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수련자
[명혜망]
1. 현지 주민에게 지역의 악행을 폭로
2003년 여름, 우리 지역에서 세무국에 근무하던 두 명의 수련생이 진상을 모르는 국장에 의해 고발당해 두 사람 모두 해당 성의 여성 노동수용소에 불법 구금됐습니다. 소식을 들은 후, 우리는 즉시 힘을 모아 납치되어 구금된 두 수련생에게 정념을 보냈고, 세무국 관련 간부들에게 진상 전화를 걸었으며, 인터넷을 통해 악행을 폭로했습니다. 해외 수련생들도 전화로 구출을 도왔고, 일부 수련생들은 세무국 간부들에게 진상 자료를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몇 명의 구출 조정에 참여한 수련생들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 세무국 국장, 즉 수련생을 고발한 주요 책임자에게 선행을 권하는 편지를 써서 명혜망에 투고했습니다. 명혜망에 편지가 게시된 후, 우리는 시내 각 부서에 편지를 우편으로 발송했고, 편지 내용을 축약하여 스티커 형태로 제작했습니다. 몇 개 조로 나뉜 수련생들이 시내 모든 세무국, 즉 지방세국, 국세국, 각 구 세무국, 주변 군·현 세무국 등에서 동시에 이 스티커를 세무국 출입문에 부착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지역의 악행을 폭로했습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진상을 알렸고, 특히 스티커 형태의 진상 자료는 사악에 대해 큰 위압 효과를 발휘했으며 중생을 구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세무국의 일부 직원들은 간부들의 행태에 강한 반감을 느꼈습니다. 특히 그 국장은 하늘을 덮을 듯한 진상의 물결에 크게 충격받았고 깊은 후회도 했습니다.
두 수련생 중 한 명은 세무 협조 업무를 담당했으며, 수련 후 모든 뇌물을 거부해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다른 한 명은 당시 ‘레이펑(雷鋒) 모범’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국장에게 보낸 선행 권고 편지에는 격한 비난의 말이 없었고, 모두 이치로써 점진적으로 그를 설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이들이 모두 훌륭한 직원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국장님, 두 직원에 대해 깊이 잘 알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들은 국가 공무원이며, 고등 교육을 받았고, 파룬궁 수련은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녀들은 직접 혜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상사이신 당신도 이 점을 잘 아실 것입니다. 벌써 5개월 넘게 지났는데, 그녀들의 처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가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까? 만약 그녀들이 당신의 여동생이라면 이런 상황이 매우 슬프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녀들의 입장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편지의 마지막에 우리는 그에게 권유했습니다. “앞으로 모든 일에 있어 타인을 더 배려하고, 너그럽고 관대하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의 경지이자 큰 기쁨입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기억해 주십시오. 당신과 가족 모두 아름다운 미래를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 국장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후 그는 한 현의 세무국장으로 전근을 갔고, 그곳에서 자신의 부서 대법제자들을 선하게 대했으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로써 그의 인생에도 희망이 찾아왔습니다.
2. 수련생이 박해로 사망하자 그의 아내 수련생은 사악이 강요한 화장을 거부
2006년 겨울, 우리 지역의 한 수련생이 다른 지역에서 납치되어 며칠 만에 박해로 사망했습니다. 나이는 불과 40대 초반이었습니다. 현지 구치소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수련생은 아마도 얼어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구치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셔츠와 내복만 입고 있었으며 경찰은 그에게 겨울 외투를 입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련생의 아내도 대법을 수련하고 있었으며, 그곳에 도착한 후 가족과 다른 이들에게 사망 소식을 알렸습니다. 소식을 들은 후 우리 몇 명의 수련생은 그 도시에서 가까운 다른 도시로 가서 그곳 수련생들과 교류했습니다. 이후 그 도시 수련생들이 차를 몰고 와서 우리와 함께 박해로 인해 수련생이 사망한 도시로 향했습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매서운 찬바람이 솜옷을 뚫고 들어왔는데, 현지 기온은 영하 20도 이상이었습니다.
박해로 사망한 수련생의 10대 딸과 가족들도 그 도시로 도착했고, 수련생의 외지에 있는 몇몇 형제와 다른 친척들도 함께 왔습니다. 우리는 기차역에 나가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기차에서 내린 후 수련생의 딸이 추위에 떨며 입술이 푸르스름한 것을 보고 저는 아이에게 따뜻한 죽 한 그릇을 사주었습니다. 아이가 겨우 그릇을 받았지만 마시기도 전에 큰아버지가 이를 제지했습니다. 큰아버지는 대법 진상을 알지 못해 아이를 옆으로 데려가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이와 저는 서로 마주 보았고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외지 경찰은 수련생 가족들에게 한 숙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즉시 수련생의 아내와 소통하며 사악에 협조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수련생의 아내는 남편의 시신을 본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 이름)의 시신 위에 흰 천이 덮여 있었는데 제가 천을 걷어 보니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등을 대고 누워 있었고 사지가 굳어 있었으며 두 눈은 크게 떠져 있었어요.” 그녀는 또한 경찰이 다음 날 남편 시신을 화장할 것이며 가족에게는 5천 위안만 준다고 알렸다고 전했습니다. 우리는 그녀에게 서명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우리 몇 명의 수련생은 현지 수련생의 주선으로 다른 작은 여관에 머물렀습니다. 당시 상황에 따라 서로 의견을 나누어, 현지 수련생들에게 되도록 빨리 이 사건에 대한 진상을 알리고 지역의 악행을 폭로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가족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박해로 사망한 수련생 형님 등 친척들에게는 지금은 기회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극도의 슬픔과 분노에 빠져 있어 우리의 진상을 듣기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진상을 알릴 계획이며, 현재는 수련생의 아내와 계속 연락을 유지하며 그녀의 정념을 가지해서 사악에 협조하지 않도록 돕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 8시가 넘어서, 우리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수련생의 형님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 수련생의 아내가 받도록 했습니다(수련생의 아내는 휴대폰이 없었습니다). 아내가 전화를 받자 그녀는 이미 화장 동의서에 서명했다고 알려왔습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그녀와 상의하여,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 가족 눈을 피해 택시를 타고 우리가 머물고 있는 여관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약 30분 후 그녀가 도착했고 우리는 법리상에서 그녀와 대화하며 서명하지 말고 화장에 협조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때 수련생의 아내는 자신이 서명한 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5천 위안뿐만 아니라 50만 위안을 줘도, 돈이 얼마든 저는 화장에 동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수련생의 아내는 더 이상 여관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화장장에 가지 않으며, 화장에 동의하지 않고 남편의 시신이 사악에 의해 화장되는 것을 동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큰형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아주버님, 저는 화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50만 위안을 준다 해도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통화를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수련생의 차에 타도록 했고, 운전하는 수련생이 그녀를 다른 도시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수련생의 아내를 배웅한 후 우리 몇 명은 다음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우리는 수련생의 큰형이 사악에 보고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동생 부인이 행방불명됐고 파룬궁을 찾아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 현지 사악은 우리를 찾으러 올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수련생이 말했습니다. “삼십육계 중 제일 좋은 계책은 바로 도주하는 거죠.” 우리 모두 동의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해서 기차역에 가서 표를 삽시다.” 당시에는 기차표를 살 때 신분증이 필요하지 않아 우리는 무사히 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30분도 채 안 되어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가 출발한 지 10여 분 후, 수련생의 큰형이 휴대폰으로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 동생 부인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그녀가 이미 우리 숙소를 떠났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즉시 이 휴대폰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악이 위치를 추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휴대폰의 배터리와 유심카드를 빼내고, 기차 객실 창문을 열어 휴대폰을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후에 현지 수련생이 우리에게 전해준 바에 따르면, 그날 밤 현지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경찰은 매우 긴장하며 시내 거의 모든 경찰력을 동원해 모든 여관을 수색했습니다(우리는 숙소에 머물 때 신분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시를 빠져나가는 모든 출구에 검문소를 설치해 우리를 차단하려 했으나,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우리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현지 사악은 밤새 여관에서 방 하나를 잡아 나머지 가족들을 직접 감시했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8시도 되기 전에 7대의 공안·검찰·법원 차량이 가족 여러 명을 데리고 와서, 수련생 아내가 없는 상황에서 큰형이 대신 서명해 화장을 신속하게 처리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 지역의 수련생들은 이 사건과 관련해 주민 아파트 복도 등 곳곳에 진상을 알리는 포스터를 대량으로 붙였고, 여러 현수막도 걸어 악행을 폭로했습니다. 이에 지역 주민들은 강한 반응을 보이며 많은 이들이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관련 인사들은 검찰원, 법원, 시 중급검찰원, 중급법원, 성 고급검찰원, 고등법원 등 여러 기관에 고발장을 제출해 공안과 구치소의 살인 사건을 고발하고, 살인 책임자들을 엄벌에 처할 것과 아직 구금 중인 대법제자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3. 전방위 협력으로 단식으로 저항 중인 수련생 구출
2024년, 우리 지역에서 여러 명의 수련생들이 이틀도 채 되지 않아 사악에 의해 가택수색당하고 납치됐습니다. 열흘 남짓 지나서 또다시 여러 명의 수련생이 가택수색과 납치를 당했습니다. 현지 사악은 수련생들을 감시하고 따라다니며 위치를 파악하는 수법으로 박해를 진행했습니다. 순식간에 마치 먹구름이 도시를 뒤덮은 듯한 분위기였고, 모두가 숨 막히는 압박을 느꼈습니다. 납치된 수련생 중 몇 명이 이틀 전쯤 내 집에 다녀간 터라, 모두가 단체 메일함을 통해 내 안전을 주의하라는 알림과 함께 외출을 삼가고 정념을 자주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저도 한동안 큰 압박을 느꼈습니다.
계속 법공부하면서 저는 정념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정법 수련자로서 우리는 타인을 위하는 정념을 닦아야 합니다. 이처럼 납치된 수련생들을 방치할 수 없기에 되도록 가족들과 연락을 취해야 합니다. 납치된 수련생 중 한 명인 A 수련생은 이전의 여러 차례 납치와 불법 구금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박해에 반대하며 사악에 협조하지 않았고, 몇 차례는 미리 정념을 발하여 스스로 탈출한 경험이 있습니다. 게다가 A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몸속에 종양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분명 사악에 협조하지 않고 박해에 저항할 것이라 확신했기에, 저는 먼저 A 구출 작업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도 집 밖에 사악이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제 생각은, 설령 오늘 제가 외출해 감시당하더라도 구출 계획과 방법을 다른 수련생들에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대각자의 본성은 타인을 위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후 법공부를 통해 깨달음을 더 높였습니다. ‘왜 사악이 감시하도록 허용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정념정행으로 맞서야 한다.’ 구세력은 모두 사부님의 정법에 반하는 마귀이며 사부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듯 우리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저는 수련생 B와 약속을 잡아 한 공원에서 만났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A의 가족을 어떻게 찾을지 모르겠지만 명혜망에 올라온 A의 관련 초기 보도에서 그녀의 고향이 어느 마을이라고 나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그 마을에 가서 알아봅시다”라고 했습니다. B는 “아니요, 저 혼자 갈게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 마을을 찾을 수 있겠어요?”라고 묻자, 그녀는 정념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럼요, 알아볼 겁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이틀 후, B는 단체 메일을 통해 저에게 A의 올케를 만났다고 알렸습니다. 그녀의 올케는 경찰이 이미 가족들에게 서명을 요구했으며, 처분보류로 며칠 내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10여 일이 지나도 A가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은 없었고, 저는 다시 B와 상의하여 우리 둘이 함께 A의 오빠 댁에 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B는 혼자 가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B는 A의 오빠를 만났다고 알려왔습니다. 오빠는 경찰이 자신에게도 서명하라고 했으며, 동생의 몸속 종양 제거 수술을 진행하려 했으나 서명하지 않고 수술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 B는 A 오빠의 휴대폰 번호도 받게 됐습니다.
며칠 후, 우리는 다시 A의 오빠에게 전화해 상황을 물었습니다. A가 이미 집에 돌아왔는지 물었더니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국보에 가서 사람을 찾아달라고 말해주길 권유했지만, 오빠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후 우리가 다시 전화했을 때는 오빠가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후, 저는 다시 C 수련생과 A의 구출에 대해 상의했습니다. 그녀는 A의 오빠 댁에 가서 직접 대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A의 오빠께 편지를 썼습니다. A의 아버지는 문화대혁명 때 심각한 박해를 받았으며 가족들은 깊은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대법 박해 중에 그 가족에는 두 명의 대법제자가 있으며 여러 차례 납치, 강제노동, 형벌 박해를 받았고, 수련하지 않는 가족들조차 연좌되어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현재 감옥에 있습니다. 오빠 또한 중국공산당(중공)의 본성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에서 저는 먼저 그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표했습니다. “당신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이 힘드셨습니다.” 이어, 중국인들이 겪는 고난은 중공이 정권을 찬탈한 이후로 끊임없다는 점을 설명하며, 인과응보의 천리를 예로 들고, 법률적 관점에서 파룬궁 수련은 위법이 아님을 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은 온 가족의 중심이며, 온 가족이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중공은 곧 신에 의해 해체될 것입니다.”
저는 변호사의 변론서, 공안부 39호 문서, 신문출판서 50호 명령 등 자료를 준비해 C에게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C는 A 오빠 댁 위치를 잘 몰랐기 때문에 이번에는 B가 C와 함께 동행했습니다. 두 사람이 방문했을 때는 A 오빠를 만나지 못했고, 대신 A의 올케만 만났습니다. 그녀는 그리 반갑게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A 오빠께 보낸 편지와 진상 자료는 모두 남겨두었습니다.
열흘쯤 지나도 여전히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수련생 D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남성 수련생으로 평소 정념이 강했고, 여러 차례 수련생 구출에 참여했으며 심지어 경찰 앞에서도 진상을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수련생을 통해 그에게 편지를 전하며 집으로 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D를 만나자 저는 A 구출 계획을 이야기했고, 그는 매우 찬성하며, A의 언니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며 먼저 그녀와 연락을 취하겠다고 했습니다.
일주일 후, D가 저에게 와서 말해 주었습니다. 자신이 A의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처음에는 언니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휴대폰으로 다시 걸었고 이번에는 언니가 전화를 받았으며, 약속을 잡아 만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A의 언니는 매우 무거운 마음 상태였고, 가족 중 몇몇이 연좌되어 모두가 두려워하며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포기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A의 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D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A의 언니의 정확한 주소는 몰랐지만 대략적인 위치는 알고 있었기에, 사부님의 가지(加持)를 빌어 A의 언니 집 근처에서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마침내 A의 언니가 광장 무용을 하러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됐고, 인내심을 가지고 진상을 전하며 파룬궁이 무죄임을 증명하는 법률 문서 등을 보여주며 간절히 그녀에게 동생을 반드시 구출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A의 언니는 감동받아 수련생들과 함께 오빠를 만나 어떻게 할지 상의하러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D는 많은 물품을 구입한 뒤, A의 언니와 함께 A 오빠의 집에 갔습니다. 이번에는 오빠의 태도가 매우 좋았고 국보에 가서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A의 오빠는 세 번이나 국보를 방문했으며, 마지막 방문에서야 국보 경찰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국보 경찰은 A가 현재 어느 병원에 있으며 그곳에서 간병인을 고용해 돌보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병원에 가서 A를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A의 언니는 병원에 가서 A를 만났고 A는 이미 앙상한 상태였습니다. 간병인은 간호사가 “이 사람은 며칠 못 살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이후 D는 A의 언니와 다시 대화하며, 어떻게 동생을 집으로 데려갈지, 그리고 국보 경찰과 어떻게 교섭할지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이때, 해외에 있는 우리 지역 대법제자들이 명혜망에서 A가 박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단체 메일을 통해 우리에게 알렸습니다. 그들은 중국 영사관 앞에서 현수막을 펼쳐 A를 구출하는 활동을 벌이고, 해외 기자들의 인터뷰도 준비하여 A가 당한 박해의 진상을 폭로할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도 즉시 현지 수련생들에게 정념을 보내 달라고 알리고, 해외 대법제자들과 함께 현수막 시위에 협력했습니다.
해외 수련생들이 중국 영사관 앞에서 현수막 시위를 벌인 바로 다음 날쯤, 국보 경찰이 가족들에게 연락해 사람을 데려가 집으로 돌아가라고 알렸습니다.
사부님의 가지 아래, A는 정념정행으로 박해에 굴복하지 않고 견뎠으며, 현지 수련생들의 끈질긴 노력과 가족들의 적극적인 참여, 그리고 해외 대법제자들의 지지 속에서, A는 무려 4개월간의 단식을 견뎌낸 끝에 마침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4. 본 지역 수련생과 교류
최근 몇 년간, 이 지역의 사악은 매우 날뛰며 대법제자들을 끊임없이 체포하고 억울하게 판결했습니다. 특히 대규모 납치 이후, 몇몇 수련생들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저 역시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려움이 집착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반드시 닦아내야 할 마음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지역에서 사악이 박해를 일으키는 원인은 결국 우리 각자의 수련 문제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악의 박해를 인정하지 않지만, 스스로를 잘 닦는 것도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이 지역 수련생들에게 조속히 자발적으로 법공부 팀을 조직하여 법을 더 많이 공부하고, 법에서 깨달음을 빠르게 높일 것을 권합니다. 동시에 구세력의 모든 계획을 전면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법 실증의 시간이 많지 않은 만큼, 우리 지역 수련생 모두가 무사무아(無私無我)의 정념을 닦아 사악이 가하는 추적과 감시를 정념으로 해체하고,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며 각자 정법 수련의 길을 잘 걸어가길 바랍니다.
대규모 납치 사건 중에, 몇몇 수련생 가정에서는 프린터와 컴퓨터까지 모두 압수당했지만 그들은 침착하게 법률을 활용해 진상을 알리고, 파룬궁 박해의 위법성을 지적하며, 박해에 관여한 이들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국보 대대장은 “여러분이 나보다 법을 더 잘 아는 것 같군요”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결국 그 수련생들은 단 10여 일간 구금된 후 당당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이 지역 수련생들이 법률을 활용해 박해를 반대하는 경험과 사례들을 더욱 많이 공부하고 공유할 것을 권합니다. 우리의 전체적인 정념이 반드시 큰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위의 교류에서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7월 3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7/31/4967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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