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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正悟)를 논함

글/ 정일

[명혜망 2009년 7월 8일] 《명혜주간》390기《동수에 대해 더욱 자비해야 한다》,《수련생이 가한 소위 나쁜 물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두 편의 문장에서 모두 자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한 말은 다른 동수에게 나쁜 물질을 가하게 된다는 동일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 견해에 대해 나 자신의 인식을 써내 진일보로 동수와 교류하려 한다. 대법제자는 진, 선, 인을 수련한다. 만약 다른 동수에게 나쁜 물질을 가할 수 있다면 마를 수련하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개인의 인식을 동수 간에 교류하는 것은 나쁜 물질을 가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설령 소위 이런 나쁜 물질이 있다고 해도 대법제자에게 마음대로 가할 수 있겠는가? 역시 불가능하다! 사부님께서는 2006년 2월 25일《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에서 우리에게 “ 누가 당신에게 특수한 좋은 것을 주려고 해도 들여올 수 없으며 누가 당신에게 당신의 수련과정 중에 원래 있던 것에 속하지 않는 특수한 것을 주려고 하거나, 누가 규정을 초과하여 당신을 박해하고자 해도 모두 하지 못한다. 당신 자신이 잘하지 못해서 가져온 것은 제외한다. 내가 말한 것을 알아듣겠는가?”고 알려 주셨다.

사부님께서는 이 단락의 설법에서 우리에게 명확한 답안을 주었는데 나쁜 물질을 가할 수 없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나쁜 물질을 가한 것처럼 느껴지는가? 사부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잘하지 못해서 가져온 것은 제외 한다.”고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다시 말해 이런 착각을 해결하는 근본 방법은 우리가 안으로 찾을 것을 요구하며 자신의 사람 마음을 닦아 버리는 것이다.

문제를 지적하는 동수의 심태가 자비하지 않고 말씨가 자상하지 않으며 원망, 화, 증오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문제를 제기했으니 당신은 접수하고 개장해야한 ”고 집착한다. 뿐만 아니라 충격을 받은 동수도 사람의 마음이 있는데 이 사람의 마음은 자극, 충돌, 다른 사람에게서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한처럼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아도 웃으면서 염두에 두지 않는 데로 도달 할 수 없다! 이때 사악한 생명은 이런 사람들의 누락 중에서 생존하며 사람의 마음을 확대하여 당사자로 하여금 더욱 이지적이 아니며 겉으로만 가서 찾아 남을 질책한다. 그리하여 동수지간의 간격과 정체의 배합에 협조하지 않음을 조성한다.

한시기 나는 나 자신의 안에서 찾는 걸 늦추어 경상적으로 동수의 부족함을 질책했을 때, 동시에 어떤 수련생은 또 나를 질책했다. 그때 내가 수련생을 질책하든지 아니면 수련생이 나를 질책하든지 막론하고 나의 눈에는 그들의 “결점”이 갈수록 많아졌으며 심지어 그들이 속인보다 못하다고 여겼다. 그 결과 모순은 갈수록 커지고 간격도 갈수록 커졌다. 그러다 갑자기 놀라 깨어나 급히 안으로 찾고 자신의 부족함을 찾으며 자신의 사람 마음을 닦아 버리고 동수의 좋은 점을 보며 장점을 배웠다. 그 결과 수련생을 볼수록 우점이 많아졌으며 간격은 신속이 사라졌다. 정체배합도 서로의 마음이 통하여 위력이 강대했다. 여기서 나에게 질책을 받았거나 나를 질책했던 동수들에게 사과와 감사를 표시한다.

다시 말하면 나쁜 물질은 누가 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닦아 버리려 하지 않는 “사람 마음”이 자양한 것이다. 안으로 찾고 사람마음을 닦아 버리면 간격이 없어지며 정체 배합은 금강 순정하다.

문장 발표: 2009년 7월 7일

문장 분류: 수련 마당문장 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7/8/204160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