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사부님의 보살핌 속에서 걸어온 나의 수련의 길(2)

글/랴오닝 단둥 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6월4일】(앞문에 이어)

– 베이징에서 법을 실증하다.

대법과 사부님이 마련해주신 수련의 기연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매일 출근하면서도 돌아와서는 저녁 늦게까지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해 왔다. 그래도 나는 종래로 피곤한 감이 없었고 힘은 넘쳐났다.

내가 한창 정진하고 있을 때 사악의 박해는 시작되었다. 99년7.20일 장xx를 대표로 한 사악의 깡패집단은 수중에 있는 권리를 이용하여 대법과 사부님을 비방중상하면서 파룬궁 수련생들이 북경에 가서 하는 평화적 청원을 무조건 체포와 감금으로 대응했다.

사악의 대법에 대한 비방과 중상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이 아팠다. 사부님의 청백함을 위해, 대법의 결백함을 위해, 사악의 기만 선전을 폭로하기 위해, 나는 단연히 진상을 알리고 대법을 실증하는 길에 올랐다.

99년 10월 나는 일자리를 포기하고, 악경들이 봉쇄한 길을 뚫고 23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는 여관을 찾아 투숙했다. 저녁 10시 경찰들의 조사가 시작되자 나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오직 사부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랐다. 경찰들은 그냥 내가 머문 방앞을 지나쳐 갔다. 그때 나는 사부님께서 보우하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나는 차를 타고 천안문으로 향했다. 차에서 나는 베이징 수련생들을 만날수 있게 해달라고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다. 천안문에 도착해 금방 차에서 내리자 남녀 두명이 우리를 마주 향해 걸어오는 것이었다. “금방 도착했죠? 피곤하시겠어요. 어디서 오셨어요?” “랴오닝에서 왔습니다.”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들은 북경의 수련생이었다. 순간 사부님께서 그들을 배치하여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베이징의 상황을 간단히 묻고나서 구체적인 행동을 토의했다.

27일 저녁뉴스에서는 파룬궁을 사교로 정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매우 평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길거리로 나가 천안문으로, 중난하이로 이렇게 아무런 목적없이 걸어 다녔다. 마음속의 괴로움은 표현할 수가 없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잘못인가? 왜서 우리가 연공하는 권리를 박탈하는가?’ 여관으로 돌아온 우리는 오래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튿날 6시가 좀 지나 우리는 천안문 광장에 도착했다. 미처 연공할 사이도 없이 사복 경찰들이 몰려와 우리를 차에다 실었다. 차에는 이미 다른 대법제자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우리는 천안문 공안 분국으로 실려갔다. 그 곳에는 이미 대법제자들이 방과 복도에서 서있었다. 조금 지나 경찰이 오더니 우리에게 20위안씩 내라고 하며 쉽게 알아보기 위해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했다. 이 곳에서 나는 전국 각지에서 온 대법제자들을 보았는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고위층에서 일반시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회계층이 모두 있었다. 모두가 베이징에 와서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수련생들은 한데 모여서 서로 교류를 했다.

이때 경찰은 등록을 하기 위해 사진을 들고 우리를 한명 한명 불렀다. 그런데 누구도 응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경찰은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기 곤봉으로 때리고 여 수련생의 머리를 잡고 아래층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 중에 20살도 채 안되는 학생은 경찰에게 맞으면서도 매우 용감을 자태를 보였다.

여러 사람들은 동수들이 매를 맞는 것을 보면서 매우 괴로워 했으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이런 장면을 보고 나서 여럿이 함께 《논어》 《홍음》을 외우기 시작했다. 홍대하고 자비한 음성이 공안국 안에서 메아리 쳤다.

경찰은 우리에게 이름을 말하라고 했다. 그 전에 우리는 이름을 말하기로 합의를 봤다. 그것은 다른 의도가 있는 자들이 우리가 지식도 없고, 사상이 없는 농촌 사람들이라고 폄하할까봐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직함, 관직, 지위 모두 써내서 그들더러 우리가 문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이름, 직함을 모두 알려주었다. 그들더러 우리는 지식이 있고 사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을 다 적고나서 악경들은 한 사람씩 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떤 동수 몸에서 감춰놓은 《전법륜》 책이 발견되자 경찰들은 지독하게 때리며 책을 뺏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수련생은 책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슴에 꼭 부둥켜 안았다. 결국 악경들은 매우 비열한 방법으로 그 동수의 손에서 책을 뺏아갔다.

오전 시간 내내 우리들은 시달림을 당했다. 정오가 되자 그들은 우리를 차에 실고 펑타이 체육관으로 데려 갔다. 그곳 벽에는 전국 여러 지역 이름이 써 있었고 그들은 우리를 지역별로 나누어 땅에 앉게 했으며 아무런 먹을 것도 주지 않았다.

그날 하늘에서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경찰은 외투를 입고도 추워했지만 우리는 얇은 옷을 입고 땅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그들은 자정까지 우리를 시달리게 하였다. 날씨가 춥고 바람도 세게 불었기에 후에 각 지역 베이징 주재사무실에 통지하여 우리를 각 고장으로 데려가게 했다. 새벽 한시가 되어 우리는 경찰들에게 끌려 호텔에 갔는데 우리보다 먼저 잡혀온 동수들이 의자에 수갑이 채워진채 앉아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경찰은 몸수색을 했다. 어떤 경찰은 정말로 비열했다. 손으로 우리 몸을 마구 만졌으며 그들의 행동은 역겨워 글로서는 표현하기 어렵다. 몸을 다 수색하고 나서 또 우리를 의자에 수갑을 채워 놓고 차디찬 땅 바닥에 앉게 했는데 수갑으로 여러 사람을 함께 연결시켜 놓았기에 하나만 움직여도 수갑이 죄어들면서 몸을 괴롭혔다. 그날 밤을 그렇게 시달림 속에서 보냈다.

이튿날 경찰은 우리 몸에서 수색해 낸 돈으로 식품을 사왔는데 그 중에는 자기들이 사용하는 물건도 있었다. 경찰은 우리에게 자기들이 쓴 비용까지도 내게 하였다.

저녁에 기차에 압송되어 올랐다. 차에 오르자 경찰은 우리를 침대차 난간에 수갑을 채워놓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묻었다. 거기에서 경찰은 파룬궁 수련자라고 대답했다. 파룬궁을 수련하는게 무슨 죄인가? 그런 질문에 두려워 경찰은 타울로 우리의 손목을 가리워 놓았다.

현지에 도착하자 경찰은 우리를 파출소로 보냈다. 소장은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로 “누가 베이징에 가라고 했어? 너희들이 갈 곳이야?” 라고 하면서 주먹을 공중으로 쳐들어 내 머리를 내리 치려고 했다. 그 순간, 어떤 힘이 소장의 주먹을 밀어내 내 머리 옆으로 비껴 내려가게 했다. 소장은 깜짝 놀라며 한참 동안 멍하니 나를 쳐다보더니 당장 태도가 누그러 들었다. 말투도 부드러워졌는데 다시는 가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들에게 시끄러움을 가져다 준다고 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인데 바보짓을 하지말라고 하고서는 나가버렸다. 후에 우리는 구치소에 감금되었다.

구치소에서 나는 사악한 경찰들이 동수들을 박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사람들로 꽉 차있은 자그마한 감방에 몸을 비틀 여유도 없었다. 그 중 동수 한 명이 연공하는 것을 범인이 고발하여 결국 모든 대법제자들이 달아 매달려 매를 맞았다. 아침에도 소장을 포함해 한 무리가 몰려 들어와 우리들을 또 때리기 시작했다. 어떤 수련생은 맞아서 살이 다 찢어졌으며 온 몸이 성한데 없이 퍼렇게 멍이 들었다. 어떤 수련생은 살이 터지면서 바지와 피가 붙어버려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기도 어려웠다. 우리는 이렇게 매일 핍박에 강제 노동까지 해야 했으며 먹는 것은 흙도 채 씻지 않은 무우국에 옥수수 떡이였다. 한동안 지나 사람이 많아진 관계로 우리는 간수소로 보내졌다.

기한이 다 되었지만 경찰은 나를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치소에 와서 나를 보더니 계속 연공을 하겠는가고 물었고 나는 계속 연공을 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대뜸 욕을 퍼붓고는 돌아갔다. 후에 가족들이 와서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구치소에서 나온 후, 나는 바로 회사로 출근하게 되었다. 출근하자 회사에서는 시 공안국의 사람들이 우리 매 사람마다 2000 위안의 벌금을 받아 갔다고 했다. 베이징에서 수색해 뺏아간 돈과 이것을 모두 합하면 경찰은 만원도 더 되는 돈을 나에게서 강탈해 갔다. 경찰이 회사에서 가져간 그 2000원 때문에 월급 때 나의 봉급은 겨우 200 위안밖에 안되어 생활에 쪼들리기도 했다.

구치소에서 나온 후 남편도 이런 말을 했다. “당신 이제 더 나가지 말아요, 멀쩡한 사람을 가둬놓질 않나, 그 사람들의 권세에 당할 것 같아요? 당신들이 못 이겨요” 남편의 말을 듣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요, 그들은 돈도 있고 세력도 있지요. 그러나 나는 대법제자예요. 우리 사부가 모욕당하고 모함을 받고 있는데 대법제자로서 내가 가만 있을 수 있어요? 응당 나서서 사부님과 대법을 수호해야 하지 않겠어요? 사부님이 우리더러 더욱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틀렸나요? 내가 나서서 말하지 않으면 대법제자의 자격이 있나요? 당신 부모가 다른 사람에게 무고하게 맞고 욕을 먹는다면 당신은 가만히 있겠어요?” 남편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오히려 파룬궁의 진상을 알렸다. 그러나 밖에 나갈때면 늘 시름을 놓지 못했다.

– 두번째로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다.

2000년 3월5일,나는 동수들과 함께 또 베이징 청원길에 나섰다. 마침 그때 인민 대표 대회 정치협상 회의가 개최되는 시즌이었다. 이것은 우리 시민들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는 민원사무실로 향했다. 거기에 가보니 경찰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이것이 어디 민원 사무실이냐? 경찰국에 다름없지 않는가? 여기는 우리가 사실을 설명하고, 자유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곳이 못되었다.

우리는 되돌아 오면서 길에서 배회하면서 천안문 광장을 지나다 보니 그 곳에는 경찰이 쫙 깔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말할 권리 마저 모두 빼앗겼다. 우리는 교류하면서 우리가 온 목적은 진상을 하기 위한 것이며 잡히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서로간에 생각하면서 여기서 안되면 다른 방법으로 진상을 해야 한다는 마음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회사에 출근을 했으나 회사에서 현지 파출소와 배합하여 강제로 나를 다시 구치소에 보내 15일동안 감금시켰다.

구치소에서 나온 후, 회사에서는 나의 태도에 따라 면직여부에 대해 고려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면서 연공 후의 심신 변화와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는것과 회사에 출근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며, 나는 국가의 어떤 법률도 위반하지 않았고 나를 해고시키는 것은 오히려 당신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이며 역시 불법이라고 했다. 대법은 나의 모든 병을 낫게 했는데 이렇게 좋은 공법을 나보고 하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들은 아예 나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강제로 나를 해고시켰다.

비록 일자리를 잃었지만 나의 사부님에 대한 견정한 믿음, 대법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으며 계속해서 다른 일자리를 구하면서 진상을 계속 하였다.

(계속)

문장완성 : 2006년 06월 02일
문장발표 : 2006년 06월 04일
문장수정 : 2006년 06월 06일
원문위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6/6/4/1295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