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이지적이고 청성하게 최후의 길을 잘 걷다

[명혜망 2009년4월29일]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지 정념이 청성하지 못한 사람은 신이 가장 멸시하는 생명이다.”( > ) 우리는 반드시 이지 청성하게 최후의 길을 잘 걸어야 한다. 아래 글은 네 가지 방면에서 나 자신의 인식을 이야기한 것이다. 부합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동수들이 자비롭게 시정해 주기 바란다.

1, 지난날 수련생을 찾아올 때 이지 청성해야 한다

지난날의 수련생을 우리는 정말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그들의 정념을 불러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하루속히 정법의 노정에 오도록 하여야 한다. 명혜망에서 발표한 >문장은 이 방면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논술 하였다. 나는 이미 수련을 포기한 사람들, 더구나 이미 사오한 동수와 접촉할 때 반드시 이지 청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동수들에게 일깨워주고 싶다.

이미 수련을 포기한 다수의 사람들은 수련의 엄숙성을 모르며 수구해야함도 근본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떤 수련생은 다시 돌아와 수련하다보니 강렬한 환희심과 과시심을 가지고 어떤 일을 조금만 알아도 누구에게나 다 말한다. 또 사오한 그런 사람들 다수는 더는 세 가지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료를 만들고 직접 진상을 알리는 것을 낡은 세력이 안배한 길을 걷는 것으로 간주하기까지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자료를 만들고 진상을 알리는 수련생을 공안국에 알려 간수소와 노교소에 감금시켜야만 그런 동수들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아예 공안국의 내선이고 유다가 된다. 우리는 이같이 층차가 부동하고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오로지 이지 청성하게 매 한 발자국을 잘 걸어야만 비로소 최대한으로 손실을 피면할 수 있고, 또 미혹 속에 있는 수련생이 더 업을 짓는 것을 피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동수들과 접촉할 때 반드시 수구에 주의해서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절대로 말하지 말 것을 건의한다. 상대방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상대방을 “감동”시키기 위해 무슨 말이든 모두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법을 실증하는 구체적인 항목은 아무 관련없는 사람에겐 절대로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매우 정진하는 동수라 하더라도 자료점은 반드시 단선 연계해야 한다. 그런데 하물며 일찍 수련을 포기했던 동수들은 이미 정법의 노정을 따라가지 못했고, 심지어 사오한 사람들이 아닌가? 물론 교류는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법리상에서 교류할 수 있고, 당연히 함께 법공부를 할 수 있지만 속인의 “마음을 활짝 연다”고 하여 모든 것을 다 털어내 놓아야만 비로소 “진심”이라고 생각해 후과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비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이지적이지 못하고 청성하지 못한 것이다.

2, 마난 속에 있는 수련생을 도울 때 이지 청성해야 한다

어떤 동수들은 낡은 세력의 박해로 신체에 문제가 나타난다. 그럴 때 신변의 동수인 우리는 반드시 이지 청성하여 정념으로 대해야 한다. 우선 동수의 정확하지 못한 신체상황은 병이 아니고 역시 “병업”도 아니라는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근본상 병이 있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더는 “병업”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사부도 정법제자에게 그 어떤 관과 난을 안배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만 낡은 세력의 안배로, 낡은 세력의 안배인 이상 우리는 견결히 그것을 부정하고 승인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의 외적 표현을 승인하지 말며 이런 가상에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에서 말씀 하셨다. “어떠한 문제가 나타나든지 여러분은 모두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매 수련생마다 대법제자로서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어서 내가 도와주는 것 외에 어떠한 부동(浮动)할만한 것이 없어야 한다. 내가 당신을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정념으로 이 문제를 대해야 하고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면 무엇을 하면서, 사람마음으로 집착하지 않았다. 사상 속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지 않고 관계를 모두 아주 바르게 놓으면 그것을 아주 중하게 보지 않아 무척 평온하였다. 낡은 세력은 별로 재미가 없다고 여긴다. 이 사람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구나, 이 사람들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니 무슨 재미가 있는가? 상관하지 말자. 그의 병업은 단번에 또 좋아졌다. 이것이 일종 정황이다.” “또 한 가지 목적이 있는데 바로 그 본인이다. 병업이 나타난 본인의 수련은 어떠한가? 그는 이런 상태에서 그렇게 강한 정념으로 걸어 지나올 수 있는가? 정말로 자신을 신처럼 여기면서 모든 것을 전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가?”

만약 우리가 동수에게 문제가 나타난 것을 보고 부정확한 상태로 조급해한다면 조급해하는 것이 곧바로 마음이 움직인 게 아닌가? 또 어떤 동수들은 서로 전한다. “이 수련생은 인터넷 기술 동수이기에 우리는 반드시 그에게 발정념을 많이 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수련생을 도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동수에게 불안전한 요소를 가해주는 것이다. 낡은 세력은 우리가 수련생을 그처럼 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고 주위의 사람들을 “고험”한다는 구실로 기회를 엿보아 동수에 대한 마난을 가중하지 않겠는가? 또 어떤 동수들은 사람정이 매우 중하여 온 몸과 마음으로 “수련생을 도와줌”에 몰입하는데 자신이 세 가지 일을 잘하는 데까지 교란을 받고 심지어 최저한 법공부와 연공도 보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동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한다고 여긴다. 그렇다, 우리는 정체이다, 동수의 일이 곧 우리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녕 우리 자신의 일이라 해도 정념으로 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무엇을 해야 하면 무엇을 해야만 비로소 철저하게 낡은 세력을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마난을 겪는 동수의 집착을 내려놓게끔 하려고 하면서 도리어 자신이 3가지 일을 잘하지 못한다면 과연 법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난 중에 있는 수련생을 도와주는 관건은 법에 따라 하는 것이다. 교류도 필요하며 발정념도 법 중의 요구이며, 단체로 법공부를 하고 진상을 알려야 확실하게 수련생을 이끌어서 더욱 잘 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일체가 “그것을 위해 한다.”면, 만약 그 일이 우리가 평온하게 3가지 일을 하는 것을 교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낡은 세력이 안배한 길을 걷는 것이다. 본인과 주변 동수들 모두 그것을 승인하지 않고 모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모두 안심하고 세 가지 일을 잘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낡은 세력이 무슨 구실로 우리를 박해하겠는가? 우리의 일념은 그것을 철저히 제거해 버릴 수 있다.

3, 동수의 기적을 대할 때 역시 이지 청성해야 한다

명혜망에는 동수들이 끊임없이 “정념이 기적을 나타내다”의 경력을 써내고 있다. 그것은 동수들 법을 실증하고 동수들과 공동으로 교류하면서 법에서 제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어떤 동수들은 이런 일들을 이지 청성하게 대하지 못 한다. 어떤 동수들은 이 방면에 관계되는 문장을 발견하기만하면 곧 출력해 반복해서 읽을 뿐 아니라, 동수에게도 매우 흥분한 채로 전하여 함께 보도록 하면서 마치 매우 크게 고무를 받은 것 같다.

사부님께서는 >에서 말씀하셨다. “대법 제자인 당신은 법에서 깨달아야 한다. 당신은 정정당당한 대법 제자이므로 이지적으로 법에 부합되는지 안 되는지를 사고해야 한다. 또 어떤 수련생들은 늘 공능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일부 수련생들에게 일부 부동한 공간의 정법 정황을 보게 하였다. 목적은 수련생이 법을 실증하는 신심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수련생은 아직도 정확하게 대하지 못하여 법에서 수련하지 못하며 심지어 일이 있으면 공능이 있는 수련생을 찾아가 봐 달라 하고 보게 된 것을 어떻게 대법의 일을 해야 하는 것과 수련을 지도하는 것으로 삼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수련하면서 아무래도 좀 청성해야한다. 만약 법에 대한 인식이“기적”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리하여“눈으로 본 것이 실(實)이다”라는 실증과학의 관념에 머물러 있다면, 신사신법의 정도를 참답게 돌이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신사신법, 그것은 “머리가 떨어져도 신체는 의연히 가부좌하다”이며 법이 무엇을 요구하면 우리는 곧 무엇을 해야 하며 추호도 그 어떤 인간 표면현상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오랫동안 발정념을 하였지만 사악이 아직도 악을 행함이 창궐한 것은, 적지 않은 동수들이 발정념 할 때 아직도 “눈으로 본 것이 실이다”라는 인식에 머물러 있어서가 아닌가? 만약 우리가 발정념을 하면서도 뼈속에서는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사악을 제거하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기적”이 나타난 동수들을 따라다니며 떠받들 때 과연 법은 어느 위치에 놓고 있는가, 우리는 또 동수에게 얼마나 좋지 않은 요소를 가해 주었는가?

이지 청성은 자신의 위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정정당당한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가장 기본인 소질이다.

4, 속인 사회의 형세 변화를 대할 때 이지 청성해야 한다

>중 한 제자가 물었다. “타이완 총통 대선에서 어떤 수련생은 인심의 파동이 있는데 낡은 세력이 배치한 고험이 아닙니까?” 사부님께서는 대답 하셨다.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수련인의 정념은 모두 움직이지 않는 이것이야말로 비로소 수련이며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대단한 것이다.(박수) 수련인은 세간의 모든 일체를 집착하지 않는다.”

이 방면의 법리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속인 사회 중에서 사람마음을 건드리는 일이 나타나기만 하면 의연히 마음을 움직이는 수련생이 있다. 이 방면의 교훈은 매우 많기에 우리는 절대 더 이상 잘못 걸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적어도 속인의 뉴스를 주동적으로 보지 말아야 하고, 동태망에서 천변만화하는 골목 소식과 사회 형세예측도 포함해서 이다. 우연하게 듣거나 무엇을 보았다 하더라도 역시 믿지 않으며 전하지 않고 더구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수련이 착실한가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이 무너져 내려와도 수련인의 정념은 모두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리를 교란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에 대한 집착, 원만에 대한 집착, 개인의 해탈을 구도 중생 위에 놓거나 혹은 구도 중생 중에 개인이 원만하려는 목적이 감추어져 있을 수 있는데, 이런 마지막 사람마음을 우리는 응당 철저히 내려놓고 진정으로 무사무아하게 수련해야 한다.

발고 :2009년4월29일

갱신 :2009년5월8일06:42:15

위치:http://www.minghui.ca/mh/articles/2009/4/29/19993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