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속에서 성장하는 청년 대법제자

글/ 해외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청년 대법제자입니다. 지금 대법 속에서 수련하고 사람을 구한 경험을 글로 써서 사부님께 보고드립니다.

1. 부모님을 따라 법을 얻다

저는 9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대법 수련에 들어왔습니다. 수련하기 전에 신기한 광경을 좀 볼 수 있었는데 당시에는 무슨 일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제가 5살 되던 해 어느 날 아침에 깨어보니 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밖은 아직 어두웠는데, 커다란 붉은 사자 두 마리가 창문에 엎드려 저를 쳐다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 마리 커다란 붉은 사자는 드라마 ‘서유기’에서 우마왕이 타고 다니는 피수금정수(避水金睛獸)와 매우 닮았습니다. 잠시 후 커다란 사자 한 마리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제 곁으로 오더니 저를 온돌에 누르고 큰 발톱으로 제 몸을 간질여서 무척 웃고 싶었습니다.

6살 때 이사를 했는데 우리집 방문 앞에서 쟁반만 한 투명한 둥근 고리가 줄지어 맞은편 이웃집 기와지붕 위에 떨어지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수련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파룬(法輪)임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때 사부님께서 이미 저를 보살펴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릴 때 저는 사고를 자주 당했습니다. 4살 때 한번은 집안 어른이 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는데 머리가 밑으로 향해 바닥에 떨어졌지만, 아파서 크게 울었을 뿐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한번은 외삼촌이 삼륜차를 타고 차 앞에는 우리 사촌 형제자매 몇 명이 있었는데, 제가 갑자기 차에서 떨어졌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어릴 때 저는 자전거에 자주 부딪혔고,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실 때 뒷좌석에 앉아 발을 바퀴살에 집어넣다가 아파서 울었지만, 발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 덕분에 유년 시절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 꽤 놀기 좋아했지만 대법이 매우 좋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당시 부모님은 가게를 하나 운영하셨는데 집안 형편은 계속 어려웠고 심지어 가게를 인수할 돈도 빌린 것이었습니다. 수련 후 아버지는 가게 진열장에 공손히 대법 사부님 법상과 파룬 도형 액자를 걸어두셨고, 저녁이 되면 이웃들을 모아 가게 밖에서 연공하게 한 다음 가게 안에서 사부님 설법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낮에 가게 영업 시간에 바쁘지 않으면 부모님은 녹음기로 사부님 설법 녹음을 틀어놓으셨고, 주변 지역에 홍법 활동이 있는 날이면 하루 휴업하고 나가서 홍법하셨습니다. 아버지는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중공)과 장쩌민(江澤民)이 대법제자를 박해하기 전에 수련하는 마음이 매우 순수했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1999년 4월 10일 전후 며칠 동안 근처 마을에서 대법제자 홍법 활동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와 어머니, 남동생은 연회에 가야 했지만, 저는 아버지와 함께 마을에 가서 연공하고 홍법하는 것을 선택했고 수련생 아저씨 집에서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 수정하신 ‘불교 이야기’ 한 권을 얻어 집에 돌아와서 흥미진진하게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큰 장이 서면 우리집 가게에 손님이 아주 많아졌는데 열성적인 수련생 아주머니 몇 분이 자발적으로 가게에 와서 부모님 장사를 도와주셨습니다.

수련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몸이 그다지 좋지 않으셨고 저도 체질이 매우 약해 겨울에 추위를 타고 손발이 찼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태어나서 1년 동안만 분유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해 설날 밤, 대략 9살 때로 기억하는데 어머니가 몹시 괴로운 듯 온돌에 누워 계셨고 아버지는 부엌에서 불을 지피며 제게 아궁이 옆에서 국자로 냄비 속 만두를 어떻게 젓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아끼려고 집에서 저와 어머니, 남동생에게 주사를 놓아주셨습니다.

부모님은 수련 후 건강해지셨고 저도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저는 6살 때 전신마취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동요를 술술 잘 외우던 제가 기억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습니다. 수련 후 제 기억력이 점점 좋아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집안 형편도 크게 나아졌습니다. 당시 집에서 집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전에 진 빚도 거의 다 갚았으며, 어머니가 저와 남동생에게 주시는 용돈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수련의 행복에 푹 빠져 있을 때 박해가 갑자기 시작됐습니다.

2. 박해 속 청소년 시절

1999년 7월 중공과 장쩌민이 박해를 일으켰고 부모님이 연이어 베이징에 가서 사부님과 대법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저녁에 외지 교류에 참석하러 나가셨다가 아침에 서둘러 돌아오셔서 어머니에게 다들 교류 후에 많이들 베이징으로 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00년 그해 겨울, 어머니는 베이징에 가셨고 아버지와 저, 남동생만 집에 있었는데 당시 집안 형편이 매우 궁핍했고 다음 날 제가 시험을 쳐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다음 날 점심값을 챙겨주셨는데 저는 마음속으로 박해에서 오는 그런 무형의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신 후 박해의 압력에 직면해 우리는 이사했습니다. 가게도 넘겼습니다. 이때부터 수년 동안 남들에게 조금 우러러보이던 우리 가족은 이해하지 못하는 친척들에게 무시당하는 신세가 됐고 비록 하루하루를 매우 힘들게 보냈지만, 우리 가족은 그래도 잘 이겨냈습니다.

그해 겨울 아버지는 대법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러 베이징에 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떠나시는 뒷모습을 바라본 후 어머니는 방으로 돌아와 제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아버지는 나중에 집에 돌아오셨을 때 수련생과 교류하며 천안문에서의 상황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르는 수련생 아저씨가 경찰에게 바닥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현수막을 몸 아래에 품어 보호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다가가서 그 수련생 아저씨에게 현수막을 내게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저씨가 현수막을 아버지에게 주자 옆에 있던 경찰은 키가 큰 아버지를 보고 자기들 동료인 줄 알고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현수막을 치켜들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말을 외치셨고 곧이어 경찰에게 붙잡혀 가셨습니다.

박해를 받던 그 몇 년 동안 저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제가 수련인임을 아는 친구들 중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들은 줄곧 저를 매우 잘 대해주셨는데 제가 아주 성실하고 조용하며 공부하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고 비록 과목 편중이 심했지만, 여전히 선생님들의 선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조용히 지냈습니다. 반 남학생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다가 저를 존중하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 대법을 모함하는 내용이나 시험 문제가 나올 때마다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번은 국어 선생님이 제가 쓴 작문을 읽어주신 기억이 나는데 미운 오리 새끼와 오빠를 구하기 위해 침묵한 엘리자 공주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 안에 저는 ‘시간은 여전히 조용히 관찰할 것이다’라는 한 문장을 썼습니다. 선생님이 다 읽으시자, 어떤 남학생이 한숨을 쉬며 “국가에서 못 하게 하잖아”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작문에서 표현한 뜻을 알아들었고 그 역시 중공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파룬궁을 수련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느꼈지만, 저는 두려운 마음 때문에 그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려주지 못해 무척 아쉬운 일로 남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해 4년 동안 기숙사 룸메이트들에게서 자신을 돌보는 방법, 생활하는 방법, 사람들과 사귀는 방법 등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 4년 동안 비록 학업으로 계속 바빴지만, 속인의 큰 염색 항아리 속에서 저도 인터넷 서핑, QQ 접속, 인터넷 일기 쓰기를 배웠고 대학 시절 연애에 빠지고, 애정 관련 글들을 읽는 큰 환경에 빠져들면서 저 역시 점차 오염됐습니다.

시간이 이미 10여 년이 지났지만, 기숙사의 여학생이 남자친구와 밖에 나가 방을 빌려 동거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의 충격과 이후로 이런 일을 흔하게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 것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비록 부모님이 여태껏 저를 아주 엄격하게 가르치셨지만, 친구들의 영향으로 저도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나중에 졸업 후 진로 문제로 헤어졌습니다. 그는 비교적 성실한 사람이라 취업 후 제가 졸업하기를 기다려주려 했지만, 그가 대학에 다닐 때 좋지 않은 행동도 많이 있었고 또 제 이후 수련에도 아주 큰 부정적 교란을 초래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기숙사 6명 중 저와 다른 여학생 한 명만 컴퓨터가 없었는데, 그 여학생은 2층 침대 친구와 사이가 좋아 남의 컴퓨터를 자주 사용했고 집안 형편이 좋았지만 컴퓨터를 사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살 돈이 없어서였지만 이것이 오히려 제게 매우 큰 이로움을 가져다주었는데, 컴퓨터가 없어서 저녁과 일요일 아침에 자주 교실에 가서 자습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국경절 연휴에 다들 고향에 가고 룸메이트 한 명이 제게 자기 컴퓨터를 하게 해줬습니다. 하루 종일 컴퓨터를 했지만, 나중에는 법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버지가 준비해주신 휴대용 ‘전법륜(轉法輪)’을 꺼내 혼자 문을 잠그고 법공부를 했는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알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함은 컴퓨터를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오랫동안 법공부를 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압박감이 매우 컸고 몹시 괴로웠습니다.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와 방학 내내 부모님, 수련생들과 함께 법공부를 하면 다시 좋아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2007년 3월 초 제가 아직 고3 때 어느 날 아침, 전날 폭설이 내려서 학교 선생님이 하루 휴교한다고 알렸습니다. 그날 아침 션윈 공연 CD를 보면서 첫 번째 프로그램의 웅장한 음악을 듣는데 갑자기 몹시 울고 싶었습니다.

2011년 정월 외삼촌 댁에 가서 저녁에 외숙모와 함께 2010년 션윈 공연 CD를 봤는데 외숙모가 제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 파룬궁을 수련하는 거야? 다들 이렇게 젊고 예쁘니?” 저는 웃었습니다. 세인들은 션윈 프로그램과 대법제자의 풍모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탄복과 인정을 느꼈습니다.

2011년 션윈 공연 CD를 집에서 여러 번 보았고 나중에 션윈쭤핀(神韻作品)을 구독한 후에 한때 익숙했던 프로그램 ‘대청거거(大淸格格)’, ‘대당사녀(大唐仕女)’, ‘매화(梅)’ 등을 보았을 때 여전히 매우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대학 졸업 후 미래에 대해 매우 막막함을 느꼈는데 당시 드라마에는 아직 ‘패도적 총재(霸總)’라는 말이 없었지만 직장 내 잠재적 규칙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집에 오셔서 친구에게 들었는데 그 친구의 딸이 일자리를 찾으러 갔더니 어떤 사장은 색욕이 있었고 어떤 사장은 계속 그들에게 술을 마시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대학생은 이미 포화 상태라 일자리를 못 찾는 사람이 수두룩했고 농촌 중학교에 가서 가르치려 해도 교장에게 최소 7~8만 위안의 촌지를 줘야 했습니다. 부모님은 제 대학 학비를 대느라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셔서 일자리를 찾아줄 돈이 정말 없었고, 저도 국내의 그 혼탁한 직장 환경이 싫어 부모님의 건의인 해외 취업에 적극 찬성했습니다.

3. 출국 후 진정으로 수련에 들어서다

출국 전 한번은 아버지가 제게 “지난 몇 년간 넌 수련을 하는 둥 마는 둥 했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듣고 속으로 반발했는데 제 생각에는 수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예전에 학교에서 진상을 알리다가 경찰에게 끌려간 적이 있어서 그 후로 친구들에게 감히 진상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출국 전 그해 12월 자전거를 끌고 나가 사람을 찾아 진상을 알리려 했던 기억이 나는데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여전히 거짓말에 속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느낀 저는 낯선 할머니 한 분에게 대법 진상을 말씀드렸지만 할머니는 두려워하며 자리를 피했습니다. 출국 전 그해 여름, 물건을 사는 한 언니에게 대법 진상을 알렸을 때 그 언니도 무서워하며 피했습니다.

출국 전 그해 겨울, 시내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옆에 있는 남성을 보며 진상을 너무 알리고 싶었지만 끝내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출국 전 가을, 한번은 볼일이 있어 가기 전날 밤 다음 날 어떻게 진상을 알릴지 생각했는데 밤에 꿈에서 흰옷을 입은 선녀가 저를 도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집 유리창 밖 비닐 막 위에도 한 무더기의 성결하고 아름다운 우담바라 꽃이 피어 있었지만, 막상 사무실에 도착해 아침을 먹고 있는 여직원 언니와 옆에서 볼일을 기다리는 소년을 보았을 때 아무리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제게 다년간의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왜 대법 진상을 알리고 싶으면서도 늘 입을 떼지 못했을까요? 국내에서 중공의 박해에서 오는 압박은 제가 사람을 구할 좋은 기회를 번번이 놓치게 만들었습니다.

출국 후 혼자서 번화한 이국의 거리를 걸었는데 길가에는 아름다운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고 저는 일에서 오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는 외에도 걸으면서 언제쯤 대법제자들이 한 장소, 한 집에서 함께 법공부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출국 후 한 달도 안 되어 마침내 이 소원을 이루었는데 당시 차이나타운 근처에서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적힌 노란 옷을 입은 한 아주머니를 보았고 그 옆에는 진상 전시판이 있었으며 당시 ‘보도(普度)’ 음악도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주머니에게 다가가다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고 아주머니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아주머니가 수련생 아주머니의 전화번호를 주셨고 그 아주머니가 불학회를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마침내 불학회를 찾았고 드디어 큰 법공부 팀에서 법공부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매주 한 번 큰 법공부 팀이 법공부를 했고 한 달에 한 번 단체 연공을 했습니다. 저는 일요일 아침에 현지 관광지에 가서 연공했고 저녁에는 차이나타운에 가서 진상을 알렸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여전히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진상을 알리는 기간에 제 자신이 점차 변하고 있음을 발견했는데, 진상 자료 한 묶음을 들고 한편으로는 나눠주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으며 삼퇴(중공의 3가지 조직 탈퇴)까지 권했고, 차이나타운에 갈 때마다 몇몇 사람에게 삼퇴를 권해 탈퇴시켰습니다. 사부님께서 제게 지혜와 용기를 열어주셔서 처음의 겁 많고 남에게 욕을 먹어 울고 싶었던 것에서부터 남의 욕설과 지적에 용감하게 직면하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해주셨음을 알았습니다. 그 나라는 아름답고 부유한 곳으로 아주 유명한 부촌 거리가 있었지만 저는 한 번도 구경하러 간 적이 없었고 첫해 설 연휴에 혼자 차이나타운의 아름다운 오래된 상점 거리를 둘러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나중에 일 때문에 현지 수족관, 식물원, 동물원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갈 기회가 생겼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월 한 번 있는 단체 홍법 연공 때문에 제가 가본 적 없고 평소에 갈 시간도 없는 해변 등 여러 곳을 갔습니다. 처음으로 멀지 않은 바닷물을 보았을 때 너무 흥분해서 “바다다!”라고 소리쳐 현지 수련생들의 의아한 시선을 끌기도 했습니다. 그 나라에서 몇 년 동안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고 매우 분주했지만 바쁘면서도 충실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매일 저녁 퇴근 후 밥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공원에 가서 연공에 참가했고, 마침내 한 시간 동안 결가부좌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집에서 진상 전화를 거느라 저녁 단체 연공에 참가하지 않게 되자 수련생 아주머니는 제 안색이 예전보다 못해졌다고 하셨습니다. 수요일 저녁에는 큰 법공부 팀의 법공부가 있었고 목요일 저녁에는 불학회에서 현지 수련생들의 법공부가 한 번 있었는데, 나중에 저는 전화를 거는 일에 참여하느라 그곳도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아쉽습니다.

저는 목요일 저녁 현지 수련생들과 ‘홍음3-어디로 도망갈까’를 함께 법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황급히 뒷문으로 돌아가거니 쓰레기 버리는 길이라 파룬따파 하오를 감히 바로 보지 못하네 타격해도 무너지지 않고 보기 또한 두려워 도망가기 급급하거니 9평이 전해지자 사당(邪黨)이 무너지네”.

이 시를 다 읽고 났을 때 수련생 아저씨들이 약속이나 한 듯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았는데 당시 저는 장쩌민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쓰레기 통로로 다녔던 일을 아직 몰랐지만, 목요일의 소조 법공부는 제 마음을 무척 평온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후 저는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삼았고 업무가 바빠서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일을 조금 해야 했기에 법공부와 연공을 모두 따라가지 못했으며 서서히 마음속으로 돈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 점점 커졌고 사람도 몹시 거만해졌으며 성격이 조급하고 거칠어졌습니다.

4. 평범한 생활 속에서 성장을 배우다

나중에 갑자기 어떤 일들이 생겨서 저는 그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옮겨가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구름 위에서 골짜기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았고 저 자신도 현실 속에서 점차 정신을 차렸습니다. 시간이 비교적 넉넉한 상황에서 전화팀 플랫폼에 들어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수련생들의 교류를 들었으며 수련생들이 올린 명혜망 교류 문장을 읽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법공부를 하면서 제 많은 관념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살 때 더는 이것저것 고르지 않았고, 마트 할인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았으며, 상류사회에 끼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돈 많고 훌륭한 배우자를 찾는 데 집착하지 않았으며, 더는 등급 관념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지 않는 등등이었습니다. ‘그림 동화’ 속에 청혼자들을 계속 비웃는 공주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전의 저는 그 공주의 상태와 아주 비슷해 남을 비웃기 좋아했습니다. 이후 수련 속에서 남을 비웃기 좋아하는 이 마음도 점차 닦여 나갔습니다.

평소 밥을 먹거나 물건을 사러 외출할 때면 늘 파룬따파 진상 자료를 가지고 다니다가 행인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래도 매우 기뻐하며 자료를 받았습니다. 저는 현지인들의 선량함과 순박함을 느꼈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높이 군림하려는 마음과 등급 관념을 조금씩 닦아버렸습니다.

한동안 저는 현지에서 서명운동을 했는데 사람들에게 현지 언어로 된 서명 안내문을 보여주면 적지 않은 사람이 보고 나서 자발적으로 서명했습니다. 이 일은 제게 사람의 선량함은 계층, 국적과 무관하고 빈부를 가리지 않으며 진상 자료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아가 박해 종식을 위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만 하면, 모두 자신의 선행으로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중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접했던 드라마, 영화, 유행가, 인터넷 글 등은 모두 남녀 간의 정에 관한 내용이었고 상당수가 무분별한 애정에 빠지게 하는 요소였습니다. 끊임없이 수련하고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서 제가 한때 그로 인해 괴로워했던 마음도 법 속에서 끊임없이 닦이고 바르게 잡혔습니다. 색정과 욕망이 범람하는 현재 끊임없이 이성을 되찾으며, 수년 전 부모님께서 제게 엄격하게 교육하신 것이 모두 옳았음을 발견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플랫폼의 한 전화 팀에서 부협조인을 맡았고 전화를 걸어 진상을 알리는 동시에 많은 수련생과 끊임없이 교류했는데, 이것 역시 남을 깔보는 마음을 닦아버리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적지 않은 나이 든 수련생 아주머니들이 법공부, 연공, 그리고 전화를 걸어 사람을 구하는 방면에서 모두 아주 착실하게 하고 있었기에 저 자신과의 격차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경제적 원인 때문에 몹시 난처해졌습니다. 가장 힘들 때 사부님의 자비로운 안배로 상황이 극적으로 호전되어 플랫폼을 떠나 매체에 와서 일하게 됐습니다. 생활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수련생에게 빌린 돈도 모두 갚아 생활의 보장도 갖게 됐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세인들에게 진상을 전하여 그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점차 중공의 사악함과 고난 속에 있는 중국인을 똑똑히 인식하도록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매체에 오기 전날 밤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제가 코끼리 한 마리를 끌고 다니며 사방으로 먹이를 찾아주었는데 먹이가 부족해 코끼리가 다소 야위어 보였습니다. 나중에 어느 집 문 앞에 이르렀는데 주인이 두 짝의 나무 문을 열고 저와 코끼리를 들어가게 해주었으며, 알고 보니 주인이 저를 위해 뒷문을 열어준 것이었고, 그곳은 온 산과 들에 푸른 풀이 가득해 코끼리가 마침내 충분한 먹이를 얻게 됐습니다. 나중에 총협조인이 우리 팀에 수련에 아주 정진하는 수련생 한 명을 데려와 협조인으로 삼게 했는데 저는 이것이 사부님의 자비로운 안배임을 알았습니다.

돈을 모아 빚을 갚던 그 2년 동안 저는 부모님이 예전에 받으셨던 압박감을 피부로 절실히 느꼈습니다. 두 분은 젊은 시절부터 장사를 시작하셨고 젊은이들이 먹기 좋아하고 꾸미기 좋아하며 놀기 좋아하는 나이에 이 가정을 유지하고 저와 남동생을 공부시키며 어르신들을 부양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바쁘게 일하셨고, 수년 동안 줄곧 먹고 입는 것을 아끼며 검소하게 사셨습니다. 저는 거의 2년 남짓 매우 절약하는 생활을 했을 뿐인데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 세월 동안 거의 줄곧 이렇게 아끼며 사셨으니 그 이면에 있는 대가와 끈기는 제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저도 허영을 추구하고 오로지 편안한 생활만 바라던 상태에서 거친 밥과 맑은 국에 만족하고 돈을 아껴 쓰며 또래와 비교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10년 동안 겉보기에는 많은 고생을 겪은 것 같지만 예전에 부모님께서 계속 가르쳐주셨음에도 제가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알게 됐고, 앞으로 이 탁한 난세에서 어떻게 이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결백함을 지켜야 하는지도 알게 됐습니다.

대법 수련 속에서 저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많은 것을 얻었는데 예를 들면 좋지 않은 많은 사람 마음을 닦아 없애고 많은 완고한 관념을 바꾸었으며, 자아에 대한 집착과 명리 추구를 점차 내려놓고 원망심과 질투심을 점차 내려놓은 것 등입니다. 저는 대법의 은혜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 시절과 방황하고 미래에 대해 막막했던 청년 시절을 지나올 수 있었고, 갈수록 더 굳건하게 반본귀진(返本歸眞, 선천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수련하여 사람을 구하는 이 길을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이상은 제가 대법 속에서 수련한 심득 교류입니다. 서둘러 글을 쓰다 보니 사부님을 향한 감사함을 다 말할 수 없는데 생활 속에서, 수련 속에서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늘 사부님의 자비로운 도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하루빨리 저 자신을 제고하여 사람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생은 법을 위해 왔으니 대법 속에서 수련해야만 저 자신이 탁한 속세의 수많은 유혹에서 멀어지고 의연히 뒤돌아보지 않고 반본귀진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삼가 이 글을 자비롭고 위대하신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 사부님께 바치며 명혜망을 빌려 멀리서 사부님께 축복과 그리움을 전합니다. 제자는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에 감사드리며 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열심히 잘해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원문발표: 2026년 9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9/14/5073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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