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대륙대법제자
【명혜망2008년5월19일】나는 쓰촨성 대지진 소식을 전하는 사이트에서 매일 사망자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매일 긴박하게 구원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수련을 시작하고 난 뒤부터 아무리 많은 고생과 곤란을 겪어도 그래도 나의 수련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 계시고 법이 있기에 고생스러움을 느끼지 못했고, 이렇게 흐느껴 우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오늘 쓰촨성 대지진으로 발생한 참상을 보고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사람을 구해야 한다. 사람을 많이 구하여야 한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우리는 겁난이 오기 전에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어야만 겁난이 지난 후라도 눈물 한 방울이나마 적게 흘릴 것이다. 우리 대법제자로 놓고 말하면 우리가 전심전력으로 사람을 구하려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만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이틀 전 법공부 소조에서 일부 수련중의 문제에 관한 논쟁을 끊임없이 했다. 각자 자신이 서로 옳다고 했다. 심지어 어떤 수련생은 매우 집착했는바, 이런 논쟁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일찌기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의의가 없다고 말한다.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그들이 가리킨 것은 단지 수련과정 중에서 하나의 이치에 대한 인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이치를 어떤 사람은 단번에 인식했으며 어떤 사람은 천천히 깨닫고, 천천히 인식했다. 어떻게 깨달았든지, 안 될 것이 있는가? 단번에 인식하면 더욱 좋고 천천히 깨닫는 그것도 되는데, 모두 깨달은 것이 아닌가? 모두 깨달은 것으로, 어느 것도 괜찮다.”
우리는 한 걸음씩 제고하면서 수련한다. 인식한 이치가 부동한 층차인 것은 아주 정상적이다. 오직 법 중에 있다면 그것은 맞는 것이다. 우리가 논쟁을 그치지 않을 때 좋은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린다. 현재 사람을 구하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 시급하다. 우리가 아직까지 이렇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해도 되겠는가?
최근, 《자료점 생활》 이 문장이 아주 많은 동수들에게 깊이 생각하도록 했다. 아주 많은 동수들은 그 문장에서 자신이 수련한 부족점을 발견했고, 자아를 내려놓고 수련생을 이해하는 게 정체를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동수들이 우리를 이해해야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매 사람마다 모두 수련 중에 부족한 점이 있다. 매 사람마다 다같이 한 가지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낡은 세력은 틈만 있으면 타고 들어와서 분쟁을 일으키고 간격을 만든다. 우리가 동수에게 이해받으려고 세밀하게 설명하고, 어떻게 서로 이해해야 하는지 토론할 때 낡은 세력은 옆에서 비웃지 않겠는가?! 큰 폭설, 수구족병, 쓰촨 대지진, 그리고 수시로 발생할 재난 중에서 본래 구도 받아야 할 사람들을 우리가 다그치지 않아 영원히 생명을 잃게 하지는 않겠는가?!
예전에 우리 외할머님이 살아계실 때 외할머니는 오랫동안 가장 원시적인 방직기로 천을 짰다. 딸과 며느리가 외할머니를 보러 갈 때 각종 원료를 갖다 주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외할머니, 알고 계세요? 지금 방직공장에 있는 방직기는 한 시간 만에 할머니가 평생 동안 짜신 천을 짤 수 있어요. 그런데 할머니 방직기는 너무 느려요.”라고 했더니, 당시 글자도 모르는 외할머님께서는 “그 방직공장은 다른 사람의 것이잖은가, 나에게는 이 방직기밖에 없으므로 나는 이 방직기를 사용한다.”라고 철학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이제야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 것 같다.
그렇다. 수련의 길은 영원히 같지 않은데 어떻게 다른 동수의 특점과 이 수련생을 비교하겠는가? 오로지 수련생이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한다면 반드시 무사무아(无私无我)하게 협조하고 지지하는 것이야말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묵묵히 원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한쪽으로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비평하며 동수의 부족한 점을 박해받는 원인으로 취급한다. 사실 거기에는 우리들이 원용시킬 책임이 있다! 다른 한 방면으로 만약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방식에 대해 수련생이 찬성하지 않더라도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오직 우리는 자신의 조건대로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며 중생구도 하는 자신의 길을 걷는다면 사부님께서 인정하실 것인데 우리는 또 누가 인정해 주길 바라는가?
정법이 최후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현재 사람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이치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자아를 내려놓고 자아의 일체 관념, 일체 집착을 내려놓고 사람을 구하여 그렇듯 구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
문장작성: 2008년05월18일
원고발표:2008년05월19일
원고교정:2008년05월19일 00:42:33
원문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8/5/19/17877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