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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박해, ‘박해의 전면부정’에 대한 인식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2010년 5월 3일】수련생이 폭로한 대법제자에 대한 사악의 잔혹한 박해를 보았다. 사악의 검은 소굴에서 어떤 수련생은 고압 전기 충격기로 반복 충격을 당해 정신 이상에 걸렸고, 어떤 수련생은 혹형 박해로 불구가 되었으며, 심지어 어떤 수련생은 박해로 사망하였다…. 사악은 대법에 대한 대법제자의 바른 믿음을 포기하게 하려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극에 달하는 박해수단을 동원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많은 동수들은 박해가 몸에 가해질 때, 대법에 대한 확고하고도 굴하지 않는 바른 믿음 속에서도 모두 사부님께서 제자를 대신해 감당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느꼈으며, 제자에 대한 사부님의 보호와 홍대한 자비를 감수하였다.

하지만 나는 다른 각도에서의 인식을 말해보고자 한다.

99년부터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리고 반박해한지도 이미 열두 해가 되었다. 세간의 형세는 이미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였는데 왜 오늘까지도 여전히 그렇듯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혹형, 능욕, 대법제자에 대한 치가 떨리는 박해가 많은 지방에서 발생하고 있는가?

사부님께서는 일찍 말씀 하셨다. “ 대법제자로서는 일체 사악한 구세력이 배치한 것을 전반적으로 부정한다.”(《정진요지2》〈대법은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박해에 직면하여 우리는 진정 행위와 사상적으로 전면 부정하였는가? 반박해 중에 우리의 ‘전면부정’이 결코 전면부정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어느 정도는 박해를 승인하고, 받아들이는 가운데서 반박해한 것은 아닌가?

《‘4ㆍ25’선에는 선의 존엄이 있다!》는 문장에서 잘 말하였다. “ 선에도 선의 존엄이 있다. 결코 덕망(德望) 높은 사람을 당신이 마음대로 업신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 사람을 당신이 함부로 때리고 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도 역시 나쁜 사람더러 두렵게 하는 선의 존엄을 펼쳐줄 수 있다.”

법 실증 가운데서 대법제자가 세인에게 펼쳐 보이는 것은 비단 수련인의 불굴의 견인, 굳건한 지킴, 확고함뿐만 아니라 더욱이 대법수련을 하는 생명의 순결함, 위덕, 대법의 수성함, 아름다움과 위엄을 대법수련자의 몸에서 체현해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은 마땅히 마음속으로부터 대법에, 대법제자에게 하나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법제자이고, 대법을 수련하는 성도(圣徒)이며, ‘진ㆍ선ㆍ인(真ㆍ善ㆍ忍)’으로 동화를 실천하며, 신의 길로 가고 있는 수련인이다. 세상의 중생은 단지 존경할 몫만 있을 뿐인데 어찌 감히 박해할 엄두를 낼 수 있단 말인가. 대법제자의 금강불괴(金刚不坏)의 신체에 어찌 박해가 가해진단 말인가, 대법이 구도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생명이 어찌 대법제자에게 혹형능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도 대법제자를 박해할 자격이 없으며, 누군가 그랬다면 그 누구에게 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은 반드시 분명해야 한다. 대법제자에 대한 이러한 박해는 마땅히 발생하지 말아야 하고, 더구나 사부님더러 이런 것을 감당하게 해서는 더구나 안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며, 가장 바른 일로서, 어떤 환경에서든 정정당당한 마음으로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노라면 일체는 모두 사부님 보우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관건은 우리 자신이 그 일념을 발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자신이 의념을 발하지 않는다면 사부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겠는가? 오직 우리에게 진정으로 정념이 있기만 하면 사부님께서는 주지해 주실 것이다! “제자 정념이 족하거니 사부는 회천력이 있노라.” (《홍음2》〈사도은(师徒恩)〉)우리 자신이 스스로 신성하여 불가침범이라고 여기게 되면 남도 감히 당신을 침범하지 못한다. 당신이 자신을 정천독존(顶天独尊)하고 끝없이 빗발치는 신, 부처라고 생각할 때면, 다른 공간의 난 귀가 어찌 박해할 엄두를 낼 수 있겠는가? 그것들의 통제가 없는데 이곳의 사악인들 어찌 대법제자의 순정, 자비한 장에서 악해질 수 있겠는가, 그들의 결말이란 오직 전화되지 않으면 즉각 도망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상유심생(相由心生)’의 법을 말씀하셨다. 오직 우리가 정념이 족하기만 하면 이 장은 우리가 주도적이며, 대법제자야말로 이 무대의 주연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에게는 모두 깊은 체득이 있다. 세인에게 진상을 알려줄 때 만약 상대방이 사부님 존함을 직접 부른다면 나는 말한다. “ 저와 말할 때 사부님 이름을 직접 부르지 마시고, 당신의 사부님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좋아하지 않는 상대방이 여태껏 없었다. 오직 사부님에 대한 우리의 존경을 감수하기만 한다면 그도 동화되는 것이다.

한 번은 이웃이자 동수인 한 수련생이 나의 집에 와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 좁다란 복도에 7,8명 되는 사람이 서 있었다. “ 당신은 ○○인가?” “ 그렇다”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말이 입 밖에 나가자 이 일문일답이 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어찌 자신을 심문받고 조사받는 위치에 놓는단 말인가. 나는 한 바퀴 주위를 둘러보고는 물었다.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 내가 이렇게 묻자 그들의 어투가 즉시에 누그러졌다.” “우리는 ○○데, 집에 외지 사람이 없는지 조사하러 왔습니다.” “여긴 저의 집인데 어찌 외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간 후 수련생이 말했다. “나도 외지 사람이 아닌데 문을 열어 보여주어도 상관없잖아, 그들이 의심사지 않게 말이야.” 내가 말했다. “무슨 관계가 있을까 봐 그런 건 아니고, 그저 그들의 무리한 요구에 협력하지 않았을 뿐이야. 그들이 함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서는 안 돼, 나의 집은 내가 주체이고, 우리 집에 오는 사람은 모두 외인이 아니야.” 바로 이러하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심문받고 조사받는 위치에 놓지 않았을 때, 다른 사람도 당신을 심문하고 조사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법 공부 가운데서 우리가 알다시피, 구세력은 우리 대법제자의 책임이 크고 높게 수련해야하므로 고험도 커야 한다는 것을 빌미로 “구세력은 비로소 중공사당을 하나 만들어, 박해 중에서 당신이 아직도 수련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고 있는데, 고비를 넘기면 당신을 승인하고,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그것은 당신이 안 된다는 것이다.”(《맨하턴 설법》)구세력은 이번 박해를 만들어 내어 대법제자들이 관을 넘게 하는데 사부님께서 승인하지 않으시며, 우리도 사악의 박해를 넘기는 것을 대법제자 수련이 합격되는가의 여부를 검증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진정 사상과 행위상에서 정념정행으로 이번 박해를 전면 부정해야 한다. “ 사악을 제거함을 먼지 떨이하듯 여길 뿐이노라.”(《전 세계 대법제자들, 중국대륙 대법제자들, 추석 문안을 드립니다!》)

나는 단지 한 각도로부터 ‘구세력의 배치를 전면부정’할 때에 대한 인식을 동수들과 교류하였을 뿐인데 타당치 못한 곳이 있다면 지적해 주기 바란다. 허스.

문장발표: 2010년 5월3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10/5/3/22275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