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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버릇으로 타인을 속이고 자신을 그르치는 속뜻을 간파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수련생들이 “나는 수련할 줄 모른다” 혹은 “나는 그런 마음이 없다”, “모모는 그렇게 수련을 잘했는데, 어째서 이럴 수 있지?” 등등의 말을 엉겁결에 하는 것을 늘 들었다. 처음에는 나도 이런 말에 따라 생각을 하면서 이 수련생이 참 억울하겠구나, 혹은 순수하구나라고 느끼거나, 모모는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법공부를 하고 법을 외우는 양을 늘리면서 이런 말속에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기만하는 좋지 않은 요소가 있음을 단번에 간파했다.

1. “나는 수련할 줄 모른다”

심성을 닦거나 집착심을 제거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류를 할 때면 어떤 수련생은 담담하게 “저는 수련할 줄 몰라요”라고 말하곤 한다. 얼핏 듣기에는 이 수련생이 무고하다고 느껴지는데, 그는 수련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수련할 줄 모르는 것이니 더는 깊이 따지지 않게 된다. 지금은 이 말이 자신을 속이고 스스로 경계를 늦춰 자신을 정진할 수 없게 하는 한 마디임을 인식했다.

마음속으로 생각한 대로 행동을 할 수 있으려면 상응한 소질을 구비해야 한다. 군인은 군인의 소질을 갖추고, 학생은 학생의 소질을 갖추어야 하며, 수련인은 수련인의 소질을 갖추어야 한다. 군대에서 나팔이 불면 전쟁터로 나가는데, 삽을 메고 달려들면 되겠는가? 게임기를 가지고 등교하면 되겠는가? 당신은 “나는 모른다. 누가 믿느냐?”라고 하는데, 수련이란, 바로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당신은 화가 나서 머리가 멍해지고, 자녀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하며, 이익을 따지는 마음이 들끓고 있다. 이런 사람 마음이 당신 앞에 놓여 있는데, 당신이 “나는 이것이 집착심인지 모르겠다. 그것을 제거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겠다.”라고 말하면 되겠는가? 분명한 것은 그것을 제거하고 싶지 않은 것인데, “나는 수련할 줄 모른다.”라는 말로 덮어 감추고 있다.

대법의 이치는 매우 직설적이고 명확하여 사람이 파고들 필요가 없는 바, 이치는 명백히 거기에 놓여 있으니 그대로 하면 된다. “나는 할 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은 얼떨떨한 척하는 것이 아닌가? 수련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수련하고 싶지 않은 것일 테지! 게다가 집착심은 당신에게 병업과 박해를 일으키고, 수련성취하지 못하게 하며 당신의 것을 망쳐버리는데, 어째서 아직도 경각심 없이 그것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가?

많은 대법제자는 학력이 없지만, 사부님의 말씀을 곧잘 듣는다. ‘남에게 선하게 대하라 하시니 그럼 나는 누구에게든 잘 대하겠다’, ‘이익에 집착하지 말라 하시니 그럼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겠다’라고 하는데, 잘 수련한 사람이 매우 많다. 사람 마음에 직면해 그것을 제거하면 당신은 곧 수련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제거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면 당신은 바로 정념이 강해지며, 그것을 제거하는 것을 견지하면 당신은 바로 정진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련인의 기본 소질이 아닐까?

“나는 수련할 줄 모른다”인가 아니면 “나는 수련하고 싶지 않다”인가? 천만년을 기다렸는데, 내가 수련하고 싶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어떻게 나의 생각일 수 있겠는가? 누가 나더러 수련하지 못하게 하는가? 뭐라고 하든 이런 사람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의 매 한 가지 집착은 모두 당신을 수련 성취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1] 그럼 뭘 더 기다리는가? 즉시 그것을 제거하자!

2. “나는 그 마음이 없다”

일부 수련생은 동분서주하며 일을 많이 한다. 하지만 이성 수련생에 대해서는 언어나 행위상에서 주의하지 않고 마음대로 툭툭 건드리거나 발끈하거나 잡아당기거나 눈을 부라리는 거리낌 없는 행동을 하곤 한다. 이성 수련생의 집에 가서는 피곤하다며 침대에 누워 한숨 자는데, 가족보다 더 마음대로 한다. 누군가 부적절하다고 지적하면 “나는 그 마음이 없다”라고 말하곤 한다.

남녀유별이라는 말이 있다. 사부님께서도 법에서 말씀하셨는바, 과거에는 남녀 사이에 조심성이 있었으며,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준 표준이다. 부부 사이라 해도 신이 인간에게 준 정통적인 표준으로는 부부가 서로 손님을 대하듯이 존경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환경에서도 방종하지 않고 주의식이 자신을 주재하는 이지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하는 것임을 체득했다. 방종하지 않으면 기타 생명에게 쉽게 통제당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자신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

당신이 보라. 신은 진정으로 순수하고 색심이 없으며, 그의 언행은 점잖고 단정하며 아름다운 것으로서, 그것은 정말로 그 마음이 없는 상태이다. 정말로 그 마음이 없으면, 그런 행위도 있을 수 없다. 구우주의 일부 신은 당신의 몸가짐이 단정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당신의 바르지 않은 사람 마음을 확대하고 강화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도 그 한 상태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더 방종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 문제가 생기기 쉽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특히 형성된 관념, 형성된 사유방식 그것은 자신에게 그런 비자각적인 사람 마음의 표현을 인식함에 있어 아주 어렵게 한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려놓겠는가? 특히 중국 그 환경에서 사당(邪黨)은 중국전통문화를 파괴해 버리고 한 세트 사당의 것을 만들었는데, 이른바 당문화(黨文化)이다. 그것이 세운 사유방식으로 우주 진리를 인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심지어는 일부 불량한 사상행위는 세간의 보편적인 가치와도 서로 저촉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불량한 사상을 인식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직 대법에 따라 할 수 있을 뿐이다.”[2]

당문화로 보니 자신은 꽤 괜찮고 계율을 범하지 않으면 잘하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전통문화로 가늠해도 여전히 잘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사람은 전통문화를 언급하기만 하면 통상 위화감을 갖고 그것은 인간에게 준 아주 낮은 것이며, 자신은 대법에 따라 하고 있다고 여긴다. 전통문화를 언급하면, 우선 ‘쓸모없는 것’이라는 생각부터 한다. 전통문화에 대한 모든 반감, 그 자체가 바로 머릿속에 존재하는 당문화 요소가 조성한 것이다. 그럼 전통문화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중국문화는 신이 정법 시에 사용하려고 다진 것으로, 본래부터 반신(半神) 문화였다. 여기에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휘황찬란한 5천 년 문명 중에는 그의 역사 이야기를 포함해서, 하나하나가 모두 신이 전한 빼어난 문화로 그야말로 부지기수이며, 상고 시대의 사람에서 현대 사유 방식의 사람으로 육성하는 과정 중에 다져진 문화이다. 그럼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이러한 문화를 내놓는다면, 이것이 보기 좋지 않겠는가? 경전(經典)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보기 좋아하지 않겠는가?”[3]

다른 한 각도에서 말하자면, 오늘날 대법제자의 수련은 개인의 원만을 위한 게 아니다. 우리는 미래 사람에게 길을 닦아주고 있는 것이며 미래 생명에게 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부동한 층차, 부동한 경지, 부동한 대궁의 무량한 중생에게 미래의 참조로 남겨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해에 대법제자가 바로 이렇게 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나는 그 마음이 없으니 그만이고, 그걸로 만족한다”라고 말할 수 없다.

대법이 육성한 생명은 위타(爲他)한 것으로, 생각이 움직이기만 하면 곧 다른 사람을 고려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생각하며 매우 바르게 해야 한다.

3. “모모는 그렇게 수련을 잘했는데, 어째서 이럴 수 있지?”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그가 언급한 그 수련생의 상황에 따라 생각하기 쉬운데, 실질적으로는 이 말을 한 사람 자신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서, 대법의 수련 형식에 대한 몰이해와 법리를 명확히 모르는 데서 나타난 의문이다.

대법수련은 이전에 수련을 얼마나 잘했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당신이 수련을 잘해 표준에 도달하기만 하면 그 일면을 갈라놓으며, 남은 이 면은 또 자격 미달로 표현되므로 끊임없이 법공부하고 제고해야 좋은 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 수련이 따라가지 못하고, 법공부에서 따라가지 못하면 교란을 당하거나 문제가 나타나기 쉽다.

당신이 법리를 명백히 모른다면, 당신은 그가 제거하지 못한 사람 마음 혹은 법공부에서 따라가지 못한 탓에 나타난 문제임을 확신할 수 없다. 당신은 오히려 그는 수련을 잘한 사람인데 뜻밖에도 문제가 나타났다며 동요하고, 대법을 견정하게 믿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자체가 바로 당신 자신이 수련의 길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대해야 하느냐의 문제이지 남이 수련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연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당신이 법리를 분명히 알지 못해 사악이 그 수련생을 더 심하게 박해하게 됐는데, 목적은 당신을 동요시켜 끄집어 내리고 수련환경을 더 심하게 불안정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이런 의혹이 있을 때는 즉시 자신의 사람 마음, 걱정, 두려움, 법을 불신하는 마음 등을 찾고, 법리를 명백히 알아야 자신의 공간장이 깨끗해져 교란받지 않고 현지의 환경을 강력하게 안정시키며, 마난에 있는 수련생을 도울 수 있다.

4. “내가 사부님과 법을 믿지 않았다면,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겠는가?”

병업이나 마난 속에 있는 어떤 수련생은 다른 수련생이 법을 불신하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일깨워줄 때, 흔히 “내가 사부님과 법을 믿지 않았다면,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겠는가?”라며 즉시 반박하곤 한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입을 곧잘 다물게 하고, 스스로 깊이 숨어 있는 집착을 찾기 어렵게 한다. 수련생은 통상적으로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신사신법으로 여기는데, 사실 이것은 서로 상관이 없다.

대법의 법리는 일체를 포괄한다. 수련인이 수련을 견지한다고 해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법리를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무조건 말씀에 따라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사부님께서 법에서 몇 가지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실질적으로 지적하신 것은 문제를 제기한 사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깊이 숨겨진 집착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집착이고 사람의 수련과 제고를 가로막았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신 초기에 현장에서 강의를 듣는 사람들에게 부채질을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어떤 사람은 그래도 부채질을 했다.

부채질을 하는 사람은 명확하게 ‘나는 당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했다면 아마 강의를 들으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층에서 보면, 그의 행위는 곧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숨겨진 집착이다.

사실 이런 표현은 많은데, 어떤 사람은 장사하거나 비즈니스를 하면서 타산적으로 남을 추측하는 데 익숙해져 매우 교활해졌다. 그런데 수련을 하면서도 관념을 바꾸지 않고, 자신이 타산적이지 않고 이리저리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지 않겠는가, 얼마나 어리석냐고 여긴다. 실제로는 법에서 말씀하신 “당신의 것이라면 잃지 않을 것이고”[4]를 믿지 않는 것이고, 사부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자신이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는 아마도 견정하게 대법이 좋다고 여기며 적극적으로 진상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이 그가 신사신법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럴듯한 이런 말은 더 많은데, 우리가 수련하면서 모두 맞닥뜨릴 수 있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많이 하며, 실질적으로 심성을 수련해야만 미혹되지 않고 배후의 숨겨진 집착을 찾아내며 이런 교란을 타파하고 중생을 더 잘 구할 수 있다.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에 따라 작성된 것이므로, 수련생들이 서로 교류하고 ‘비학비수(比學比修)’ 하는 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각지설법13-2015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서: ‘각지설법11-20년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서: ‘각지설법11-대법제자는 반드시 법 공부를 해야 한다’
[4] 리훙쯔 사부님 저서: ‘전법륜’

 

​원문발표: 2022년 5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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