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 당시 우리는 창안가에 있었다

글/ 허베이성 대법제자

[명혜망] 또다시 이 신성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해 ‘4·25’를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 특별히 사부님과 수련생들께 그날의 경험을 보고드립니다.

1999년 4월 24일 토요일,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한 수련생이 베이징에 가서 법을 수호하고 불법적으로 납치된 톈진 수련생을 구출해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가고 싶다면 내일 수련생들이 빌린 차가 어디에 정차하고 몇 시에 출발하는지도 말해주었습니다. 우리집은 연공장이었기에 당일 바로 모든 수련생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 3명의 수련생이 꼭 가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를 통해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알게 돼 입문한 수련생들에게도 즉시 알렸는데 여기에는 양가 부모님과 형제자매가 포함됐습니다. 그때는 농촌에 전화가 아직 보급되지 않았을 때라 어떤 수련생 집은 자전거를 타고 직접 찾아가 알렸습니다.

저녁에 우리는 간식과 물통 등 외출 용품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14살 딸아이가 평소 학교에 갈 때 챙기는 작은 물통을 우리 가방에 넣었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라며 “너도 가려고?”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딸을 데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6·4’의 목격자로서 우리는 그 피비린내 나던 새벽의 비인도적인 참상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겨우 10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들이 또다시 민중을 학살하지 않을까 우려됐습니다. 우리는 대법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지만 아이는 아직 인생을 겪어보지 않았고 법에 대한 인식도 얼마나 깊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만약 단순히 구경하러 따라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수련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지 마라, 그곳에는 기관총이 놓여 있고 탱크가 매복해 있을지도 몰라. 아빠 엄마가 돌아오지 못하면 너는 고모나 이모에게 가서 살렴”이라고 만류했습니다. 딸은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무섭지 않아요. 부모님도 제가 법을 수호하는 걸 막을 권리가 없어요, 저도 대법의 일원이에요!”

이야기가 이쯤 되자 우리도 아이를 데려가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의 바지 속에 200위안을 꿰매 넣어주며 일러두었습니다. “만약 길을 잃고 흩어지게 되면 이 돈을 써서 집으로 돌아오너라.”

파룬을 보다

베이징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시어머니를 뵈었습니다. 어머니는 손에 작은 천 가방을 들고 계셨는데 그것은 농촌 노부인들의 기본 차림이었습니다. 70세 가까이 사시면서 가장 멀리 가보신 곳이 현 소재지였던 분입니다. 어머니는 같은 마을의 다른 고령 수련생과 함께 자전거를 탈 줄 몰라 현 소재지까지 걸어서 오셨던 것입니다.

오전 8시경 우리는 창안가(長安街)에서 차를 내렸습니다. 뜻밖에도 경찰이 우리를 신화문(新華門)의 붉은 담장 밖으로 안내했습니다.[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는 사악한 배후 조종자 뤄간(羅幹)이 쳐놓은 그물망이었습니다.] 속속 도착한 대법제자들은 매우 질서 있게 줄을 섰습니다. 인도 위에서 보도블록 경계선 안쪽으로 규범에 맞게 섰는데 인파는 대략 3~4줄 정도였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부모님을 뵈었는데 부모님은 본인들 연공장의 수련생 몇 명과 함께 서 계셨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크게 소리 내어 떠들지 않았습니다.(목청껏 말하는 것은 우리 농촌 사람 대부분의 생활 습관입니다.) 모두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교류했습니다. 낯선 수련생이 일러주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맨 앞에 서고 고령 수련생들은 힘들면 뒤에서 앉으세요, 모두 허리에 손을 얹거나 가슴에 팔짱을 끼지 마세요(대항한다는 의미가 있음).” 우리는 자발적으로 이런 주의사항을 주변에 전파했습니다.

우리는 신화문 동쪽으로 약 30~40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습니다(‘4·25’ 자료 화면에 이 지점이 나옵니다). 맞은편 도로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약 3~5걸음 간격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입구에서 초병이 서 있는 것처럼 미동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왔다 갔다 하거나 담배를 피우고 서로 귓속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군인은 우리 앞으로 다가와 우리가 손에 든 물건을 살펴보기도 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반면 전국 각지에서 온 남녀노소의 평범한 서민들인 우리 쪽은 조용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서 있었으며 초조해하거나 조급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략 9시나 10시경 누군가 “나무 끝을 보세요, 파룬(法輪)이에요, 큰 파룬이에요!”라고 외쳤습니다. 우리 주변의 수련생들이 모두 하늘을 바라보았고 다들 보았습니다. 심지어 맞은편 군인 중에도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침 8시부터 해 질 무렵까지 분명히 중간에 음식도 먹고 화장실도 가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서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간식 좀 드세요”, “달걀 좀 드세요”라며 서로 건넸습니다. 화장실은 베이징 수련생들이 안내해 주었습니다. 당시 베이징 골목은 여전히 ‘재래식 화장실’이었고 물을 내릴 수 있다 해도 매우 허름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으니 얼마나 지저분할지는 짐작할 만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갔을 때 본 광경은 의외로 깨끗했습니다. 변기 주변에는 석회가 뿌려져 있었고 안에도 오물이 별로 쌓이지 않아 방금 청소한 것 같았습니다. 알고 보니 베이징 수련생들이 화장실 밖에서 대기하며 몇 분에 한 번씩 청소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특별히 감동하게 됩니다. 우리가 도로에서 10시간을 서 있는 동안 그들은 화장실 밖에서 10시간을 서 있었던 것입니다.

대략 오후 4~5시경 신화문 쪽이 떠들썩해지더니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인사하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주 총리님!” 또한 주룽지 총리 곁의 직원이 “여기 다 모여 있으면 안 되니 대표를 몇 명 파견해 안에서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누군가 손을 높이 들며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구체적으로 몇 명이 갔는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군중이 잠시 술렁였으나 곧 다시 평온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격려했습니다. “대표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절대 흩어지지 맙시다.”

우리 보도소 소장님은 60대인 베이징 토박이셨는데 대열 사이를 비집고 오셔서 한 명씩 통지해 주셨습니다. “조금 후에 모두에게 통지할 텐데 해산할 때 창안가를 따라 서쪽으로 가세요, 우리의 집결지는 ○○ 버스터미널입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켜졌습니다. 대략 7시경 인파 속에서 수련생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크지는 않았지만 주변에서 모두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들 서로 전달해 주세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답니다, 톈진에서 사람들을 석방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세요. 바닥의 쓰레기를 주워 가시고요!”

그러자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다들 일제히 허리를 굽혀 자기 발밑의 종잇조각과 음식 찌꺼기를 찾았고, 심지어 맞은편 군인들이 버린 담배꽁초까지 주워 자기 손에 쥐었습니다. 그러고는 좌우로 즉시 떠났습니다.

우리 부부는 딸아이를 이끌고 양가 어르신들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우리 가족 6명, 즉 제 부모님, 시어머니, 우리 부부와 딸이 서로 바짝 붙어서 서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습니다. 70세 가까운 세 어르신이 우리의 발걸음을 바짝 뒤따르셨고 어린 딸도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신화문에서 ○○ 버스터미널까지 약 8km 되는 거리를 우리 가족을 포함해 길가의 수련생들 모두,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도중에 한 번도 쉬지 않았습니다. 약 1시간 반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다들 전혀 기진맥진한 느낌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습니다.

버스터미널에서 소장님과 조율 능력이 있는 다른 수련생 몇 명이 터미널 관계자와 차량 대여 건을 상의했습니다. 올 때 돌아갈 시간을 몰라 돌아갈 차를 예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휴대폰이 있는 수련생 몇 명이 목이 쉬도록 전화를 걸어 마침내 터미널에서 대형 버스 5대를 배정해 주었습니다. 베이징 친척 집으로 간 몇 명을 제외하고 우리 현의 모든 수련생이 돌아가는 차에 올랐습니다. 소장님 부부는 베이징에 거처가 있었지만 그분들도 모두와 함께 돌아갔습니다.

차가 막 출발하자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천둥 번개가 우리 버스를 동반해 2시간 만에 현 소재지에 도착했습니다. 소장님은 현 소재지 수련생들에게 농촌 수련생들을 집으로 데려가 하룻밤 재워주라고 당부했습니다. 이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집에 도착해 방문을 막 열자마자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노동절(5월 1일) 전에 이렇게 큰비가 내린 것은 수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중난하이(中南海) 밖에 미처 줍지 못한 작은 쓰레기들이 이 큰비에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고 합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당시 많은 지역의 공안들이 상급 기관의 지시에 따라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간 대법 수련생들을 데리러 갔다고 합니다. 우리 현에서도 차를 몇 대 보냈으나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고, 이 일로 우리 현 공안이 상급 기관의 표창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당일 여러 사정으로 청원에 참여하지 못한 수련생들이 그날 밤 차를 여러 대 모아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오는 우리 차량 행렬과 마주쳤습니다. 이 버스터미널의 이름을 숨긴 이유는 터미널 관계자가 우리에게 감동해 요금을 받지 않고 무료로 보내주었기 때문입니다.

‘4·25’는 일요일이었습니다.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간 대법 수련생 중 학생은 학교 가는 데 지장이 없었고 공직자도 출근하는 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4·25’, 이 위대한 날이 지나간 지 27년이 됐지만 지금까지 회상하면 여전히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이 생에 위대한 순간을 겪게 해주심에 감사드리고 제자들을 위해 세심하게 안배하고 정성껏 보호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다들 수련의 길이 고생스럽다고 하지만 수련 30년에 이 제자는 오직 행복과 끝없는 감사만을 느낍니다!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사부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허스(合十)

 

원문발표: 2026년 4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4/5/508461.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4/5/50846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