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시(陝西)성 대법제자
[명혜망]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대법 수련에 입문한 저는 결가부좌로 반 시간을 앉을 수 있었고, 두 다리에는 약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묘한 감각이 있었으며 아프거나 힘들다는 느낌도 없었습니다. 평상시에도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에 따라 스스로를 요구할 수 있었고,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졸업, 직장 생활까지 모든 과정이 비교적 순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부님의 자비로운 안배였으며, 대법 수련을 통해 저는 지혜를 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 여러 방면의 오염을 받으며 점차 수련을 소홀히 하게 됐습니다. 인정에 얽매이고 세속적인 관계에 매달리며 속세에서 하루하루를 흐리멍덩하게 보내다 보니 마음도 고요해지지 않았고, 법과도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 안으로 찾아 어머니와의 갈등을 해소하다
어머니는 성격이 다소 강한 분이십니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긴 뒤부터 어머니의 ‘안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육아 문제에서 저는 제 방식대로 아이를 키우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방식대로 기르려 하셨습니다. 우리 사이의 갈등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듯했고, 아주 사소한 일로도 다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원인을 상대방 탓으로 돌렸습니다. 소통이 어렵다고 느꼈고, 이 일은 왜 저렇게 처리하는지, 그런 말은 왜 하는지 등을 단순하게 판단했습니다.
나중에야 이 모든 것이 ‘밖으로 찾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친구가 한 말을 떠올렸습니다. “네 눈에 비친 너는 진짜 너가 아니고, 남이 보는 너도 진짜 너가 아니야. 네 눈에 비친 타인이 바로 너야.”
더 이상 밖으로만 보지 않고 안으로 찾기 시작했을 때, 제 안에 많은 집착심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고집을 부리고,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관용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찾아낸 후에는 어머니의 어려움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어머니도 한때는 무력한 아이였고, 너무 일찍 삶의 무게를 짊어지셨으며, 오랫동안 당(黨) 문화의 오염을 받아 강한 성격이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상대방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하게 되자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가르쳐주신 ‘진선인(眞·善·忍)’이 저를 변화시켰고, 상대방 입장에서 이해하며 ‘나’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자 갈등도 사라졌습니다. 제 마음에는 관용과 이해가 자리 잡았고, 모녀 관계도 화목해졌습니다.
2. 남을 얕보는 마음을 발견하다
이전에는 모든 사람이 각자 맡은 일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업무에서는 항상 ‘선견지명’을 중시했고, 어떤 문제든 반복해서 생각하고 깊이 숙고하길 좋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해와 이득에 집착하게 됐고, 쉽게 불안해졌습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모든 일을 명확히 통제하고 털끝만큼의 오차도 없이 계산하려는 것 자체도 일종의 집착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명(名)에 대한 집착 — 남들이 제가 일을 잘하고 유능하다고 말해주길 바라며, 타인의 인정을 받는 그 감각을 무척 즐겼습니다. 평소 일할 때도 여러 가지를 동시에 처리하길 좋아했는데, 그것이 제 능력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이(利)에 대한 집착 — 제 이익이 손상될까 봐 늘 두려워했습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 — 어떤 일을 더 잘하려면 반드시 제 생각이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도 제 방식대로 해주길 바랐습니다. 업무에서 자기주장을 고수하는 것도 매우 큰 집착으로, 인간사의 성패를 너무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의 심성(心性) 제고를 우선순위에 두지 못한 것입니다.
자아를 내려놓는 법을 배운 후에는 모든 사람에게 빛나는 점이 있고, 배울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제야 진정으로 깨달았습니다. 사회든, 직장이든, 가정이든 모두 제 수련 장소이며, 만나는 모든 사람은 제 수련을 돕기 위해 나타난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저에게 잘해주든 못해주든, 저는 반드시 수련인의 기준으로 그들을 선하게 대해야 하며, 제 심성을 높이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들이 저에게 잘해주든 못해주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제고할 수 있었겠습니까? 남을 얕보는 마음은 수련 중의 큰 누락이며, 반드시 이 누락을 고쳐야 합니다.
3. 수구(修口)
속인 사회에서 저도 모르게 비교적 원만한 성격을 형성하게 됐습니다. 겉보기에는 세상과 다투지 않고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제 출발점은 ‘선(善)’이 아니라 사람들이 저를 좋게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 즉 속세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욕심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인사할 때도 항상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말을 골라서 했습니다. 옷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거나 오늘 안색이 좋다고 말하며, 뚜렷한 장점이 보이지 않아도 어떻게든 듣기 좋은 말을 찾아 했습니다.
가끔 사무실에서도 어울리기 위해 맞장구치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동료들이 다른 사람 뒷담화를 할 때 저도 몇 마디 보태곤 했고, 점차 불평을 늘어놓고 남의 험담을 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중국공산당(중공)의 ‘거짓(假), 악(惡), 투쟁(鬪)’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위선의 가면을 쓰고 살게 했습니다. 이런 위선이 저까지 오염시켜 진실한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좋은 말만 하면서 실제 마음은 감추려 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수련이 제고될 수 없고, 진상을 알리는 데에도 좋은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이후 저는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며 가정사나 뒷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했고, 쓸데없는 말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동료들이 자신들의 관심사를 이야기할 때도 되도록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으려 주의했습니다. 이 부분의 수련은 매우 은밀한 시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시작했지만, 말하다 보면 어느새 본래 의도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이를 통해 ‘수구(修口)’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일사일념(一思一念)부터 잘 닦아야 함을 느꼈습니다.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즉시 자각하고 곧바로 제거해야 합니다.
4. 법 암기가 마음가짐을 바꾸다
지난 법공부 과정을 되돌아보면, 가끔 바쁘다는 핑계나 게으름으로 여러 이유를 대며 연공도 하지 않고, 한동안은 책도 펴보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휴대폰을 할 때는 밤을 새워가며 즐겁게 하곤 했습니다. 작년 설 이후 마음을 다잡고 법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외우는 속도는 느렸지만 수확이 컸습니다. 이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내포된 의미들이 서서히 드러났고, 때로는 법을 외우다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예전 제 상태는 다소 비관적이었습니다. 늘 살아서 생을 마감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정법이 끝날 텐데, 저는 땅에 주저앉아 눈물도 없이 조용히 티끌로 사라져버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늘 따라다니던 그 허무감과 추락감처럼, 저는 항상 자신이 수련을 형편없이 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를 인식하면서도 정진할 수 없었고, 깊은 무력감이 저를 감쌌습니다. 하지만 법을 외우면서 일부 집착들이 점차 내려졌고, 이런 생각도 서서히 바뀌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정법(正法)시기 대법제자다. 서약을 세우고 이번 생에 온 것은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과가 어떻든 간에 대법을 실증하고 원융하기 위함이지, 어떤 소위 결과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결과에 집착하는 것은 결과를 수련보다, 대법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개인적인 결과가 어떻든 나는 파룬따파가 정법임을 실증해야 하고, 사부님이 대우주를 구원하러 오신 분임을 보여야 하는데, 어찌 개인적인 결과를 구할 수 있겠는가?’ 제 마음이 점차 밝아졌고, 그 허무감과 두려움, 추락감 역시 이기적인 것으로, 법이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진정한 제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하루 대법을 수련하면 하루의 수확이 있고,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어느 날 ‘정진요지-경지’라는 경문을 외우게 됐는데, 마치 그전까지는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법에서 말씀하신 선자(善者)와 각자(覺者)의 경지를 기준으로 자신을 돌아보니, 저는 그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당신은 악자(惡者)입니까?”라고 직접 물어본다면 저는 단호히 부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법의 기준에 비춰보니 저는 어떤 면에서는 아직 ‘악자(惡者)’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잘못했을 때 마음에 원한이 생겼고, 남들보다 많이 했다고 느껴질 때는 마음이 불평했으며, 누군가 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이것저것 따지며 망설였습니다. 이제야 이것이 바로 질투심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5. 반석처럼 견고한 초심과 진정한 믿음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는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고 서천으로 불경을 구하러 갑니다. 관음보살은 그에게 보물을 주고 네 명의 제자가 서천 길에서 그를 보호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미혹이 깨진 것이 아닌가? 진짜 보살이 현신(現身)하여 경을 구하러 가라고 했으니, 깨달음이 부족해도 누구든 가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나중에 깨달은 것은, 그렇게 확실한 계시가 있어도 진정한 믿음에 대한 시험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삼장법사는 관음보살의 지시를 받아 진경을 구하러 가라는 명을 받았고, 육정육갑(六丁六甲), 오방게제(五方揭諦), 사치공조(四値功曹) 및 십팔위 호교가람(十八位護教迦藍)이 긴밀히 따라다녔지만, 난관 앞에서는 여전히 그것이 산처럼 높게 느껴졌고 여러 차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는 스스로도 ‘살아날 수 없겠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마침내 온갖 어려움을 겪고 진경(眞經)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부님께서 친히 공을 전수하시고, 법을 설하시며, 의혹을 풀어주셨습니다. 이 문은 정말 크게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원만에 이르러서도 성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시험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때 잘하지 못했다고 해서 기죽어서는 안 됩니다. 옛말에 “부지런히 배우는 것은 봄날 싹이 트는 것과 같아서,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날마다 조금씩 성장하고(勤學如春起之苗,不見其增,而日有所長), 공부를 그만두는 것은 칼을 가는 숫돌과 같아서, 닳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날마다 조금씩 닳는다(輟學如磨刀之石,不見其損,而日有所虧)”라고 했습니다. 매번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한다면 마침내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은 제가 체득한 얕은 견해로, 교류를 위한 나눔입니다. 지금까지 저를 보살펴주시고 일깨워주신 사존께 절을 올려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5월 3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5/31/495556.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5/31/4955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