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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과 같이 식사하던 일화에서 생각난 것

글/동북(東北)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1월 1일】 십년 전 사부님의 설법을 직접 들었던 노제자(老弟子)한테 들은 일화다. 그는 “그때 사부님께서 우리 이 도시에 오셔서 학습반을 꾸리셨는데 점심 때가 되어 식사할 때의 일이다. 모두들 자리에 앉았고 접대를 맡은 직장의 노조 간부가 사람들에게 음식을 시키게 했다. 당시 사부님을 모시던 한 제자가 야채를 많이 시켰다. 이때 접대를 맡은 그 노조 간부는 ‘왜요? 당신들 사부님은 고기를 안 드시나요?’라고 말했다. 이때 사부님께선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시면서 ‘우리 여기에서는 유독 그 친구만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야채를 시킨 제자를 가리키심). 모두들 ‘와’하고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 후 사부님께선 고기 메뉴도 몇 가지 주문하게 하셨다.”(사부님의 말씀은 대략적인 뜻에 불과할 뿐 원 말씀은 아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내게는 이 이야기가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처음에 나는 사부님께서는 상냥하고 겸손하시며 유머가 있으시구나 라고만 여겨왔다. 그런데 어제 저녁 나는 갑자기 이 일화에 다른 함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설법 중에서만 우리더러 곳곳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며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법(正法)정각(正覺)을 수련해 내라고 하신 것만이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역시 곳곳에서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이 일은 나로 하여금 정말이지 많은 감동을 주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다른 한 가지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최근 나와 몇몇 동수들은 함께 교류할 때 늘 갑(甲) 수련생을 언급하곤 하는데 갑 수련생은 과격한 타입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대법을 수련한 후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가 하면 일도 하지 않는다. 또 동수 집에 갔다가 악당(惡黨) 문화의 책이나 용(龍) 도안이 있는 것을 보기만 하면 동수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없애버리는데 동수의 가족들로 하여금 달리 보게 했다. 갑 수련생은 또한 집에서 키우던 꽃이며 식물을 전부 없애버렸는데 이런 것들이 쉽게 영기(靈氣)를 얻어 사람을 교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이런 말을 듣고만 있었던 나도 속으로 불평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어찌 이리도 이지적이지 못할까.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그렇게 뚜렷하게 말씀하셨는데 설마 그는 설법을 보지 않았단 말인가?’ 나중에는 말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더욱 끓어올라 마음속으로 ‘ 이런 유형의 사람은 앞으로는 될 수 있는 한 적게 접촉하자.’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는 매번 갑 수련생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함을 느꼈다.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이 문제를 냉정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기왕에 모두들 다 그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모두에게 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모두 다 닦아 버려야 할 사람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자 자신의 사람 마음이 즉시 폭로되어 나왔다. 그가 수련한 것이 나만 못하다거나 원망하고 질책하고 불평을 하는데 그 핵심은 또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아주 큰 사(私)와 아(我)였다.

나는 늘 스스로 자신이 수련을 아주 잘했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왜 교류할 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인식만을 강조하는가? 심지어 다른 사람이 말할 때 다른 사람의 말을 가로막고 자신이 말하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깨달은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못해 안달하는데 잠재의식은 상대방더러 나의 인식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으로, 내가 가는 방향이 그래도 더 바르다고 여기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말한 것과 한 것이야말로 가장 옳고 바른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의견을 말할 때면 속으로 늘 불편함을 조금씩 느끼곤 한다. 이것은 낡은 우주의 생명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자신을 분석했을 때 나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많은 자아를 지닌 배후의 사람 표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든다면 친구들과 모임을 가질 때 나는 친구에게 알려준다. 이 사업은 네가 이렇게 해야 하고 그 길은 마땅히 이렇게 걸어야 하며 심지어 친구 가게의 간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여긴다. 나는 이 마음이 이렇게 깊이 숨어 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정말이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늘 자아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수련인(修煉人)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안을 향해 찾아야 사람에서 벗어나 신으로 걸어 갈 수 있으며 밖으로 찾는다면 영원히 사람이다. 과거에 나는 늘 자신이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이 그래도 정진으로 칠 수 있다고 여겨 왔으며 틀림없이 정법노정을 따라 갈 수 있다고 여겨왔고 정법이 결속되면 사부님을 따라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여겨왔었다. 아울러 정법이 결속되지 않는 것을 보면 사부님께선 틀림없이 정진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을 기다리시는 것으로 나는 긍정코 그 속에 포함되지 않을 거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갑 동수에 대한 일에서 나는 자신의 사람 마음이 아직도 깨끗이 수련되지 못했음을 보았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동수에 대해서는 관용(寬容)해야 하며 동수의 부족을 안을 수 있어야 하며 동수의 수련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동수의 표현이 부족할 때 이것은 수련인이 버리지 못한 수련해 버려야 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동시에 선한 마음으로 지적해주어야 한다. 대법에 대해 책임지고 신우주(新宇宙)에 대해 책임져야 하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이 일체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이 일체를 나는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공이 자라지 않는 두 가지 원인을 말씀하셨다. 나는 자신이 고층차의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며 심성(心性)수련이 제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여 늘 사람 마음에 이끌려 밖을 찾고 있다고 느꼈다. 정말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천상의 신들도 일을 할 때면 서로 상의한다고 알려주셨다. 나는 신(神)과 신 사이의 그런 이해와 관용 및 포용하는 무아(無我)의 경지는 대법제자가 마땅히 도달해야 할 표준이며 이 표준에 달하지 못하면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 나는 늘 마음속으로 ‘빨리 결속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결속된다면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사람 마음이 이렇게 많은데 사부님께서 나를 어디에 놓으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련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으며 또한 엄숙한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다짐했다. ‘사부님, 저는 반드시 수련을 잘 하겠습니다. 꼭 표준에 도달하겠습니다.’

나의 인식이 전변(轉變)된 후 다시 갑 수련생을 보자 그에게는 우수한 점이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법에 대한 그의 견정한 마음은 나는 따라갈 수 없다. 그가 법을 베끼고 외우며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배포할 때 생사를 내려놓으며 중생을 구도하는 그런 상태는 나를 감동케 한다. 낡은 세력이 당초 각기 다른 세계에서 와서 차이가 몹시 큰 대법제자들을 하나의 환경에서 수련하도록 배치한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간격이 생기고 의견이 갈라지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자아를 강조하는 중에서 하나의 정체를 이룰 수 없게 하려는 것이며 이로써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고 수련하여 올라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부님의 법은 우리로 하여금 자아를 내려놓고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게 했으며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 일체를 돌파함으로써 신우주의 생명 표준에 도달하게 하셨다. 이것은 일종의 경지와 요구이다.

나는 자신이 이 요구와 단지 한 걸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앞으로 반드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문장발표: 2007년 1월 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1/1/145918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