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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엄격히 요구하고 속인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글 / 대만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9월26일] 모순에 부딪치면 상대방에게 도리를 말하지 말며 옳고 그름을 다투지 말아야 한다. 옳고 그름을 다투는 것은 바로 속인의 이치를 다투는 것이 아닌가?

법공부 할 때 주변 환경이 아주 떠들썩한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움직이지 않는가를 고험하는 것이 아닌가? 단체 법공부할 때 어떤 사람은 빠르게 읽고 어떤 사람은 느리게 읽는데 바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움직이지 않는가를 고험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마음을 완전히 내려 놓았을 때 빠르던 늦던 떠들던 상관없이 모두 읽어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먼저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하며 남을 도와주어야 한다.

진상을 알려 줄 때 부근의 상가에서 우리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게 하는데 겉으로 보건대 그들의 장사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안을 향해 찾아봐야 한다. 자신에게 쟁투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 쉽사리 이끌리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지를 보아야 한다. 반드시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중생을 위하여, 그를 위하여, 우리는 문제를 처리할 때 내심은 반드시 자비하고 상서로워야 한다.

이번에 홍콩에서 한 속인이 나를 그의 가게 문 앞에서 진상을 하지 못하게 하면서 또 우리가 정치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의 마음이 따라 움직였고 후에 그가 나를 가라고 손으로 떠밀기까지 하자 나의 마음은 더욱 심하게 이끌려가게 되었고 나중에 그가 성이 나서 나에게 물러가라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이 진상을 듣는 것 마저 방해 하였다. 나는 단숨에 청성해 졌고 후회막급하였다. 후에 다른 한 명소에서, 나는 교훈을 섭취하여 쟁투심을 닦아버리고 자비로 관리인원을 대해 주었더니 효과는 참으로 좋았다. 동일한 지방에서 다른 수련생이 하면 안되었지만 내가 가서는 괜찮았다. 문제의 출현을 표면으로 봐서는 안 되며 옳고 그름을 다투어도 안 된다. 우리는 수련인이며 더욱 높은 이치가 우리를 요구하고 있다. 문제가 발생하면 흔히 표면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그러나 흔히 그것은 진정한 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표면적인 원인으로 해결하려면 해결할 수 없는 것이며 자신의 씬씽으로부터 착수하는 것만이 비로소 옳은 길이다.

인터넷에서 한담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써 쟁투심, 환희심, 자만심이 있어서는 안 되며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을 따라 이야기해야 하고 반드시 그의 감수를 고려해야 한다. 이전에 나는 상대방은 마땅히 어느것 쯤은 알아야 한다고 여기고는 그것을 그에게 밀어넣어 주었다. 결국엔 언제나 혼자 스스로 말한 격이 되었고 상대방은 도망가버리고는 하였다. 지금 내가 인식하건대,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상대방의 접수 능력에 따라 그에게 줄것을 주어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자신을 검사해 보아야 한다. 그 외에 내가 발견한데 의하면, 속인의 말은 어떤때는 가상이며 사악의 교란이다. 이를테면, 절반쯤 한담하던 중 상대방이 갑자기 듣기 구차한 말을 한다. 내가 물으면 그는 도리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마치 방금전의 일은 전혀 발생한 적이 없는 듯 하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전에 늘 아이에게 도리를 말해주곤 하였는데, 자신은 그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애들은 도리어 내가 설교한다면서 좋아하지도 접수하지도 않았다. 나중에야 나는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애들이 바라는 형식대로 그애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전에 나는 내가 즐기는 방식대로 효도하면서 스스로 효도라고 여겼다. 나중에야 비로소 마땅히 부모님이 바라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부모나 아이들이 바라는 방식이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위해 영원히 책임진다는 태도에 기초하여 그들과 토론해야 한다. 필경 속인은 인연을 보아내지 못하며, 우리야말로 비로소 무엇이 진정으로 그들을 좋게 하는 것인가를 알고 있는것이지만 그래도 다만 선을 권유할 뿐, 결과를 집착할 수 없는 것이다.

모순이 발생하면 반드시 그것은 우리의 어떤 마음을 겨냥하여 왔다는 것을 보아내야 한다. 다만 자신의 마음을 동하기만 하면 반드시 자신을 검사해 보아야 한다. 문제는 꼭 자신의 몸에서 나타난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모순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집착을 누락없이 닦아버렸을 때 길을 가도 곁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를 향해 웃을 것인데 어디에서 모순이 오겠는가? 두려움이 없는데 우리를 두렵게 하는 요소가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최근 몇 번 홍콩에서 신문배포를 하였는데, 신문이 잘 배포되지 않을 때면 자신을 검사해 보는 외 나는 인식하였다. 나에게 부족점이 있다 하더라도 사악은 이른바 나를 고험한다는 구실로 중생이 진상을 아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나의 부족점은 사부님께서 나를 위해 배치하신 수련의 길에서 자연히 닦아버릴 것이다. 이 일념을 발하자 신문은 뚜렷하게 많이 배포되었다. 신문을 배포하는 과정은 자신의 사람의 관념을 제거하는 과정이었다. 그 무슨 출근하는 사람들에겐 배포하기 어렵고, 어느구역, 어느지점은 배포하기 어렵고, 이렇게 속도가 늦고서야 언제면 다 배포하겠는가……등등 일체 관념은 모조리 타파해야 하며, 배포하기 어려울수록 더욱 낙관적이고, 심정은 더욱 홀가분 해야 하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저 자비롭게 중생을 대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렇게 나는 견지하였고 신문 배포도 아주 순조로웠다.

즉각 박해를 종결해야만 비로소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이전에 자신이 진상 알리는 과정에 환희심, 자아 가치를 긍정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을 회상해 보면, 바로 “자신을 실증”하기 위하여 “박해 가운데서 진상을 알리고 좋은 일을 한”것이 아닌가? 바로 “박해를 구한” 것이 아닌가? 진상을 알리기 위한 것은 대법제자가 존재하는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법을 실증하기 위해 왔으며, 박해가 발생했기 때문에 중생을 구도하기 위하여 우리는 비로소 진상 알리는 것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전에 도리어 “박해가운데서 진상을 알리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가치를 찾으면서 박해를 구하고는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부족점을 닦아버리는 것은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서이지 층차의 제고를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잘하지 못하여 자책으로 의기소침해지면 사악은 기뻐한다. 우리는 참으로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중 어떠한 일이 발생했더라도 절대로 속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즉각 기어일어나 새롭게 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악이 우리의 부족점을 이용하여 틈을 타는 것을 견결히 부정해야 한다. 법을 실증하는 과정에 그 어떠한 속인의 마음이든 모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박해 연속”을 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층차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부당한 곳은 동수들께서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7년 9월26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7/9/26/16327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