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샤오청언(肖承恩)
[명혜망] 공자는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 “공자께서는 괴이함·폭력·어지러운 일·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셨다(子不語怪力亂神)”,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焉知死)?” 등의 말을 남겼다. 예로부터 공자는 귀신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이 있었으며, 공자와 동시대 인물인 묵자(墨子)는 “유가(儒家)는 하늘을 밝지 않다 여기고 귀신을 신령하지 않다 여기니, 하늘과 귀신이 기뻐하지 않을 것이요, 이것이 천하를 망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하며, 유가가 “귀신이 없다고 단정하면서 제례(祭禮)를 배운다”고 비웃었다.
그런데 공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제사 지낼 때는 마치 (선조가) 계신 듯이 하고, 신에게 제사 지낼 때는 마치 신이 계신 듯이 하라(祭如在,祭神如神在).” 제사를 드릴 때는 신이 실제로 그 자리에 앉아 계신 것처럼 해야 비로소 경건한 제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공경하되 멀리하라”고 했을까? 춘추전국 시대로 돌아가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면, 역사의 현장 속에서 이처럼 모순되어 보이는 태도의 내력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다.
덕이 없는 우공, 제사도 소용없다
『좌전(左傳)』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기원전 655년, 진(晉)나라가 우(虞)나라에게 길을 빌려 괵(虢)나라를 치려 했다. 우나라 대부 궁지기(宮之奇)가 우공(虞公)에게 간언했다. “우나라와 괵나라는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는 관계이니, 괵나라가 멸망하면 진나라는 반드시 우나라도 멸할 것입니다.” 우공은 개의치 않으며, 진나라는 우리 종족이니 변심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궁지기가 반박했다. “진나라의 다른 가까운 친족들도 이미 멸망하지 않았습니까?” 우공은 다시 말했다. “나의 제물은 풍성하고 정갈하니 신명께서 반드시 나를 보우하실 것이다.”
궁지기가 우공에게 고했다. “귀신은 특정한 사람만을 친히 여기지 않으며, 오직 덕(德)이 있는 자를 따릅니다(鬼神非人實親,惟德是依).” 그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귀신은 아무에게나 가까이 하지 않고, 오직 덕행이 있는 자를 보우한다고요. 그래서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하늘은 사람을 친하고 소원하는 것으로 대하지 않으며, 오직 덕이 있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또 ‘오곡의 제물은 향기롭지 않으며, 오직 아름다운 덕만이 향기롭게 풍겨 나온다’고도 했습니다. 『주서』에는 또 ‘사람들의 제물이야 다를 것이 없으나, 오직 아름다운 덕을 지닌 사람의 제물만을 신께서 받으신다’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주서』의 말씀에 따르면, 임금에게 덕이 없으면 백성은 화목하지 않고, 신명도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신명이 의지하는 것은 사람의 덕행에 있습니다. 설령 진나라가 우나라를 빼앗더라도, 진나라가 아름다운 덕으로 신명께 제물을 올린다면 신명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공은 궁지기의 간언을 듣지 않고 진나라 사신이 가져온 명마(名馬)와 옥(玉)을 받아들이며 길을 빌려줄 것을 허락했다. 궁지기는 일족을 이끌고 우나라를 떠나면서 말했다. “우나라는 이제 연말의 납제(臘祭)도 지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우나라는 멸망하고 말 것이며, 진나라는 다시 군사를 보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국 진나라는 괵나라를 멸한 후 돌아오는 길에 기세를 몰아 우나라마저 멸망시켰고, 우공은 끝내 신명의 보우를 받지 못했다.
춘추전국 이전의 서주(西周) 시대에는 예악(禮樂)이 성행하고 사회의 도덕 수준이 높았다. 하늘을 공경하고 제사를 올리며 도를 구하고 신을 향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주목왕(周穆王)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곤륜(崑崙)을 지나고 약수(弱水)를 건너 서왕모(西王母)를 만난 일도 있었으니, 이는 『목천자전(穆天子傳)』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동주(東周)에 이르러 열국이 다투고 예악이 무너지며 인심이 예전 같지 않아 욕망이 채워질 줄을 몰랐다. 제사의 형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그 내면에서 진정한 경외(敬畏)와 경건함은 사라지고 말았다.
제환공, 권세에 집착하다 신의 가호를 잃다
춘추전국 시대의 제환공(齊桓公)은 즉위 초에 사람을 알아보는 혜안이 있어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어 현명함을 기준으로 삼았다. 관중(管仲)이 한때 화살로 자신을 쏘았음에도 지난 원한을 개의치 않고 재상으로 발탁했다. 훗날 누군가 관중을 헐뜯는 참언을 올렸으나 제환공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관중을 더욱 신임하여 ‘중부(仲父)’라는 존호를 내렸다. 관중이 제환공을 보좌하여 “아홉 차례 제후들을 규합(九合諸侯)”했다.
그러나 패주(霸主)가 된 후, 제환공은 교만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고 점차 욕망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관중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관중이 제환공을 수행하던 중 한 자 남짓한 작은 사람이 나타나 길을 안내했는데, 관중이 이는 산신의 아들이라고 하자 제환공이 관중에게 성인의 도에 통하였다고 칭찬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환공은 제사와 점복(占卜)을 중시했다. 그는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치르려 했으나 관중이 만류했다. 봉선은 공덕(功德) 있는 천자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인데, 제환공은 제후에 불과했으니, 이는 이미 두드러진 월권의 마음이었다.
관중은 제환공이 교만과 사치를 내려놓고 내면을 수양하기를 바랐다. 『열자(列子)·탕문(湯問)』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하나라 우왕(大禹)과 서주의 주목왕(周穆王)이 북쪽을 유람하다가 ‘종북(終北)’이라는 나라에 이른 적이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의 마음이 선(善)을 향하는 곳으로, 서로 교만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귀천의 구분도 없으며, 사람들이 화목하게 어울려 살았다. 관중은 제환공에게 정무를 내려놓고 함께 북쪽으로 유람하여 우왕과 주목왕이 찾아간 ‘종북’의 나라를 찾아보자고 권했다.
제환공은 마음이 동했고 막 출발하려는 참이었다. 그때 신하 습붕(隰朋)이 가로막았다. “임금께서 떠나신다면, 제나라의 넓은 땅과 수많은 신민(臣民)·산천의 보물·예의와 조공·백만 군사, 그리고 후궁의 총애하는 후비들과 그 모든 권세가 전부 허사가 되어 버립니다. 관중은 이미 노망이 들었으니, 어찌 그의 말을 따르십니까?”
이 말을 들은 제환공은 다시 내려놓지 못했고, 관중과 함께 선경(仙境)을 찾아 떠나려던 계획을 멈추고 말았다. 관중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이는 본래 습붕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저 저 선경의 나라에 결국 가지 못하게 될까 두렵고, 그러면 제나라의 부유함인들 무엇이 아쉬우랴? 기회란 오직 한 번뿐인 법이다.”
제환공은 그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다. 관중은 어쩌면 앞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제환공에게 ‘종북’의 나라로 멀리 떠나 운명의 궤적을 바꾸자고 권했는지도 모른다. ‘종북’의 나라는 사실 다른 차원 공간의 경계(境界)로, 진심으로 도를 구하는 자가 먼 유람과 갖은 고생과 백방의 탐구 끝에 비로소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춘추전국 시대 첫 번째 맹주(盟主)였던 제환공은 그 기연(機緣)을 깨닫지 못하고 인연을 놓쳐 버렸다. 제환공은 인간 세상의 권세에 탐닉했고, 관중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위기에 빠졌다. 간신들이 높은 담을 쌓아 궁 안에 가두니, 밥조차 먹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이 결말을 맞이하고서야 관중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천으로 머리를 감싸 질식하여 죽었다. 죽은 지 11일 만에 구더기가 문틈으로 기어나오고서야 사람들이 환공의 죽음을 알았고, 67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염을 할 수 있었다.
공자의 태도 “사람이 죽으면 앎이 있는가, 없는가”
이처럼 춘추전국 시대에 벌어진 일들을 공자는 직접 몸으로 느끼며 예악이 무너지는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신에게 제사 드리는 예의는 남아 있었으나, 예악 안에 담긴 신과 천도(天道)에 대한 경건함은 희미해져 있었다. 도덕을 높이고 참된 도를 향하는 인연이 찾아왔을 때, 어떤 이는 그것을 귀히 여길 줄 모르고 권세와 욕망 속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에 공자는 깨달았다. 낡은 예악을 고집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며, 겉으로 드러난 형식과 절차로는 내면의 인심을 다잡을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밝아지고, 도덕이 자연스럽게 서게 되느냐—이것이 공자가 유학(儒學)을 주창한 근본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귀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에 있어서, 공자는 거의 침묵에 가까운 태도를 유지했다. 『설원(說苑)』에는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죽은 사람에게 앎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물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가 답했다. “나는 죽은 자에게 앎이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효자·순손(順孫)들이 삶을 아끼지 않고 죽은 이를 따라 죽을까 두렵다. 또 앎이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불효한 자손들이 어버이의 유해를 버려두고 장사 지내지 않을까 두렵다. 자공아, 죽은 사람에게 앎이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다면, 죽거든 천천히 스스로 알게 되리니, 그때 알아도 늦지 않다.”
맺음말
이상을 종합하면, 공자가 “귀신에 대해 말하기를 꺼린” 것은 사람들이 덕을 닦도록 이끌기 위함이었지, 미신을 믿거나 아무것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무신론자가 아니었고,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덕행(德行)’이야말로 신명의 보우를 받을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의 본래 뜻은 이렇다. 귀신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존재를 인정하고, 그 위의(威儀)를 공경하되, 형식에만 치우치는 것은 멀리하며, 덕을 닦는 것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귀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사람들이 귀신에게만 초점을 맞추다가 도덕 수양을 소홀히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문발표: 2026년 3월 25일
문장분류: 천인(天人)사이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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