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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세와 전생

글/ 지린성 대법제자

[명혜망]

1. 사람에게는 원신(元神)이 있다

제가 어머니에게 아주 어릴 때 늘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고 가끔 아름다운 선녀도 봤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제가 ‘불연(佛緣)’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불연’이 무엇인지 몰랐고 어머니는 나중에 크면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원래 화학약품 회사 회계과장이셨는데 가업을 계승하려고 퇴직하고 집에 돌아와 중의사가 되셨고 나중에 개인 진료소를 차리셨습니다. 아버지는 진료비를 적게 받았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돈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늘 의사는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고 사람의 육체적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4살 때 중의학 서적을 외우게 하셨고 제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중의학을 계승하길 바라셨습니다. 소아과, 부인과 진찰과 치료 및 약리, 약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기만 하면 저는 아버지를 따라 경을 읽듯이 외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속으로는 싫어했고 노래를 부르거나 신선 관련 서적을 즐겨 봤습니다. 가장 즐겨 보는 책은 ‘봉신연의[封神榜]’였고 몇 번이나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 저는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려고 열심히 배우고 외웠습니다. 3년간 저는 약리, 약성과 처방을 전부 외웠습니다. 중의사의 4대 요소인 보고, 듣고, 묻고, 맥을 짚어 보는 진단 중에서 저는 맥에 대한 실천이 적었는데, 아버지는 제가 너무 어려서 좀 커서 다시 배우자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속으로는 언젠가 신을 만나 재주를 배워 신처럼 되길 바랐고 중의사가 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제 어린 시절의 소원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청년 시절에 국민당 군에 입대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반(反)혁명으로 몰리셨습니다. 목에 큰 팻말을 걸고 조리돌림을 당하며 비판 투쟁을 받으셨습니다.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언니는 항상 품덕(도덕) 교육을 포기하지 말자고 주장했는데 그때 품덕 학과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언니는 학교에 주재한 군인 대표와 노동자 선전대 대표로부터 자본주의 집권파로 몰려 역시 목에 팻말을 걸고 비판 투쟁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어서 아버지를 농촌에 보내 정신개조를 하려 했고 온 가족도 같이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일하다 다쳐 오른쪽 팔이 분쇄성 골절이 되어 힘든 일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저희가 가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아버지께도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몸은 연약하셨지만 마음은 강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저희가 농촌에 가지 않도록 신께 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3개월 넘게 감금됐다가 풀려나와 집에서 대기하라고 했고, 언니도 풀려나와 해임당하고 출근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인 대표와 노동자 선전대가 철수한 후 언니는 다시 교사로 일했습니다. 아버지도 줄곧 농촌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저희 가족은 만약 어머니가 신께 빌지 않았다면 이미 농촌으로 갔을 것이고 아버지와 언니도 무사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언니는 누명을 벗고 다시 교장으로 복직됐습니다. 아버지도 누명을 벗고 계속 중의사로 일했으며 나중에 왕 씨와 장 씨 의사 두 분과 함께 진료소를 열었고 제자 두 명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광란과 불안정한 시대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이 박해받아 몸과 마음이 상처받았고, 얼마나 많은 가정이 처자식과 이별하고 집이 파산하고 사람이 죽었을까요? 저희처럼 무사하게 지나온 가족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불안정한 시기에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어머니가 매일 해주시는 신화 이야기를 듣고 정신적 압박이 많이 해소됐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평온한 외모에 총명하고 강한 마음을 가지신 것이 놀라웠습니다. 더욱이 어머니는 글을 배우지 못하셨지만 기억력이 대단하셔서 매일 밤 저희에게 신화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중복된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저는 늘 어머니의 지혜는 신께서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기에도 저는 건강 및 학업에 영향받지 않았습니다. 언니의 감독과 지도, 아버지의 독려, 어머니의 신앙으로 제 학업 성적은 매우 좋았고 한 가지 과목을 다 습득한 후 별도로 다른 책들을 봤는데 선생님 몰래 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닐 때도 저의 각 학과 성적은 줄곧 상위권이었습니다. 매번 시험 때 저는 일부러 1등을 피했습니다. 이것은 아마 ‘문화대혁명’ 시기에 얻은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한번은 오픈북으로 작문 시험을 봤는데 옆 반 학생이 자신의 작문 성적이 늘 60~70점이어서 ‘삼호(三好) 학생(역주: 품성, 신체, 학습이 모두 좋은 학생)’이 되는 데 지장을 주어 저에게 한 편 써주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튿날 저는 그 작문이 87점을 맞았다는 꿈을 꾸어서 그 결과를 그녀에게 알려줬습니다. 그녀가 기뻐서 국어 선생님을 찾아가 물으니 아직 시간이 없어 점수를 매기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며칠 후 발표된 점수는 제가 그녀에게 알려준 것과 같은 87점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하방(下放) 운동(역주: 중국공산당이 도시 청년들을 농촌으로 보내 농민들과 함께 지내게 한 정치운동) 시기를 만났고, 나중에 도시에 돌아와 대입 시험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의대를 지망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중의학’을 계승하길 바라셨고, 어머니는 제가 원하는 과에 지망해도 된다고 하셔서 저는 중문학을 택했습니다. (나중에 제 아이가 의대를 지망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달래드렸는데, 은연중에 이미 안배된 것 같았습니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저는 아무런 압력을 받지 않고 자유로웠으며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았습니다. 그때 기공 열풍이 불어, 저는 많은 기공 서적을 읽었지만 여전히 ‘불연(佛緣)’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어리둥절하게 수련과 연관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모든 기공 서적이 동작만 강조해서 저는 몇 가지 공법을 배웠으며 여유 시간에 늘 연마했습니다. 저는 시험에서 계속 상위권을 차지했습니다. 가장 암기하기 어려운 철학과 정치경제학 등은 95점 맞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나 저는 90점 이상 맞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교 다닐 때까지 다른 학생들처럼 힘들게 교과서를 외운 적이 없습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비밀은 제가 매번 시험을 치르기 전날 밤에 꿈에서 시험문제와 답을 얻어서입니다. 처음에 저는 사람마다 다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제가 신을 믿는 가정에서 자라서 신에 대한 저의 경건함과 지향 때문에 신께서 보호하고 이끌어주신 것 같습니다. 시험을 치를 때 답안이 이미 머릿속에 저장되어 제가 시험지에 그대로 적으면 됐고 문장 부호마저도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공부뿐만 아니라 직장, 결혼, 사업 그리고 일상 속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꿈에서 미리 알았고, 나중에 모두 현실로 됐습니다. 제가 언제 진정한 불법(佛法), 대도(大道)를 만나는지도 꿈에서 알려주셨습니다.

봄은 파종하는 계절입니다. 어느 봄날, 한번은 꿈에서 푸른 문의 수도원​으로 걸어 들어갔고 넓은 홀에는 사람들이 세 줄로 나누어 서 있었는데 매 줄 앞에는 수녀가 한 명씩 있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문에서 가장 가까운 줄에 섰습니다. 제가 수녀 앞에 왔을 때 그녀는 저를 상대하지 않고 책상 위에 있는 큰 노트를 들고 뒷문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또 중간에 있는 줄에 가 섰고 제 순번이 됐을 때 이 수녀도 저를 상대하지 않고 노트를 들고 뒷문으로 떠나갔습니다. 저는 세 번째 줄에 섰고 제 순번이 됐을 때 이 수녀도 앞에 두 수녀처럼 노트를 들고 뒷문으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빈 홀에는 저만 남았고 어떤 힘이 저를 이끄는 듯해서 저도 뒷문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조약돌로 된 작은 길이 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길 양쪽엔 맑은 시냇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저는 그 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끝에 도착했습니다. 앞에는 곧은 큰길이 있어 계속 걸어갔는데, 키가 크고 흰색 양복 차림을 한 남자가 자상하게 저를 보고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내 사부님이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문득 이분은 수녀와 같은 법문이 아니기에 그녀들이 저를 외면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후 제가 이미 5년간 연마한 ○○ 공법은 정법대도(正法大道)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꿈에 본 ‘사부님’ 모습은 제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몇 개월 후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입니다. 어느 휴일 오후, 저는 신화서점에 가려고 준비했습니다. 도서 도매단지에 들어가 보니 정말 컸고 많은 책방에 책들이 가득해 책의 바다 같았습니다. 여러 책방을 다 둘러봤으나 제가 원하는 책이 없어 좀 실망해서 밖으로 걸어 나오다가 복도 거의 끝에 나왔을 때 어떤 책방에서 한 가닥 빛이 번쩍였습니다. 호기심에 끌려 저는 그 책방으로 들어서자 벽 세 면에 각종 기공 서적과 기공 잡지가 가득 진열되어 있어 저도 모르게 놀랐습니다. 가득 진열된 기공 서적들은 제 마음을 사로잡았고 가게 사장에게 가장 인기 있는 기공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려다가 그 반짝이는 빛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계속 빛나고 있는 ‘파룬궁(法輪功)’ 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장에게 그 ‘파룬궁’ 서적을 원한다고 했고 사장은 제가 안목이 있다면서 지금 가장 잘 팔리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 책을 받은 저는 급급히 책을 펼쳤는데 첫 페이지에서 제가 몇 개월 전 꿈에 봤고 지속적으로 찾고 있던 저의 진정한 사부님 사진이 있었습니다! 책은 8위안(약 1500원)이라고 적혀 있어 사장에게 8위안을 주자 사장은 30%를 할인해준다고 해서 저는 5위안 6자오(약 1000원)로 제 운명을 바꾼 이 귀중한 보서(寶書)를 얻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저는 지체하지 않고 책을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착실하게 읽었고, 또 도해에 따라 다섯 가지의 공법을 전부 배웠습니다. 그때 아침 해가 서서히 떠오르면서 만 갈래 노을빛이 대지를 비추려 했고 제 마음은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노을 같아 진정한 대법대도(大法大道)를 얻었다고 깨달았습니다. 제 마음속의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이 책에서 찾았습니다. 특히 ‘불연’이 뭔지, 사람은 어디서 왔고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2. 전생과 현세 관련 몇 가지 사례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후 갈수록 저는 불법(佛法)이 넓고 심오하다고 느꼈고, 제가 깨달은 것은 바다의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련하기 전에 잘난 체했던 제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위대한 불법을 마주하고 나서야 사람이 보잘것없고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현세에 사부님의 제자로 될 수 있어 영광스럽고 긍지를 느꼈습니다. 불법에 대한 갈망과 인식, 수련은 대법에 동화하는 것이라고 깨달았지만, 그것은 다만 낮은 층차의 인식일 뿐이며 오직 착실하게 행해야만 실질적으로 향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할 때나 생활 속에서 이기적인 일을 더는 감히 하지 못했고 시시각각 대법 사부님께서 가르치신 ‘진선인(真·善·忍)’ 법리에 따라 제 언행을 요구했습니다. 사상 경지가 끊임없이 향상됨에 따라 저의 원신도 자주 육신을 떠나 전생으로 돌아갔고, 전생 혹은 전 전생, 심지어 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먼저 설명하고 싶은 것은 수련생의 층차가 서로 다르기에 사람의 원신이 순간적으로 본 것은 아마 일생의 경험, 혹은 몇 생의 경험일 수 있고 반생(半生)이나 한 시기의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제 층차가 비교적 낮아서 사부님께서 제 층차에서 볼 수 있는 부분만 보여주셔서 어느 생이나 어느 일부분만 볼 수 있었습니다. 몇 가지 사례만 들겠습니다.

1) 두려움 없는 희생과 비장한 죽음

저의 전생: 50년대 초기에 저는 ‘인민해방군’이었고 주지하다시피 ‘상감령(上甘嶺)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그 치열함은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저는 26세에 중대장이었고 ‘전사’라는 일종의 명예가 있었지만 실은 사람마다 총알받이였습니다. 그 전투에서 저희는 수비·방어 능력이 거의 없었고 장비가 열악했으며 사기가 저하됐습니다. 며칠 동안 분전했지만 식량도 부족해서 사람마다 기진맥진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처참한 광경을 봤는데, 전우의 시체가 여기저기 피바다에 널브러져 있었고 폭격당한 나무들이 가득했으며 벌거벗은 산이 저희의 ‘벙커’였습니다. 적의 강대한 공세에 많은 전우가 잇따라 쓰러졌고 일부는 포탄에 맞아 사지가 산산조각 났습니다. 저희는 100여 명의 보충 중대였지만 보급품이 없고 먹거나 마실 것이 없는 상황에서 다음 날 저녁까지 버텼습니다. 마지막에 저와 병사 7명만 남았고 굶주림에 목이 말라 입술은 모두 갈라지고 눈에는 핏발이 섰습니다. 폭격의 빈틈에 저는 산비탈에 가서 물과 음식물을 찾았고 얕은 웅덩이에 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물을 담아 마시다가 날아오는 유탄에 심장을 맞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타향에서 죽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전쟁 중의 희생양이 됐습니다.

그리고 더 먼 생인 남송(南宋) 시기, 저는 대장군 악비(岳飛)의 휘하에 있던 장병이었는데, 저는 철갑을 입으신 악비 장군이 바로 현세의 저희 파룬따파(法輪大法) 사부님이시라는 것을 봤습니다.

장군을 따라 다년간 혈투하다가 승승장구하던 중 장군이 조정에 소환되자, 장병들은 황제가 무도하고 장군이 처한 상황이 위태롭고 불길하다고 모두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장군은 정의를 위해 주저하지 않고 조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장군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장병들은 더없이 비분했는데, 장군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정충보국(精忠報國: 충성을 다하여 국가에 보답하다)’을 실천한 장거에 놀라거나 탄복했고 비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지만 장병들은 장군의 말씀을 기억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그 이후의 여러 차례 전투에서 잇따라 전사했으며 저도 31세 나이로 철수 도중에 전사했습니다.

백성을 위해 싸우고 나라를 위해 죽었으며 비록 비장하게 죽었지만 가치가 있었습니다!

2) 빚은 언젠가는 갚아야 하고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파룬따파 수련을 금방 시작한 어느 날, 갑자기 법원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법원은 제게 “당신이 주식을 가지려면 3만 위안(약 550만 원)을 갖고 와서 주식과 교환하고, 주식을 포기하려면 관련 서류를 가져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저는 몇 년 전 일이 생각났습니다. 90년대 초, 화학약품 회사에서 사회에 주식을 발행했는데, 저는 5만 위안 가치의 비상장 주식을 샀습니다. 주식을 받은 그날 밤, 여동생이 찾아와 자기 남자친구에게 급한 사정이 생겨 3만 위안을 빌려달라며, 며칠 지나서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현금이 부족했고 밤에 은행에 가서 돈을 찾을 수 없어(당시에는 24시 ATM이 없었음) 주식 중에서 3만 위안어치를 꺼내 여동생에게 줬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저는 여동생과 함께 법원에 가서 주식을 주고 제가 서명하고 지장을 찍은 후 여동생은 남자친구를 빼냈습니다.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은 그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당시 주식도 시장에 상장하지 않아서 저는 돈을 받는 일을 잊었습니다.

몇 년 후 그 주식이 시장에 상장되자 법원에서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일이 기억나서 여동생을 찾아 법원에서 걸려 온 전화에 대해 말했습니다. 여동생이 전 남자친구에게 전화로 그때 그를 위해 돈을 냈던 일을 말하자 그는 잊지 않았지만 상환 능력이 없어 그의 부모님께 돈이 있으니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동생은 그의 부모님 댁을 찾아갔고 그의 부모님은 왕년에 시 정부 기관 부서장이어서 지린(吉林)시 고급 간부 소재지의 강변에 있는 작은 별장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와 여동생은 과일 등 선물을 갖고 그의 부모님 댁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부모님의 처참한 상황을 보게 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다리 하나가 없었고, 그의 어머니는 심한 심혈관 질환에 천식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희 자매는 아들이 진 빚을 갚으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을 위로한 후 자리를 떠났습니다. 돌아가면서 여동생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 저는 수련생이고 사부님께서 모든 일은 우연하지 않다고 하셨기에 아마 제가 전생에 그에게 빚을 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3만 위안을 준비했지만 속으로는 아쉬웠습니다. 저는 그 당일에 돈을 내지 않고 나흘째 되는 날에 갔습니다. 법원에서 제가 규정된 시간 내에 돈을 가져오지 않아서 2천 위안(약 36만 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또 집에 돌아가 또 2천 위안을 가져다 법원에 돈을 내고 주식을 받아왔습니다.

그 후 어느 날, 꿈에서 원신이 육신에서 나와 또 전생으로 갔습니다. 청나라 말, 저는 7살 나이에 부잣집 아들이었고 집은 현재 허난(河南)가와 샹양(向陽)가 사거리에 있는 붉은색 대문의 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길거리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몸에 꿩, 산토끼를 몸에 지닌 사냥꾼을 봤습니다. 저는 달려가 산토끼를 잡고는 도망쳐 집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고 당연히 사냥꾼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냥꾼이 바로 제 여동생의 전 남자친구였고 그는 전생에 산토끼였는데, 저는 현세에 3만 위안을 갚았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후 저는 비록 조금 아쉬워했으나 여동생과 여동생의 전 남자친구를 포함해 전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수련생은 이익을 담담하게 봐야 하고 이익에 좌우지 돼서는 안 된다고 하신 기본적인 요구에 도달했습니다. 이것은 사부님의 자비이시고 사부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제가 죄와 업력을 갚으면서 제고하게 하셨습니다. 저에게 세상일은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주는 공평한 것으로, 생명은 잘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하면 갚아야 한다. 이번 생(生)에 갚지 못하면 다음 생에 갚아야 하는데, 이는 절대적인 우주의 법칙이다!”[1]

3) 이익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백만 위안어치의 재물을 담담히 대하다

90년대 초반에는 집값이 비싸지 않아 저는 의류공장을 도급맡아 번 돈으로 80여만 위안(약 1억 5천만 원)을 투자해 700여 평방미터 크기의 아파트를 샀습니다. 그때 제 이름으로 이미 가게가 하나 있었고 제 어머니 이름으로도 가게 하나가 있어서 세금을 더 내지 않으려면 친척 명의로 사야 했습니다. 당시는 수련하지 않았고 그때 연마했던 공법도 심법 요구가 없어서 저는 친척 이름으로 집문서를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파룬따파 수련을 통해 이런 진실하지 않은 행위는 대법 ‘진선인’ 법리를 위배한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친척에게 보답하려고 친척과 협의서를 작성했습니다. 내용은 제가(갑) 투자하고 을(친척)의 이름으로 진행하며 양자가 사용권이 있고, 만약 집을 임대하면 임대료는 을이 소유하고 갑은 돈을 받지 않으며, 을은 매각권이 없다고 적었습니다. 또한 매각하려면 반드시 갑이 동의해야 하고 갑은 매각비의 절반을 을에게 주는 것에 동의하며, 갑이 받아야 할 절반의 매각비엔 갑의 가족을 포함하고, 을이 받는 매각비 절반에도 을의 가족을 포함한다고 했으며 서명하고 지장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친척은 저 몰래 집을 매각했고 2개월이 지나서 저의 아이가 이 사실을 듣고 제가 알고 있는지 급히 물었습니다. 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이는 두 달이 지나도 친척이 제게 이 일을 알리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담담하냐고 했습니다. 아이는 집을 200여만 위안(약 3억 7천만 원)에 팔고도 알려주지 않았으니 우리에게 돈을 주지 않으려는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가 떠난 후 저는 친척을 찾아가지 않았고 그녀를 난감하게 하지 않으려고 그녀가 자진해서 저를 찾아오길 바랐습니다.

1주일이 지나도 친척이 찾아오지 않아 저는 은행 통장을 갖고 찾아갔습니다. 제가 웃으며 집을 파느라 수고했다고 하자 그녀는 어디서 들었는지 물었고 저는 잘 팔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통장을 주면서 제가 받아야 할 돈을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이튿날 통장을 보니 25만 위안(약 4500만 원)이 입금되었고 왜 이것뿐인지 묻자 그녀는 “제게 돈이 그렇게 많이 없고 자녀에게 좀 주고 나머지는 정기 저축했어요. 그러면 저는 매월 이자를 받아서 쓸 수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수련생이기에 절반을 드린 것인데 25만 위안만 주시면 너무 적지 않나요? 게다가 수련생의 돈을 차지하면 당신에게도 좋지 않아요.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고 군자도 돈을 좋아하지만 정당하게 벌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수련하지 않지만 마땅히 군자는 돼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떠나면서 저는 빈 통장을 주면서 남은 돈을 거기에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담담하게 떠나 집으로 돌아왔고 모든 일은 우연이 없으니 아마 제가 어느 생에 그녀에게 진 빚을 이런 식으로 갚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마음은 잔잔한 물결도 없는 물처럼 고요했습니다. 30년 수련하면서 저는 수련인으로서 제고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하고 제고는 돈을 얼마 주더라도 살 수 없다고 깨달았습니다.

결국 몇 개월이 지나도 제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제 아이는 25만 위안만 준 것을 알고 나서 협의서를 들고 변호사에게 자문을 받았습니다. 아이는 돌아와서 양자가 서명하고 지장을 찍었고, 또 제삼자 증인도 있어 협의서가 유효하니 매각비의 절반을 받을 수 있으며, 소송비용은 패소한 사람이 부담한다는 변호사 자문 내용을 전했습니다. 저는 “네 말이 맞단다. 속인이면 법률로 해결하는 것은 틀리지 않아. 하지만 나는 수련생이어서 문제에 봉착하면 수련생의 표준으로 해결해야 한단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법률이 속인 중의 일을 상관하는 이것은 문제가 없다. 연공인이라면 바로 초상(超常)적인데, 그렇다면 당신은 초상적인 사람으로서, 초상적인 이치로 당신에게 요구해야 하지, 속인 중의 이치로 가늠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한 가지 일의 인연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당신은 이 일을 잘못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위(無爲)를 말하는데, 당신이 무엇을 하고 싶다고 해서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2]

저는 사부님의 대법을 아이에게 읽어줬습니다. 아이는 비록 수련하지 않지만 늘 대법서적을 읽어 일부 법리를 깨달았고, 처세하거나 일할 때 득과 실 방면에서 모두 사부님 법리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면서 뇌물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이 부분 설법이 몇 페이지에 있으니 돌아가서 잘 공부하면 제가 바르게 행했는지 알 수 있으니 그때 다시 교류하자고 했습니다.

며칠 후 아이는 와서 그 법리는 맞지만 돈을 10분의 1만 줘서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네가 엄마를 이해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고, 비록 수련하지 않지만 수련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잘했어”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에 저는 아이에게 상대의 장점을 많이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라고 알려줬습니다.

이어서 다른 친척들도 이 일을 알고 잇따라 와서 돈을 받지 못하면 화풀이라도 해야 하고, 그녀가 사람을 너무 업신여긴다는 등등을 말하면서 제게 싸우라고 했습니다. 거의 모든 친척이 그녀를 멀리하고 멸시했으며 외삼촌 댁 언니는 그녀를 찾아가 적어도 아파트 원가는 돌려줘야 하고 수련인을 괴롭히면 죄가 더욱 크며 이것은 분명히 강탈이라고 했습니다. 이 일을 알게 된 저는 친척들에게 그녀를 그렇게 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수련생인 제 언니도 그녀의 이런 행위는 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저희가 수련생이어서 그녀가 덕이 없다고 말하면 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수련생은 현상에 미혹되지 말아야 하고 사부님께서는 세상엔 우연한 일이 없다고 하셨으며, 우연이 아니면 꼭 원인이 있을 것이고 아마 제가 어느 생에 그녀에게 빚을 졌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또 와서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제가 어머니가 친척분에게 남겨둔 통장을 가지러 가서 저희 돈을 그렇게 많이 차지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니 마땅히 몇십만 위안은 더 줘야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한 푼도 더 줄 수 없다고 해서 정말 화가 났어요.”

아이가 화나지 않는지 물어서 저는 화나지 않았고 수련인이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아이는 제가 어리석은 게 아니라 그녀가 너무 지나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래, 너무하긴 했지. 내가 화가 풀리게 해줄게”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제가 혹시 그녀를 찾아가려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난 수련인의 방법으로 할 거야. 수련인은 공능(功能)이 있지 않니? 내가 발정념을 해서 그녀가 오늘 우리에게 10만 위안을 가져오게 할 거란다”라고 말했습니다.

몇 시간 후 친척이 10만 위안을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기뻐하며 “어머니의 공능으로 저희가 받아야 할 돈을 모두 가져오게 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먼저 사부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들어봐”라고 말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개공해도 떨어져 내려갈 것이며, 파악하지 못하면 개오해도 떨어져 내려갈 것이다. 그 부처도 잘 파악하지 못하면 역시 아래로 떨어지는데, 하물며 당신은 속인 중에서 수련하는 사람임에랴!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공능, 얼마나 큰 공능이 나왔든지, 신통이 얼마나 크게 나타났든지, 당신은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2]

저는 이 법을 아이에게 외워서 들려줬습니다. 제가 “사실 나는 그녀를 좀 혼내주고 싶었어. 그런데 이 역시 보복심이자 쟁투심이고 내가 이 부분 수련을 잘하지 못한 것이지. 더구나 사부님의 대법으로 가늠하면 너무 부족하단다. 이렇게 자신을 위해 공능을 사용한 게 이미 잘못된 건데 내가 또 그렇게 하면 되겠니?”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연거푸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사부님의 법을 이해하며 지지해서 저는 매우 기뻤고 아이도 이익을 담담하게 보면서 너무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저의 원신이 명나라에 돌아갔는데 저는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서생이었고 중도에 돈을 잃어버려 여인숙에서 계산할 돈이 없어 헤매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서 허리춤에 검을 찬 협객이 왔는데, 제 상황을 알고 나서 제게 많은 돈을 아낌없이 줬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저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아 저는 형님이라고 불렀고, 그의 이름과 주소를 기록하고 나서 나중에 방문해 보답하겠다고 하고는 길을 떠났습니다. 벼슬한 후 저는 그에게 보답하려고 그 주소와 이름으로 찾아갔지만 몇 년이 지나도 그 은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협객이 바로 현세의 그 친척이었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그녀를 멸시했던 친척들에게 말하자 모두가 사부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안배하심에 탄복했고, 세상 모든 일은 우연이란 없으며 사람의 제고를 위해 안배됐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사람은 살면서 좋은 일과 선행을 많이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외삼촌 집 언니는 원래 수련에서 연공만 중시하고 법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고 정진하지 않았는데, 제 말을 듣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알고 법공부와 마음 닦는 것을 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더는 그 친척을 멀리하거나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 세상의 시시비비를 몇 사람이나 분명히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인간 세상의 쟁투를 몇 사람이나 초월할 수 있을까요? 인간 세상의 은혜와 원한에 대해 몇 사람이나 그 인과를 알 수 있을까요? 오직 파룬따파 사부님께서만 아실 수 있습니다. 이 말세에 ‘9자진언’인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늘 외우면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원문발표: 2023년 5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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