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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은 나를 변화시켰고 시어머니도 복을 받게 했다

글/ 산둥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1998년에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해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늘까지 걸어왔습니다. 저는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 ‘완전히 남을 위하는 대법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지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 대법의 ‘진선인(真·善·忍)’ 법리는 이미 제 마음속에 뿌리내렸습니다.

저는 일상생활에서 자신에게 엄격하고 최선을 다하며 사람들에게 대법 진상과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렸는데 사람들, 특히 친척들이 대법을 인정했습니다. 대법은 저를 변화시켰고 시어머니에게도 복을 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께 저와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시부모님은 시골에 사시고 딸 셋과 아들 둘, 남편은 집안의 막내, 시누이와 아주버님은 모두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제 남편만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됐습니다. 아주버님은 성격이 온순하고 똑똑하고 말을 잘하지만 제 남편은 급하고 몇 마디로 다른 사람의 입을 막아, 할 말을 잃게 하는 성격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시부모님과 떨어져 살았기에 여러 가지 이유로 시부모님은 노년에 우리와 함께 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아주버님을 각별하게 편애하셨습니다.

제가 시댁에서 산후 조리할 때 시어머니는 저를 잘 보살펴 주지 않았습니다. 돼지 족발 두 개만 사주시고 달걀을 삶아 먹게 했습니다. 딸이 태어나기 3개월 전 큰 시누이가 둘째를 낳았는데 시어머니는 돼지 한 마리를 잡고 족발 4개를 큰 시누이에게 주셨습니다. 제 딸은 태어날 때 3.9㎏였는데 모유가 부족해, 한 달이 지나서야 4㎏이 됐습니다. 대부분은 첫 달에 1~1.5㎏ 정도 자랄 수 있는데 제 딸은 겨우 100g밖에 자라지 못했습니다.

저는 시댁에 20일도 머물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올 때, 우리는 친구들에게 선물할 달걀을 좀 가져가려 했는데 시어머니는 일부를 덜어내 감추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시어머니와 한바탕 다투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제 남편을 꾸짖으시면서 나이가 들어도 우리에게 기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남편도 너무 화가 나서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육아휴직을 끝내고 출근하게 되면 시어머니가 아기를 돌봐줄 것을 바라면서 두 달만 있으면 아기가 젖을 떼니 친정어머니에게 봐달라고 하겠다고 넌지시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우리 집에 오셔서 6일간 아기를 봐주고 돌아가신 후 다시는 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저는 화가 나서 위아래 입술에 물집이 잔뜩 생겼으며 아기도 젖을 먹고 설사했는데 약을 먹어도 멈추지 않아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서야 멈췄습니다.

시부모님은 남존여비 관념이 아주 심했습니다. 아주버님네는 아들을 낳고 저는 딸을 낳았습니다. 시부모님은 제 딸을 보러 한 번도 와 보신 적이 없으며, 아주버님의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키워주셨습니다. 친정어머니가 제 딸이 9개월 때 젖을 떼서부터 시작해 7살 학교에 갈 때까지 봐주셨습니다. 시어머니는 또 국수와 기름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는데 제가 친정으로 빼돌린다고 여기저기에 가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고향 집에 살지 않았기에 남편 몫으로 지은 집에 시부모님이 지내셨습니다. 우리가 결혼해 몇 년도 안 되어 시부모님은 남편의 몫이던 집을 우리와 상의도 없이 큰 아주버님에게 주셨고 아주버님에게 그 집을 헐고 재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저는 화가 나서 명절 외에는 거의 시댁에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무신론에 세뇌되어 인과응보를 몰랐습니다. 저는 시부모님이 우리에게 불공평하게 대하고 동서도 만만찮으며, 그들을 감히 건드릴 수 없고 제가 온순하면 그들이 저를 업신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들과 한 번도 다투지 않았지만, 시어머니에게 속으로 원한을 품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남편과 말다툼이 있을 때면 시댁 일을 들추어내 남편을 꾸짖는 이유로 삼았고 남편은 말문이 막혀 말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시부모님이 노년에 보살핌이 필요하게 되면 결산하겠다고 별렀습니다. 저는 ‘시부모님을 모시지 않을 수는 없지만 딱 큰동서가 하는 만큼 할 거야. 윗사람을 따라서 한다는데 누가 뭐라고 못하겠지. 나는 꼭 본때를 보여 그들을 난처하게 할 거야.’라고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1998년 저는 운 좋게 대법을 만났습니다. 대법의 법리는 저를 꿈에서 깨어나게 했습니다. 남이 자기에게 나쁘게 대하는 것은 업력윤보(業力輪報)의 결과이며, 어느 생에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대했던 결과입니다. 그리고 대법의 ‘진선인(真·善·忍)’ 법리는 시부모님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악랄한지 깨닫게 했습니다. 제가 마음에서 이런 생각을 버리고, 원한을 덕으로 갚으며, 시부모님을 잘 대하지 않는다면 저를 수련자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쌓인 원망은 두꺼운 얼음처럼 쉽게 녹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원망이 올라올 때마다 법공부를 했습니다. 대법은 제 마음을 밝혀줬고 제 정념을 확고하게 했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해내어야 수련이로다”[1] 라고 하신 가르침을 기억하고 분노와 증오를 한 번에 떨쳐낼 수 없어도 행동으로 그들을 잘 대해주려 했습니다. 우선 시아버지에게 잘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제가 수련을 시작해 2년 만에 뇌졸중으로 식물인간이 됐고 3년 후 돌아가셨습니다. 그 전의 세 차례 여름 방학 동안 저는 시부모님을 우리 집으로 모셔와 함께 살았습니다. 우리는 처음 2년은 학교 주택에서 살았는데 방이 두 개밖에 없어서 이웃의 비워둔 집을 빌려 시부모님이 지내도록 했습니다. 3년 되는 해에 우리는 집을 사고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 3년간 시아버지의 생일이 되면 친척들이 모두 우리 집에 모여 시아버지의 생신을 축하드렸습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22일 동안 우리 집에서 계시다가 임종이 다가오자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전날 밤 9시에 고향 집에 도착하셔서 다음 날 오전 11시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날 장례를 치른 뒤 시어머니께 “어머님, 집에 혼자 계시니 우리 집에 가셔서 함께 지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큰 시누이가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올케가 어머니를 모셔가면 우리는 마음이 놓여요.”라고 말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우리 집에 계시다가 시아버지의 21재(齋) 때 고향에 가셨다가 올라오셨으며, 시아버지 35재 때까지 계시다가 다시 고향에 가셨다가 올라오셨고, 49재 때는 이미 겨울이었는데 내려가셨다가 우리가 다시 시어머니를 모셔왔으며, 설날 전 까지 계시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시아버지가 70세에 돌아가셨을 때 시어머니는 68세셨습니다. 시어머니는 항상 건강하셨고 자식들과 함께 지내기를 원치 않으셔서 혼자 시골에서 사셨습니다.

2012년 시어머니가 77세 된 해인 10월 5일 밤,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습니다. 다음 날 최고 혈압이 60을 넘지 않았고 심장 박동이 40을 넘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위독하다는 통지를 내렸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입으실 옷까지 모두 가져왔습니다. 결국 아들딸들은 어머니를 집에 모셔 집에서 편안히 운명하시게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시어머니를 병동에서 집에 모셔온 후 저는 시어머니의 귀에 대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우시라고 큰소리로 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시누이들에게도 함께 외우고 마음속으로 시어머니를 구해달라고 대법 사부님께 간청드리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때는 시어머니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그날 밤도 가족들은 장례 준비를 계속했습니다.

남편은 밤새도록 혼수상태에 빠진 시어머니의 혈압과 심장 박동을 1~2시간 간격으로 측정했습니다. 그리고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시어머니의 혈압과 심장 박동 수치가 점차 상승했고, 새벽에는 정상 수치에 가까워졌으며, 낮에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습니다. 시어머니는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몸이 허약하셔서 집에 묵은지 하루 만에 다시 병원에 모셨습니다. 당시 시어머니에게 희망이 없다고 말한 담당 의사는 깜짝 놀라면서 “염라대왕이 어르신을 원하지 않았네요.”라고 농담했습니다. 우리는 사실 시어머니가 대법을 인정하셨고 제 수련을 지지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시어머니는 대법을 더욱 믿고 하루에도 몇 번씩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 이 ‘9자진언(九字真言)’을 외우셨고 건강도 항상 좋으셨습니다.

2년 전 가을, 마침 사과 수확 철이었는데 시어머니가 몸이 불편하다고 하셨습니다. 남편이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는 며칠간 입원해 보양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저는 농촌은 농번기고 저는 일이 바쁘지 않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제가 휴가를 내서 어머니를 돌봐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열흘간 병원에서 시어머니를 돌봐드렸습니다. 시어머니가 퇴원하신 후 셋째 시누이 남편이 저에게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한 달 치 월급을 드릴 테니 기다리세요.”라고 농담했습니다.

우리가 도시에 살고 있어 시어머니가 입원할 때마다 남편과 제가 돌보고 동행하고 식사하는 것을 전담했는데 시간이 있을 때는 집에서 손수 지어서 드렸고 시간이 없을 때는 사서 드렸습니다.

큰동서는 10년 전에 외지에 있는 아들 집에 가서 손주를 봐주고 있었고, 큰아주버님은 집에서 시부모님의 과수원을 관리하면서 시어머니에게 매년 3천 위안(한화 약 57만 원)을 드리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큰아주버님은 2년만 드리고 그 후에는 드리지 않았습니다. 3~4년 전에는 큰아주버님도 아들 집에 가셨기에 시어머니를 돌보는 책임을 거의 우리가 맡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큰아주버님과 따지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는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었고 자식들 집에서 살기를 꺼리셨지만 우리는 시어머니를 일 년에 몇 번씩 모셔다 10~20일씩 함께 지냈습니다. 지난가을에 저는 생선과 다른 것들을 사고, 제 여동생이 차를 운전해 고향에 내려가 시어머니를 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매우 감동하시고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남편은 좋아하면서 저에게 “당신은 이번에도 마을에서 유명해졌어. 마을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가 복이 많다고 하시며 좋은 며느리를 두신 것을 부러워했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어머니는 제가 평소에 해드린 일을 동네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어머니를 뵈러 가면 동네 사람들이 다 친절하게 말을 건네고 효도한다고 칭찬했습니다.

작년 설에 중공 바이러스로 마을을 폐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해서 우리는 서둘러 시어머니를 우리 집에 모시고 전 세계적인 전염병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시어머니도 전염병이 사람들을 도태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믿었고 대법을 더욱 믿었습니다. 제가 연공할 때 시어머니는 다리를 결가부좌하고 조용히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를 외우셨습니다. 제가 법공부할 때면 시어머니는 글자를 모르시기에 애가 타셔서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면 꼭 공부하겠어. 눈뜬장님(글자를 모른다는 뜻)이니 속이 탄다.”라고 하셨습니다.

시어머니는 마을 봉쇄가 풀리고 날씨가 따뜻해질 때까지 우리 집에 머무셨습니다. 이번에 시어머니는 너무 감동하셔서 “너만 나를 신경 쓰는구나. 그 딸들은 모두 집에 와 보지도 않더라. 마을을 봉쇄한다 해도 너는 산을 넘어서라도 집으로 갈 수 있다고 했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어머니가 떠나시기 전에 저는 시어머니에게 9자 진언을 암송하는 것을 잊지 마시라고 상기시켜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걱정하지 마, 집에 가서도 계속할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대법에 대한 시어머니의 확고한 믿음에 기뻤습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몇 년이 지나서도 시어머니는 다섯 자녀 중 우리 집에 오시기를 원했습니다. 지난겨울, 이곳은 날씨가 춥고 폭설이 예보됐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가 눈길에 넘어지실까 봐 며칠 전 남편에게 시어머니를 모셔오라고 당부했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가 집에 오실 때마다 시어머니를 목욕시키고 온몸을 문질러드렸으며, 때가 되면 머리카락을 잘라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제가 솜씨 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둘째 시누이 부부는 “올케 같은 며느리는 정말 많지 않아요. 지금 시골에는 노인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시누이는 또 그들의 아들 부부가 자주 다투는데 한번은 며느리가 남편에게 “외숙모를 따라 파룬궁을 배워요.”라고 했습니다. 친척들이 모두 대법을 인정해 저는 정말 기쁩니다.

몇 년 전 시어머니가 저의 집에 사시면서 미안하다는 듯이 “세 딸 중 누구도 네가 나에게 베푸는 친절을 따라갈 수 없어. 내가 노년에 너의 신세를 질 줄은 정말 몰랐어. 이 신세를 다 갚을 수 없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시어머니에게 “노인 봉양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또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어머님이 대법의 덕을 보신 것이니 우리 사부님께 감사하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대법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데 망할 늙은 두꺼비(장쩌민을 일컫는 말)가 파룬궁을 못 배우게 하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한 것은 저 자신이 잘했다고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저 자신이 수련을 착실하게 한 대법제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회 전체의 도덕이 쇠퇴하는 상황에서 제가 대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저는 결코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또한 친척들이 저를 인정하는 것이 분명히 파룬따파를 인정하는 것이며, 저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사실 파룬따파에 대한 찬사임을 압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대법에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詩詞): ‘홍음-착실한 수련’

 

원문발표: 2022년 3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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