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는 톈진 사건만이 원인인가?

글/ 정암(鄭岩)

[명혜망] 공개된 자료에서는 통상적으로 톈진(天津) ‘청소년과학기술박람(靑少年科技博覽)’ 잡지에 게재된 허쭤슈(何祚庥)의 글과 그 후 톈진 경찰의 납치 사건을 직접적인 도화선으로 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단지 글 한 편과 국지적인 충돌만으로 만여 명이 넘는 청원 행동을 촉발하기에 충분한가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해 왔다. 당시 중국공산당(중공) 내부에서 파룬궁(法輪功) 단체에 대한 태도는 이미 심각하게 분열된 상태였는데 이 사건이 어떤 면에서 이용돼 최고 결정권자의 탄압을 가속하는 계기가 됐는가?

두 번째 질문은 대답하기 매우 쉽다. 사상을 통제하고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중공의 주요 통치 수단이기 때문이다. 파룬궁은 ‘진선인(眞·善·忍)’을 설파하고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문제에 부딪히든 보편적 가치인 ‘진선인’을 출발점이자 목적으로 삼아 자신과 타인의 언행을 포함해 선악과 시비를 판단하고 자신의 관점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도록 격려한다. 예를 들어 생명에 대해 파룬궁은 자살을 엄격히 금지하며 자살의 본질은 살생이고 살생은 죄업을 낳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어떤가? 당을 위해 헌신하라고 맹세하게 하며 당의 이익이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 이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가치관이자 도덕 체계다. 민간에서 파룬궁이 누리는 인기를 고려할 때 공산당은 조만간 손을 쓸 수밖에 없었으며 공산당이 손을 쓰는 데는 변명이 필요 없고 단지 몇 가지 새로운 구호나 죄명만 조작하면 됐다.

이제 다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글 한 편이 만여 명이 넘는 청원 사건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는가? 특히 평화롭고 이성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고 스마트폰도 없던 시대에 말이다. 답은 ‘아니다’다. 왜 글 한 편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1. 기공 열풍

1991년 중국인들은 이미 보편적으로 공산주의를 더 이상 믿지 않았고 중공은 중국에서도 ‘평화적 이행(和平演變)’이 일어날까 봐 매우 두려워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전국적인 기공 열풍을 걱정해 중공은 ‘9인 실무조’를 설립했다. 이 실무조는 국가체육위원회,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생부, 안전부, 중앙선전부, 재정부, 공안부, 총정치부 연락부, 무장경찰본부 등의 장차관급 관리들로 구성된 고위급 조직으로 기공 단체를 엄밀히 감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2. 파룬궁의 탁월한 건강 효과로 인한 조사

1994년 파룬궁은 공안의 특별한 주의를 끌었다. 질병 치료와 건강 증진 효과가 뛰어나고 ‘진선인’을 설파했기 때문에 파룬궁수련자 수가 매우 빠르게 증가했다. 1994년 일부 지역에서는 파룬궁 단체에 공안 요원을 파견해 ‘잠입’시켰으나 아무런 ‘이상 상황’도 발견하지 못했다. 1994년 말 파룬궁 창시자는 중국 국내에서 공법 전수를 중단했다.

3. 심신에 유익해 급증한 파룬궁수련자 수

1996년 파룬궁수련자 수는 다른 어떤 기공보다 많았다. 명단이 없고 오가는 것이 자유로워 정확한 숫자는 없었지만 파룬궁 측은 수천만 명에서 1억 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했다. 당시 중국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 중에는 당정 간부, 특히 은퇴한 노간부들이 많았다. 이에 대해 장쩌민(江澤民)은 파룬궁 창시자의 막대한 영향력을 극도로 질투했고 파룬궁이 자신에게 아부하지 않고 이용당하려 하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었다.

4. 1996년 광명일보 사건

1982년 5월 13일 당시 중앙선전부 부장이자 훗날 중공 중앙 총서기가 된 후야오방(胡耀邦)은 중앙선전부에 기공과 특이공능(초능력)에 대해 ‘홍보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으며, 논쟁하지 않는다’는 ‘3불(三不)’ 정책을 하달하도록 지시했다.

같은 해 3월 장전환(張震寰)이 주재한 특이공능 시범을 당시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 모 국 부국장이자 후에 정치위원이 된 우사오쭈(伍紹祖)가 관람했다. 우사오쭈는 시범 관람 후 후야오방 총서기에게 편지를 썼는데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과학 발전의 역사를 살펴보면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고 갈릴레오가 지구 자전설을 견지하며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모건이 유전자 이론을 제안했을 때 모두 세속 세력의 가혹한 비판을 받았고 새로운 학설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브루노처럼 말입니다. 소련은 유전자 이론을 자산계급 유심주의의 사이비 과학이라고 공식적으로 낙인찍었지만 사실은 리센코 학설이야말로 사이비 과학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이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부 오래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종종 과학적 도약의 전조가 되며 일단 발견돼 과학적 이론으로 격상되면 매우 중대한 과학적 의미와 실용적 가치를 지닙니다.’

1985년 칭화대 이론핵물리학 연구원 출신으로 당시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 정치위원이었던 우사오쭈는 중국 핵화학공학자이자 전 중국과학기술대 총장, 중앙선전부 부부장, 중국과학원 부원장인 텅텅(滕藤) 및 칭화대 공정물리학과 실험핵물리학 전공으로 당시 안전부 부장이자 당조 서기 겸 당서기였던 자춘왕(賈春旺)과 연합했다. 이 세 명의 정부 주요 부서 책임자들은 상부 지도자들에게 특이공능의 과학적 의미를 설명하며 자신들이 직접 특이공능 연구와 관련 정책 및 관리 업무를 맡겠다고 자원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은 관련 책임자의 비준과 동의를 얻었고 이로써 중국에는 ‘인체 과학 3인 영도 소조’가 생겼다.

1996년에 이르러 중앙선전부 부부장 쉬광춘(徐光春)은 개인적인 정치적 자산을 챙기기 위해 10개 중앙 주요 일간지 편집장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고 ‘광명일보(光明日報)’에 파룬궁을 비방하는 기사를 게재하도록 했으며 다른 주요 신문들에도 전재하도록 지시했다.

쉬광춘은 당시 파룬궁에 ‘초보적이고 조악한 사교(邪敎)’라는 모자를 씌우려 했다. 그러나 ‘광명일보’에 파룬궁을 비방하는 기사가 실린 후 관련 부서에는 파룬궁의 진실을 밝히는 수십만 통의 시민 편지가 쇄도했고 이로 인해 관련자들의 파룬궁에 대한 추가 탄압은 일시적으로 보류됐다. 2014년 6월 2일 중공 ‘법제만보(法制晩報)’가 공안부 [2000] 39호 문건의 통지를 공개적으로 재천명하며 파룬궁이 사교가 아님을 다시 한번 명확히 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

5. 1997년 두 차례의 비밀 조사

1997년 1월과 7월 뤄간(羅幹)이 장악한 공안부는 전국적으로 파룬궁을 두 차례 조사하며 ‘사교’로 규정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전국 각지 공안국은 충분한 조사를 거친 후 모두 ‘아직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안부 1국이 발표한 공정(公政) [1998] 제555호 ‘파룬궁에 대한 조사를 전개할 데 관한 통지’는 여전히 파룬궁을 ‘사교’로 칭했다. 중국 사회에서 이러한 공개적인 법 집행 위반과 언론의 여론 몰이는 정치 운동에 흔히 쓰이는 전주곡이다.

6. 1998년 베이징 방송국 사건

1998년 5월 칭화대를 졸업하고 ‘양자역학의 발전은 장쩌민의 3개 대표 이론이 과학 기술 혁신 평가 체계의 근본적 기준임을 입증했다’고 단언하는 글을 썼던 중국과학원 원사이자 뤄간의 동서인 허쭤슈가 베이징 방송국(BTV) ‘베이징특쾌(北京特快)’ 프로그램에서 의도적으로 파룬궁을 헐뜯었다. 많은 파룬궁수련자가 이 소식을 듣고 베이징 방송국을 찾아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진실을 설명했다. 베이징 방송국은 상황을 파악한 후 정정 보도를 했다.

7. 허쭤슈 베이징에서 발언 금지돼

허쭤슈의 도발은 당시 베이징의 한 부시장을 불쾌하게 만들었고 그가 베이징의 언론에서 함부로 말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베이징에서 발언이 금지된 것이 바로 1999년 허쭤슈가 톈진으로 옮겨 비방 글을 발표한 이유다.

8. 공안부 다시 도발

1998년 7월 21일 공안부 1국은 또다시 전국 공안 부서에 통지를 보내 신장, 헤이룽장, 허베이, 푸젠 등지의 일선 공안 부서가 강제로 연공하는 시민들을 해산시키고 부당하게 가택수색을 하며 민가에 무단 침입해 개인 재산을 몰수하도록 했다.

9. 은퇴 원로 간부들 조사 보고서 제출

각지에서 벌어지는 공안의 괴롭힘에 맞서 파룬궁수련자들은 잇달아 상부에 편지를 보내 상황을 알렸다. 1998년 하반기 차오스(喬石)를 비롯한 일부 전국인민대표대회 은퇴 원로 간부들은 파룬궁에 대해 일정 기간 상세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한 끝에 ‘파룬궁은 국가와 국민에게 수많은 이로움이 있을 뿐 해로움은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연말에 장쩌민을 수반으로 하는 정치국에 조사 보고서를 제출했다.

정치국에서 조사 보고서를 본 후 당시 총리였던 주룽지(朱鎔基)는 매우 기뻐하며 파룬궁수련자들의 연공을 방해하지 말라는 취지의 비준을 했다. 주룽지의 비준은 경제와 사회 관리의 효율성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만약 어떤 공법이 국가를 위해 막대한 의료 보험비를 절감해주고 사회 질서 유지에 도움이 된다면 정부는 당연히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9년 ‘4·25’ 청원에 참가했을 때 파룬궁수련자들은 비로소 주룽지 총리가 98년 말에 위와 같은 비준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장쩌민은 인민대표대회 은퇴 원로 간부들의 조사 보고서를 보고 매우 불만을 품었으며 그 보고서를 뤄간에게 넘겼다. 당시 중앙정법위원회 서기였던 뤄간이 장쩌민이 전달한 이 보고서를 받고 장쩌민의 태도에 따라 무엇을 했는지는 중국 체제의 작동 방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뤄간이 주룽지의 비준을 직접 압류했는지 여부를 포함해 십중팔구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0. 1999년 톈진 사건

뤄간의 지지하에 베이징에서 발언이 금지됐음에도 허쭤슈는 1999년 4월 11일 톈진 교육대학 ‘청소년과학기술박람’ 잡지에 파룬궁을 비방하는 글을 다시 발표했으며 나아가 ‘망국(亡國)’이라는 차원으로 비화시키고 ‘정신병’보다 더 무서운 모자를 씌웠다. 까닭 없이 모욕을 당한 다양한 연령, 교육 배경, 직업 배경을 가진 파룬궁수련자들이 이에 대해 어떤 심정이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99년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일부 파룬궁수련자들이 톈진 교육대학 및 기타 관련 기관에 가서 실상을 알렸다. 4월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톈진시 공안국은 진압 경찰을 동원해 구타를 가했고 이로 인해 수련자들이 피를 흘리며 다쳤으며 45명을 납치했다. 파룬궁수련자들이 석방을 요구했을 때 톈진 시정부에서는 공안부가 개입했기 때문에 베이징의 허가가 없으면 납치된 파룬궁수련자들을 풀어줄 수 없다고 알렸다. 톈진 공안은 파룬궁수련자들에게 직접 권유했다. “베이징으로 가시오. 베이징에 가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소.”

‘베이징으로 가라’? 베이징이 저렇게 넓은데 어디로 가야 이 긴급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행정 소송, 인민대표대회와 정치협상회의, 언론 채널이 모두 통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현관(縣官, 높은 관리)’이나 ‘현관(現管, 직속 상관)’이 모두 소용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이 관리를 고소해도 법원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차오스 같은 급의 은퇴 원로 간부가 제출한 조사 보고서마저 장쩌민 개인의 의지에 의해 부정되며, 언론이라는 ‘제2의 민원실’조차 감히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국가에서 ‘포청천(包靑天)’은 어디에 살며 관아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라. 지금도 중국의 서민들이 급한 일을 당했을 때 경찰에 신고 전화를 거는 것 외에 정부 청사 문이 어느 쪽으로 나 있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자신에게 필요한 법적 절차가 무엇인지 알겠는가? 특히 법을 잘 지키는 시민들은 경찰을 신뢰한다. 길을 물을 때도 경찰을 찾고, 지갑을 주워도 경찰에게 주며, 사건을 신고할 때도 경찰을 찾는다. 그래서 제복을 입은 경찰이 청원 시민들에게 신화문(新華門) 밖 담장 옆에 서서 기다리라고 지시했을 때 시민들이 그 배치에 따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규칙을 위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법을 어기지도 않았고 어떤 사람이나 공공 재산에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평지풍파를 일으켰는가? 또 누가 억만 중국인의 기본 인권과 생명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기어코 파룬궁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했는가? 누가 이 박해를 거의 30년 동안 지속했는가? 그들의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국민의 권익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사리사욕을 위해서인가? 파룬궁을 가상 적국으로 삼은 이 정치 운동은 중국 사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중국의 법치에 또 어떤 치명적인 중상을 입혔는가?

 

원문발표: 2026년 4월 20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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