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의 ‘외국 증오’ 정서와 관련된 기본 사실들

글/ 해외 대법제자

[명혜망] 각국 관광지에서 진상을 알리는 수련자들이 보편적으로 접하게 되는 중국인들의 마음속 매듭이 바로 ‘외국 증오’다.

이를 위해 중국과 다른 나라들 사이의 역사적 연원 등 화제에 대해 몇 가지를 정리했으니 진상을 알릴 때 참고하시기 바란다.

먼저, 각국 수련자들이 거주국의 상황, 중국과 거주국의 관계에 대해 기본적으로 이해할 것을 건의한다. 중국공산당(중공)의 의도적인 선동으로 인해 일부 사람들(특히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은 일반인)은 중·일, 중·미 간의 역사적 연원과 갈등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만약 우리가 충분히 알지 못한다면 그들의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주기 어려울 수 있다.

또한, 현재 해외로 이주하거나 여행할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부와 지식 수준이 높은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진상을 전하는 과정에서 겸손하고 평등한 태도로 소통할 것을 권한다. 마치 진리를 장악한 듯한 우월한 어조로 접근하는 것은 상대방의 부정적 감정을 자극할 수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

셋째, 거주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이나 역사적 잔존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를 회피할 경우 자칫 사람들은 우리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오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 한국,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에 대해 수련자들이 그 역사적 연원과 원인을 이해하면 중생과 소통하고 논의하는 데 도움이 된다.

1. 구미(유럽·미국) 국가를 증오하는 것에 관하여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인민과 모두 우호적이었다. 그들은 중국 인민을 적으로 삼지 않았고, 미국 의원들조차 “반드시 중공과 중국 인민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중국 인민과 어떠한 분쟁도 없으며, 중국 인민은 중공의 착취와 탄압을 받는 주요 피해자입니다”라고 말했다.

중공 공식 뉴스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럽의회의 이른바 ‘반중[反華]’은 주로 중국의 인권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권은 중국 인민 자신의 인권을 말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노동자 복지, 불법 아동 노동 고용, 여성 보호, 주 5일 근무제, 언론의 자유(부패와 사회적 불공정에 반대하는 데 유리함) 등이다. 구미는 중국이 자유경쟁의 시장경제 체제를 갖추기를 희망하는데, 시장경제의 본질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개방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과 중국 인민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중공이 유럽과 미국에 반감을 갖는 본질적인 이유는 그것이 중공이 국내에서 누리는 특권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2. 일본을 증오하는 정서에 관하여

중·일 관계는 매우 민감하며, 관련된 의제도 많다.

1) 일본군의 중국 침략 문제에 관하여

상대에게 우리 역시 일본의 침략을 단호히 규탄하며 당시 인민이 당한 학살에 대해 깊은 동정을 표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

2) 전후 일본은 평화주의의 길을 걸었다

전후의 일본은 평화주의 노선을 걷고 있으며, 이는 전쟁시기의 일본과 다르다는 점을 상대방에게 말해줄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의 모든 번영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주의 노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후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이며, 국민은 자유와 인권을 갖고 있고, 군대가 지배하는 군국주의 국가가 아니다. 전쟁시기의 일본은 군인이 통치하는 군국주의 국가였고 국민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많은 일본인들에게 참전은 그들 자신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전쟁 중에 일본 천황은 신이었지만 전후에 일본 천황은 이미 실권 없는 국가원수이며, 게다가 줄곧 평화주의 수호자로서 계속 전쟁을 반성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해 왔다.

3) 중국인이 ‘일본은 중국 침략 후 결코 사과한 적이 없다’고 오해하는 문제에 관하여

중국 내 언론은 “일본 교과서는 침략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전한다. 일본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있는 나라로서 다양한 목소리가 출판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극우 세력이 편찬한 교과서는 채택률이 매우 낮으며, 일본에서 전체적으로 채택되는 교과서는 모두 침략 책임을 인정하는 교과서다.

전후 일본은 중국에 여러 차례 사과했다. 당시 중국이 일본의 전쟁 배상을 포기하자 일본은 미안한 마음에 중국에 ODA(정부 개발 원조)를 제공했고, 중국에 장기 무이자 대출을 실시했다. 베이징 수도공항, 광저우 바이윈공항, 난쿤철도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한 민생 관련 공정을 도왔으며, 각 지방 도시에 세워진 방역소와 공공 위생 체계의 완비도 일본의 도움으로 건설된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일본 기업들은 정부의 호소에 가장 먼저 응답해 중국에 와서 투자하고 공장을 세우고 기업을 운영했다. 많은 중·일 합작 브랜드가 탄생했으며, 이는 중국 경제 발전을 크게 추진했고 중국에 많은 일자리를 제공했으며 중국 시장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야스쿠니 신사는 1869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여러 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과 군무원을 기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신사에는 약 246만 명의 전사자 영령이 모셔져 있으며, 그중에는 러일전쟁, 제2차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일본 군관들도 포함된다.

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1945년 5월)까지 일본 군부가 전담하여 관리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군은 일본에 전후 헌법의 정교(政敎) 분리 원칙을 따르도록 요구했고, 신도(神道)를 비정치화하여 일반 종교로 분류하도록 했다. 이에 야스쿠니 신사는 민영 종교법인으로 개편됐다.

이 신사는 1978년에 2차 대전 중 14명 일본 A급 전범의 위패를 모신 이후 큰 논란이 되었고, 그로 인해 이후 천황은 이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일본 국내에서도 공직자의 참배 가능 여부에 대해 다양한 생각과 목소리가 있으며 미국은 이런 행위를 권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과거 일본 관리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도 중공은 항의하지 않았고, 최근 몇 년 들어 국내의 증오 정서를 자극하고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이 문제를 선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고인을 추모하는 것은 일본의 문화적 전통으로, 대만과 한국에서의 예를 들 수 있다.

(1) 아베는 2013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국군 항일 열사를 모신 충열사에 참배했다.

(2) 기시다 후미오가 총리 재임 시 한국을 방문해 한국 독립운동 열사를 안장한 국립현충원을 참배했다.

일본이 강제로 중국 노동자를 징용하고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문제에 대해 우리도 똑같이 규탄하며 피해자에게 동정을 표해야 한다. 한국의 예를 들 수 있는데, 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로 합의를 이루었고 일본의 사과와 830만 달러 배상을 받았다. 이 돈은 재단을 설립해 생존 피해자들을 돕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중국은 일본과 합의하지 않았다. 원인은 중공이 진심으로 피해자를 위해 정의와 배상을 쟁취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의제를 이용해 증오를 선동하려 하기 때문이다.

난징대학살에 관하여 일본은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국내 관점과의 차이는 사망자 30만 명이라는 숫자의 정확성에 대해 현재 논쟁이 있다는 점이다.

4) 중생들이 묻는 내용, 일본 사회의 보수화와 우경화는 군국주의의 부활인가?

상대방에게 불가능하다고 명확히 말해줄 수 있다.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 교육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애니메이션 ‘도라에몽’에서 일본 패배는 노진구가 환호한 사건이며, 중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사례를 알고 있다.

우경화와 보수는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자유시장을 더 중시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일부 극우 단체가 침략 전쟁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지만 이는 사회의 주류가 아니다. 또 중국인들의 반일 의식이 적어질수록 이러한 언행이 자랄 토양도 줄어든다.

중공은 늘 전쟁을 이용해 증오를 선동하고 민중의 분노를 딴 데로 돌려 국내의 반일 정서를 갈수록 고조시키는데, 이런 무책임한 수법은 중일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일반적으로 자유민주 사회에서 정부가 이런 문제를 처리할 때는 민중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며, 민선 정부는 일본과의 호혜 관계를 유지하고 중국 내 일본 기업의 경영 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국의 경제와 고용 안정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국은 아주 좋은 예인데 일본 사회는 한국에 대한 수용도가 비교적 높다. 비록 한국과 일본도 영토 분쟁이 있고 한국인도 강한 민족 감정을 갖고 있지만 한국은 민주 국가이기에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당선 후 모두 한일 관계 안정을 매우 중시해왔다. 중공의 정책은 단지 중공 특권 계층의 이익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민선 정부는 유권자들에게 책임을 진다.

오늘날 중국은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일본 군국주의와 매우 닮았다. 민족주의가 성행하고, 관료사회의 정치적 부패, 재벌의 인민 자원 수탈과 독점, 군인 세력이 확대되어 국가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

3. 한국에 대한 편견에 관하여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은 두 차례 서울을 점령한 적이 있었다(이후 서울은 미국 측에 의해 다시 탈환됨). 이 때문에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을 가볍게 보는 태도를 갖고 있다.

한국은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다. 중국인의 반미 감정 역시 한국에 전가될 수 있다. 또한 한국전쟁은 오늘날 중국 공식 선전에서 반미·반서방의 상징이 됐고, 미국을 이길 수 있다는 자긍심의 원천이 됐다.

1) 상대방이 한국전쟁(즉 항미원조) 화제를 언급할 경우

당시 항미원조에 참여한 지원군은 많은 중국인들에게 민족 영웅이므로 이 감정을 직접 부정하지 않는 것이 좋다. 먼저 한국전쟁에서 그렇게 많은 지원군 군인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 애도와 안타까움을 표할 수 있다. 그다음 이야기 흐름을, 많은 지원군은 실제로 항일전쟁에 참여했던 국민당 군대였으며, 항일의 주력은 사실 국민당이었다는 점으로 전환할 수 있다.

한국전쟁 문제를 이야기할 때 듣는 사람과 이 전쟁이 도대체 맞는지 틀린지 논쟁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사람들에게 전쟁의 결과는 3대 세습의 김씨 깡패 정권을 만들어 냈고, 북한 사람을 극심한 빈곤 속에 빠뜨렸다는 점을 알려주면 된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38선 남북 인민 삶의 격차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심지어 오늘날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한국의 대중문화다.

많은 참전 노병들이 중공 공식 선전에서는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라 칭송받았지만, 제대 후에는 정부가 그들에게 마땅히 제공해야 할 생활 보장을 거부해 청원에 나서 권익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고, 지역 정부의 ‘안정 유지’ 대상이 되어 탄압을 받았다.

항미원조의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화동사범대학 선즈화(沈志華) 교수의 영상과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소련 스탈린과 북한 김일성이 중국 몰래 공모한 침략 행동으로, 중국은 피동적으로 전쟁에 끌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게다가 북한 김일성은 중공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난 뒤 당내 연안파(延安派, 친중공파)를 숙청하기도 했다.

스탈린과 김일성이 일으킨 이 전쟁에서 중국의 희생은 매우 컸으며, 최소 100만 명의 중국 군인이 사상했다.

2) 한국은 왜 한·미 동맹을 맺었는가?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35년 동안 받으며 철저한 망국을 경험했다. 항전 후 다시 독립했지만 곧바로 남북 분단이 이어졌다. 이는 한국의 생존 불안을 크게 만들었고, 민족적 자존심도 매우 강해졌다. 한국이 한·미 동맹을 갖게 된 이유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인들이 늘 북한의 군사적 위협 아래 놓였기 때문이다. 북한은 미사일과 대포로 한국을 위협했고, 여기에 망국과 식민 지배의 역사까지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미국의 보호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3) 한국의 반중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국인들이 중국에 반감을 품는 근본적 이유는 중공이 북한이라는 깡패 독재 정권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이 정권은 인민을 굶주리게 만들면서 통치자들은 교만하고 사치스럽고 음탕했다. 중공은 중국 인민의 돈으로 북한에 돈을 펑펑 쓰며, 이렇게 김씨 정권을 60년 동안 부양해왔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가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중국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중·한 민간 감정이 좋지 않은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공산주의가 한반도의 분단을 만들었고, 북한 인민의 기근을 만들었으며, 무수한 가정의 생이별을 만들어낸 것이다.

4) 이른바 ‘한국이 중국 전통 문화를 빼앗아 간다’는 주장에 관하여

먼저 ‘공자가 한국인’이라는 등의 말은 대부분 인터넷이 막 등장하던 시절 눈길을 끌기 위해 만들어낸 가짜 뉴스다.

다음으로, 국내 선전에서 “한국이 단오절을 자기네 것이라고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한국 강릉단오제는 중국 전통의 단오절과 연원이 있기는 하나 같은 것이 아니며, 이미 한국 고유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마치 기독교가 2000년에 걸쳐 발전하여 서기 4세기 프랑스에서 천주교가 형성되었고,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같은 고딕 양식 건축이 나타났으며, 러시아의 정교회는 같은 과정에서 그보다 먼저 그리스에서 형성된 기독교 분파임에도 교회 건축은 둥근 돔을 특징으로 발전했고, 러시아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정교회 국가가 된 것과 같다.

문화는 역사라는 긴 흐름 속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발전한다. 기원이 중국이라고 해서 반드시 중국의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원문발표: 2025년 11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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