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그 시절 제가 근무하던 대학교는 학사, 석사, 박사를 양성하는 청급(廳級) 기관이었습니다. 1999년 ‘7·20’ 이전, 저는 캠퍼스 연공장의 보도원 중 한 명으로서 우리 학교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가 널리 전해졌던 성황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당시 우리 학교의 연공 성황
1995년, 파룬따파가 우리 캠퍼스에 전해지자 그야말로 전례 없는 성황을 이뤘습니다. 대학 본부의 통일전선부장, 홍보부장, 법규처장, 교무처장 등 간부들부터 여러 학부의 서기, 학장, 중진 교수, 청장년 교직원을 비롯해 수많은 학생과 교직원 가족에 이르기까지 정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았습니다. “잇따라 모여와 입도(入道)하여 법(法)을 얻는구나.”[정진요지-깨달음(悟)]
연공하러 오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 금세 두 개의 야외 연공장으로 확장됐습니다. 일년내내 단체 연공을 꾸준히 하는 사람이 100여 명에 달했습니다. 한 단과대학에서는 오랫동안 비어 있는 대형 교실을 내주어 40~50명이 연공하고 법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학교 유치원에도 저녁 단체 법공부 팀을 만들었는데 20~30명이 자주 참여했습니다. 사부님의 새 경문이 전해졌을 때 이틀 만에 200여 부가 모두 배포됐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2교시가 끝난 휴식 시간에 저는 때때로 학생 10여 명을 데리고 1~2장 공법을 연공하곤 했습니다. 그중 한 남학생은 중국공산당(중공)의 박해가 시작된 이후에도 수련을 견지하다가 2000년 관할 지역 중공 경찰에게 박해받아 2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끊임없이 나타난 병 치료와 건강 증진의 기적
소련 유학 경험이 있는 한 노교수님은 원래 심장병이 매우 심해 여러 번 사경을 헤맸습니다. 연공을 시작한 이후로는 다시는 발작하지 않았습니다. 연공 이후 그의 천목(天目)이 열렸으며 자신의 생생한 체험으로 무신론과 진화론 관념을 타파했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법을 널리 알리고 실증했으며 나중에는 우리 시의 보도소장을 맡았습니다.
한 선생님의 시어머니는 한쪽 다리의 무릎 관절이 뻣뻣하게 굳어 37년 동안 다리를 끌며 걸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연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릎 관절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74세였던 이 어르신은 원래 음력 달력의 날짜나 요일 정도만 겨우 읽을 줄 알았습니다. 연공 이후 꿈에서 ‘전법륜(轉法輪)’의 글자가 하나씩 머릿속으로 날아들어 오는 것을 보았고, 잠에서 깨자 글을 읽을 수 있게 돼 ‘전법륜’을 통독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일은 한동안 미담으로 전해졌습니다.
학생 관련 업무를 하던 한 여직원은 수년간 B형 간염을 앓아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냈습니다. 남편은 갑자기 뇌출혈로 마비됐고 딸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일과 생활의 압박으로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다행히 대법 수련을 만나 고질병이 나았고 마음가짐도 좋아져 시련에 비교적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됐습니다.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자 남편은 감격하며 다음 생에도 아내를 찾겠다고 말했습니다. 직장에서도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퇴직을 앞두고 평직원에서 부처장으로 바로 승진했고, 퇴직 이후에는 정처장 대우를 받았습니다. 딸과 사위의 결혼과 직장 생활도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사존께서 주신 것이라며 깊이 감사했습니다.
30대 무렵의 한 남교사는 심각한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아 양방과 한방 치료를 10여 년간 받아도 낫지 않았고, 특히 무릎이 추위를 몹시 탔습니다. 한여름에도 도서관에 갈 때면 무릎을 보온하기 위해 늘 솜 방석을 챙겼습니다. 연공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나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40대였던 학교 교무처장은 위장이 찬 기운에 무척 예민해 상온에 둔 과일조차 먹지 못했고 먹기만 하면 위경련이 일어났습니다. 연공 이후 위장병이 자신도 모르게 나아 과일은 물론이고 아이스크림까지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는 비로소 살맛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40대 초반의 한 여교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계절성 알레르기로 내장까지 손상된 상태였습니다. 전문의는 다시 발작하면 질식사할 수 있어 병원에 올 기회조차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연공한 지 5개월째 되던 달이 바로 해마다 병이 발작하던 시기였지만 아무 일도 없었고, 오늘날까지도 한 번도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 여교사는 산아제한 정책으로 강제 낙태를 당해 자궁내막염과 골반염까지 앓고 있었는데, 병이 도지면 고열이 내리지 않고 생리가 몇 달씩 멈추지 않아 허리가 아파 10분도 앉아 있지 못했습니다. 강의 노트도 엎드려서 써야 했고 머리를 감을 때도 두 번이나 쉬어야 했으며 얼굴에는 기미가 가득했습니다. 연공 이후 온몸의 병이 다 나았고 피부가 놀라울 정도로 희고 고와졌습니다. 피부 관리실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한 중년 여교사는 손에 찬물만 닿아도 퉁퉁 부어올라 옷 단추를 채우거나 바지를 끌어 올리지도 못했습니다. 손끝을 아래로 향하기만 해도 수만 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이 아파 두 손을 가슴 앞에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너무 가난해 세탁기를 살 돈도 없었고 전기나 연탄으로 물을 끓여 쓰기도 아까웠으며, 고무장갑을 껴도 별 소용이 없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파룬궁을 연공한 지 한 달도 안 돼 다 나았고 찬물도 쓸 수 있게 돼 장난꾸러기 아들의 옷을 제때 빨아줄 수 있게 됐습니다.
한 중년 여교사는 집안 내력으로 유전성 간 질환이 있어 얼굴이 누렇고 몹시 말랐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이모, 그리고 다섯 자매가 모두 40~50대에 간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오직 파룬궁을 수련하는 그녀만 남았습니다. 이 여교사는 80세 무렵까지 살았습니다. 이는 훗날의 이야기입니다.
그 밖에도 축농증, 구내염, 허리디스크, 좌골신경통, 불면증, 치질, 변비, 생리통 등을 앓던 수련생들이 연공 이후 약을 쓰지 않고도 나았습니다. 연공 이후 돋보기를 벗은 사람도 있었고 담배, 술, 도박을 끊은 사람도 있었는데 사례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행동해 모두에게 공인받은 좋은 사람인 연공인
1998년 대홍수 때 학교에서 모금 활동을 벌였습니다. 본관 전광판에는 기부자의 이름과 금액이 스크롤되어 나왔습니다. 앞장서서 기부하고 비교적 큰 금액을 낸 사람들은 대부분 연공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30위안, 50위안을 기부할 때 연공인들은 100위안, 200위안씩 냈습니다. 지금 보면 1~2백 위안이 대수롭지 않겠지만 그 당시에는 사람들의 수입이 아주 적었고 모아둔 돈도 별로 없었습니다.
한 여교사는 10년 연속 우수 강의상을 받았습니다. 수련 이후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양보하기 위해 수상을 사양했습니다.
인품이 훌륭하고 업무상 아무런 실수가 없던 한 과장이 있었는데 직속 간부가 아무런 상의도 없이 그의 과장 자리를 자신의 측근에게 주었습니다. 그가 예전 같았으면 호락호락 넘어갈 성격이 아니었기에 구경거리가 났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웃어넘겼습니다. 그는 대법 수련 속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심성을 끌어올린 것입니다.
한 여교사는 임금 인상 대상자로 네 번이나 추천받았지만 번번이 누락됐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세네 번씩이나 이렇게 사람을 무시할 수 있냐며 따져 묻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곧 자신이 연공인임을 깨닫고 잃음과 얻음에 대한 사존의 법리를 떠올렸으며 ‘진선인’에 부합하는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 참았습니다. 이 교사도 대법을 얻기 전에는 남에게 져주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저명한 교수인 소속 대학 학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파룬궁을 잘 모르지만 파룬궁이 그 선생을 저렇게 변화시켰다면 정말 대단한 것이고 좋은 것이오.”
정의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
‘광명일보(光明日報)’ 사건이 발생한 이후, 우리 학교 대법제자들은 국가 관련 기관과 주요 언론사에 연이어 서신을 보내 사실을 해명하고 대법을 수호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학교의 치안 담당 간부와 제때 소통해 대법이 사람들에게 ‘진선인’을 가르치고 수련자의 심신을 건강하게 한다는 사실과, 파룬궁의 조직 형태와 활동이 합법적이라는 상황을 명확히 알렸습니다. ‘7·20’ 전까지 우리는 모두 정상적인 수련 환경을 누렸습니다.
우리 학교 연공인 중에는 나중에 ‘4·25’ 평화 청원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고, ‘7·20’ 이후 성(省) 정부에 청원하러 간 사람도 있었으며, 사건 당일이나 그 이후 베이징으로 올라가 상황을 알리고 사존과 대법의 결백함을 수호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존의 은혜를 입은 제자들은 감사할 줄 알고 정의와 양심이 있었습니다.
제가 속한 단과대학의 한 여교사는 변호사인 남편, 80대 시어머니, 일곱 살 난 막내아들과 함께 천안문(天安門)에 가서 법을 실증했습니다. 부부는 각각 베이징과 현지 노동수용소에 갇혀 박해받았고 집에는 노인과 어린아이만 남게 됐습니다. 우리 학장님은 분노하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인권 재앙이자 인륜의 비극이다. 장쩌민은 반드시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청급 시장인 남동생과 지위와 영향력이 있는 제자, 친구 등 인맥을 총동원해 이 여교사를 반년 일찍 노동수용소에서 빼냈고 밀린 월급을 되찾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 학장님은 큰 덕을 갖춘 분이었습니다.
2000년 정월 초여드렛날, 우리 학교 총장님은 수련을 견지하는 사람들을 소회의실로 불렀습니다. 총장님은 입을 열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산당은 반성해야 합니다. 파룬궁이 전해진 지 몇 년이나 됐다고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아 아무리 억눌러도 눌리지 않는단 말입니까.” 또 말했습니다. “지금 당과 군중, 간부와 대중의 관계는 더 이상 물과 기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물과 불처럼 양립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어서 말했습니다. “파룬궁은 과거에 국가에서 권장했던 것이니 학교에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 스스로 선을 잘 지켜 법을 어기거나 자신과 학교에 문제를 일으키지 마십시오.” 총장님은 우리에게 이런저런 각서를 쓰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전교 교원 직급 심사 대회에서 총장님은 말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파룬궁을 연공하는 사람들은 모두 교사의 모범이자 수업의 핵심 인재들이니 직급 심사에 불이익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해 우리 학교에서 승진 대상이었던 연공인은 한 명도 빠짐없이 승진했습니다.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한 이 총장님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퇴임 이후 어느 대학의 제2학원 원장으로 초빙됐는데 연봉이 백만 위안이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심장 우회 수술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살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 학교에서 그와 비슷한 시기에 심장 우회 수술을 받은 5~6명은 진작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공 악당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 속에서 우리 학교의 어떤 연공인들은 스승과 법을 굳게 믿고 명예와 이익, 생사를 내려놓으며 시련을 이겨냈고 평온하게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물러선 사람들도 있습니다. 악당의 박해는 수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길을 가로막았으니 그 죄악이 하늘에 닿을 만큼 악랄하여 형신전멸(形神全滅)로도 그 죄를 갚기 어렵습니다.
파룬따파는 말세에 사람을 구하는 불가의 고덕대법(高德大法)입니다. ‘진선인’에 동의하는 것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여러분 모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진선인’을 믿고 좋은 사람이 되면 마음이 편안하고 밥맛도 좋으며 잠도 잘 자고 몸도 건강해지니 얼마나 좋습니까! 당신이 ‘진선인’을 믿으면 신의 보살핌과 대법의 제도를 받아 영원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얻게 되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부디 이치를 깨닫고 자신을 위해 책임 있는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허스(合十).
원문발표: 2026년 8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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