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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생이 자신을 가두는 몇 가지 형식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사존의 정법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한 이래 어느덧 25년이 흘렀습니다. 이 25년간의 박해 속에서 수많은 대법제자들이 납치와 가택수색, 강제노동을 당했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명혜망에 따르면 지금까지 중공의 부당한 박해로 사망한 대법제자 중 신원이 확인된 사례만 해도 5천 명이 넘습니다. 중공이 방어 수단이 없는 대법제자들에게 저지른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도 대다수 수련생은 사람의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로 걸어 나와 대법을 실증하며 거짓에 속은 중생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수련생은 이 중요한 시기에 여러 이유로 집에만 틀어박혀 관망만 하며 걸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이런 수련생들을 가장 걱정하실 것입니다. 바깥에서 정진하는 수련생들이 이런 수련생들을 좀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정체(整體)로서 서로 돕는 관계이고 모두가 법을 위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이들도 기꺼이 신의 광환을 벗어던지고 사부님을 따라 세상에 내려와 정법을 도왔고, 갖은 고난을 겪으며 이번 생에 행운으로 사부님의 대법을 만났습니다. 모두 사부님의 가족입니다.

우리 지역에도 비슷한 수련생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집에 가둔 그들의 몇 가지 전형적인 상태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다만 제 현재 층차에서 깨달은 것일 뿐이니 부족한 점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첫째, 개인 수련만 하는 경우

사부님께서 일찍이 법에서 말씀하시길, ‘7.20’ 박해 전인 1999년 당시 중국에서 파룬궁 책을 보는 사람이 1억 명에 달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중공이 박해를 시작하고 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자, 일부는 연공도 배움도 그만뒀습니다. 또 어떤 수련생들은 박해 이후로 집에서 법공부와 연공만 하면서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 중 한두 가지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수련생들은 박해 초기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이 상태로 있습니다.(물론 혼자 수련하면서도 세 가지 일을 다 하는 이는 제외) 이들은 외부 수련생들과 만나지 않고 집에서 법공부와 연공만 합니다. 사실 이런 수련 형태가 만들어진 것은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들 중 일부는 박해 초기에 가택수색이나 부당한 강제노동을 당하고 돌아온 뒤로 칩거 생활을 하며 외출을 줄였습니다. 다른 수련생들도 만나지 않는 상태가 길어지다 보니 결국 은둔하게 된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납치나 가택수색은 전혀 당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정반대로 변한 사회 분위기와 중공의 악랄한 박해에 놀라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수련생이 각 지역에 적잖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람’의 측면은 대법에서 좋은 것을 얻었기에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손으로는 사람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신을 놓지 않으려 집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 다른 수련생들과 일대일로 연락하면서 사부님의 새 경문이 발표되면 그 수련생 집에 가서 가져오고, 그 뒤엔 다시 조용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아예 새 경문이나 ‘명혜주간’도 찾지 않고 그저 집에서 법공부와 연공만 합니다. 우리 지역에도 이런 수련생들이 있지만 다른 수련생들과 교류하지 않고, 다들 그들을 찾지도 않아서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주변에 이런 수련생이 있다면 꼭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정법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이 만고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 대법제자 개개인이 구해야 할 중생들은 아직도 우리가 구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둘째, 노령화 문제

65세 이상 수련생이 우리 지역 전체 수련생의 75% 정도를 차지합니다. 이분들은 사부님께 법을 전해 받을 당시 거의 반백의 나이였는데, 지금은 대부분 70대, 80대가 되었고 심지어 90세 가까이 된 분도 있습니다. 수십 년간 대법 속에서 수련한 그분들은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날마다 경쾌하게 걸으시고,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다시 검게 돌아왔습니다. 명혜망에서 본 기사에 따르면, 산둥성의 한 90대 노인은 대법 수련 후 온몸의 병이 없어지고 얼굴에 홍조까지 돌았는데, 매일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누비며 진상을 알리고 사람들을 구했다고 합니다. 이런 수련생들은 대법제자 중에 많고 정신 상태는 젊은이 못지않습니다. 날마다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로 바쁘게 지내며 중생 제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런 분들은 비교적 잘 수련하는 노년 수련생들로서 세 가지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며 대법 안에서 정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수련생은 좀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매일 법공부와 연공은 하지만 중생을 구하는 일은 사부님의 정법 노정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바로 ‘사람’의 관념을 바꾸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정법을 도와야 할 대법제자가 아니라 그저 ‘노인’으로 여기며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생각으로 자신을 묶어두고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 지역의 노년 수련생 A와 교류를 나눴는데, 제가 “우리가 중생을 구할 때 자료 몇 가지만 나눠주고 끝내선 안 돼요. 직접 만나서 진상을 알려야 해요. 그래야 사람도 구할 수 있고 사람의 마음과 관념도 많이 제거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A는 난색을 표하며 “저도 나가서 진상을 알리고 싶은데 나이가 많아 입을 열기가 힘들어요”라고 했습니다. 또 한번은 B 수련생에게 “컴퓨터 좀 배워보세요. 그럼 명혜망에서 모든 자료를 다 보실 수 있어요”라고 권하니 “에이, 나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걸 다뤄요”라며 거절하셨습니다.

노령화 문제는 때로 건강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가 20년 넘게 대법 안에서 수련했어도 관념의 영향을 받은 일부 노년 수련생은 여전히 병업(病業)의 가상에 시달리고 있고, 심지어 육신을 잃은 분도 있습니다.

2020년에 제가 식료품점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어느 날 60대 할아버지 한 분이 잡곡을 사러 오셨는데, 자기는 ‘3고(三高, 고혈압·고혈당·고지혈증)’가 있어서 잡곡으로 보양해야 한다면서 어떤 잡곡은 혈당을 낮추고 어떤 잡곡은 혈압 조절에 효과가 있다고 아주 전문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저는 대법 진상을 알려드리고 9자 진언(眞言)을 정성껏 외우면 건강에 신기한 효과가 있으니 이런저런 잡곡을 먹을 필요도, 그런 번거로움도 없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쁜 얼굴로 “저도 파룬궁을 연마합니다! 다른 지역에서 이 도시로 와서 손자를 보고 있어요. 20년 넘게 연공했고 지금 다른 수련생 찾는 중이에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연공하시는데 어떻게 ‘3고’가 있으세요? 왜 또 보양이 필요하신가요? 그러면 속인이랑 뭐가 달라요?”라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도 매일 책 보고 연공하는데 몸에 생긴 ‘3고’가 내려가질 않아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매일 책을 보고 법공부를 해도 사람의 관념을 안 바꾸면 그냥 사람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우리 많은 수련생들, 노년층뿐만 아니라 저 자신까지 포함해서 공통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건 못 고친다’, ‘이건 바꿀 수 없다’는 사람의 이치에 사로잡혀 책을 보고 연공만 하면서 법에서 뭔가를 얻으려 드는 것입니다. 이러면 법공부를 해도 법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 강의실에 앉아 초등학교 교과서나 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수련에서는 관념의 전환이 가장 중요합니다.

셋째, 옛 공로에 기대는 문제

‘옛 공로에 기대다[吃老本]’는 말은 한 사람이 예전에 돈을 많이 벌었거나 어떤 분야에서 성과를 내어 소위 ‘원로’ 지위를 누린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속인사회에는 “좋은 사나이는 옛 영광을 자랑하지 않는 법[好漢不提當年勇]”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 우리 대법제자들 중에도 ‘옛 공로에 기대 안주하는’ 현상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입니다. 99년 ‘7.20’ 박해 초기에 많은 대법제자들이 엄중한 상황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규모로 진상 전단지를 배포하며 대법을 실증하고 사부님의 결백을 변호했습니다. 악이 아무리 날뛰어도 중생을 구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악이 아직 창궐하던 어느 날, 저는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매일 밤 먼 교외로 자료를 배포하러 갔고, 한밤중에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곤하단 느낌은 없었고 마음은 몹시 가벼웠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박해가 많이 수그러들고 환경이 느슨해지면서 우리 지역 수련생들 사이에 해이해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예전처럼 긴장된 분위기는 지나갔고 지금은 악도 많이 줄었으니 좀 느슨해져도 되겠지. 그동안 자료도 많이 배포했고 일도 적잖이 했는걸’이라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안일한 마음을 품은 수련생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한번은 우리 지역 수련생 C와 중생을 구하는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눴습니다. 제가 “사부님께서 예전에 법에서 말씀하신 적 있어요. 우리는 직접 만나서 진상을 알려야 해요. 자료 몇 장 돌리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구하는 효과를 내기 힘들어요”라고 하니까, C는 “박해가 심했던 그 몇 년간 우리가 했던 게 적지 않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즉, 지금은 조금만 해도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C처럼 생각하는 이가 소수는 아닙니다. 자세히 분석해보면 이런 ‘옛 공로에 기대 안주하는’ 심리는 사람 마음으로 사부님과 흥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수련생은 아직 법리를 똑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자신이 사부님과 대법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내가 그렇게 많은 자료를 돌렸고 대법을 위해 그렇게 많이 했는데 설마 사부님께서 날 빠뜨리시진 않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대법 일을 하는 걸 수련으로 착각하고, 자신의 속인 관념 제거는 소홀히 합니다.

사존께서는 ‘험악(險惡)을 멀리하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대법은 원래 있던 것으로, 인간 세상에 펼쳐짐은, 말후에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으로 대법을 위해 무엇을 하겠는가? 대법이 ‘사람’을 구하고 있다! ‘사람’이 대법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넷째, 가정의 감옥화

1) 가족의 속박을 받는 유형: 저는 지금껏 수련하면서 가족의 제약을 받는 수련생이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주된 이유는 우리가 아직 가족에게 진상을 잘 알리지 못해서 그들이 중공의 거짓말에 속아 있거나, 진상은 꽤 많이 알렸지만 효과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구해야 할 중생이 아니라 자신의 ‘식구’로 보고 진상을 알리거나 정(情)을 갖고 말하니 잘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아주 중요한 원인은 일부 수련생이 밖에선 수련인답게 굴면서도 집에선 해이해진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언행을 가족은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대법제자는 가정에서 자신의 형상을 더욱 중시해야 합니다. 가족은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집에서 진상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거나 대법제자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세 가지 일에도 직접적인 악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면 우리의 수련과 중생 제도에도 손실을 초래하게 됩니다. 어떤 가족은 수련생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어떤 이는 오로지 집에서만 연공하게 하며 밖에 나가 다른 수련생을 만나는 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혼 지경까지 간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가족들도 그들 나름의 사명과 책임이 있을 텐데, 아마 당신의 수련 성취를 돕겠다고 신께 맹세하고 이 세상에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하면 가족이 그 서약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어 오히려 신께 죄를 짓게 만드는 게 아닐까요?

2) 스스로를 속박하는 유형: 이건 위의 경우와 정반대입니다. 가족은 수련생의 법공부와 연공, 세 가지 일을 전혀 막지 않고 오히려 지지해 주는데도 이런 수련생들은 여전히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한 마디로 ‘바빠서’입니다.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이 아니라 속인의 역할을 잘 맡느라 날마다 바쁜 겁니다. 집에선 노인 봉양에 아이 돌보기, 손주와 외손주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고, 또 사업 때문에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가정의 책임을 내팽개치라는 건 아닙니다. 사부님의 대법도 속인 사회에서 전해지고 있으니 우리는 여전히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해야 합니다. 다만 그 분주함 속에서도 우리가 정법을 도와야 할 대법제자라는 주요 역할을 잊어선 안 됩니다. 만약 속인의 역할만 잘 맡을 뿐, 중생 제도라는 신성한 사명은 홀시한다면 그건 본말전도가 아닐까요?

그럼 이 문제를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시간 관리를 잘하는 것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우리 개개인에겐 주어진 시간도 제한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 활용을 잘해야 합니다. 언제 무엇을 할지 배치하되, 정해진 시각이 되면 지체 없이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가령 법공부 시간이 되면 천둥이 쳐도 법공부를 해야 하고, 연공 시간이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연공에 임해야 합니다. 일할 때는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합니다. 어떤 일을 언제 하기로 정했으면 반드시 그 시간에 그 일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시간을 잘 배분하려면 강력한 실천력(의지력)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또 스스로에게 높은 기준을 요구하면 안일함과 나태해진 상태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저 같은 경우 알람을 새벽 3시 15분에 맞춰놓고 반드시 일어나서 연공을 합니다. 엄격한 자기 관리로 매일 아침 3시 15분이면 꼭 일어나되, ‘못 일어나도 보충할 기회가 있겠지’라는 변명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낮에도 낮에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높은 기준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또 이렇게 하면서 강인한 의지력도 수련해낼 수 있습니다. 바빠서 정신없는 수련생들은 이 방법을 시도해보시길 바랍니다. 시간 관리를 잘하고 해야 할 일을 날마다 질서 있게 해내면 적은 힘으로도 큰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속인사회에 부합해서 수련할 수 있고, 가정에서도 책임을 다할 수 있으며, 우리의 세 가지 일도 소홀히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른다’는 말로 변명하기

몇 년 전 법공부할 때 있었던 일인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 적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께 도움이 되고 좀 깨우침을 드렸으면 합니다. 그날 법공부가 끝나고 몇 명의 수련생이 늘 하던 대로 교류를 했습니다. 저는 수련생 D와 E의 대화를 곁에서 들으면서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련은 정말 쉽지 않아요. 매일 넘어야 할 고비는 말할 것도 없고 없애야 할 집착심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자 E가 받아서 말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르고 할 수 있는 만큼 하세요. 어차피 지옥엔 안 갈 테니까요.” 전 이 말이 너무 부적절하고 소극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방의 체면을 살려야 해서 딱히 지적하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모든 수련생에게 일깨워 드리는데, 일사일념(一思一念), 일언일행(一言一行) 속에서 반드시 자신을 수련해야 합니다. 수련에는 작은 일이 없습니다.

사실 이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른다’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순응하고 인위적으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어떤 증상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나타났을 때 그걸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여기고 너무 간섭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가 당시 수련생 E의 상황과 일치한다고 봅니다. E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소극적인 마음으로 저 말을 한 뒤, 그 부정적인 심리를 계속 키워나간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사부님께서 법에서 말씀하신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른다’는 건 우리에게 최대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며, 당신의 것이라면 자연히 당신에게 돌아올 거라는 뜻입니다. 그건 사물이 발전하는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E가 말한 그 소극적인 소위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른다’는 건, 수련자로 하여금 정진을 멈추게 하고 의지를 상실케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미래의 한 대각자(大覺者)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수련에서 정념을 말하는데 정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부정적인 것들을 품지 맙시다. 다른 공간에선 모든 것이 다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 ‘부정적인 감정’ 역시 삼계 내의 산물이라 다른 공간에선 살아 숨 쉬는 생명체입니다. 그것의 사명은 바로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들고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환경 속에서야 그것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법제자들은 수련 중에 절대로 그런 것들을 품으면 안 됩니다.

여섯째, 돈으로 정과(正果)를 살 수 있는가?

우리 지역에도 다음과 같은 ‘수련생’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라 정리해서 여러분이 경계할 수 있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수련생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간과할 순 없습니다. 그들은 법공부와 연공에는 아주 적극적입니다. 하지만 진상 알리기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거나 아예 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료점에 돈을 대주는 건 엄청 적극적이라서, 늘 일정 금액을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수련생들은 대개 형편이 넉넉한 편인데, 사업하는 분도 있고 퇴직하고 연금 잘 나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이 보내주신 자금 덕분에 자료점 운영과 중생 제도에 큰 도움이 되었고, 정말 공덕이 무량한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우리에겐 이 부분에서 법리를 오해하고 계신 수련생을 일깨워줄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헌금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수련을 대신할 순 없고, 집착심 제거를 대신할 순 없으며, 세 가지 일로 중생을 구하는 것을 대신할 순 없습니다! 일부 수련생은 자료점에 돈을 보내고 나면 괜히 뿌듯해하는데, 정작 본인은 자료 한 장도 돌리러 나가지 않으며 중생을 만나 진상 알리는 건 더더욱 하지 않습니다. 전 이게 바로 가장 더러운 사심(私心)이 여지없이 드러난 거라고 봅니다. 중생을 구하러 나가지 않으면 정법이 끝날 때 자신이 떨어질까 봐 두렵고, 그렇다고 나가자니 위험할까 봐 겁이 나는 것입니다. ‘겁이 나서 사람을 구하는 활동은 못 하겠으니 돈이라도 내야겠다, 어차피 돈은 있으니까.’ 이 얼마나 더러운 마음입니까!

물론 제가 하는 말은 세 가지 일을 다 하면서 자료점에 돈도 대주시는 분들을 두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자료점 후원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다만 이 부분에서 법리를 오해하시는 수련생 몇 분을 일깨워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개인의 이익을 버리고 대의를 택하는 그 정신에 감탄합니다. 우리에겐 중생을 구해야 할 사명이 있고, 여러분의 그 사심 없는 헌신 덕분에 중생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겁니다.

한번은 우리 지역에 그런 수련생 F에게 어떤 방식으로 중생을 구하고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F는 별다른 방법을 쓰지 않고 밖에도 안 나가며 그저 자료점에 돈만 댄다고 했습니다. 몇 년 전 일인데 그 말을 듣고 저는 화도 나고 우습기도 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돈을 주고 정과를 살 수 있나요?”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비록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일곱째, 안일은 독주보다 무섭다

고대 동진 시대에 도간(陶侃)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인배의 모함으로 외진 곳으로 좌천되어 부임했습니다. 무장 출신인 도간은 그곳에서 문관처럼 지내게 되었고 날마다 할 일이 없었습니다. 도간은 이대로 살다간 몸이 망가질 것 같아 걱정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벽돌 100장을 서재로 날랐다가 저녁에 다시 밖으로 날랐습니다. 이렇게 몇 년을 보내다 70세가 되어서는 과연 큰일을 성사시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도간의 이런 행동은 안일함을 극복한 사례입니다.

예로부터 수련계에서는 안일을 수련인의 큰 적으로 여겼기에 ‘안일은 독주보다 무섭다’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수련은 고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서 고생하지 않으면 업력을 없앨 방법이 없습니다. 업력을 제거하지 않고서야 어찌 원만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수련인은 절대로 안일을 추구해선 안 됩니다.

여러분도 밀라레파 부처님의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그분의 사부님은 제자가 업을 갚도록 여러 큰 고난을 주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제자들을 이끌고 동냥하러 다니고 숲속에서 고행을 하셨습니다. 그분들도 안일을 마치 독을 지닌 전갈처럼 여기고 두려워하셨습니다.

지금 대법 속에서 수련하는 우리는, 자연환경이든 물질적 여건이든 고대인들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서 수련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물질이 풍족해서 의식주 해결이 매우 편리하니 이런 고생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사부님께서는 ‘7.20’ 이전에 대법제자들을 원래 자리로 다 밀어주셨다고 하셨고, 진수(眞修)하는 제자들의 신체를 정화해주셨으며,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등 정말 좋은 것들을 너무나 많이 주셨습니다. 옛사람들에 견주어 보면 우리는 아주 편안한 환경에서 고생 하나 없이 수련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생이라야 매일 법공부하고 연공하며 집착심을 없애는 것뿐인데, 고대의 수련과 비교하면 고생도 아닙니다. 그래서 안일함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고생과 안일은 언제나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수련은 고생을 의미하는 건데, 고생하지 않으면 분명 안일 속에 빠지게 될 겁니다.

저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했어도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을 아직 완전히 없애지 못했습니다. 수련 상태도 좋다 나쁘다 합니다. 며칠 잘 수련했다 싶으면 좀 느슨해집니다. 사람을 구하는 일에서도 날씨가 좀 안 좋다거나 다른 핑계로 나가기 싫어하고, 중생을 직접 만나서 진상 알리는 걸 꺼렸습니다. 이건 다 안일심이 교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도 안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수련생이 있다면 반드시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안일은 수련인의 정진하려는 의지를 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주 대법 속에서 수련하고 있고 하늘의 신들도 부러워하는 대법제자입니다. 우리의 수련이 옛사람들보다 못할 순 없습니다. 밀라레파 부처님과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련은 개인수련일 뿐, 이번 사부님의 정법을 위해 기초를 닦아준 것인데도 그분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달프게 수련하셨습니다. 동진의 대장군 도간은 평범한 사람인데도 고생 속에서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언젠가 사부님의 정법이 갑자기 끝나면 우리가 고생하고 싶어도 고생거리를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이 부분에서 잘하지 못한 수련생들은 어서 ‘온실’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고생은 반드시 해야 하고, 책임져야 할 것도 반드시 책임져야 합니다!

여덟째, 두려움이 근본 문제

앞서 정리한, 수련생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몇 가지 상황은 결국 모두 두려움이라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두려움은 구(舊)우주의 이기적인 것으로, 반드시 버려야 할 것입니다. 사부님의 정법이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이 두려움을 빨리 없애고 이기적인 낡은 이치에서 속히 벗어나지 않으면 정말 이 만고의 기회와 인연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사존의 설법을 되새겨봅시다. “어떠한 생명이 우주대법이 구도할 자격을 갖고 있는가? 구도 받는 생명은 단지 개인의 원만을 위한 것이겠는가? 어떻게 해야만 대법제자(大法之徒)가 될 자격이 있는가? 집에 숨어서 이른바 법 공부를 한다는 그러한 사람들이겠는가?” (정진요지3-역시 방할하노라)​

“두려운 마음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기연을 잃게 하며, 두려운 마음은 사람이 신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생사의 고비이다.”[정진요지3-생사의 고비(死關)에서 벗어나라)]

옛 고사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잘 알려진 소무(蘇武)가 양을 치던 이야기입니다. 소무가 흉노에게 잡혀갔을 때 그들은 명예와 돈으로 회유하며 귀순하라고 했고 나중에는 협박까지 가했습니다. 하지만 소무는 굴하지 않고 줄곧 대의를 지켰습니다. 흉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소무를 북쪽 바다 인적 없는 곳으로 보내 양을 치게 했습니다. 온 산이 눈에 덮여 먹을 것조차 없는 그곳에서 소무는 들쥐를 잡아먹고 눈을 녹여 마시며 배를 채웠지만, 매일 같이 한나라의 큰 깃발을 높이 들고 민족의 기상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의 영웅입니다.

저는 수련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두려움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생기면 용기를 냅니다. 그래서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저는 신분을 당당히 밝혔고, 대법제자임을 감추려 한 적이 없습니다.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인데 숨길 게 뭐가 있나요? 그래서 2005년에 부당한 강제노동을 당했을 때도 떳떳했고, 당당하게 수용소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제 25년 수련 여정에서 주된 생계 수단은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일하는 거였습니다. 가게 일, 식당 일, 청소부, 가정부 다 해봤는데 우리 수련으로 치면 행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일하든 저는 먼저 신분을 밝히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똑똑히 말합니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사장과 동료들에게 진상을 알립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점이 자기 자신에게 높은 표준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들 제가 파룬궁 수련한다는 걸 아니까 쉽게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않게 되고, 힘들고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많이 하게 됩니다.

제 말은 두려움을 감추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덮어두면 오히려 자라나서 마치 우리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소극적으로 만듭니다. 우리가 대법을 수련하는 건 떳떳한 일인데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그러니 집에 갇혀 있는 수련생들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얻은 건 무엇인가요? 끝없이 넓은 우주 대법입니다! 우리는 대우주의 총애를 받은 생명들로서, 하늘의 무수한 신들이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속인의 기개만도 못하단 말인가요? 조금만 고비가 있어도 의기소침해지고, 약간의 풍파에도 집에 숨어버리는데 정말 사부님께 면목이 없고 대법에도 부끄럽지 않습니까! 우리는 깊이 반성해봐야 합니다. 수련 전에 우리의 심신 상태가 어땠고, 수련 후에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상처가 아물면 은혜를 잊는 사람이 되면 되겠습니까? 대법은 우리에게 건강한 몸과 화목한 가정, 뛰어난 생활 여건을 주셨는데 왜일까요?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중에서 우리 자신의 과위를 원만히 해주시려는 것이 아닌가요? 사악이 아직도 제멋대로 중생을 박해하는데 우리가 그저 참고만 있어야 할까요?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계속 집에만 있으면서 법공부와 연공만 할 건가요? 정말 그렇게 한다면 중생이 죽어가는 걸 보고도 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살인 방화하는 것을 보고도 당신이 상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心性(씬씽) 문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좋은 사람을 체현해 낼 수 있겠는가? 당신이 살인 방화하는 것마저 상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상관할 것인가?”(전법륜)​

수련생 여러분, 사부님의 정법이 우리에게 남겨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잘 분석하고 법에 대조해봐야 합니다. 적극적이고 진지한 자세로 수련에 임하고, 어떤 사람마음을 고의로 감추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사실 어떤 사람마음과 집착은 못 찾는 게 아니라 제거하기 싫어서 그런 겁니다. 심지어 키우고 있기도 합니다.

말씀이 다소 무거웠지만 사부님께서도 여러 차례 경종을 울리셨고 저도 글을 쓰면서 저 자신을 격려하고 일깨우며 엄격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법제자라는 칭호를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맺음말

수련은 마치 물을 거슬러 배를 저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밀려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돛을 올리고 항해를 이어가야 합니다. 정법의 마지막 길, 그 얼마 남지 않은 여정을 잘 걸어가야 합니다.

이 글은 우리 지역에서 나타난 상황만 근거로 전반적인 상황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만약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수련생이 있다면 서로 도우면서 일깨워주면 좋겠습니다. 사부님께서 ‘험악(險惡)을 멀리하라’에서 “서로 구조(救助)하게 하고”라고 하신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이상은 제 개인적 깨달음일 뿐이니 적절치 않은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발표: 2024년 4월 10일
문장분류: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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