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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믿음과 확고한 믿음

글 / 흑룡강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2월 20일] 제5회 대륙법회 문장을 읽고 깊은 감촉을 느꼈고, 비교해 보는 중에 자신의 적지 않은 사람 마음과 격차를 보아낸 동시에 일부 해결 방법도 찾아내게 되었다. 그야말로 대단한 도움을 받게 되었다. 본문에서는 개인이 얻은 수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단지 감상만 말해볼까 한다.

동수들의 심득 체험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이를테면, 신사신법하고 법을 스승으로 모신 것, 확고하게 법을 수호한 것, 두려운 마음이 없거나 의식한 후에는 재빨리 두려운 마음을 버렸고, 그리하여 진정으로 생사지념을 내려놓은 것, 정념이 족하고 제때에 바르지 못한 일사일념을 부여잡고 제거한 것, 일에 부딪히면 안을 향해 찾아보고 즉시 법으로 자신을 귀정한 것, 정법의 수요를 천직으로 삼고 세 가지 일을 출중하게 잘한 것 등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한 가지는 여러분 특히 나 본인이 반드시 동수에게서 따라 배워야 할 것은 “신사신법” 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법수련자의 본성이다. 즉 우선 반드시 갖춰야 할 수련인의 근본 소질이다. 오로지 이 하나의 소질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누락 없이 사부님의 요구대로 할 수 있으며, 비로소 끊임없이 부지런히 법공부하여 씬씽 경지를 끊임없이 승화시킬 수 있으며, 비로소 정념이 족할 수 있고, 비로소 집착을 잘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때에 고통스럽더라도 버릴 수 있으며, 비로소 수련과정 중에 부딪친 일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고, 최후에는 진정한 대원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지역 동수들의 상태를 보면, 일부 동수들의 신사신법 정도상에 아직도 부동한 격차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신을 믿지 않고 건강한 신체만을 위하며, 신을 믿는 것은 일종 신앙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대법이 좋다고 승인하나 대법수련은 하는둥 마는둥 한다. 평소에 보건대 신사신법하는 것 같지만 박해 속에서는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해야할 일을 감히 하지 못한다. 보건대는 신사신법하는 것 같지만 집착을 찾아내도 버리기 싫어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대법이 좋다고 여기지만 늘 자신의 이미 형성된 제자리 걸음 같은 후천적 관념으로 사부님의 법리를 가늠하기에 사상업 교란에 이끌려 세간에서의 대법형세의 변화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그로부터 자신이 자신에게 장애를 조성해 주어, 진정한 법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정법중에 어떤 일들은 마땅히 발생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이는 자기 인식이 국한된 것 때문임을 모르고 있다. 마음속으로는 신사신법하지만 넘지 못할 마난(중병업 같은 것)에 부딪치거나 혹은 정법중에서 나타난 새로운 형세에 마주칠 때면 곧 미혹되어 버린다(나는 병업관을 넘는 류에 속한다).

이상의 법에 있지 않는 종종의 인식은 갓 보건대는 마치 개인 수련의 층차가 부동한 것으로 하여 나타난 문제에 속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근본상에서 법에 대해 확고히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문제이다. 어떤 수련생은 문화수준이 낮거나 법을 얻은 시간이 짧아 법리를 아는 것이 적지만 그저 믿기만 한다. 사부님이 뭐라고 말씀하면 무얼 믿으며, 박해가 들이닥쳤을 때 거짓말을 믿지 않고 미혹되지 않았으며, 검은 소굴에서의 잔혹한 박해도 생명 본성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온 대법에 대한 그(그녀)들의 확고한 신념을 개변할 방법이 없었다.

이상의 부족이 있는 동수들에 대하여 이번 법회는 바로 격차를 찾아내고 선두를 따라잡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이는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우리 대륙에 있는 대법제자들이 이 특수한 역사시기에 공개적으로 교류하고 정체적으로 제고하여 더욱 온당하고 더욱 성숙되어 최후의 정법수련의 길을 잘 걷고 바르게 걷게 하기 위하여 고심히 안배해 주신 것이다. 우리 전 중국 대법제자는 이 특수한 법회를 통하여 솔직하고 성실하게 공동으로 교류하고, 공동으로 부족을 찾아내며, 공동으로 제고하여 우리 매 한 사람마다 자신과 잘한 동수와의 법에서의 격차를 보아내게 되었고, 이번의 신성하고도 홍대한 법회를 통하여 진정으로 제고되어 올라옴으로서 정법 최후의 이 짧은 시간에 분발하여 정법진행을 따라잡게 하였다.

단지 신체를 튼튼히 하고 건강하게만 하려는 동수들은 신심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 깊이 있는 고찰을 해야할 것이며, “사부님 은혜”란 문장을 읽어 보고 수련생이 수련 중에 나타난 수많은 신의 행적을 요해해 보고, 다시 또 사부님께서 추천하신 “불가 인물 참고 자료”를 읽어보며, 1992년 후 매체에서 “파룬따파”가 당시 중외에서 나타난 생생한 신의 행적에 관한 보도도 찾아서 읽어 보라, “무신론” 간행물 마저 모두 신이 있다고 승인하고 아울러 신이 있다는 것을 실증하였는데 당신은 아직도 의심하고 있는가? 이것이 그래 사당의 “무신론”의 독성이 작간을 부린 것이 아닌가? 당신은 이미 대법의 문앞까지 걸어왔는데 절대로 생명의 영원에도 다시 있을 수 없는 대단히 좋은 기연을 잃지 말아야 한다!

또 말하는바, 여러분 알다시피 사부님의 매번 설법은 모두 현장 수련생의 사상 상황과 접수 능력에 견주어 부동한 각도로부터 현실 사회상황 그리고 실증과학에 결합하여 말씀하신다. 수련생들의 끊임없는 제고에 따라 또 끊임없이 옅은 데로부터 깊은 데로, 나중에는 실질적인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는 “전후가 같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점차 승화하는 것이다.

다른 한 방면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법리는 “다만 극히 얕고 아주 작은 한 점에 불과하다”, 어떤 법리에 대해서는 우리는 일시적으로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사부님은 >이란 경문에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대법(大法) 중에서 무엇을 깨달았든지 모두 끝없는 법리가 한 층차 중에 존재하는 법리의 한 점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삼계와 우주의 일체는 반대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부님은 >란 경문에서 말씀하셨다. “이 법(法)은 상상할 수 없이 크다. 당신들은 그 법리(法理)를 영원토록 전부 알고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수련생은 잘 말하였다. “알지 못할 문제가 있으면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많이 하고 그런 다음에 동수들과 교류한다. 그래도 명백하지 못하다면 걸어 놓았다가 점차 제고해가면서 인식한다.” 절대로 스스로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집착 때문에 대법에 의심이 생겨서는 안 된다.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중, 확실히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나타나 수련 종료시간을 자꾸만 연장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알게 되었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정법 중에서 허다한 일들이 사람의 뜻대로 되지 못하는데 그것은 낡은 세력이 낮은 층과 높은 층이 결합하여 한 것”이다. (>) 여러분 알다시피 정법은 우주의 정사대결인데 순풍에 돛단 듯이 할 수 있겠는가? 한 가지 일을 하자 해도 실행 중에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 끊임없이 수정하고 조정해야 하는데 하물며 우주정법이란 이렇듯 방대하고 복잡한 문제임에랴? 이 과정 중에 근본상에서 수련에 대해, 불법에 대해 우리가 확고히 믿는가 안 믿는가를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근본적으로 법(法)에 대하여 아직 견정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집착을 찾아냈지만 버리기 싫어하고, 신사신법도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믿지 않는 문제이다. 사부님은 알려 주셨다. “낡은 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 사람, 정념이 매우 충족한 사람을 그것들은 모두 건드리지 못한다.”(>) 당신은 정말로 믿는가? 두려운 마음이 중하면 법공부를 많이 하는것과 구세력을 철저히 부정하는 외, 진상을 알리어 중생을 구도하는 길에서 당신은 동수 혹은 스스로 혼자 부딪쳐 보라, 보증하고 부딪칠수록 담이 커질 것이다. 몇 번 부딪치고 나면 진상자료 배포가 무아지경에 도달한 듯 할 것인즉, 교란이나 위험한 상황에 부딪쳐도 자연히 풀릴 것이며 아울러 마음속에서 진상자료 배포하러 가기를 좋아할 것인데 마치 신심이 충만되어 전쟁터로 나가 승리를 빼앗아 오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것은 사부님께서 당신의 정념이 올라온 것을 보시고 당신의 두려워 하는 물질을 떼어내 주시고 당신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두려운 마음은 모두 사악이 작간을 부린 것으로서 당신 스스로 자신을 위협하여 그로부터 사람 마음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구세력이 미혹시키는 수단으로 우리를 미혹시켜 당신을 정진하지 못하게 하는데 대해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 어떻게 해야 미혹되지 않거나 적게 미혹될 수 있겠는가? 우선 참답게 파룬따파의 종지, 요구에 대해 명백히 알아야 하며, 내심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를 승인하는가 안 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런 것을 진정 알아야만 비로소 당신은 성실하게 수련할 수 있다. 근본 문제가 통하면 기타의 문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며 단지 점차적으로 인식하는 문제일 뿐이다. 그때에 당신은 대법과 사부님의 요구대로 가서 한다면 보증하고 잘 할 것이다. 사부님은 >에서 말씀하셨다. “어찌되었든 간에 당신이 정념정행 한다면 넘기지 못할 관은 없다. 바로 정말로 아주 위험한데 또 문제가 어디에 생겼는지 모를 때에도 정념이 없어서는 안 되며, 어떤 정황하에서도 대법에 대한 근본 신념을 동요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때 당신이 설사 통하지 않고 어떤 일도 잘 하지 못했으며 큰 관을 넘기지 못했고 심지어 인체를 잃고 세상을 떠났다 할지라도, 역시 마찬가지로 원만할 수 있다. (박수) 왜냐하면 사부는 이번 박해를 승인하지 않는데, 이는 이번 박해가 당신에게 조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 주의하라.”

수련자로서 ㅡ 사부님의 도제로서 사부님의 법에 대해, 혹은 믿는 정도에 있어서 누락이 있거나 일을 만나면 늘 미혹되거나 하면 어찌 수련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겠는가? 원만은 더구나 제기하지도 말라!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다른 방법은 없다. 오로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하고, 정진하는 동수의 법중에서 제고한 경지와 대법의 요구에 부합된 행위를 많이 보는 것밖에 없다. 오직 신심이 있고 결심이 있기만 하면 곧 끊임없이 “믿는” 정도가 제고될 것인데, 성심으로 믿고 확고히 믿을 때 까지이다. 성심으로 믿는다는 것은 성심성의로 믿는다는 것이며, 백분의 백으로 믿는다는 것이라고 나는 여긴다. 뭇 신들이 공인하는 것처럼 사부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면 무엇이라 믿는 도제가 제일 훌륭한 도제이다. 확고한 믿음이란 성심으로 믿는 경지 중에 법공부 수련을 통해 성심으로 믿는 정점 ㅡ 확고한 믿음에로 승화하는 것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든 동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여긴다. 신의 상태란 고난에 직면해도 움츠러 들지 않고, 큰 관에 직면해도 신심이 있으며, 미혹, 교란에 직면해도 돌아서지 않으며, 생사에 직면해도 주저하지 않는 것이며, “가거나 남는 것은 사부님 안배에 따른다”(>) 대군처럼 용맹정진하자!

층차가 제한되었지만, 터무니 없는 고론을 말했는데 뜻인즉 좋은 의견을 많이 듣자고 함이다. 동수들께서 지적하고 보충해주길 바란다.

 
문장발표 : 2009년 2월 20일
원문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9/2/20/19576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