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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법회] 박해 초기 명혜 통신원을 한 경험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이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박해 초기 저는 조립식 컴퓨터를 구매했습니다. 당시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아 컴퓨터를 구매하는 그날 친척들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그 당시 컴퓨터 모니터는 매우 크고 무거웠습니다. 우리는 한나절 떠들썩하며 5천 위안(약 90만 원)에 가까운 모델로 구매해(당시에는 적은 돈이 아님) 집으로 안고 왔습니다.

그 후 매우 신기하게 한 수련생과 연락이 닿았는데 컴퓨터 기술을 좀 알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컴퓨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매우 기뻐했으며 바로 우리집으로 왔습니다. 그는 우리집에서 2박 3일 머물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뭘 하는지 저는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스크린에는 전부 영문이었고 제가 알아볼 수 없는 코드들로 가득했습니다. 수련생이 흥분하며 말했습니다. “명혜망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저는 명혜망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지금까지 이렇게 긴 시간 명혜망과 함께 걸어가리라 생각하지 못했고, 명혜망 통신원 신분으로 중국이라는 인간 세상의 큰 무대의 한 귀퉁이에서, 중국 대법제자들의 위대한 조사정법(助師正法) 장거를 문자로 기록할지는 더구나 몰랐습니다. 비록 모두 떨어져 있는 조각들이나 이런 무수한 조각들이 명혜망에 집결돼 한 폭의 웅장하고 화려한 작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제20회 명혜망 중국법회에 즈음하여 저는 박해 초기 명혜망 통신원을 하던 그 시절의 잊지 못할 경험을 회상하고 글로 적기로 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위대한 사존께서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비할 바 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명혜망에 접속하면서 실시간으로 사부님께서 발표하신 경문을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경문을 수련생에게 전해줄 수도 있었습니다. 또 전국 각지 대법제자 교류문장도 볼 수 있었고, 대법제자가 사악에 박해당한 글도 보도됐습니다. 그때 저는 수련생이 박해당한 보도 글은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박해의 잔인한 정도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을 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악하고 추호의 인간성이 없는 박해를 수련생 몸에 가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수련생이 그런 박해에서 어떻게 일분일초를 감당하며 지냈을지는 더욱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부류의 문장을 제외하고 봤으며 도저히 박해 문장을 읽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당시 명혜망에서 일부 지역 대법제자가 정부 고위층이나 현지 지도자, 직장 등에 공개편지를 쓴 글을 발표했습니다. 내용은 파룬궁 진상과 무리한 박해를 서술했는데 편지 내용이 아주 좋았습니다. 우리 지역의 몇 명 정념이 매우 강한 수련생은 명혜망에 발표된 전국 각지 대법제자가 쓴 편지를 모방해 자신이 어떻게 대법 수련에 들어서고, 대법 수련 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박해당한 상황을 써내 주변 지인이나 친척, 이웃, 상사, 동료에게 편지 방식으로 진상을 알렸습니다. 저는 몇 명 수련생이 쓴 손 편지를 보았는데 깊이 감동했습니다.

수련생 한 분은 교사이며 만나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어떤 특별한 부분을 느낄 수 없었으나 그가 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체가 허약하고 병이 많았으며 가정 상황도 아주 비참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사망했고 어머니와 누나는 수년간 병을 앓았습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 다른 한 누나는 가정폭력을 못 이겨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습니다. 그가 누나를 위해 신고하려 했지만 경찰은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 병으로 앓던 어머니와 누나가 또 잇따라 사망했습니다. 그는 외로움과 가난, 절망 속에서 또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바로 이때 그는 운 좋게 파룬따파를 만났습니다. 대법 수련 후 그의 몸은 매우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대법으로 인생의 의미를 알았고 사람이 왜 고통과 고난이 있는지, 어떻게 인생의 고난을 마주해야 할지 알았습니다. 그는 지난날의 비관적이고 염세주의 관념에서 낙관적이고 명랑하게 변했습니다. 그는 “파룬따파가 저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련 후 이 교사는 직장에서 성실하고 근면했으며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상사가 분배한 일을 고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선진 교사, 우수 담임교사로 선정됐고 우수 교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학생을 가족처럼 여겨 자신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어려운 학생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학부모들이 주는 선물은 선의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되돌려 보내기 어려운 것은 돈으로 계산해 드리거나 반에서 어려운 학생에게 기부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파룬따파를 박해한 후, 이렇게 좋은 선생님이 강제로 교직에서 쫓겨났고 교단에 설 수 없게 됐습니다. 그의 학생들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연대 서명으로 학교에 편지를 써 좋은 선생님이 떠나지 못하게 하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실에서 학생들과 작별할 때 학생들은 칠판에 “○○ 선생님, 사랑합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니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고 수련생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당시 저는 주변 수련생에 대해 아는 바가 적었고 대법 수련 전 그들 인생에서의 고난을 알지 못했으며, 대법 수련 후 얼마나 좋은 사람으로 변했는지, 박해 후 또 어떤 박해를 당했는지 몰랐습니다. 이 선생님은 믿음을 견지하는 것으로 불법적으로 감금되고 세뇌반에 보내졌으며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 직함 강등, 수업 정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또 진상을 전한 이유로 불법 징역형을 받아 학교에서 제명됐습니다.

만약 수련생이 편지 형식으로 자신의 경험을 적어 명혜망을 통해 세인에게 펼쳐 보이지 않았다면, 대법제자라는 이 선량하고 좋은 사람들이 사악한 중국공산당에게 박해당했는지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수련생의 평범하고 진실한 수련 이야기는 파룬따파가 도덕성을 향상하고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는데 거대한 작용이 있음을 증명했고, 사악의 거짓말을 타파해 사람들이 진실한 파룬궁과 수련생에 대해 알 수 있게 했습니다.

글을 컴퓨터로 타자한 후 우리는 함께 명혜망에 투고했습니다. 당시 명혜망에 투고하는 페이지가 매우 간단해서 타자한 글을 대화창에 붙여넣기하고 발송하기를 클릭하면 됐습니다. 한 번에 한편의 글만 투고할 수 있었고 또 몇 개 인증번호를 적어 넣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오래전이라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몇몇 수련생이 머리를 맞대고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면서, 발송 성공 후 나타나는 황금색 작은 연꽃이 나타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모습입니다. 만약 작은 연꽃이 나타나면 수련생들은 긴 숨을 내쉬고 즐겁게 다음 일을 했습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실망하지 않고 다시 이전 페이지로 되돌아가 다시 성공할 때까지 시도했습니다. 당시 저는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움직이는 사람으로 여러 사람의 가운데 끼어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으로 늘 따뜻함과 안정감을 느꼈습니다. 박해가 그렇게 심했으나 명혜망은 우리를 하나로 응집시켰습니다. 명혜망은 이런 글을 받은 후 매우 빠르게 게재했습니다.

이 몇몇 수련생이 이끌어 주고 도와주자 우리 지역의 다른 수련생들도 자신이 파룬따파를 수련한 진실한 상황과 사악의 박해 폭로, 정정당당하게 파룬궁 진상을 알려야 함을 의식했습니다. 당시 저는 타자와 투고 담당이었고 일부 박해 소식도 적어서 투고했습니다. 또 일부 수련생이 박해당한 경험을 적어줬습니다. 다 쓴 글은 제가 타자, 투고를 담당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좀 쉬웠습니다. 비교적 복잡한 건 박해 소식과 그것에 대한 보도 글이었습니다.

당시 소식은 기본적으로 귀로 듣고 입으로 전했기에 소식 내용 대부분이 ‘○○ 대법제자가 불법으로 붙잡혔다’였습니다. 소식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어떤 건 수련생의 이름만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이름도 없고 시간도 확실치 않았습니다. 대략 어느 날, 대략 어느 지역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입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박해당한 수련생이 많으나 박해 소식 보도가 적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아는 수련생이 적어서 정확하고 완전한 박해 소식을 수집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당시는 모두 사부님의 가지(加持)와 수련생의 도움에 의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련생이 수련생을 찾아가고, 다시 다른 수련생을 찾고, 또다시 다른 수련생을 찾아가는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기본 정보를 비교적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소식을 기억했다가 만났을 때 입으로 서술하는데, 늘 조각조각이어서 들으면서 기록해야 했으며 일부 관건 문제는 다시 물어보고 반복적으로 확인해야 했습니다. 각종 어려움이 있었으나 저는 될수록 소식 내용을 정확히 적었고, 언어표현에서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래야 명혜 수련생이 소식을 접한 후 교정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부님의 도움으로 저의 이해 능력과 글 표현 능력이 끊임없이 향상됐습니다. 일부 수련생은 입으로 소식을 전해줬고 어떤 이는 소식을 전하기 전에 이미 여러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수련생이 말할 때 이것저것 조리 없이 말하거나 많은 쓸모없는 정보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주요 정보를 그 속에서 끄집어냈습니다. 점차 저는 혼잡한 정보에서 빠르게 쓸모 있는 정보를 끄집어낼 수 있었고, 또 들은 정보에서 몇 가지 요점에 대해 수련생에게 질문했으며, 수련생이 답변하면 정보가 더욱 정확하고 완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수련생의 공동 제고에 따라 점차 수련생이 전해오는 소식도 더욱 완전하고 정확했습니다. 이런 소식이 비록 작아 보이나 명혜망에 투고해 폭로하면 그 작용은 거대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악인이 폭로된 후 매우 두려워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해외 수련생의 공동 성원과 구출로 악인들은 감히 악행을 저지르지 못했고, 감히 제멋대로 대법제자를 박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공간의 사악도 폭로로 인해 대량으로 해체됐으며 우리는 압력이 많이 경감된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수련생이 가져온 소식은 여러 번 접은 쪽지여서 제가 받았을 때는 조금 젖어 있었습니다.(수련생이 잃어버릴까 봐 손에 움켜쥐거나 호주머니에 넣어 땀으로 젖음) 여러 번 펼쳐야 전체 종이가 되는데 가로세로 주름이 많았고 이름을 모르는 수련생의 필적이 있었으며, 보도할 기본 상황을 명확하게 적었습니다. 제가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련생이 동분서주했겠습니까! 당시 수련생들의 경제 조건이 보편적으로 그다지 좋지 않았고 대중교통수단도 많지 않아서, 많은 경우는 걸어서 또는 자전거로 움직여야 해서 매우 수고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수련생들은 모두 큰 열정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봤는데 만약 그렇게 많은 수련생의 공동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최근 박해 소식을 가장 빠르게 명혜망에 투고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가운데 이름 모를 수련생들도 중국 명혜망 통신원이 아니겠습니까?

한번은 제가 받은 쪽지를 펼쳐보니 연필로 쓴 글이었습니다. 다 읽은 후에야 이 글은 초등학생이 적은 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글에서 그는 어머니가 대법 수련 후 이전에 있던 병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공이 대법을 박해한 후 직장과 파출소에서 어머니가 연공하지 못하게 했고 어머니에게 연공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작성하도록 핍박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붙잡아가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주변 이웃은 어머니에게 “가짜로 안 하겠다는 말을 적어 보내고 진심은 마음에 두면 돼요”라고 권했으나 어머니는 보증서를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에게 가장 걱정되는 일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매일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에 달려와 아파트 아래에서 큰 소리로 “엄마!”라고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달려가 아파트 아래에서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은 비어있었고 어머니가 붙잡혀 갔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마음이 뭉클했고 이렇게 어린아이가 감당한 큰 고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습니다. 저에게 이 쪽지를 건네준 수련생은 제 마음을 알고 격려의 말을 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사부님께서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사부님이 계시고 대법이 있습니다. 저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수련생과 함께 아이의 어머니가 붙잡힌 소식을 컴퓨터에 입력 후 명혜망에 투고했습니다. 명혜망에서 사악의 박해가 폭로된 후 그 어머니를 붙잡은 악인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나중에 아이의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붙잡힌 기간에 지인과 친척, 선량한 대법제자가 이 아이에게 도움을 줘 큰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간단한 소식은 정리해서 투고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만약 수련생이 박해당한 경과를 보도하는 소식이라면 장소를 정하고 수련생과 대면해 교류하며 일문일답으로 대화해야 했는데 취재와 같았습니다. 미팅이 끝나면 저는 다시 기록한 내용을 정리해 글로 작성한 후 교정해 명혜망에 투고합니다. 지금은 당시에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며 유일한 인상은 만났던 수련생들이 매우 순박했고 대답에 매우 진실했다는 점입니다. 수련생들이 자신이 어떻게 파룬따파 수련에 입문했는지 말할 때면 사람마다 겪은 일이 매우 신기했습니다. 그들은 대법 수련 후 어떻게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어 신체가 건강해지고 가정이 화목해졌으며 일에서 성실하고 근면했는지, 또 주변 사람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파룬따파의 위대함에 경탄했습니다.

수련생들이 붙잡혀 불법 감금, 공갈, 불법 감시, 심지어는 구타, 학대 등 박해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사악한 박해에 분개하면서 다른 한 방면으로는 수련생의 불굴의 정신과 평화롭고 선량한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저 자신이 누구인지 늘 잊고 있었으며 수련생들의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는 듯했습니다. 제가 거듭 회피하며 보지 않았던 박해 보도 속 주인공들이 지금은 하나둘씩 진실하게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저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박해 보도 글이 두렵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평온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수련생이 박해당한 그런 내용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60여 세 수련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동자이고 지식수준이 낮았습니다. 그 집 여러 명 식구는 그의 몇백 위안의 퇴직금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는 대법 수련 전에 ‘절반 목숨’이라는 별명이 있어서 전신에 모두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법 수련 후 병이 다 나았고 수년간 약 한 알 먹지 않았습니다. 1999년 7월, 중공 악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그의 직장과 현지 파출소는 여러 차례 그를 찾아와 연공하지 않겠다고 태도 표시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찾아온 사람에게 자신은 대법 수련 후 전신의 병이 다 나았고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는 잘못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직장은 파룬궁을 수련하면 퇴직금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 수련생은 그런데도 의연히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직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공안국에 보내 죄를 씌워 구치소에 불법적으로 감금했습니다. 무리한 처리와 공정하지 못한 처사에 이 수련생은 연속 5일간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습니다. 나중에 구치소는 그의 생명이 경각에 달하자 두려워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후 이 수련생은 또 불법적으로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으며, 노동수용소에서 수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수련생은 이 과정을 말할 때 매우 평화로웠고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석방 후 파출소에 신고할 때 파출소는 그에게 연공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써야 호구 신고를 받겠다고 핍박했습니다. 수련생은 확고하게 말했습니다. “호구 신고를 할 수 없을지언정 수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련생의 낙관적이고 확고한 마음가짐을 보면서 저는 탄복했습니다. ‘오직 위대한 사부님, 위대한 대법만이 이렇게 대단한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 수련생은 사악이 자신에 대한 박해를 연속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또 다른 수련생의 도움으로 법률로 정정당당하게 박해를 반대해, 이전에 그에게 박해를 가했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호구 신청 문제도 해결됐습니다.

수련생들의 이야기 속에서 저는 끊임없이 감동했습니다. 동시에 운 좋게 수련생들의 이런 자그마한 이야기와 경과를 기록해 파룬따파의 위대함, 사부님의 위대함을 실증할 수 있음에 마음 깊이 비할 바 없는 영광을 느낍니다.

사부님의 도움으로 저의 글쓰기 수준도 빠르게 향상됐습니다. 많은 경우 제가 적은 말을 다시 되돌아보면 저 자신도 놀랍니다. ‘이게 내가 쓴 글인가?’ 그 외 제 타자속도도 무척 빨라 한 수련생이 이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신의 손이네요!” 이 모든 것은 사부님과 대법에서 얻은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자그마한 소원이 있어서 문자로 수련생 몸에 발생한 이야기를 기록하려 했을 뿐이었으나 사부님께서 저에게 끊임없이 솟아나는 지혜와 영감을 주셨고, 제가 알지 못하는 많은 수련생을 제 신변에 데려다주셨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제가 수련생에게 글을 작성해주는 것으로 여겼다가 점차 사부님께서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수련생이 저를 믿어준 것에 감사했고 저에게 자신들이 겪은 경험을 공유해준 것이 고마웠습니다. 그러했기에 저는 이런 경험을 문자로 적어내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가장 힘들고, 또 대부분 수련생이 고려했던 건 중공의 박해 압력에 마주해 용기를 내 명혜망과 전 세계에 사악의 박해를 폭로해 백일하에 드러나게 할 수 있는지였습니다. 수련생들은 사악을 폭로한 후 보복당하거나 가중되는 박해를 받을까 우려했기에, 그럴 때면 또 끊임없이 사부님 설법을 공부하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걱정과 우려를 타파해야 했습니다. 제 주변의 한 수련생은 수련생들이 이런 우려를 버리고 신사신법(信師信法)하며 정념으로 문제를 볼 수 있도록 도와줬는데, 수련생들이 많은 걱정을 버리고 더욱 많은 수련생이 일어나 사악의 박해를 폭로해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나중에 어떤 원인으로 장소를 바꾸며 컴퓨터도 그곳으로 옮겼습니다. 아마 우리 이곳 지역이 크지 않고 당시에 컴퓨터로 명혜망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며, 게다가 명혜망에 우리 지역의 글이 여러 편 나타나면서 사악이 당황했을 수 있습니다. 사악은 우리 지역에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대법제자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저에게도 찾아왔습니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저를 보호해주셔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악과 마주치지 않았으며 컴퓨터도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한 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매일 수많은 사악에게 주시당하고 있는 것 같았고,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사악에게 붙잡혀 갈 것 같아 아주 장시간 감히 명혜망에 접속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했음에도 사부님의 가지로 우리 지역에서 박해를 폭로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주 깊이 은폐된 자료점의 한 수련생은 중공이 대법을 박해하기 전에 알고 지내던 분으로, 당시 아주 뜻밖의 계기로 연락됐습니다. 제가 타자하거나 글을 쓰는 걸 도와주면 그 수련생이 가져가 명혜망에 투고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건 그 당시 다른 한 수련생이 관건 시각에 저를 대신해 박해를 폭로하고 싶어 하는 다른 수련생을 도와 투고했으며, 동시에 끊임없이 저에게 격려를 보내고 많은 도움을 주어 제가 그 어려운 시간을 견뎌낼 수 있게 했습니다.

당시 제가 봉착한 가장 큰 문제는 사악이 저에게 행한 교란과 박해를(비록 박해가 성공하지 못했지만) 폭로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생각해보니 폭로 후 사악의 보복이나 거듭되는 박해를 당할까 두려웠고, 또 자신이 사악을 폭로하는 건 스스로 자백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사악에게 저에게 컴퓨터가 있고 제가 인터넷에 접속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끊임없이 사부님 설법을 공부하는 것을 통해 최종적으로 저는 용기를 내 이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이 일로 저는 체득했습니다. 조사정법(助師正法) 이 길에서, 중국 대륙이라는 인간 세상 연극의 주 무대에서 제가 비록 글로 이 단락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선택했으나, 저는 단순히 기록하는 역할, 무대 아래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역할 뿐만이 아니라, 저도 예기치 못한 경우에 무대 앞으로 떠밀려 나가 제가 펜으로 적은 그런 인물이 겪은 일을 제가 봉착했을 때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해내야 했습니다. 저의 안전이 위협을 받을 때, 제가 하는 이 일이 좌절을 당했을 때, 제가 하는 이 일이 조사정법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을 때, 그러나 현실 속에서의 표현이 이 일로 마치 제가 ‘박해’당하는 것으로 표현된다면, 제가 확고하게 사부님과 대법을 믿고 사악의 배치를 부정하며 한결같이 견지해나갈 수 있을까요? 최종적으로 저는 한 가지 점에서 확고해졌습니다. ‘나는 대법제자이고 수련인이며 오직 정진하며 착실히 수련하는 전제하에서 비로소 중국 명혜망 통신원으로 잘 할 수 있으며, 비로소 내가 걸어가는 이 길에서 나타나거나 앞으로 나타날 일체를 정념으로 대할 수 있다.’

사악을 폭로한 후 저의 환경이 점차 호전되어 다시 교류 글을 작성해 명혜망에 투고할 수 있었고, 아울러 명혜망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중국법회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다시 박해 초기에 명혜망 통신원으로 했던 그 과정을 회상하면 수많은 장면이 머릿속에 나타납니다. 그때는 비록 간고했으나 마음속에 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한줄기 힘이 있었습니다. 사부님의 세심한 배치로 보기에 불가능한 수많은 일을 기적같이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후 저는 오히려 그 당시의 상태를 되찾아오기가 매우 힘듭니다. 앞 전 시기에 소침한 상태에 빠졌고, 심지어 법회에 글을 투고하는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꿈에서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재차 일깨워주셨습니다. 꿈에 한 교실에서 사부님께서 강단에 섰고 저희가 아래에 앉았는데, 사부님께서 사람마다 발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나는 정말로 말할 게 없으니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봐야지’하고 잠자코 있었는데 뜻밖에 사부님께서 제 이름을 지명하며 발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부끄러워하며 일어섰습니다.

저는 이번 법회로 교류하는 기회에 그때의 과정을 회상하며 수련을 처음처럼 하는 상태를 되찾으려 합니다. 사부님께서 제자를 위해 하신 일체에 대해 어떤 언어로 감격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는 오직 마지막까지 잘하고 해내며 정진하는 것으로 사부님 은혜에 보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비롭고 위대한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같은 길에서 함께 해온 주변 모든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3년 11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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