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법회] 수련생 대가족이 함께 신의 길을 걷다

글/ 네이멍구 대법제자

[명혜망]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장엄한 제22회 명혜망 중국법회를 맞아 제 한동안의 수련 과정과 체험을 써내 사부님께 보고 드리고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려 합니다.

수련생에게 거처할 환경을 제공하다

우리집은 수련하는 가정으로 저와 아내, 아들 모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합니다. 갈 곳을 잃었거나 몸에 병업(病業) 상태가 나타난 수련생 등이 우리집에 와서 임시로 머물렀고, 우리집은 수련생들에게 머물 곳과 수련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법공부하고 교류하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서로 도우면서 확고하게 정법 수련의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 지역 몇몇 수련생이 박해를 당했는데, 불법 판결문에 A 수련생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 소식을 듣고 우리집에 와서 몇 달간 간헐적으로 머물렀습니다. 이후 그녀는 또 B 수련생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중공 바이러스(우한 폐렴) 유행 기간에 A의 몸에 심각한 이상 상태가 나타나 기침과 발열 등 증상이 매우 좋지 않았고, 그녀는 다시 우리집에 왔습니다. 우리는 함께 법공부했고, 1개월여 만에 A의 몸은 정상으로 회복됐습니다.

D 수련생은 몸이 좋지 않아 입원했다가 병원에서 도망쳐 우리집에 왔습니다. 당시 친척이 우리집에 있었는데 D가 누구인지 몰랐고 그녀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감히 방으로 들이지 못했습니다. 저와 아내가 퇴근하고 돌아와 보니 D가 우리집 문 앞에 앉아 있었는데, 너무 말라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얼른 그녀를 집 안으로 들였습니다. 당시 저와 아내는 근무 기간이라 직장에서 묵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수련생을 우리가 머무는 곳으로 데려와 밤낮으로 돌보며 물을 떠다 주고, 발을 씻기고, 얼굴을 닦아주며, 따로 죽을 끓여줬습니다.

D는 병원에서 도망쳐 나왔기 때문에 병원에서 환자를 찾지 못하자 그녀의 가족이 경찰에 신고해 사람들이 사방에서 D를 찾았습니다. 나중에 한 수련생이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그분 댁에 있어요? 다들 찾고 난리예요. 경찰력까지 동원해서 찾고 있어요.” 아내는 이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만약 경찰이 오면 제가 여기서 처리할게요.” 새벽 1시가 됐지만 경찰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후 D의 친척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지나갔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저와 아내는 아주 먼 시골로 C 수련생을 만나러 갔습니다. 저는 그와 함께 감옥에서 박해를 받은 적이 있어, 감옥에서 알게 된 사이였습니다. 우리가 방에 들어서자 C가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뇌졸중 증상을 보이며 땅에 내려오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작년부터 C가 땅에 내려오지 못했으며, 설 전날에는 거의 죽을 뻔했다고 했습니다. C 자신도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틀렸어요. 팔을 들 수도 없고 다리에 설 수도 없으며 연공도 할 수 없어요.”

집에 돌아와 저는 아내와 아들에게 이 상황을 이야기했고, 아들이 말했습니다. “그분을 우리집으로 모셔오면 되잖아요.” 그날은 큰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아들은 두말없이 차를 몰고 가서 C를 우리집으로 모셔왔습니다.

C는 몸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연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서 있지 못하고 팔을 들지 못해 아침에 연공하기를 꺼렸습니다. C가 연공할 수 있도록 아침에 연공할 때 저는 그의 뒤에 서서 그가 팔을 들 수 있게 도와주며 끊임없이 격려했습니다. “버텨요, 버텨요.” C는 정말로 버텨냈습니다. 연공을 마친 후 우리는 C와 함께 끊임없이 법공부하고, 발정념하고, 연공했습니다. 7일 후 C의 몸은 완전히 회복됐습니다. 오기 전에는 제 아들이 차로 C를 우리집에 모셔왔는데, 7일 후 그는 놀랍게도 제 아들의 자전거를 타고 15km 떨어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아내는 매우 놀라고 감동해 전화로 말했습니다. “집에 도착했어요. 이렇게 빨리 회복되다니! 정말 많이 변했어요! 집에서는 땅에도 내려오지 못했는데, 이렇게 먼 길을 자전거 타고 집에 오다니요. 이건 정말 기적이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련생들이 함께 모여 대가족을 이뤘지만 각자의 성격이 달라 심성 마찰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제때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로잡고 안으로 찾으며 법 속에서 승화했습니다. 외지에서 온 E 수련생이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이 박해를 받아 그녀는 갈 곳을 잃고 우리집에 와서 보름 넘게 머물렀습니다. E는 시골 사람이라 우리와 생활 습관이 매우 달랐고, 때로 저는 그녀의 일부 행동이 보기 싫어 말에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저는 즉시 안으로 찾았습니다. ‘수련생이 갈 곳 없이 떠도는 게 얼마나 힘든데,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내 말이 수련생에게 상처를 줬구나.’ 저는 그녀의 생활 방식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참아야 했습니다. 이후 저는 E의 일부 행동들을 모두 포용할 수 있게 됐고, 그녀가 우리집에서도 낯설어하지 않고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도록 했습니다.

저와 아내는 이전에 중공 악당에게 중형을 부당하게 선고받은 적이 있으며, 현지에서 나름 알려진 큰 농장 집안에서 박해로 인해 집안이 빈털터리가 됐습니다. 박해 때문에 당시 우리집에는 빚도 많았는데 저와 아내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모두 빚을 갚는 데 썼습니다. 우리가 생활이 가장 어려웠던 몇 년간에도 병업 중인 수련생이나 갈 곳 없는 수련생들이 끊임없이 우리집에 머물렀습니다. 중공 악당이 우리 수련생들을 박해하니 우리는 수련생의 손을 굳게 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수련생들의 마음은 모두 하나가 돼 서로 도우며 정법 수련의 길을 걸었습니다.

때때로 우리집에 물건 살 돈이 떨어졌을 때 우리는 수련생이 부담을 느끼거나 이 상황을 알고 떠날까 봐 걱정했습니다. 우리는 수련생들이 이미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저와 아내는 생활의 어려움을 참으면서 웃는 얼굴로 수련생을 대하며 우리가 궁핍하게 산다는 것을 수련생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고, 꼭 사야 할 생필품은 때로 가게에서 외상으로 사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매우 어려웠음에도 오가는 수련생들의 먹고 마시는 것과 일상 비용을 보장했습니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 저와 아내는 겨울에 온수를 쓰지 않았지만, 수련생에게는 몰래 따뜻한 물을 데워주며 수련생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습니다. 수련생이 우리집 생활 형편을 물을 때마다 우리는 생활에 문제없다고 말하며 수련생의 걱정을 덜어줘, 수련생들이 우리집에서 안심하고 어려운 과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생활은 모든 것이 좋아졌고 수련 환경도 갈수록 좋아졌으며, 우리에게는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하는 데 전력을 다할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생겼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길

우리의 생활은 한때 매우 어려웠지만 사람을 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아내는 자주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 진상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 현수막을 걸었으며, 사람을 구하는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었고, 사람을 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어느 해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저와 아내는 산길을 따라 근처 마을에 진상 자료를 배포하고 현수막을 걸러 갔습니다. 너무 멀리 갔기 때문에 돌아올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고, 길에는 큰 눈이 내려 길을 완전히 덮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망설이고 있을 때, 저는 눈빛에 비친 땅 위의 발자국 몇 개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이 발자국을 따라 걸었고 끝까지 갔을 때 이미 집 문 앞에 도착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날 저와 아내는 오토바이를 타고 시골에 진상 자료를 배포하러 갔는데, 길을 가면서 길가의 마을에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길은 갈수록 멀어져 어디에 이르렀는지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진상 자료를 다 배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던 참에, 앞쪽에서 차 한 대가 다가왔습니다. 그 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곳이 바로 우리가 왔던 그 길이었고, 심지어 집으로 돌아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밤에 시골로 진상 자료를 배포하러 갔습니다. 한번은 우리가 자료를 배포하러 가던 길에 도로에서 아주 먼 곳에 불빛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곳이 분명 마을일 거로 생각했지만, 주변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몰랐습니다. 갑자기 아주 먼 곳에서 차 한 대가 그 불빛이 있는 곳을 향해 갔고, 우리도 그 차의 방향을 따라가 이 마을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이곳의 중생들이 구원받을 수 있음에 매우 감격했습니다.

사부님의 보호 아래 우리는 진상 자료를 배포하는 과정에서 위험 속에서 기적을 만난 일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우리가 50km 떨어진 곳으로 진상 자료를 배포하러 갔습니다. 당시 하늘은 아직 대낮처럼 밝았는데, 우리는 한 마을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가 절반쯤 배포했을 때 한 여자가 대문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내가 다가가 그녀에게 진상 자료 한 부를 주며 보라고 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파룬궁 잡아라! 파룬궁 잡아라!”라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심지어 아내가 방금 진상 자료를 배포했던 집의 남자까지 불러냈습니다. 그 남자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거(진상 자료) 가져가!” 아내는 방금 그가 문을 열어둔 운전석에 진상 자료를 놓았는데, 그는 차 문을 닫아버리고는 아내에게 자료를 가져가라고 다그쳤습니다. 아내가 그에게 차 문을 열라고 했지만 그는 또 열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 여자는 끊임없이 “파룬궁 잡아라!”라고 외쳤습니다. 게다가 길가에서 차를 보면 닥치는 대로 가로막았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다가, 마침내 그녀에게 차 한 대가 멈춰 섰는데, 운전자는 마을 간부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차 안의 사람에게 우리를 신고했고 차 안에 있던 한 사람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려 했습니다.

상황이 매우 위급해지자 아내는 “사부님, 저를 구해주세요!”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그때 아내가 다시 그 남자의 차 문을 당기자 문이 순식간에 열렸습니다. 아내는 진상 자료를 꺼내 몸을 돌려 재빨리 그 사람들을 벗어나 작은 골목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는 양 우리를 지나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다른 거리에서 자료를 배포하던 저를 따라잡았습니다. 아내는 제게 방금 일어난 일을 말했고, 우리 둘은 함께 사부님께 구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사부님의 가지(加持) 아래 우리 둘은 그 사람들을 벗어나 안전하게 빠져나왔습니다. 우리는 안전한 곳을 찾아 진상 자료를 숨겨두었다가 다음 날 다시 가지러 오기로 했습니다.

뜻밖에도 다음 날 밤에 큰비가 내렸고, 우리 둘은 오토바이를 타고 비를 맞으며 집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으로 진상 자료를 가지러 갔습니다. 비는 갈수록 거세졌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반드시 지나가야 할 도로 한 곳이 비교적 낮아 이미 물이 고여 작은 강을 이뤘는데, 깊이가 족히 1m는 넘어 보였습니다. 만약 오토바이가 지나가면 물에 잠겨 시동이 꺼질 것이었습니다. 이때는 이미 새벽 1시였고, 하늘은 흐리고 길에는 사람 하나 없었으며 집까지는 아직 35km가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초조해져 물가에서 서성였습니다. 바로 이때 뒤에서 높고 큰 대형 로더가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서둘러 로더를 따라갔고 그것이 앞에서 물길을 가르자 우리는 그 뒤를 따라 작은 강을 건뜄습니다. 우리가 반대편 높은 지대에 도착하자 갈라졌던 물길은 다시 망망대해로 변했습니다. 저와 아내는 모두 웃으며 생각했습니다. ‘깜깜한 한밤중에, 이미 새벽 1시가 넘었고 큰비까지 내리는데 어디서 로더가 온 거지?’ 우리는 사부님께서 제자들을 돕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오랜 세월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일을 너무나 많이 겪었고, 그때마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모든 것이 사부님의 자비로운 안배임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명혜망 제22회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11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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