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대법의 표준에 따라 가정의 모순을 대하는 것도 정법수련의 한 부분이다.(4)

문/즈윈

【명혜망 2004년 8월 16일】내가 느끼건대 이 한 정법시기에 가정에서의 모순은 더는 간단하게 개인수련이거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부딪친 어떠한 일도 모두가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과 연계된다. 또한 자신의 수련과 긴밀히 연계되어있다. 만약 자신이 잘했다면 주변에 수련을 하지 않는 친인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면 이미 사악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작용을 일으킨 것과 같으며 어떤 때에는 표현되는 형식이 직접적이 못되더라도 그러나 간접적으로 중생을 구도하는데 하나의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내가 발견한데 의하면 어떤 동수들은 밖에서 진상을 할 때에는 마땅히 대법제자가 표현해야 할 자태를 나타내고 있지만 일단 집에만 들어오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을 늦추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심지어는 자기가 집안에서의 표현을 밖에 있는 동수들이 모르고 있기에 괜찮다고 여기며 대수로워 하지 않는다. 또 어떤 동수들은 얼굴이 가려워 자기가 집에서 잘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대해 동수들이 아는 것을 싫어하며 자신의 형상이 영향을 받을 가봐 두려워한다. 마지막에 가정모순이 커져서 연공장에까지 미치게 되여서야 동수들은 비로소 그 동수의 집에서 모순이 이미 매우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대법제자가 속인과 모순이 발생했다면 이 자체가 문제로 된다. 한 대법제자가 집안에 수려하지 않는 사람과 모순이 발생했다면 마찬가지로 문제인 것이다. 사부님께서 설법 중에서 오늘 사회상에서 모든 일들이 모두가 대법제자들의 마음이 촉성한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이러한 가정모순을 단지 구세력이 했다거나, 혹은 상징적으로 입으로 말로만 자신에 누락이 있다고만 한다면 이것은 안 된다. 한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더욱 깊이 파고들어 근원에서 문제를 찾아야 하는데 가정에서 모순이 장기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원인이 그 뿌리하고 밀접한 연계가 있다.

진정한 하나의 대각자는 안과 밖이 일치하다. 집에서나 밖에서 막론하고 표현되는 것이 마땅히 같아야 한다. 각자의 눈부신 빛발은 어디에서든지 변하지 않으며 밖에서만 더 빛나고 집에서는 어둡고 빛을 잃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 대각자의 자비는 어디에서든지 변하지 않으며 밖에서만 자비를 나타내고 집에서는 자비가 없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막론하고 대법제자는 곳곳에서 응당 가지고 있는 풍모를 체현해야 하며 시시각각 자신이 대법을 실증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며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 특히는 한 정법시기 대법제자로 말하면 이것은 그저 응당 해야 할 일인 것이 아니라 직책으로 삼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중생을 구도하는 신성한 함의를 알고 있는 대법제자라면 생명에 대해 똑 같이 대해야 한다. 이 생명이 자신과 알륵이 없다고 해서 진상을 알려주고 저 생명이 자신과 알륵이 있다고 해서 그를 제도하기 싫어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한다면 속인중의 네가 나를 좋게 대하면 나도 너를 좋게 대한다는 것과 무슨 구별이 있는가? 이것은 절대로 한 대법제자가 응당 있어야할 사상이 아니다.

가정의 모순 속에서 어떤 부부들의 모순은 때로는 매우 어려운데 그러나 우리가 수시로 대법의 표준을 지도로 삼고, “정”이라는 사념의 영향을 제거한다면 능히 바로 잡을 수 있다.

법을 얻은 지 3년이 되는 한 부부가 있는데 두 사람은 늘 서로 상대가 잘못했다고 질책했는데 이런 상황이 매우 오래 지속됐다. 하루는 아내가 법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문제를 의식하게 됐다. 왜냐하면 남편이 수련하기 전에 자기에 대한 감정이 매우 깊었으며 많은 면에서 가급적이면 아내가 하는데 따라 주었다. 그러나 수련을 시작한 뒤로는 점점 남편이 그전처럼 자신을 대하지 않으며 또한 많은 면에서 예전처럼 모든 것이 자신과 같지 않았는데 특히는 동수들이 있는데서 자신의 결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잠재의식 속에 하나의 불평이 생겼는데 이리하여 남편과의 한차례 또 한 차례의 논쟁이 발생했다. 이 아내는 자신의 문제를 찾은 후 다시는 남편과 다투지 않았으며 자기부터 잘해야 되겠다고 자신에게 요구했다.

어느 하루 그가 남편에게 자기의 인식을 말했는데 생각 밖으로 남편은 매우 기뻐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인식을 말했다. 전에 감정이 깊었기에 그냥 모든 일에서 하자는 대로 따라만 주었는데 어떠한 일도 부부의 감정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법을 수련한 뒤로는 자신의 감정관이 개변되는 것을 느꼈는데 두 사람이 비록 지금 부부의 연분이 있지만 이것은 법을 얻어 수련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수련 중에서 보면 같지 않는 두 사람의 수련인 이기에 반드시 자신의 수련에 책임을 져야 하며 아내가 수련을 잘했다 하여 나도 잘 수련했다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내가 수련을 잘했다 해서 아내가 수련을 잘한 것도 아니기에 누구도 누구를 대신하지 못한다. 부부정에 끌려서 대법의 표준을 망각한다면 이것은 안 된다. 남편은 아내도 수련을 하고 있기에 이러한 도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아내가 한번 또 한번씩 자기와 다툴 때 아내가 생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으며, 그러므로 제때에 아내와 적절한 교류를 하지 못했다.

쌍방은 솔직한 교류를 통해 장기간 논쟁하던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수련에서 “정”의 영향을 제거하며 서로 상대를 동수로 삼으며 상대의 결점을 절대로 감싸주지 않고 제때에 지적해 주며 공동정진할 것을 약속했다.

또 한 부부가 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수련하고 있다. 그러나 늘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다가 마지막에 백열화 되었다. 쌍방은 모두 자기한테 잘못이 없다고 하면서 서로 법리를 가지고 상대를 질책했다.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았으며 법정에 가서 이혼을 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두 사람은 서로 변호사까지 청했는데 정말로 “끝장을 보지 않으면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태세였다. 정말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만약 서로 자신을 향해 찾고 근원을 파낸다면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두 대법제자인데 왜서 마지막에 법정에까지 가게 됐는가? 법정에 간 기점은 무엇인가? 분풀이를 하기 위한 것이며 혹은 자기가 인식한 것이 맞다는 것과 상해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정”속에서 지지를 얻어 상대를 타격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법의 이치도 쓸데없으며 상대를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비로소 법정에 간 것이 아닌가? 두 사람 모두 대법수련 중에 있는 제자인데 대법의 법리를 지도로 하여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속인중의 이치에 의거하는데 이것이 그래 근원에 있는 문제가 아닌가? 한 대법제자로서 이것이 그래 치욕이 아닌가?

정법은 이미 마지막으로 하고 있는데 정말로 자신에 이것이 정상인가를 물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서로 모순이 발생했을 때 마땅히 방법을 생각해 해결해야 하지만 서로 정속에 빠져들어 갔다. 왜냐하면 정이 미움을 생성하였기에 싸울수록 영향이 더욱 큰 것이다. 대법제자로서 생각해 보았는가? 주변에 있는 속인들이 대법제자들이 몸에서 발생한 이러한 일들을 또 어떻게 보겠는가? 이것이 그래 법을 실증하는 것인가? 만약에 두 사람이 서로 이 힘을 사악을 제거하는데 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렇게 해야 만이 제대로 한 것이다.

수선 대법제자로서 부부가 이혼을 한다는 이 문제를 말하지 않더라도 정말로 두 사람이 이혼을 했다하자. 그렇다면 그 모순들이 없어지는가? 집착하는 그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뿌리에 있는 문제들이 소실되었는가? 그런 미시적인 속에 있는 큰 산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대법수련자는 모두 잘 알고 있는데 속인중의 모든 수단들이 자신의 뿌리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며 그 미시적인 곳에 있는 큰 산들은 더구나 움직이지 못한다. 오직 대법만이 비로소 이 모든 것의 뿌리에 있는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오직 안을 향해 찾고 대법에 동화돼야 만이 이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다.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자신의 부족 점을 맞설 용기가 있어야하며 만약 서로 간에 대치상태에 있으면서 누구도 먼저 양보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있어야할 상태가 아니다. 이 속에는 비록 구세력의 교란과 요소가 들어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오직 안을 향해 찾아야 만이 비로소 철저히 그것을 부정할 수 있다. 천상에 있는 낡은 신마저도 “명, 리, 정”으로 인해 서로 간에 다투고 있는 대법제자들을 바로 보지 않고 있다. 정말로 자신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하며 “대법제자”의 호칭에 자격이 있어야 한다.

또 한 부부지간에 모순이 있는데 한 사람은 수련을 하나 다른 쪽은 수련을 하지 않는다. 먼저 마땅히 자신의 문제를 찾아야 하며 대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이 먼저 잘해야 한다. 관건은 어떻게 “정”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바로 놓는가 하는 것이다.

한 수련생이 있는데 아내는 수련을 하지 않으며 또한 그가 대법 일을 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수련생은 많은 일을 할 적에 아내를 속이고 하는데 그가 알면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길까봐 두려워했다. 또한 매번 아내가 트집부릴 때면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서 그를 위협했다.

이 수련생은 매우 큰 고민에 빠졌다. 이런 상태가 1년간이나 지속됐다. 이 수련생은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았으나 모두 소용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 수련생은 자신의 마음과 어떤 관계가 없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순간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이 동수의 마음속 깊이에는 아내가 자기하고 이혼을 할까봐 매우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아내가 매우 예쁘게 생겼기 때문인데 매번 아내와 함께 거리에서 걸을 적이면 다른 사람들이 그한테 부러운 눈길을 던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자신도 매우 득의양양 했다. 만약 아내가 정말로 자기와 이혼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얕잡아 볼까봐 두려웠으며 또한 다시는 지금의 아내처럼 예쁜 색시를 얻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다.

이러한 속인의 마음을 끄집어내고 보니 이 수련생은 자신이 너무도 정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감이 들었으며 1년 동안이나 이 마음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의식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이러한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자신이 비할 데 없이 홀가분해진 것을 느꼈다. 그는 아내에게 대법제자가 되려는 염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만약 견결히 이혼을 하겠다면 또한 자기보다 그를 더욱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싶다고 했다. 순간 아내는 멍해졌다. 그는 남편이 이처럼 대범하고 활달할 줄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 후부터 아내는 다시는 그하고 다투지 않았으며 그가 하고 있는 일들을 가로막지 않았다. 또한 남편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 아내도 따라서 연공을 하기 시작했다.

가정의 모순 속에서 자신이 “정”속에 빠져 있게 되면 자신의 문제를 보아내기 어렵다. 오직 수시로 대법의 표준으로 자신을 비춰보고 자신을 요구해야 만이 비로소 “정”속에서 뛰쳐나올 수 있으며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사실상 일찍이 개인수련시기에 대륙의 대법제자들이 가정의모순을 대하는 면에서 허다한 감동되는 사례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 대법제자로 말하면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제일 기본적인 것이다. 대법이 대륙에서 사람사이에 전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방식으로 신속하게 전해졌는데 이것은 대법자체의 위력을 제외한 외에 대륙의 제자들이 방방면면에서 잘해 온 것과 관계가 된다. 비교하여 볼 적에 우리 해외에 있는 많은 제자들이 아직까지도 제고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는 이 한 특수한 시기에 더욱 더 깨여나야 한다.

우리들이 밖에서 모순을 대할 적에는 모두가 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가 직접 대법과 대법제자들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중생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모순이 생기면 더욱더 잘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 가정 내의 사람과 친척 친우, 동네사람들이 대법과 대법제자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게 되며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륙의 제자들이 그렇게도 엄혹한 환경 속에서 세인을 향해 대법이 좋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대법제자들은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는데 그들이 치른 대가는 생명과 선혈이다. 비교해 볼 적에 우리 해외제자들은 먼저 다른 것을 제쳐놓고 서라도 자기집안에서의 모순 속에서도 잘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마땅히 청성하게 자신이 정말로 수련을 하고 있는가를 한번 잘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대법을 실증하고 있는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할지라도 제일 기본적인 실속수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대하고 있는 것이 사회상에서의 모순이던지 아니면 가정에서의 모순이던지 막론하고 우리들은 잘하지 말아야할 그 어떠한 이유도 없다. 정법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이 세인들의 이해와 지지를 얻는다는 것이 쉽지 않으며 이중에는 얼마나 많은 대법제자들이 치른 대가가 들어있는가? 이 중에는 또 사부님께서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이셨는가? 특히는 우리 해외제자들이 이렇게 느슨한 환경에서 가정에서도 잘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자신이 잘하지 못해서 주변에서 대법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대법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그저 일반적인 작은 문제라고 볼 수 없다. 또한 자신의 정법수련에 가져다 주는 손실은 작은 것이며 대법에 가져다주는 영향은 큰 것인데 그것은 바로 죄책이다.

“유유한 만세의 인연은 대법의 一線에 묶이었다네” (《神의 길은 어렵니라》)모든 인연은 대법으로 인해 왔다. 잘하자, 위치를 바로 잡자, 아끼자, 일념의 차이로 자신에게 유감을 남기지 말자. 정법의 노정이 신속하게 제일 표면으로 돌진하고 있다. 자신이 잘 하지 못했거나 혹은 대법이 요구하는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누구를 기다리며 정법의 진전이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일념의 차가 정법의 노정에서 자신이 대표한 천체중의 그 한 층의 중생이 남는가 도태되는가를 결정한다.

사회상에서나 가정에서나 막론하고 다른 사람을 대하거나 가정 내의 사람을 대하거나를 막론하고 대법제자로서 잘하지 못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대법에서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정법시기대법제자의 기본 직책이기 때문이다.

(끝)

문장완성:2004년 8월 12일
문장발송:2004년 8월 16일
문장갱신:2004년 8월 16일 12:17:31 PM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8/16/81632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