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정성(正省)
[명혜망] 2023년 7월 7일 저녁, 전 남편이 재혼해 낳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우리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딸이 문을 열고 두 사람을 보더니 매우 놀랐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 엄마가 떠났어. 앞으로 당신들이 아이를 좀 돌봐줘. 매달 생활비를 조금 줄게.”
딸은 두 사람이 다투었을 뿐이고 갈등만 해결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남편은 둘이 다툼도 없었다며, 아마도 아이 엄마가 그가 돈을 벌지 못한다고 생각해 돈 많은 사람을 찾아 떠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를 위로하며 진정하라고 했고, 아이가 아직 어리니 일을 키워 아이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일이 너무 갑작스럽다고 말했고, 딸은 아빠를 설득하며 자신과 저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이혼하지 않았고, 단순한 다툼인지 아니면 정말로 헤어질 결심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섣불리 개입하면 사람들이 오해할까 걱정됐습니다. 전남편이 돌아오려 한다거나 대법제자가 그들의 결혼에 개입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죠. 또한 아이가 너무 어려서 이혼은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될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저와 딸은 아이 엄마가 돌아오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남편이 떠난 후, 저는 여러 생각에 잠겨 밤새 한숨도 못 잤습니다. 안으로 찾아보니 무엇이 이런 일을 일으켰을까요? 대법제자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우연이 아닙니다. 이혼한 지 15년이 지났고 아이 아빠에 대한 감정은 이미 없었으며, 그에게 진 빚도 갚은 것 같았습니다. 수련을 시작한 이후의 모든 장면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고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
저는 1998년에 법을 얻었습니다. 수련을 몇 달 하지 않아 중공의 박해가 시작됐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대법을 비방하는 내용이 넘쳐났고, 아이 아빠는 박해 이전에도 제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별로 찬성하지 않았는데, 이제 구실을 찾아 자주 이혼으로 저를 위협했습니다. 당시 저는 심성 수련이 무엇인지 몰랐고 이렇게 좋은 대법을 반드시 수련하겠다며,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수련을 못하게 하냐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1999년에 저는 세뇌팀에 불법 납치됐고, 아이 아빠는 두 아이(7살, 4살)를 데리고 와서 제가 포기하도록 설득했습니다. 저는 가족과 아이에 대한 정을 내려놓지 못해 ‘삼서(三書, 3가지 수련 포기 각서)를 써서 수련을 포기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사회의 조류에 따라 저는 필사적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정 부담은 점점 커졌고 아이 아빠는 성격이 소박하고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꺼려 직업도 안정적이지 않았기에 가정의 짐은 모두 제 어깨에 실렸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강가에서 빨래하고 직장에 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와서도 밥을 하고 물을 길며 채소를 가꾸고, 아이들과 아이 아빠를 돌봤습니다. 학력이 없어서 온갖 힘든 일을 다 했습니다. 남자들처럼 트럭에 올라 흙을 내리고 다른 사람의 운반공으로 일했습니다.
제 몸은 가정 갈등과 끊임없는 노동 속에서 적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출근길에 쓰러졌는데, 다행히 마을의 사촌 오빠가 발견해 응급차를 불러 제 목숨을 구했습니다. 의사는 제가 알레르기 체질이고 만성 알레르기성 천식이 있어 현재 국제적으로도 치료법이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발작이 자주 일어나면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 수 있으며, 현재는 호르몬 약물로 병을 억제하고 있으나 이미 최대 용량이 처방됐으니 이대로 가면 3년도 살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발병할 때마다 병원에 가서 산소 공급을 받았고, 며칠 동안 관을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매번 증상이 조금 완화될 뿐, 다음 발작이 또 일어났고 발작 주기는 한 달에서 결국 며칠로 줄어들었습니다.
병 때문에 일도 할 수 없었고, 고액의 의료비는 우리 작은 가정에 큰 부담이었습니다. 두 아이가 불쌍하게 저를 바라보고 아이 아빠는 계속 담배만 피우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도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버텼습니다.
사부님의 제도를 받고 이혼을 강요당하다
사부님께서는 이 무능한 제자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막다른 길에 있을 때, 마을의 한 수련생이 우리집에 와서 보물 책 《전법륜(轉法輪)》을 가져다주며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미 매우 위험합니다. 빨리 돌아오세요. 오직 사부님만이 당신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저는 눈이 번쩍 뜨이며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법 수련의 길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 아빠가 제 수련을 반대했기에 처음에는 몰래 책을 보고 연공해야 했습니다. 점차 몸이 좋아지면서 천식 발작 간격이 길어졌고, 아이 아빠는 효과가 있는 것을 보고 제가 연공하는 것을 모른 척하며 더는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2007년경, 올케가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 경찰에게 납치돼 우리 가족 전체가 동요했습니다. 아이 아빠는 제가 올케처럼 납치될까 봐 걱정돼 다시 이혼으로 위협하며 수련을 금지했고, 게다가 지역사회 직원들이 끊임없이 전화로 그를 괴롭히며 저를 감시하고 외출을 금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더욱 두려워했고 나중에 저 때문에 두 아이가 연루될까 걱정했습니다(당시 파룬궁 박해는 연좌제 정책을 채택해 파룬궁수련생의 자녀는 군 입대, 관직, 공무원 시험 등을 금지하고 심지어 학적을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 저는 수련에 그리 정진하지 않아 병업(病業) 가상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아이 아빠는 제가 완전히 나아지지 않았다고 생각해 대법이 효과가 없다고 믿었고, 끊임없이 제 수련을 방해했습니다. 처음에는 냉전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폭력으로 발전했습니다. 한번은 저를 창문 가로 밀어 아래로 밀며 이혼하지 않으면 저를 떨어뜨려 죽이고 모든 사람에게 제가 파룬궁을 연마하다 주화입마(走火入魔)해 스스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설득하고 이치를 설명하며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고 말해도, 그는 모두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저는 육체적, 정신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그와 협의 이혼했습니다.
이혼할 때, 그는 외도한 잘못을 감추기 위해 아이들을 잘 돌보겠다며 저를 속이고 모든 돈과 집을 그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당시 철거 보상 주택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그는 저와 이혼 협의서를 작성해 37평의 큰 집은 아들에게 주고, 그는 외부 여자와 30평의 작은 집에 살며, 원래 저와 살던 24평의 낡은 집은 제가 임시로 살도록 두고 나중에 아들에게 양도하기로 했습니다. 두 아이의 의료비와 학비는 모두 그가 부담하고 철거 보상금 10여만 위안(약 2000만원)도 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대법의 가르침으로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다
그는 계약 조항을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두 달 동안 800위안의 생활비를 준 후에 약속을 어기기 시작했습니다. 딸의 학비를 내지 않으려 했고 딸의 매월 생활비도 주기 싫어했습니다. 때로는 딸이 요구해도 받아내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울곤 했습니다. 아들은 우리가 이혼한 후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14살에 가정 생계를 돕기 위해 수습생으로 일하고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저도 여기저기서 잡일을 찾아 가정 생계를 도왔습니다.
2015년, 아이 아빠가 또 어린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시댁 쪽 모든 사람이 매우 기뻐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가장 늦게 알게 됐습니다. 퇴근해서 집에 오니, 아는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비웃으며 아이 아빠가 두 아이도 돌보지 않으면서 또 작은 아이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딸이 또 말하기를, 새 집이 나왔는데 아빠가 30평이 너무 작다며 작은 아들이 자라면 한 가족이 살기에 부족하다고 하면서 강제로 37평 집을 차지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시 매우 화가 나서 변호사를 찾아 이혼 재산 분할 소송을 제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법공부 후 저는 그 생각을 억눌렀습니다. 만약 제 아들의 운명에 없다면 제가 다투어 가져와도 지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와 다투려는 생각을 포기했습니다.
그의 집 리모델링이 끝난 후, 아이 아빠가 다시 우리집에 와서 가구를 사는 데 돈이 부족하다며 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딸은 퇴근 후 울며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는 어떻게 아직도 뻔뻔하게 돌아와 돈을 빌릴 수 있어요?! 저와 동생, 아빠가 하루라도 돌본 적 있어요? 아빠가 큰 집을 원해서 큰 집도 줬는데, 무슨 자격으로 또 우리에게 돌아와 돈을 빌릴 수 있어요?!”
저는 침착하게 딸을 설득했습니다. “얘야, 네가 돈이 있으면 아빠에게 빌려줘. 만약 그가 네 아빠가 아니라 외부인이라도, 어려움이 있으면 너는 여전히 빌려줬을 거야. 과거의 일은 더 언급하지 말자. 그것은 모두 인연 관계가 있는 거야. 그가 나를 이렇게 대한 것은, 사부님께서 꿈에서 알려주셨는데, 내가 전생에 네 아빠에게 한 목숨을 빚졌기 때문이야. 지금 내가 그에게 갚는다고 생각하고, 그가 잘 지내기만 하면 우리는 모두 따지지 않을 거야. 아무리 힘든 날들도 우리는 모두 이겨냈잖아, 그렇지?” 딸은 매우 순종적이어서 결국 돈을 아빠에게 빌려주었습니다. 나중에 아이 아빠는 연속해서 두 번 더 돈을 빌려 갔고 마지막에는 적반하장으로 갚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와 따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촌언니가 이 일을 알게 되어 말했습니다. “너는 어쩜 그렇게 마음이 약해? 그들 가족이 먹고 사는 게 너보다 어려워? 집을 꾸미고 사는 게 너보다 못해?! 왜 아직도 그에게 돈을 빌려줘? 그는 왜 또 뻔뻔하게 너희를 계속 찾아오는 거지?!”
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언니, 난 대법 덕분에 지금 몸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어. 자기 관리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고 병원비도 들지 않아. 두 아이도 정말 순종적이야. 아들은 공장에서 일한 지 10년이 됐는데 하루도 불평 없이 일했어. 딸은 졸업도 하기 전에 좋은 직장을 찾았고, 수련 덕분에 사부님께서 그녀의 지혜를 열어주셔서 독학으로 수채화를 배워 인터넷에서 판매해 합하면 월급이 적지 않아. 게다가 두 아이는 일과 생활에서 나에게 너무 많은 걱정을 끼치지 않았고, 차도 살 수 있고 새집도 꾸밀 수 있었어. 이것이 신의 도움 같지 않아? 내가 믿는 것은 진정한 불법(佛法)이고, 불법은 특별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것이기에, 우리집은 계속 사부님의 보호와 돌봄을 받아 그렇게 평온하게 어려움을 헤쳐나올 수 있었어.”
“당시 아이 아빠가 떠났을 때 집은 엉망이었고 대문도 제대로 설치되지 않았으며, 문 가장자리에 큰 구멍이 있어 쥐들이 드나들며 집에 둥지를 만들었어. 나는 채소를 살 돈이 없어서 일주일 동안 소금물에 무를 담가 먹었고, 마지막에는 자전거를 타다가 어지러워 논둑에서 떨어져 손발이 모두 다쳤어. 아들은 당시 주방에서 수습생으로 일하면서 발이 장시간 물에 담겨 있어 종기가 생기고 썩어가고 있었는데, 내가 아이 아빠에게 20위안을 달라고 신발을 사려고 했지만 그는 주지 않고 오히려 날 때리려고 했어… 만약 사부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우리 모녀 셋은 정말 이겨내지 못했을 거야.”
당시 모든 친척이 마치 억제된 것처럼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고, 이혼의 책임을 제가 파룬궁 수련한 탓으로 돌렸습니다(실제로는 아이 아빠가 외도하여 동거하며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지금은 예전과 정말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때로는 길에서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엄지를 세우고 저를 보며 딸에게 말합니다. “너희 엄마는 이런 사람이야! 너희는 반드시 엄마를 잘 공경해야 해!”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만약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저는 아이 아빠와 그 가족을 이렇게 대하지 못했을 것이고 관용과 넓은 마음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당신은 정말 훌륭해요! 당신 집 두 아이도 정말 잘 컸네요. 당신 혼자서도 집안을 이렇게 잘 꾸려나가니, 모두 당신이 잘 가르친 덕분이에요.” 사실은 제가 잘 가르친 것이 아니라, 제가 대법을 수련한 후 대법의 법리로 처세하고 두 아이가 귀감을 얻어 점차 ‘진선인(眞·善·忍)’의 기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렇게 우수하게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제가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저 자신도 어떻게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몰랐을 텐데, 어떻게 두 아이를 잘 가르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당신은 30대에 이혼했는데 왜 다른 반려자를 찾지 않았어요? 도움이 될 텐데,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기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제 마음속은 분명합니다. 옛사람은 한 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저와 아이 아빠의 이혼은 서로 관계가 나빠서가 아니라 주로 중공의 대법에 대한 박해와 이 사회의 무신론이 인성의 타락을 초래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아이 아빠는 깨어날 것이고 정의롭고 용감하고 밝고 선량하게 살기를 선택할 것입니다. 세속적인 의미의 이혼은 신께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행동으로 제 신앙을 실천하며, 그를 선하게 대하고 그를 깨우고 그가 양심을 되찾도록 인도하여 그 자신이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하도록 할 것입니다.
밤에 저는 꿈을 꿨는데, 꿈에서 아이 아빠와 함께 평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깨어나서 저는 아이 아빠에 대해 여전히 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최소한 가족정이 있고 그를 가족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저는 법을 외웠습니다. 외우다가 울고, 울고 나서 다시 외웠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도와 많은 것을 없애주셨고, 저는 마음이 점차 평온해지면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딸을 불러 매우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네 아빠에 대해 자연스럽게 대하자. 정말로 우리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가 도와주자. 나는 앞으로 네 아빠와 재결합하지 않을 거야. 네 아빠는 지금 재혼해서 아이가 있으니 그의 아이를 배려해야 해. 비록 아이가 아직 어리지만 우리의 행동이 그를 해치지 않도록 해야 해. 그리고 내가 지금 네 아빠와 어린아이를 받아들여 관리한다면, 그들 생활의 여러 문제를 직면해야 할 텐데, 이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잘하는 데 매우 영향을 줄 거야. 우리는 정에 얽매이지 말아야 해, 특히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딸은 억지로 동의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가끔 아빠에 대한 원망이 솟아올랐습니다. 저는 항상 법으로 그녀를 격려하고 깨우쳐주어 점차 딸아이의 마음가짐도 점점 더 좋아졌습니다.
전남편의 아이를 선하게 대하다
아이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는 무척 반항적이었습니다. 숙제하기를 극도로 싫어해서 숙제하라고 부르면 이곳저곳에 숨어버렸습니다. 때로는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때로는 옷장 속으로 숨거나 방 안에 틀어박혔습니다. 도저히 숨을 곳이 없으면 바닥에서 뒹굴며 떼를 썼습니다. 또한 아이는 식탐이 심했고 냉장고와 서랍장을 뒤지며 간식을 찾아 먹었습니다. 양치질이나 세수도 하지 않아 손톱 틈은 새까맣고, 옷은 걸레처럼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가 잠든 후에 손톱을 깔끔하게 정리해주고, 옷을 벗겨 깨끗이 빨아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이는 놀라며 제게 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제 손톱을 깎고 옷도 빨아줬어요?” 저는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전남편의 말로는, 아이가 텔레비전과 게임을 몹시 좋아하는데 그 안에는 온통 싸움과 살인 장면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밤에 자면서도 계속 잠꼬대를 하고 이불을 차며, 입에서도 그런 내용들을 중얼거렸습니다. 제가 아이를 돌볼 때는 밤새도록 눈을 제대로 붙이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대법을 통해 아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돌아와서 숙제가 적어 시 한 편만 외우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시를 다 외운 후에 저는 일부러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도 시를 외우고 있는데 아주머니 책을 보고 확인해 줄 수 있겠니?” 아이는 기뻐하며 동의했습니다.
저는 《홍음(洪吟)》을 꺼내 아이에게 읽어주었고, 아이도 따라 읽으며 여러 편을 연달아 읽었습니다. 제가 밥을 하러 간 뒤에도 아이는 놀랍게도 혼자서 계속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이 흐뭇했고 ‘혹시 사부님께서 이 아이를 우리집에 법을 얻으러 보내신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아이는 잠자리에서 더 이상 이불을 차거나 잠꼬대를 하지 않고, 아침까지 편안하게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매일 아침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줄 때, 가끔씩 아는 사람들을 만나곤 했습니다. 그들은 비웃으며 전남편이 스스로 고생을 자초한다고 말하고, 제가 왜 아직도 그의 아이를 돌봐주냐며 자존심도 없냐고 했습니다. 한번은 그들의 말을 아이가 듣게 되었고 아이는 화를 내며 학교에 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빠가 저를 때리게 하겠다고 위협하며, 제가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심성을 지키지 못하고 아이를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아빠에게 나를 때리게 하겠다고? 나와 너는 어떤 관계니? 내가 자발적으로 너를 돌보고 네 아빠에게 한 푼도 받지 않았는데!” 예전에 전남편이 이혼을 강요하면서 저를 심하게 때렸던 기억이 떠올라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러나 곧 바른 생각이 잘못된 생각을 눌렀고, 어린 아이에게 화낼 일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미안해, 아주머니가 너에게 화낼 게 아니었어. 넌 아무 잘못이 없어. 앞으로는 이렇게 하지 않을게. 자, 빨리 학교에 가자.” 아이는 제 목소리가 부드러워진 것을 보고 순순히 차에 올라 저와 함께 학교로 갔습니다.
그 후로 등교길마다 저는 아이에게 도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제가 수련하는 사람이라 화내거나 노여워해서는 안 되며, 앞으로 반드시 고칠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또한 ‘진선인(眞·善·忍)’의 표면적인 의미도 설명해 주고, 어려움이 있을 때 ‘대법이 좋다(大法好)’고 생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소선대 조직에서 탈퇴하도록 도왔습니다. 한번은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제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9자 진언을 기억하는지 물었습니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진은 거짓말하지 않는 거고, 선은 모든 사람에게 잘하는 거고, 인은 다른 아이가 나를 때려도 참고 되갚지 않고 남을 용서하는 거예요.” 저는 종종 작은 선물과 아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주며, 조금이라도 좋아진 점이 보이면 칭찬하고 작은 선물로 격려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병업 가상으로 계속 기침을 했는데, 아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뭐 안 좋은 걸 드셨어요?” 저는 괜찮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겨울에는 거실이 추워서 아이에게 제 방에서 숙제하라고 했고, 딸이 옆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한 후 몸이 좀 불편해서 침대에 기대어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제가 쉬는 모습을 보더니 딸의 손을 잡고 거실로 나갔습니다. 저는 아이가 점점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게 된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예전에 아이는 집에서 꼬마 폭군이었고, 부모조차 그를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는 다른 아이의 머리를 다치게 하거나 손가락을 부러뜨리곤 했습니다. 엄마가 꾸짖으면 엄마와 맞서 싸우고 심지어 엄마의 손을 물어 상처를 내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는커녕, 주변 사람이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부숴버렸습니다. 어느 날, 올케가 저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이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변했어요?” 저는 그것이 모두 대법 덕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아이가 비록 어리지만 대법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점점 말을 잘 듣고 이해력이 생기자, 우리는 아이에게 독립심을 길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스스로 아침 식사를 사 먹고 혼자 등교하도록 했습니다. 전남편이 출근해서 집에 없을 때 아이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는 것 외에는, 생활 속에서 아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은 점차 스스로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항상 아이를 격려하고 칭찬하자 아이도 점차 훌륭한 어린이로 성장했습니다.
이 반년 동안, 전남편도 아이 엄마에 대한 원한을 내려놓았습니다. 저와 딸은 자주 그에게 전통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며, 관대하고 너그러운 대장부가 되어 아이 엄마를 용서하고 그녀에게 기회를 주어 돌아오기를 기다리라고 조언했습니다. 전남편은 이제 평온해졌고 처음에 품었던 살인적인 분노와 폭력성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딸에게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며, 내면이 이제 강해졌고 앞으로 잘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전남편 집안의 일이 온 동네에 소문이 퍼졌을 때 근처에 사는 사촌 언니가 웃으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무개야, 이 기회에 아이 아빠를 되찾아 오지 그래! 그 여자(아이 엄마)는 이미 다른 사람을 찾았으니 돌아오지 않을 거야!” 저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 없어요. 그건 어린 아이에게 너무 잔인해요. 아이 엄마가 돌아올 의사가 있다면 우리는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해요. 아이가 이렇게 어린데 엄마 없이 지내게 할 수는 없어요. 너무 불쌍해요.” 사촌 언니가 계속 저를 설득하려 하자 저는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사람과 신이 함께 있는 시대예요. 제가 법을 얻은 것은 곧 신이 되는 길인데, 신과 인간이 어떻게 다시 얽힐 수 있겠어요?” 그녀는 이 말을 듣고 마치 충격을 받은 듯했고 저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반년 동안, 저도 인간적인 마음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생각했습니다. ‘만약 전남편이 돌아온다면, 우리 두 아이도 완전한 가정을 가질 수 있고, 전남편도 대법을 접할 기회가 생겨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정법이 이미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고, 모든 수련생들이 분초를 다투며 사람을 구하는 일에 매진하는 이때, 저는 인간 세상의 정에 얽매여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련생의 말씀이 저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꼭 함께 살아야만 그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만날 때마다 진상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아이의 변화를 보면서 저는 그가 구원받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믿습니다.
원문발표: 2025년 4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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