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법제자
[명혜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인(忍)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제가 체득한 몇 가지를 교류하려 합니다.
1. 내가 이해한 인(忍)은 인과응보 법리를 인정하는 것
저는 늘 스스로를 이치를 따지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소위 이치에 맞지 않는 사람이나 일을 만나면 이해가 안 되고 억울해하거나 상대와 옳고 그름을 따지며 공정함을 요구했습니다. 오해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마음속에 불평이 생기고 심지어 화가 나서 해명하려 하거나 상대를 멀리했습니다. 고통이나 재난을 만나면 고통을 피하고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방법을 찾곤 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런 문제와 마주치는가? 모두 당신 자신이 빚진 업력이 조성한 것으로서, 우리는 이미 당신에게서 무수하고도 무수한 몫을 없애주었다. 다만 얼마 남지 않은 약간의 것을 각개 층차 중에 나누어 놓았는데, 당신의 心性(씬씽) 제고를 위해 사람의 마음을 연마(魔煉)하고, 각종 집착심을 버리도록 설치한 일부 마난(魔難)이다. 이것은 모두 당신 자신의 난(難)으로서 우리는 당신의 心性(씬씽) 제고를 위해 그것을 이용하는데, 당신이 모두 넘을 수 있게 한다.”(전법륜)
사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아주 명백히 말씀하셨지만, 문제에 부딪쳐 힘들 때면 여전히 ‘내가 그렇게 큰 업력이 있을까, 분명 상대가 잘못한 것인데’라고 생각했습니다.
법리에 대한 인식이 끊임없이 깊어지면서 저는 천천히 안으로 찾는 법을 배웠고, 제가 생각하는 이치란 모두 사람의 이치였음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우주의 법리는 공정하고 공평하며 모든 것에는 인과가 있습니다. 생생세세 우리가 어찌 업을 짓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업을 갚는 것이 응당한 일인데 무엇이 불평스럽고 억울하겠습니까? 제가 만나는 모든 난관은 제가 반드시 감당하고 해소하며 올바르게 대면해 넘어가야 할 것들입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제가 어떤 면에서 제고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부님의 고심스러운 안배임을 체득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난을 만날 때 저는 비교적 평화롭게 대하며 더는 회피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마음을 수련해 없애야 하는지 살펴보고, 동시에 신의 길을 걷는 저를 줄곧 보호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전에는 ‘역래순수(逆來順受, 좋지 않은 일이 닥쳐와도 순순히 받아들이고 참고 견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나약하게 굴복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인식이 생겼는데, 수련에서 그것은 법리를 명백히 안 후의 담담한 대면이자 주동적인 감당이며, 생명이 승화하는 과정입니다.
2. 내가 이해한 인(忍)은 다름을 포용하는 것
우주는 번영하고 생명과 사물은 본래 다양합니다. 층차와 경지 또한 무궁무진합니다. 끝없이 넓은 우주 앞에서 작디작은 저는 경건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 신의 걸작을 바라봐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비슷한 생명과 생각만 받아들이거나 자아가 매우 강하다면, 그것은 정말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아서 우리의 세계는 단조로워지고 지혜도 크게 제한될 것입니다.
한번은 동료들과 중국 음식점에서 식사했는데, 식사 후 각자 포춘쿠키(행운·운세 메시지가 들어 있는 쿠키)를 하나씩 받았고 그 안에는 쪽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제 쪽지는 매우 특별했습니다. “우주를 당신 마음에 담으면 당신은 그것을 소유하게 된다.”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사부님께서 이렇게 명백한 방식으로 저에게 모든 것을 포용하라고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에 이런 포용은 오직 감상하는 눈빛으로 다름을 바라봐야만 상대를 이해할 수 있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으며, 사고를 넓혀 더 광활한 세계를 보고, 우리가 대면해야 할 일들에 더 많은 방법과 지혜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강하다고 여겨도, 사람 몸을 갖고 미혹 속에 있기에 모두 큰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강한 자아를 내려놓아야만 남의 장점을 볼 수 있고, 우주의 광대함을 볼 수 있으며, 자신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의견이나 다른 행위를 만날 때, 저는 더는 예전처럼 단순하게 ‘그가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왜 머리를 안 쓰지, 정말 할 말이 없네, 정말 독단적이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완충 지대를 둡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모르는 상황이 있을까? 내가 잘못했나? 명확히 말하지 않았나? 아니면 그에게 정말 어려움이 있는가? 어쩌면 그의 방법이 더 나을 수도?’
한번은 어떤 수련생이 안배한 일에 부족함이 보여 저는 매우 평화롭게 제안했는데, 그녀는 즉시 반발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저를 비꼬았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반응이 크십니까? 저는 단지 제가 본 것을 제안드린 것이고, 받아들일지는 당신이 파악한 상황에 따라 처리하시면 됩니다”라고 하자 그녀는 말이 없어졌습니다.
저는 체득했습니다. ‘그녀는 예전의 나와 비슷하구나. 자기 생각과 다르기만 하면 배척하고 빠르게 반응하고 결론을 내리며, 잠재의식적으로 늘 자신이 옳다고 여겨 사람도 상하게 하고 일도 망치는구나.’ 저는 스스로에게 상기시킵니다. ‘쉽게 결론 내리지 말고 다른 의견을 많이 들어라. 각 천국 세계는 각자의 운영 방식이 있다.’ 번체자 ‘성(聖)’자는 왼쪽에 귀(耳), 오른쪽에 입(口)이 있는데, 제가 이해하기에 이는 우리에게 많이 듣고 적게 말하며, 먼저 듣고 나중에 말하라고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면 또 다른 세계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3. 내가 이해한 인(忍)은 관용
우리 각자는 많은 집착과 관념, 그리고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미혹 속에 있기에 수시로 잘못을 범합니다. 하지만 우리 많은 사람은 완벽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우주의 가장 밑바닥인 인류 사회에 있는데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잘못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컴퓨터 편집기를 사용할 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기능 중 하나가 바로 ‘undo’(되돌리기)입니다. 잘못했을 때 ‘undo’ 한 번이면 잘못한 부분이 사라집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잘못을 범했을 때도 이렇게 쉽게 undo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잘못을 범했을 때 모두 양해받기를 희망합니다. 수련의 길은 본래 매우 어려운데, 그렇다면 우리는 왜 남을 양해하지 않습니까?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사가 차를 빨리 몰았지만, 그가 일부러 사람에게 부딪치려고 했겠는가?”(전법륜)
기사가 사람을 친 이렇게 큰 잘못에 대해서도 그가 고의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면, 남이 잘못을 범해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 우리는 상대가 우리에게 화를 낼 때도 고의가 아니며, 사실 화를 내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피해자임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저도 화를 낸 적이 있기에 체득이 있습니다.
명혜망의 한 교류 글에서 수련생 A가 감옥에서 고문을 견디지 못해 밖의 수련생 B를 밀고해 B가 7년형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B는 출옥 후 처자와 헤어지고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겨우 안정을 찾았을 때 A가 난관이 커서 B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B는 원한을 내려놓고 A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신을 밀고한 것을 이해하며 A를 도왔습니다. 저는 읽고 나서 매우 놀랐습니다. 오직 각자(覺者)만이 이런 관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문제가 나타날 때 늘 문제의 실질을 볼 수 있고, 말이 핵심을 찌르고 정확하며, 빙빙 돌리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그것이 꽤 좋다고 느꼈고 문제가 있으면 남들이 직접 지적해주기를 바랐습니다. 다른 수련생도 말이 매우 직설적이어서 많은 사람이 견디지 못했지만, 저는 그녀가 꽤 좋고 진실하다고 느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저는 남의 잘못을 보는 데 능했고, 핵심을 찔러 말하는 것에는 포용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성분이 들어있었습니다. 효과는 당연히 좋지 않았습니다.
속인 중에 ‘난득호도(難得糊塗-어리숙한 것이 오히려 낫다)’라는 말이 있는데, 수련하면서 저는 이 말에 대해 한층 더 인식하게 됐습니다. 사람이 잘못을 범하는 것은 마치 강물이 늘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에 의견이 있겠습니까? 주변의 속인이 잘못을 범하면 우리는 비교적 쉽게 포용합니다. ‘속인이니까 따지지 않는다.’ 수련인에 대해서는 우리가 왜 포용하지 못합니까? 더구나 사부님께서도 모든 수련생을 관리하고 계시니, 각자가 조만간 넘어야 할 난관을 넘어갈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두고 있을 필요가 없고 이 과정에서 자신을 잘 수련하면 됩니다.
한 수련생이 일찍이 저에게 매우 큰 고비를 준 적이 있습니다. 또 거만하게 저에게 “당신이 내 존경을 받고 싶습니까? 당신이 쟁취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어떤 수련생도 그보다 능력이 높지 않았습니다. 1년 넘게 뼈를 깎는 수련을 거쳐 상대를 거울로 삼아 저는 많은 집착을 찾았고, 마침내 내려놓았습니다. 몇 년 후 다시 그를 만났는데 그는 여전히 말이 거칠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매우 평온했습니다. 본래 그에게 일깨워주려 했지만 그런 마음 상태로는 제 조언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아 내려놓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수련의 길이고 사부님께서 보살피실 것입니다. 각자가 먼저 수련해 없애고 나중에 수련해 없앨 것이 다르며, 어쩌면 우리가 내려놓지 못한 것을 남들은 이미 수련해 없앴을지도 모릅니다.
이상은 저의 약간의 심득이며 적절하지 못한 곳은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202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8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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