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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에 대한 약간의 이해

글/ 말레이시아 대법제자

[명혜망] 수련생들이 교류할 때 자주 논쟁이 일어나곤 합니다. 모두들 자신은 법에 기초해서 말하고 있으며 사부님의 설법을 인용해 자신의 깨달음을 분명하게 설명하는데, 상대방은 왜 그렇게 간단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할까 생각합니다. 또 자신은 상대방의 오해를 바로잡아주고 상대방을 위해 말하는 건데, 상대방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논쟁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우리가 상대방과 이치를 말할 때 인내심과 자비심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가로막는 것을 좋아하며, 거창한 이론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데 익숙해져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높게 깨우치고 바르게 깨달았다고 여기며 “보세요, 제가 한 말은 모두 법에 기반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지만, 온화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지, 선한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지는 잊어버리고, 얼굴과 귀가 빨개질 정도로 격렬하게 다투면서 서로의 집착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심성에서 한 번 더 찾아본다면, 우리에게 자신이 남보다 높다는 의식이 있지는 않았을까요? 상대방이 말한 것이 자신만큼 좋지 않다고 여기는 약간의 질투심은 없었을까요? 수구(修口)하지 않거나, 오만하거나, 남을 가르치려 들거나 하는 모습은 없었을까요?

다음은 저의 오만이 생겨나는 과정을 스스로 한번 분석해보겠습니다.

저의 수련 과정을 돌이켜 보면, 막 입문하고 ‘전법륜(轉法輪)’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우침을 얻어서 그 기쁨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에는 오성이 높지 않고 사람의 정과 집착이 강했지만, 발언은 적극적이고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다른 수련생들이 제 집착심을 지적해주면 내심 좌절감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저는 신수련생이니까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때 가장 듣고 싶었던 교류는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실 때의 여러 가지 기적과, 어떤 수련생이 천목이 열려 보게 된 신기한 광경들, 대주천이 통해 가부좌할 때 날아오른 일, 숙명통으로 전생의 일을 본 이야기 등이었는데, 신기하면서도 자극이 되어 제게도 하루빨리 그런 신통이 나타나길 기대했습니다.

수련이 깊어지면서 점차 법리상으로 수련의 목적과 참뜻을 알게 되자, 제가 예전에 말한 것들이 너무나 부족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제가 말한 것은 모두 집착과 속인의 마음이었고, 추구했던 작은 능력과 신통은 수련의 목표와는 십만팔천리나 차이가 났습니다. 이런 부끄러운 마음 덕분에 제 수련 태도를 바로잡을 수 있었고, 여기저기 사람을 찾아다니며 교류하는 대신 더 많은 시간을 법공부에 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법리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수련생들과의 교류에서 그들의 집착을 알 수 있게 됐고, 저 자신도 예전에는 그랬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교류할 때는 정말 주의하고, 정(情)에 이끌리지 말며, 법에서 깨달은 바를 더 많이 교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사부님의 후기 설법을 공손히 읽은 후에는 삼계의 안개가 한 겹씩 걷히면서 대법이 이렇게 깊고 심오하다는 걸 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더욱 법공부에 전념해 저만의 깨달음을 얻기 시작했고, 수련생들과 교류할 때도 점점 더 많은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제가 벌써 ‘노(老)’ 수련생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수련생의 잘못을 지적하고, 수련생들과 법에 대한 이해를 논쟁하기 시작했으며, 차차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제가 한 말은 모두 법에 근거한 것인데, 방금 A 수련생에게는 크게 칭찬받았다가 기분이 좋아 B 수련생과 나누려고 갔더니 인정받지 못하고 상대방을 설득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여러 가지 집착이 있다는 지적을 받아서 얼굴이 빨개지고 화가 나서 며칠 동안 진정할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비록 내 개인적인 관념과 집착심이 섞여 있긴 했지만 내가 한 말은 이치에는 맞잖아? 우리가 논증하는 문제에서 내가 틀린 게 없는데, 그는 왜 그렇게 오성이 낮아서 내 흠만 잡고 요점은 듣지 않는 걸까? 그는 밖을 향해 찾고 있어!’ 이 시점에서 저는 실제로 아직도 제거하지 못한 집착이 너무 많다는 걸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교류할 때 무의식중에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 수를 남겨뒀고, 잠재의식 속에서는 자신의 집착을 숨기기 시작했으며, 더는 신수련생처럼 사고가 단순하지 않게 됐습니다.(엄밀히 말하자면 인정 받기 위해 상대방을 설득하려 하거나, 칭찬받기를 추구하는 이 두 가지 목표에는 모두 수련인이 추구할 바가 아닌 속인의 마음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 이후의 교류에서 저는 남의 허물을 들추는 것에 익숙해졌고, 입버릇처럼 “전 직설적인 사람이라 좀 퉁명스럽게 말하는 편이지만 당신을 겨냥한 건 아니고 법에서 서로 인식을 나누는 것뿐이에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겉으로는 “법에서 인식한다”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집착심을 양파처럼 겹겹이 감추고 숨기고는, 차분하고 신랄한 말투로 수련생들의 사람마음을 직설적으로 지적하고 상대방의 집착을 짚어내며, 사소한 것 하나를 트집 잡아 전체를 부정하면서 오만함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니 다른 수련생들은 제 사람마음을 간파하기가 더 어려워졌고, 오히려 받는 칭찬은 더 많아진 것 같았습니다. 칭찬은 환희심을 시험하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입으로는 “절 칭찬하지 마세요”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랑스러운 미소를 주체할 수 없어 ‘오늘도 멋진 하루였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끔은 화들짝 놀라 깨닫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행복한 기분과 인정받는 만족감을 즐기고 싶었습니다.

이 단계에 이르자 저는 결국 감히 자신을 ‘제자’라고 칭하고 완전히 ‘노수련생’ 대열에 합류시켰습니다. 이제 누구도 법리로 저를 누를 수 없을 거라 여기게 됐습니다. ‘예전에 부러워하던 천목이 열린 사람들이나 신통을 나타낸 이들은 사실 대근기지인은 아니었어. 그들이 말한 건 다 낮은 층차의 법리이고 오직 전법륜만이 가장 높아.’ 법 앞에서는 겸손했지만 수련자들에 대한 태도는 전과 전혀 달라졌습니다. ‘수련에 입문한 순서를 따지지 않고 모두 제자인데, 당신의 그 가엾을 정도로 얕은 인식으로 나와 논쟁하려 하고 날 설득하려 하다니, 그건 불가능해!’ 이렇게 해서 지금의 제가 만들어졌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성숙하고 중후하며 예의 바르지만, 실제로는 거만하고 오만이 가득한 노수련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수련할 기회도 많이 남지 않았는데 이대로 가면 영원히 집착을 제거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교류를 많이 할수록 오만한 성격만 자랐기 때문입니다. 정말 단호한 마음으로 뿌리를 파헤쳐야 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청성(淸醒)’에서 말씀하신 어투와 선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나는 늘 말했다. 만약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티끌만큼도 자신의 목적과 인식이 없다면, 한 말은 상대방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고. 나는 단지 당신들에게 대법(大法)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나의 작풍(作風) 역시 당신들에게 남겨놓은 것이다. 일 처리 중의 어투, 선한 마음, 도리(道理)를 더하면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킬 수 있으나 명령은 영원히 할 수 없다!”(정진요지-청성)

저는 너무 오랫동안 흐리멍덩한 상태였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수련인의 자비심은 고사하고 속인의 가장 낮은 층차인 ‘온량공검양(온화·선량·공경·검소·겸손)’조차 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자심생마에 빠지고 난법을 연설하는 곤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예가 너무나 많기에 정말 경각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세상이 날로 타락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무의식중에 그 흐름에 따라가고 있습니다. 제가 대법 수련 환경에서는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사부님께서 지켜보시는 순수하고 정결한 대법 수련장의 가지(加持) 덕분이었음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속인 환경에 있게 되면 곧바로 해이해지고 자신의 기준이 속인보다 조금 높다는 것에 우쭐해하기까지 합니다. 이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왜 우리가 속인 속에서 수련해야 하는지’를 진정으로 깨닫게 됐습니다. 주변의 모든 친척, 이웃, 만나는 모든 낯선 이들과의 상호작용이 모두 시험이며, 가정환경, 사회환경, 심지어 삼계 내의 유형무형의 모든 환경도 다 수련장입니다.

또한 우리의 수련 속도가 우주 천체 중 그 어떤 수련 방법보다 훨씬 빠른 이유도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시시각각 수련의 용광로 속에 있고, 매 일사일념(一思一念)마다 뭇 신들의 층층 시험을 받기 때문입니다. 매 분 매 초를 모두 도(道) 중에 둘 수 있다면 수련의 속도는 ‘자연히’ 매우 신속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늘 자아를 똑똑히 바라보고, 깊이 숨겨진 어떤 집착이 사람마음을 일으키는지 찾아내, 더는 오만함을 방임해선 안 됩니다. 항목에서는 겸허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고, 생활 속에서는 타인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속인을 대할 때는 속인 환경에 부합하는 바른 이치로 좋은 사람이 되고, 수련생들을 대할 땐 처음처럼 수련하는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밖을 향해 보는 습관을 고쳐 안으로 찾아 자신을 수련해야 합니다. 모든 대법제자의 언행은 대법의 이미지를 대표하므로,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이 곧 대법의 이미지를 수호하는 체현입니다. 하나로 원융하여 정체(整體)를 이루는 것이 수련 환경을 잘 수호하는 것입니다.

모든 수련생과 함께 정진하여 진정으로 법 속에 용해되어 원만에 이르기를 희망합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4년 4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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