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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께서 호주에 오셨던 날들을 회상하며

글/치원

[명혜망 2006년 7월13일] 1996년 8월2일은 사부님께서 처음으로 호주에 오셨던 날이다. 그때 나는 법을 얻은지 8개월 남짓 되었을 때였다. 사부님을 만나고 싶은 그런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다. 내 일생에서 가장 심령을 자극 받은 때는 바로 그 때이다. 그것은 행복이며,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행복감이다.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 때의 느낌은 그런 순진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쳐 나온, 전체 생명에 충만된 행복감이었다. 동시에 흥분과 긴장된 심정, 약간의 걱정도 있는 – 우리의 준비가 사부님의 설법 표준에 부합되지 않을까봐 걱정하는, 우리가 잘하지 못할까봐, 설법을 들으러 오는 사람이 너무 적을까봐, 사부님을 실망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들이었다.

그때 우리 호주에는 두 개의 초기 대법 연공장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나는 애쉬필드(Ashfield) 공원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카브라마타(Cabramatta)의 카브라베일(Cabravale)공원에 있었는데, 나와서 연공하는 수련생은 두 곳을 다 합쳐도 10여 명 뿐이였다. 그 때 사부님께서 시드니에 오셔서 설법하신다는 것을 알려진 후로부터 설법하실 때까지는 3~4일 시간 밖에 남지 않았었다. 때문에 우리는 백여 명쯤 와서 법을 들어도 우리에겐 놀라운 숫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실제 법을 들으러 온 사람 숫자는 생각 밖에도 우리가 바랐던 숫자의 2~3배나 되었다. 사실 대법수련은 초상적인 것인데 법을 들으러 오는 사람의 숫자를 어찌 사람 마음으로 가늠할 수 있겠는가? 그때는 사람의 마음으로 법을 들으러 오는 인원 수를 가늠했던 것이다.

이튿날, 8월7일 오전 8시 전후에 사부님께서 회의장 밖에 오셨다. 사부님의 행동은 언제나 그렇듯 소탈하시고 비범하시었다. 사부님은 회의장 문 입구에 서 있는 모든 작업자들과 일일이 악수하셨고, 특히 문 입구에 서 있던 유일한 서양 수련생 한 명과 특별히 몇 마디 말씀을 나누셨다. 그 때 나는 행운스럽게도 곁에서 중,영문 번역을 하였다. 나는 사부님은 생각을 꼼꼼히 하셔서 아주 작은 부분마저 다 고려하신다는 것을 느꼈다. 후에 나는 이것이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큰 뜻을 품었지만 작은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노라.’ 라는 법리의 일종 체현임을 깨달았다.

그때 법을 들으러 온 사람들 대부분은 수련을 시작하지 않았거나 혹은 금방 수련을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사부님은 설법 시작 시간에 법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사부님은 줄곧 서신채로 설법하셨는데, 연속 5시간을 서 계셨다. 법을 들으러 온 사람들 대부분은 모두 속인의 심태였고, 회의에서 제기된 문제들도 대부분 대법 인식 초기의 문제들로서 거의 모두는 《전법륜》 중에 직접적인 답안이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번거러워 하시지않고 자세히 해답해 주셨다.

문제 해답 중, 석가모니 부처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런 한 단락 말씀을 하셨다. “그 때 석가모니 부처가 세상에 계실때 마(魔)는 말하기를, 나는 지금 당신의 법을 혼란시키지 못하지만 당신의 법이 말법시기에 들어갔을 때를 기다려 나는 나의 제자와 손제자들을 파견하여 당신의 절에 출가하도록 할 것인즉, 나는 당신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겠다! 라고 했고, 석가모니 부처는 당시에 눈물을 흘렸다. 석가모니 부처, 그는 당연히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말법에 이르게 되자 매우 난잡하게 되었다. 그가 이야기한 말법시기는 단지 사람만이 아니며, 다만 절을 가르킨 것만이 아니라, 인류 사회 도처에 모두 인류 사업을 파괴하는 일이 존재하고 이러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법륜불법(시드니 설법)》)

사부님께서 이 부분 설법을 하실 때, 사부님의 눈 언저리에 눈물 방울이 맺힌 것을 나는 그 때 보았고, 마음 속으로 아주 큰 진동을 받았다. 아마 사부님의 시람을 구도하는 어려움이 그 때 석가모니 부처가 사람을 구도하는 어려움과 비슷한 감수임을 보신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나 또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일년 후, 국내의 동수들과 이 일을 회상할 때 적지 않은 동수들이 눈물을 흘렸다.

몇 년이 지나갔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때의 정경이 어제 일처럼 또렷이 떠오르면서 깊은 감개를 느끼게 된다. 그 때는 놀라운 마음으로 석가모니 부처를 위해 괴로워 했지만 우리가 이제 바라는 것은 사부님의 근심이 덜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다른 일종의 법리를 알게 되었다. 사실 석가모니 부처는 그 때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그 제자를 위해, 우리의 사부님을 위해 눈물을 흘렸으며, 더욱이는 업력이 엄중한 중생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닌가!

설법이 끝난후, 사부님은 회의장에서 모두에게 친히 신체청리를 해주셨다. 사부님께서 회의장을 떠나려 할때, 《전법륜》에 서명해줄 것을 요청하는 수련생이 있었다. 그러자 매우 많은 사람들도 따라서 서명을 받으려고 하였다. 아마 그 때의 사람들은 《 전법륜》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부님은 그 때 이런 수련생들의 심정을 이해해 주시고 쉴새없이 서명을 해 주셨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그냥 서명하시었다. 마지막에 사부님은 수련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기념을 남겼다.

내가 기억하건대 이 날 사부님은 온 종일, 오후의 잠깐 휴식 시간에 병에 담긴 물을 조금 마셨을 뿐, 아침부터 어두워질때까지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셨다. 그랬어도 여전히 우리의 신 수련생들의 서명이며, 사진찍는 일을 도와주고 계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호주 수련생들은 정말로 행운스러웠고 또한 부끄럽기도 하였다.

사부님은 몇몇 수련생들과 시드니 달링항구를 지날 때 이렇게 말씀 하셨다.(이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뜻임) “달링항구 이 곳에 연공장을 세운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이곳은 사람이 많아서 신문에 돈을 내고 파룬궁 소개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부님이 떠나가신 후, 우리 2~3명의 수련생들은 달링항구 연공장에서 파룬궁 주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부터 이 곳에서 주말 연공에 참가하는 수련생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몇 차례의 기복이 있었다. 심지어 중국공산당 스파이들은 달링항구 관리층에 압력을 가하여, 연공장을 정지시키려 시도한 적도 있었다. 연공장 활동은 비록 100% 지속적으로 운영되어 나가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으로 정지된 시간이 많지 않았다. 주말 연공 시간이면 수련생들의 연공을 보증하였고, 최근 몇 년 동안은 갈수록 안정되었으며, 그 중 몇몇 수련생들은 묵묵히 댓가를 지불하고 있다. 달링항구 연공장은 시종일관 시드니, 즉 호주의 주요한 야외 연공장 중의 하나로 되어 사람이 많을 때는 200명을 넘었고, 적을 때라도 2~30명은 되었다. 많은 수련생들이 이 곳에서 법을 얻었던 것이다.

아마 1996년 11월14일 일요일이었던 것 같다. 아침 10시 전후, 우리 20여 명의 수련생들이 제5장 공법을 연마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에게 그 무슨 예감이 있어 눈을 떴더니 사부님께서 우리에게로 걸어 오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처음에 내 눈이 잘못되었는가 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나는 사부님 뒤에서 뛰어오는 나이든 수련생 언니가 나를 보고 손짓하는 것을 즉시 알아 보았다. 그 의미는 ‘빨리 일어나 사부님을 맞이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부님은 손시늉으로 나더러 움직이지 말고 계속 연공하라는 표시를 하셨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앉은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참지 못하고 또 눈을 뜨고 사부님을 바라 보았다. 사부님은 재빨리 발자국 소리도 없이 나는 듯이 가볍게 우리 곁을 지나 가셨는데 사부님께서 빨리 걷는다는 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사부님을 따라온 수련생 몇은 보폭을 크게 했어도 여전히 사부님을 뒤쳐저 따라갔다.

사부님은 뒤에 서신 채로 수련생들의 연공을 보고 계셨다. 나는 연공용 녹음기를 갖고 다니는 일을 책임 졌는데, 우리는 앉아서 연공하고 사부님은 도리어 서서 우리의 연공을 보고 계셨다. 나는 자꾸만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은 수련생들의 연공을 방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사부님을 뒤에 서신 채로 우리의 연공이 끝나기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제 겨우 10여분 가부좌 하였다. 나는 그냥 사부님에게로 가서 인사를 올린 후, “연공을 중지하고 사부님께 여러분을 인사 시킬까요?” 하고 물었다. 사부님은 웃으시면서 수련생들의 연공이 다 끝난 후에 다시 보자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도 사부님의 곁에 서 있었고, 누구도 다시는 더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또 몇 분이 지나갔다.(당시 나는 시간의 흐름이 너무나 느린 것 같았다.) 나는 끝내 또 용기를 내어 사부님께 물었다. “사부님 그들의 연공을 중지하라고 할까요?” 사부님은 웃으시면서 나를 보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음악이 멎으면 그만해도 됩니다. 나는 잠깐 생각해 보고 나서 녹음기 곁으로 다가가서 천천히 소리를 낮추다가 껐다. 그리고 나서 “사부님께서 우리를 보시러 오셨어요.” 하고 말하였다.

동수들은 눈을 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귀를 의심하고 두리번 거렸다. 그 당시 현장에 있었던 노 수련생이 이 일을 회상하여 말하기를, 그녀가 당시 눈을 뜨니 등받이가 없는 공원 의자에 사부님이 자애롭게 앉아 계시는 것을 보고 사부님의 법신인 줄로 여겼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제 정신이 들어서야 사부님이 정말로 오셨다는 것을 알고 사부님 곁으로 신속히 모였다. 사부님은 한 시간 남짓 설법하시고 여러사람의 물음에 해답을 주셨다.

나는 늘 이런 감각이 있다. 처음에 사부님을 금방 만나게 될 것 같으면 마음이 아주 흥분되고 긴장됨과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든다. 그러다가 사부님 곁에 다가서기만 하면 이상할 정도로 평온해지고 자연스러워진다. 내가 생각하건대 사부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우리 대법제자들에게 작용한 결과인것 같다 .

달링항구 연공장은 내가 알기에 호주에서 유일하게 사부님께서 친히 직접 오셔서 설법하셨던 연공장이며 또 유일하게 사부님께서 친히 지적하여 세운 연공장이다. 이 연공장은 주변환경이 매우 아름답다. 동쪽으로는 시의 경계에 인접하였고, 남쪽으로는 긴 분수 연못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인도와 항구가 있는 바다이다. 서쪽으로는 달링항구에 인접된 주요한 인도가 있다. 매 주말까지 행인과 유람객이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연공하는 구역에 나무를 몇 줄 심어 놓았다. 지면은 달링항구에 많지 않은 종류의 토사구조를 가진 땅이다. 우리가 연공할 때면 비가 금방 올 것 같다가도 언제나 오지 않는다. 대부분 우리가 연공을 끝내면 비가 내린다. 매우 많은 꼬마제자들이 몇 년 전에 벌써 신체가 투명한 수련생이 있는 것을 보았고, 나무와 나무꼭대기에서 커다란 파룬이 돌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또 사부님의 법신도 보았다. 연공장의 뒷면에서 몇미터 가면 해항의 바다물이 있는데 연공시간이면 수면에 연꽃이 가득피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꼬마제자들의 달링항구 연공장에서의 신기한 이야기 또한 적지 않다.

춘하추동을 막론하고 달링항구 연공장에서 연공을 마치고 나면 늘 시원하고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되는 날도 적지 않다. 아무때나 여러분이 기회가 있어 시드니에 오시게 되면, 달링항구 주말 연공장을 찾아 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9:00AM ~11:00AM

사부님께서 달링항구 연공장을 다녀가셨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수련생들이 사부님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 이를 응낙하시여 1996년 11월26일 저녁에 사부님은 호주 수련생들과 다시 한번 만나셨다. 장소는 시드니시 중심에 있는 매소닉(Masonic)센터였다.

이번에 법을 들으려 온 사람은 약 600여명 되었다. 사부님께서 시드니에 오셔서 설법하신 이후, 짧은 3달동안 호주에서는 대법을 배우는 사람이 급증하였다. 나는 그날 저녁 법회장 문앞에 서서 사부님과 악수를 하고싶은 집착이 있었다. 하지만 경거망동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부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면 좋을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사부님께 먼저 손을 내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부님은 과연 제 시간에 도착하셨다. 사부님은 나의 그 집착으로 충만된 사람마음을 꿰뚫어 보시기라도 하듯이 너그럽게 웃으시면서 나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사부님의 그 부드럽고 따뜻한 커다란 손을 쥐니 또다시 형용하기 어려운 행복감이 솟아 올랐다. 지금에 와서 그 당시 자신의 심태를 돌이켜 보노라니 얼굴에 땀이 날 정도로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사부님께서 남을 배려하시는 언행은 언제나 그렇듯 세심하시고 주도면밀하셨다.

1999년 5월2일부터 3일까지 ‘호주 파룬따파 수련심득 교류회’가 달링항구 국제회의전시센터에서 열렸다. 세계 각지에서 온 수련생 2700명이 이 법회에 참석하였고 사부님도 오셨다.

그 당시 세계를 놀라게 한 ‘4.25 파룬궁 만인평화공소’가 끝난지 일주일이 지난 때여서 각 매체의 기자들이 부지런히 사부님을 취재하였다. 어떤 기자들은 나쁜 마음을 품었고, 특히 홍콩의 중문 잡지는 수련생의 단체연공 시 사진을 촬영하고, 가공을 거쳐 매우 비열한 수단으로 수련생들이 새긴 ‘眞.善.忍’ 글자 모양을 악의적으로 다른 글자 모양으로 고쳐 잡지에 크게 올렸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 잡지와 대법에 대해 암암리에 요언을 날조한 중국공산당 내의 악당 중에 있는 악인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중국공산당 악당이 곧 시작하게 될 행위의 전주곡이였다.

사부님을 만난 후 모두 자리에 앉았다. 나는 사부님께서 매개 수련생들의 머리 위를 일일이 훝어 보시고는 머리를 끄덕이시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사부님은 별로 다른 말씀을 더하시지 않으셨기에 나도 감히 물어보지 못하였다. 마음 속으로는 수련생들의 수련상태와 연관되는 일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감히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수련을 잘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실까봐 겁이났던 것이다. 사부님께서 우리 여러 사람에게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이전 어느 토요일 아침, 사부님께서는 달링항구 연공장에 다녀오신 적이 있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때 거기에서 연공하는 수련생이 한 사람도 없었기에 돌아 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듣고 나서 마음 속으로 심심한 아픔과 유감을 느꼈다. 유감스러운 것은 내가 다른 동수들과 함께 이 연공장을 애호하지 않았던 것 때문이었고, 우리가 이 특별하게 의의가 있는 연공장을 지속적으로 잘 견지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웠다.

최근 몇 년간 달링항구 대법 연공장은 정상적으로 꾸려지고 있다. 지금까지 묵묵히 줄곧 견지하고 있는 동수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5월3일 저녁, 법회가 끝난 후 사부님과 일부 수련생들은 함께 식사를 하였다. 그 때 사부님의 표정은 매우 가라앉은 것 같았다. 여러 사람들도 마음이 매우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음식을 들지 않았다. 사부님은 이러한 우리들을 보시자 웃으시면서 많이 들라고 권하셨다. 사부님은 매우 적게 드셨다. 두 달후, 중국공산당 악당은 1억 수련자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몇차례 사부님을 만나면서 제일 눈에 뜨인 것은 바로 사부님께서 깨끗하게 빨아 입으신 색이 바랜 셔츠였다. 사부님은 언제나 깨끗이 빨아 입으셨지만 언제봐도 한가지 그 옷이었다. 식사도 아주 간단하였다. 이 방면의 이야기는 국내 수련생들에게서 많이 들었을 것이다.

내가 느끼건대 끝없이 넓고 큰 대법 외에는, 사부님의 언행과 행동을 우리 대법제자들은 영원히 다 배우지 못할 것이다.

이상의 회억은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으로서 진실하고 왜곡된 것이 없는 있는 그대로이다. 오직 소박한 언어와 순정한 심태가 있어야만 진귀한 기억을 써낼 수 있을 것이다.

문장발표 : 2006년 7월13일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6/7/13/132884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