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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언(諫言)을 과감히 수용한 당태종(唐太宗)

글/훠한(華翰)

“엄동설한을 겪지 않고 어찌 매화의 향기로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처음 대당신어(大唐新語)>를 읽고, 당태종이 그리 자유롭지 못했고 군신들로부터 만만치 않은 견제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하들은 이것도 비판하고 저것도 지적했지만 본성이 선량하고 대범했던 당태종은 바른 의견을 받아들일 줄 알았다. 이것이 바로 당태종이 영명한 군주가 될 수 있었던 바탕이었고, 정관(貞觀)성세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하는 모두 당나라 유숙(劉肅)의 대당신어(大唐新語)>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인 이야기들이다.


당태종(唐太宗)

장현소(張玄素)가 치국지도(治國之道)를 논하다.

정관(貞觀) 원년 당태종은 이름 높은 현자 장현소를 초청하여 치국지도(治國之道)를 물었다.

장현소는 “자고이래 수(隋)나라만큼 죽음과 재난이 많았던 적이 없는데, 군주의 절대적 권력에 도(道)가 없고 법률이 하루하루 혼란스러워졌던 것이 그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군주가 위에서 겸허하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고, 신하들이 아래에서 잘못을 바로 고쳤다면 어찌 그런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하물며 만승(萬乘)의 군왕이 나라의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려 한다면, 하루에 10가지 결정을 내린다 해도 그 중 다섯 가지는 실수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루에 그 많은 일을 처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된다면 기필코 많은 일이 잘못되게 되어 결국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만약 수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거울로 삼아 하루하루 좀 더 진중하고 성실하게 하실 수 있다면, 곧 요순(堯舜)의 치세지도(治世之道)와 같은 것이니 더 보탤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태종은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위징(魏徵)이 지방관에 대한 조사를 중지시키다.

당태종이 섬서(陝西)성에 있는 행구성궁(幸九成宫)을 유람한 후 경성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당시 한 궁녀가 위천현(湋川縣)의 관사에 머물고 있었다. 얼마 후 이정(李靖)과 왕규(王珪)가 위천현에 도착하자 현의 관리가 궁녀를 다른 곳으로 내보내고 이정(李靖)과 왕규(王珪)에게 관사를 내주었다. 당태종은 이 사실을 알고 진노하여 “권세를 휘두르는 자들, 정녕 권세가 이정 등의 손아귀에 있단 말인가? 현리(縣吏)는 어째서 지나친 예로 이정 등을 맞이하고, 오히려 나의 궁녀를 소홀히 대하는가?”라며 즉시 위천현의 관리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위징이 나서서 간언(諫言)했다. “이정 등은 폐하가 아끼는 신하들입니다. 하지만 궁녀는 폐하와 황후를 시종하는 노비로서 양쪽의 직무를 따져보면 똑같이 취급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이정 등이 출장가면 각 지방관들이 그들로부터 조정의 얘기를 전해 듣고, 폐하께서도 그들이 돌아오면 민간의 상황을 묻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정 등은 마땅히 아래 관리들을 만나야 하고, 또 아래 관리들로서는 대신(大臣)들을 예방(禮訪)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궁녀에게는 음식과 주거를 마련해주면 되고, 결코 예방하거나 아첨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일로 죄를 물어 지방관을 처벌한다면 폐하의 인덕과 명성에 이로움이 없을 것이며, 백성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태종은 “그대의 말이 대단히 합당하오.”라고 말하고는 지방관에 대한 조사를 중지시켰다.

어진이의 말은 이로움이 무궁하다

정관 원년, 당태종은 순행(巡行) 준비를 위해 낙양의 궁전을 다시 축조하고자 했다.

그러자 급사중(給事中) 장현소가 상소문을 올려 간언했는데, 그 상소문에 적기를 “신이 듣기로, 아방궁(阿房宫)을 짓고 나서 진나라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장화대(章華臺-초영왕이 쌓은 호화로운 별궁) 축조 후 초(楚)나라를 배신하고 떠난 사람이 많았으며, 건원전(乾元殿)이 준공되자 수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해체되었습니다. 지금 폐하의 국력이 그때 수나라와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백성들에게 다시 멸망한 수나라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게 한다면, 폐하의 과오는 수양제(隋煬帝)보다도 클 것입니다. 저는 폐하가 좀 더 심사숙고하시어 유여(由餘)의 비웃음[유여는 춘추시대 서융(西戎) 사람인데, 서융왕의 사절로 진(秦)나라에 간 적이 있다. 당시 진목공(秦穆公)은 자랑삼아 화려한 진나라 궁전을 참관하게 했는데, 궁전을 둘러보고 난 유여는 “만약 이것이 귀신에게 짓게 한 것이라면 귀신에게 수고를 끼친 것이고, 만약 백성을 부려 짓게 한 것이라면 백성을 해친 것이다. 이게 바로 중원 각 나라가 재앙을 불러온 원인이다”라고 했다]거리가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천하의 큰 행운이 될 것입니다.”

이에 당태종은 “내가 수양제와 같지 않다면, 그럼 하(夏)나라 걸왕(傑王)이나 상(商) 나라의 주왕(紂王)과 비교하면 어떠한가?”고 묻자 장현소는 “만약 대규모로 건원전 건설을 진행한다면 그 결과는 걸왕과 주왕처럼 정신이 어지럽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폐하는 낙양을 평정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 않습니까? 태상황(太上皇-당고조 이연)이 고문대전(高門大殿)을 모두 불태우라고 칙령을 내렸을 때 폐하께서는 나무와 기와는 사용할 수 있으니 불태우지 말고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자고 했습니다. 그 후 그대로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천하의 사람들은 폐하의 덕이 크다고 칭송했습니다. 오늘 만약 옛 사례를 무시한다면 수나라 때의 노역이 부활되고 재현되는 것입니다. 5-6년도 지나지 않아 폐하의 태도가 상반되게 바뀐다면 무엇으로 만민의 뜻을 한데 모으고, 천하를 밝게 비추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당태종은 “말씀 잘 하셨소!”라고 하며 장현소에게 비단 300필을 상으로 내렸다.

위징도 감탄하여 말하기를 “장현소 공(公)의 말은 사리기 깊어 하늘을 되돌리는 힘(回天之力)이 있으니, 가히 인자(仁者)의 말이어서, 가져다주는 이로움이 대단히 크다!”고 했다.

문장발표: 2011년 3월 29일
문장분류:천인사이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3/29/23819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