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용광로 속에서 진금을 단련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본인 구술, 수련생 정리)

[명혜망] 저는 1998년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을 시작해 올해 80세입니다. 법을 얻은 그날부터 저는 생명의 서광을 보았습니다. 대법 속에서 끊임없이 수련하면서 전반생에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던 건강한 신체의 즐거움과 마음이 탁 트이는 기쁨을 갈수록 더 느끼게 됐습니다. 저는 마치 갑자기 행복한 천국에 들어선 것 같았습니다. 1년 뒤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따파를 잔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지만, 제 마음속에는 시종일관 대법이 중생에게 부여한 자비로운 불광(佛光)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비록 박해 속에 사악한 파도가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고 저 역시 몇 차례 중공의 박해를 당했지만, 저는 끝내 방향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중공의 박해를 받기 시작했기에,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80년간 겪은 천지가 뒤바뀔 듯한 인생의 큰 변화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1. 고난의 전반생

한 살 때 치료받을 돈이 없었다

1947년, 저는 부유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 그해 중공은 ‘토지개혁’을 시작했고 중공은 우리집을 부농(富農)으로 규정해 우리집 토지와 재산을 모조리 분배해 버렸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집은 통제와 괴롭힘의 대상이 됐고 차별과 탄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한 살 무렵 걸음마를 배울 때 왼쪽 발에 악성 종기가 났는데, 작은 발목에 7개의 구멍이 곪아 터져 안쪽 복사뼈에서 바깥쪽 복사뼈까지 모조리 썩어 들어갔습니다. 집안 재산을 모두 빼앗겨 돈이 없어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그저 악성 종기가 곪아 터져 고름과 진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기에 저는 매일 아파서 울기만 했습니다. 저는 완전히 살든 죽든 운명에 맡겨진 상태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제 발은 4년 넘게 썩어 들어간 후에야 아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6~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보다 눈에 띄게 가늘어 보였고, 낮에 활동을 많이 하면 밤에는 아파서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다리 전체가 아파서 누가 저를 살짝만 건드려도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팠고, 그야말로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온 가족이 대기근으로 죽을 뻔하다

1958년 중공은 ‘대약진’ 운동을 벌이며 전국적으로 위아래가 모두 거짓을 꾸며내고 허위 보고와 과장을 일삼았습니다. ‘1무(畝)당 곡식 1만 근 생산’, ‘대련강철(大煉鋼鐵, 대규모 철강 제련)’, ‘초영간미(超英趕美, 영국을 능가하고 미국을 따라잡는다)’ 등 황당한 계획을 벌여 곡식이 풍작이어도 거둬들일 사람이 없어 모두 밭에서 썩어버렸고 민중들은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1960년은 우리집 생활이 가장 어려웠던 때로 먹을 양식이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13세로 한창 성장할 시기였는데 매일 너무 배가 고파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른 집은 먹을 것이 없으면 생산대(生産隊)의 농작물을 훔쳐다 먹을 수 있었지만, 우리집은 계급 성분이 높아 감히 훔쳐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만약 발각되면 우리를 죽일 듯이 괴롭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배가 고파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었고 걸을 힘조차 없었으며, 때로는 정말 제가 죽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5, 6월 무렵 어머니는 떨어진 버들잎을 삶아 소금에 절이셨고 우리는 그것을 먹었습니다. 우리는 큰 그릇으로 가득가득 먹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배가 고팠습니다. 가을에는 옥수수 속대, 옥수수 줄기 속, 목화 줄기 껍질을 먹었는데, 우리는 돼지도 안 먹는 이런 것들을 먹었습니다.

우리는 매주 외할머니 댁에 가서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기만을 고대했습니다. 외할머니 댁 문 앞에는 아주 넓고 비옥한 땅이 있었지만, 중공은 농작물을 심지 못하게 했습니다. 농작물을 심으면 자본주의의 길을 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황무지에는 매년 먹을 수 있는 풀이 많이 자랐는데 아주 높게 자랐고 시들면 씨앗이 맺혔습니다. 외할머니는 그것을 맷돌에 빻아 옥수수빵을 찌셨고, 매주 어머니는 저와 남동생을 데리고 가서 옥수수빵 한 끼를 먹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식사였습니다. 우리는 어쨌든 굶어 죽지는 않았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맞서 싸우다

당시 우리집은 사람들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감히 나서서 항쟁했는데, 특히 온 가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일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제가 11살 되던 해, 생산대에서 우리집을 괴롭히며 노동 점수대로 식량을 주지 않았습니다. 너무 적은 것을 보고 제가 “우리집은 왜 이렇게 적어요?”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너희는 노동 점수를 이만큼밖에 못 벌었어”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저씨가 기록한 장부 어딨어요? 가져와 봐요. 아저씨가 기록한 점수 나도 다 기억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주판을 탁탁 튕겨서 계산해 내고는 “보세요, 맞나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대조하자 그들은 할 말을 잃었고 다시 우리집에 한몫의 식량을 더 내주었습니다.

생산대에서 큰솥에 밥을 지어 함께 먹을 때는 한 사람당 한 끼에 마 몇 조각씩을 주었습니다. 다른 집에는 한 무더기씩 주면서 우리 세 식구에게는 마 몇 조각만 주었습니다. 그들이 또 우리집 식량을 착복하는 것을 보고 저는 화가 나서 단번에 그들의 저울을 꽉 움켜쥐고 말했습니다. “다시 달아봐요. 우리집 세 사람한테 왜 이렇게 조금 주는 건데요.” 그들은 감히 아무 소리도 못 하고 곧바로 제게 큰 마 두 덩어리를 더 줬습니다. 우리집은 곳곳에서 괴롭힘을 당했기에 제가 따지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막 시작됐을 때, 대대(大隊)에서 어머니에게 거리 청소를 시켰습니다. 저는 대대장을 찾아가 “왜 우리 어머니에게 거리 청소를 시키는 거죠?”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지주와 부농 분자들은 과거에 착취했으니 지금은 이렇게 해야지”라고 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당신들도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람을 착취하지 않은 걸 다 알고 있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온종일 허리에 밧줄을 매고 밭에 가서 일하셨고, 어머니는 집에서 맷돌을 돌려 밀가루를 빻으며 온 대가족을 수발하셨어요. 그분들은 모두 스스로 힘으로 살아가는 노동자이고 사람을 착취하지 않았는데, 거리 청소를 시키면 안 되죠.” 제가 이렇게 이치에 맞게 강력히 따지자 그들은 어머니에게 거리 청소를 시키지 않았고, 그 이후로 흐지부지 끝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저보고 대단하다고 했습니다.

학교에서 ‘계급의 적’이 되다

저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과 반 학생들이 모두 인정했지만, 출신 성분이 높다는 이유로 좋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몇 명은 중점 중학교에 합격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반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저만 반일제 중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 학교 학생들은 공부를 못하거나 성분이 높은 학생뿐이었는데, 보리 수확 때부터 방학을 해서 가을이 지나서야 개학했으니 반년 동안이나 수업이 없었습니다. 중공은 이처럼 우리가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때 저는 다시 부당한 대우를 받아,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제 성적이 남들보다 월등히 높았기 때문에 농업전문학교에서 저를 받아주었습니다. 우리 반에서 성분이 높은 학생은 저 하나뿐이었는데, 계급투쟁을 앞세우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던 그 시절에는 제가 반에서 무슨 말을 하든 이리저리 꼬투리를 잡아 저를 ‘계급의 적’으로 몰아세웠습니다. 누군가 저를 동정하거나 제게 조금이라도 잘해주면 계급투쟁의 고삐를 늦췄다고 말했습니다. 공산당이 우리를 ‘흑오류(黑五類, 출신 성분이 나쁜 다섯 부류)’로 몰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모두 저를 적으로 여겼습니다. 그때 제가 받은 정신적 압력은 너무나 컸습니다.

한번은 반 학생 몇 명이 함께 놀면서 모두 자신에게 시대에 맞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한 아이는 “나는 훙궈(紅果)라 부를래”라고 했고 저 애는 “나는 원거(文革)이라 부를래”라고 했습니다. 저는 “나는 리신(立新)이라고 할게,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로 리신”이라고 말했습니다. 반 청년단 지부 서기가 벌떡 일어나 눈을 부릅뜨고는 목소리를 바꿔가며 제게 말했습니다. “네 이름이 리신이라고? 너는 반동이야. 네가 낡은 것을 타파(破舊)하지 않는 것은 반동이야.” 한 학생이 “얘 설마 ‘포주리신(破舊立新, 낡은 것을 깨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운다는 공산당의 정치구호)’이라고 부르려는 건 아니겠지?”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애들은 웃었지만 저는 울었습니다.

우리 기수 졸업생들은 모집 요강에 졸업 후 각 현(縣)의 농업국에 배치된다고 규정돼 있었습니다. 결국 졸업 전에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됐고, 우리 졸업생들도 현 농업국에 가지 못하게 되자 다들 일하지 않고 학교에서 기다렸습니다. 이후 집에 연줄이 있는 학생들은 잇달아 일자리를 찾아 떠났습니다. 저는 첫째로 다리가 좋지 않아 밭에 나가 일할 수 없었고, 둘째로 성분이 좋지 않아 아무도 제게 일자리를 배치해 주지 않았기에 계속 학교에서 기다리다가 1969년 말에야 제가 가장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 기간에 고향 사람이 제게 여러 명의 혼처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제 몸이 좋지 않고 성분도 나쁜 것을 보고는 모두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시내에 사는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바로 지금의 남편입니다. 그는 배운 게 많지 않아 학교를 3년밖에 다니지 못했기에 우리 둘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조건도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에게 “우리집 성분이 안 좋아요”라고 하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내 몸도 안 좋아서 늙으면 더 안 좋을 거예요”라고 말하자 그는 “늙으면 내가 당신을 모실게. 당신이 못 움직이면 내가 모실게”라고 했습니다. 이토록 진실하고 소박한 두 마디가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순식간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렇게 우리 둘은 약혼하고 혼인신고를 한 뒤 결혼증을 받았으며, 저는 호적을 시댁으로 옮겼습니다.

2. 큰 용광로 속에서 진금을 단련하다

법을 얻으니 지극한 보물을 얻은 듯하다

1998년 설 무렵, 우리 반 동창 모임이 있었습니다. 장후이(張慧)는 우리 반 학습위원이었는데, 학교 다닐 때 그녀는 몸이 좋지 않아 늘 병치레를 했고 안색도 좋지 않았습니다. 출근한 후에도 줄곧 병약했습니다. 그런데 모임 날 그녀는 몹시 예뻤고 안색이 아주 뽀얗고 분홍빛을 띠어 그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던지,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상한 것은 다른 동창들은 아무도 저처럼 감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마 사부님께서 제게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제가 “장후이, 너 어쩜 이렇게 예뻐졌니?”라고 하자 그녀는 “나 파룬궁 연공해”라고 했습니다. 제가 “어디 가서 연공하는데?”라고 묻자 그녀는 “둥허 공원에서”라고 했습니다. 제가 또 다급히 “몇 시에 시작해?”라고 묻자 그녀는 “아침 5시”라고 했습니다. 저는 금세 흥미가 떨어져 ‘나는 못 일어날 텐데, 7시에도 눈을 못 뜨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리가 아파서 새벽 2~3시 전에는 잠을 못 잤기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싫었습니다. 출근할 때도 늘 남편이 밥을 다 해놓고 깨워야만 부랴부랴 일어났습니다. 연공을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한다는 말을 듣고 저는 가고 싶지 않았고 자신이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새벽, 저는 갑자기 잠에서 깼는데 정신이 아주 맑았습니다. 보니 겨우 4시가 넘었는데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 않아 차라리 연공하러 가자고 생각했습니다. 옷을 챙겨 입고 곧장 공원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20여 개의 연공장이 있었고 저는 어느 것이 파룬궁인지도 모른 채 곧장 한 연공장으로 갔습니다. 물어보니 정말 파룬궁이었습니다. 제가 옆에서 한참을 봤는데 당시 제 다리가 아프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신기할 수가?’ 저는 신입 수련생을 맞이하는 파룬궁수련생에게 말했습니다. “어머, 이 마당(場) 분위기가 참 좋네요, 저도 한번 배워볼까요, 어떻게 연공하나요?” 그는 “배우시려면 책을 보셔야 합니다. 책을 안 보고 연공만 하면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책이 어디 있는데요?”라고 묻자 그는 “마침 신먀오 유치원에서 반을 열어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틀어주는데 오후 6시 30분에 시작하니, 배우고 싶으면 가보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저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갔습니다. 비디오가 켜지고 선생님이 강의를 시작하셨는데, 제가 보니 선생님이 그렇게 젊으시고 강의 내용도 제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 들을수록 점점 더 듣고 싶어졌습니다. 하루에 한 강의씩 들었기에 매일 저녁 식사 후 제가 가장 기다리던 일은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제3강을 들을 때 사부님께서 ‘수련은 전일(專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한 직장 동료를 마주쳤는데 저를 쫓아오며 “아미타불을 염하세요, 아미타불이 엄청 좋아요”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저와 말 한 번 섞은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열정적으로 제게 불교를 권하며 우리집까지 계속 쫓아왔습니다. 그녀가 끝도 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저는 “나는 파룬궁을 연공해요. 선생님께서 수련은 전일해야 한다고 하셨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오, 알았어요, 그럼 파룬궁을 연공하세요”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바로 저를 시험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제가 대법제자가 될 수 있는지 보려 하셨던 것입니다.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 제7강, 8강을 볼 무렵 어느 날 아침, 제가 연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데 저와 같은 날 은퇴한 동료가 저를 보더니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언니! 어디 갔다 와요?” 제가 “파룬궁 연공하고 와”라고 하자 그녀는 말했습니다. “어머! 어쩜 이렇게 예뻐졌어요? 안색이 정말 좋아요. 며칠 못 봤는데 변화가 너무 크네요, 이 공법이 틀림없이 좋으니까 빨리 연마해요.”

우리집은 3층에 있는데 예전에는 매번 계단을 오를 때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한 층 오르고는 잠시 쉬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저도 모르게 단숨에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마음이 어찌나 감격스럽던지요! 저는 속으로 ‘동료가 내 안색이 좋다고 했으니 거울 좀 봐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보니 제 얼굴의 부기가 빠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에는 잠을 잘 자지 못해 얼굴도 붓고 눈도 붓고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안색이 정말 좋았고 동료가 저를 칭찬할 만했습니다.

저는 1살부터 52세까지 왼쪽 다리가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고, 몸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파룬궁을 연공한 지 며칠 안 되어 제 다리가 아프지 않게 됐고 밤에도 잠을 잘 잤으며 아침에도 일어날 수 있게 됐으니, 제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대법서적 ‘전법륜(轉法輪)’을 모셔왔습니다. 책을 보자마자 너무 좋다고 느꼈습니다! 대법의 법리는 제가 ‘흑오류’라는 악명을 짊어지고 겪었던 갖가지 심리적 상처를 빠르게 달래주었습니다. 파룬궁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잘해주었으며 모두 남을 위해 배려했고 모두 진선인(眞·善·忍)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했기에 누구를 경계할 필요가 없었으며, 어떤 인신공격이 있을까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상쾌해졌고 저는 꿈에도 오늘 같은 좋은 날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연공을 시작한 지 열흘째 되던 날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만나자마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말씀하셨습니다. “얘, 딸아, 어쩜 이렇게 예뻐졌니? 얼굴도 안 붓고 혈색이 이렇게 좋구나.” 제가 “엄마, 나 파룬궁 연공해요”라고 하자 어머니는 “빨리 연공해라, 빨리 연공해, 우리 딸이 이제 살았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늙으신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기뻐서 “제 다리도 안 아파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기뻐서 웃으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파룬궁은 성명쌍수(性命雙修) 공법으로 심성을 닦을 뿐만 아니라 건강한 신체를 만듭니다. 게다가 마음을 닦는 것이 최우선이며 오직 마음을 닦아야만 신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때서야 저는 마음을 닦는 것 역시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과거에 괴롭힘을 당하는 과정에서 많은 원망심, 쟁투심, 남을 깔보는 마음, 방어심, 남을 의심하는 마음 등이 커졌기 때문에 이런 좋지 않은 마음을 모두 제거해야 했고, 저는 마음을 닦아 선을 향하며 반본귀진(返本歸眞, 선천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하는 길에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진정으로 생명의 의미를 찾았고 매일 매우 충실하게 보냈습니다.

나는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다

법을 얻은 후 저는 매일 천국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행복했습니다. 저는 자신이 갑자기 이토록 아름다운 환경에 들어온 것으로 인해 종종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1999년 7월 중공이 파룬따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몹시 고통스러웠고 이렇게 좋은 공법이 왜 탄압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거짓말이 하늘과 땅을 뒤덮을 때 저는 맑게 깨어 있었는데, 왜냐하면 제가 파룬따파의 신기한 건강 효과를 체험했고, 불법(佛法)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음을 체험했으며, 제게는 사부님의 지도가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에 속은 동포들에게 진상을 알게 하기 위해 저는 명혜망에서 다운로드한 진상 자료를 개인 인쇄소에 가져가 복사했고 인쇄하자마자 바로 배포했습니다. 나중에는 또 진상 자료를 붙이고 진상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수련생들이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는 것을 보고 우리 3~4명의 수련생도 의논해서 베이징에 갔습니다. 우리는 금수교(金水橋)에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크게 외쳤고, 이후 사부님의 보살핌 속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001년 8월, 저와 수련생이 함께 진상 표어를 붙이다가 순찰병에게 납치돼 파출소로 끌려갔고 당시 우리는 계속 정념을 발했습니다. 밤에 우리는 경찰들이 잠든 것을 보고 제가 “화장실 갈게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속으로 ‘당신들이 들었다면 우리는 화장실에 가는 것이고, 못 들었다면 우리는 떠날 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큰 철문이 잠겨 있어 나갈 수 없었습니다. 화장실 벽은 높여 놓아서 역시 안 됐습니다. 화장실에서 나온 후, 돌연 화장실 문 앞에 아주 높은 알루미늄 사다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상하게도 들어갈 때는 없었는데 어째서 나오니 큰 사다리가 있었을까요? 당시에는 많이 생각하지 않고 우리는 ‘휙휙’ 사다리를 붙잡고 올라가 담을 넘어 정문으로 나갔는데, 문 앞에 마침 택시 한 대가 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나요?”라고 묻자 기사는 “가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차에 타서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평소에 저는 몸에 돈을 지니고 다니지 않았는데, 그날 마침 7위안 남짓이 있어서 기사에게 주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우리는 사다리가 사부님께서 연화하신 것이고 택시 역시 사부님께서 우리를 마중 나오도록 안배하신 것이며, 사부님께서 제자들을 구해내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감히 집에 가지 못하고 교외의 한 수련생 집으로 갔습니다. 며칠 후 집을 떠나 떠도는 수련생들과 연락이 닿았고 우리 역시 집을 떠나 떠돌게 됐습니다. 우리는 현(縣) 소재지로 갔는데, 전국 각지에서 방을 얻어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아무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았기에 살기에 아주 적합했습니다. 우리는 삼륜차로 소모품, 진상 자료, 진상 CD를 싣고 들락거렸지만 아무도 무엇을 싣고 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이 현의 시내에는 집을 떠나 떠도는 수련생 10여 명이 모여들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함께 법을 실증하는 일을 했습니다. 진상 자료를 제작하는 사람, 진상 CD를 제작하는 사람, 자료를 제본하는 사람, 각 현의 자료점으로 배달하는 사람, ‘전향’됐던 수련생을 다시 끌어오는 사람 등등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분업하여 협력했는데 비록 조건은 매우 열악했지만 서로 호흡이 아주 잘 맞았습니다. 집을 떠나 떠돌았던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모두 전심전력으로 법을 실증하는 일에 뛰어들었고 그 느낌이 정말 좋았습니다.

수련생들 사이에도 심성 마찰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A 수련생은 누구와도 잘 맞지 않아서 그녀와 함께 있으면 다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고, 한 수련생은 자주 그녀 때문에 화가 나서 울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A와 함께 있게 됐을 때 저 역시 그녀와 다퉜습니다. 그때는 심성이 낮아서 우리의 심성을 제고시키기 위한 것인 줄 몰랐고, 만약 알았더라면 얼마나 빨리 제고했겠습니까만, 당시에는 안으로 찾을 줄을 몰라 거기서 허구한 날 다투기만 했습니다.

2004년 12월, 저와 수련생이 현에 가서 교류하고 돌아오던 길에, 버스 안에서 수련생이 작은 크기의 ‘전법륜’을 보다가 사복 경찰에게 발각됐고 그녀는 서둘러 책을 덮어 제 가방에 넣었습니다. 현의 시내에 도착하기도 전에 차가 멈추고 수색을 시작했고, 우리 둘은 곧장 인근 현의 구류소로 납치됐으며 수련생은 정념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불법 구금됐고 경찰이 제 이름을 물었는데, 저는 이미 3년 4개월 동안 집을 떠나 떠돌았기에 더는 방랑하고 싶지 않아서 제 진짜 이름을 말했습니다. 구류소에서 제가 15일간 단식한 후 제 가족과 현지 파출소 경찰이 저를 데리러 왔고, 이로부터 저는 집을 떠나 떠돌던 나날을 끝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파출소 직원이 저를 찾아왔고 저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저는 줄곧 당신들 경찰을 매우 존중했습니다. 경찰은 마땅히 권선징악해야 하며 당신들은 민중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제가 구류소에 가고 나서야 똑똑히 보았습니다. 원래는 그 안에 동네 건달이나 각종 범죄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부 그런 게 아니라 억울한 서민들이었고 전부 현지 정부가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당신들 경찰이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나요? 왜 나쁜 사람은 안 잡고 전문적으로 좋은 사람만 탄압하나요?” 그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한 경찰이 “아주머니, 참 말씀 잘하시네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진선인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탄압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어딜 잘못했습니까? 우리가 이런 박해를 받으니 저는 저 자신을 찾아봐야 했고 제가 어디가 틀렸는지 생각해봐야 했습니다. 결국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틀리지 않았고 저는 당(黨)이 틀렸고 이 정책이 틀렸으며 당신들이 법에 따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할 말이 없었고 이후 다시는 저를 찾지 않았습니다.

2010년 저는 1년형의 불법적인 강제노동을 당했습니다. 저는 ‘전향’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대장이 “어디 불편한 데가 있으면 대장에게 말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저를 일깨워주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어떻게 나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한 수감자가 “아주머니, 병이 있으시잖아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내게 무슨 병이 있단 말이에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또 저를 일깨워주시는 것임을 알았지만 어떻게 깨달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사부님께서 제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밤에 꿈속에서 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깨어난 후 저는 제가 나갈 수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다음 날 저는 대장에게 “제가 다리가 아픈데, 멀쩡하게 걸어 들어왔다가 누워서 나가게 될까 봐 너무 두려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혈압을 재보니 혈압이 높게 나왔습니다. 대장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요”라고 했습니다. 결국 줄을 서서 걷다가 제가 ‘쿵’하고 넘어져 바닥에 납작 누워버렸고 깜짝 놀란 그들이 얼른 저를 부축했습니다. 며칠 동안 저는 7~8번이나 넘어졌고 그들을 엄청나게 겁먹게 만들었으며 혈압도 높고 이미 60대가 넘었기에, 그들은 저를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받게 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사부님, 저더러 가라 하시면 저는 갈 것이고 사부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검사 후 제게 ‘병보석’ 수속을 밟아주었습니다. 저는 6개월 넘게 일찍 집에 돌아왔습니다.

사부님께서 내 생명을 연장해 주시다

2005년, 제 남동생이 백혈병에 걸려 저는 병원에 가서 그를 수발했습니다. 올케가 조용한 곳을 찾아 제게 “형님, 남편의 이 병 때문에 걱정이에요,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죠?”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이고, 그런 말 마, 만에 하나 기적이 있을지도 모르잖아”라고 하자 그녀는 “맞아요, 저도 기적을 바라고 있어요, 기적이 형님한테는 나타났잖아요. 만약 그이한테도 나타난다면 그 점쟁이가 잘못 짚은 게 되겠죠”라고 했습니다.

올케의 말에 저는 어리둥절해서 물었습니다. “무슨 점을 봤다는 거야?” 올케는 “형님, 모르셨구나, 남편이 예전에 벌써 두 사람 점을 봤어요. 점쟁이가 형님은 53세까지 살고 남편은 57세까지 산다고 했대요. 보세요, 형님은 이미 53세도 넘기셨고 오히려 갈수록 건강하게 잘 사시잖아요. 그이도 57세를 넘겼으면 좋겠어요.” 저는 단번에 깨달았고 올케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52세에 대법을 얻었고 사부님께서 내 생명을 연장해 주셨어. 내가 53세 이후에 사는 목숨은 모두 사부님께서 주신 거야.”

제가 법을 얻은 후 남동생에게도 법공부하고 연공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배우지 않았고 법의 요구에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동생은 정말 5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는 점쟁이가 제대로 점을 쳤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제 올케가 제게 이 말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니며, 사부님께서 저의 이후 생명이 연장된 것임을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시간을 다그쳐 사람을 구하다

제 생명이 사부님께서 연장해 주신 것임을 안 후, 저는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겼습니다. 저는 컴퓨터, 인쇄, 진상 자료 만들기, 진상 알리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수련생 집에서 진상 자료를 만들다가 나중에는 기계를 우리집으로 가져왔고 남편도 지지했으며 나중에는 아이들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직접 배포하는 것 외에도 팀 수련생들에게 진상 자료를 공급했습니다.

어느 날 길에서 사람들이 스쿠터를 타는 것을 봤는데 속도도 빠르고 편리해서 저도 한 대 사고 싶었습니다. 다리가 안 좋아서 걷는 게 느렸기에 제게 스쿠터가 한 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가족과 상의했지만 다들 반대하며 “벌써 60대가 넘었는데 이렇게 나이 들어서 스쿠터를 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남편에게 “한 대 사줘요”라며 계속 졸랐습니다. 결국 남편은 정말 허락했습니다.

스쿠터가 생기니 제게 ‘다리’가 생긴 셈이었고 이동 시간이 절약돼 진상 알리기가 더 수월해졌습니다. 저는 스쿠터를 타고 도시의 절반이 넘는 곳을 누비며 진상을 알렸습니다. 수련생은 “걷는 거 보면 80대 같은데 스쿠터 타는 거 보면 18살 같아요, 정말 빨리 타시네요”라고 했습니다. 스쿠터는 이미 14년의 춘하추동을 저와 함께하며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했는데, 마치 나타(哪吒)의 발밑에 있는 풍화륜(風火輪) 같았습니다.

20여 년간 진상을 알리며 저 역시 나름의 경험을 정리해 냈습니다. 처음 진상을 알릴 때는 중공 악당의 역사부터 이야기했는데, 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데 2~3시간이 걸려 시간과 힘이 들고 효과도 별로 좋지 않아서 저는 속으로 무척 걱정했습니다. 게다가 집안일이 많아서 진상을 알릴 시간을 많이 내기 어려웠습니다. 나중에 수련생들과 진상을 알리는 방법에 대해 교류하면서, 말을 간결하게 다듬으면 몇 마디만으로도 명확히 알릴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들어줄 시간이 별로 없으므로 우리는 짧은 시간 안에 명확히 말해서 사람들이 알아듣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때 더 자세히 알립니다.

나중에는 ‘잠깐 실례할게요, 알려드릴 게 있는데요’라는 첫마디가 역시 덜 자연스럽고 덜 친절하며 상대방과 거리감이 있어 거절당하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후 저는 곧바로 그들을 걱정하고 배려하는 말로 먼저 소통하고 대화를 나누어, 제가 진심으로 그들을 위한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날씨가 쌀쌀할 때는 제가 “오늘 날씨가 쌀쌀해졌으니 옷 좀 더 입으세요. 감기 걸리면 곤란하잖아요, 병원에 가서 감기만 치료해도 몇백 위안이나 들 텐데 건강 조심하셔야죠!”라고 말합니다. 보통 그들은 모두 웃으며 대답하고 감사해하는데, 이때 진상 내용으로 들어가면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를 권하기가 아주 수월합니다.

저는 또 당시의 날씨 상황과 진상을 듣는 사람의 상태, 특징에 따라 그들이 관심 가질 만한 화제를 찾아 대화를 시작하는데, 이렇게 하면 거리감이 없고 상대방도 어떤 방어 심리나 반감을 품지 않습니다. 친근한 대화 속에서 진상을 명확히 알렸고 삼퇴를 시켰습니다.

지금 저는 매주 4~5번씩 나가는데 매번 3, 40명에게 삼퇴를 시킬 수 있습니다.

 

원문발표: 2026년 9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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