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이명(聞以明)
[명혜망] 중국은 예로부터 ‘신주(神州)’ 대지로 불리며 풍부하고 다채로운 신전(神傳)문화를 연출해왔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사찰, 도관, 교회는 ‘문화관광 프로젝트’가 돼 각종 기발한 방법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어떤 곳은 온 산에 각종 기이한 신상(神像)을 세워놓고 관광객과 사진을 찍으며 각종 명목으로 돈을 거두어 명산대천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예전의 속세와 동떨어진 청정한 수련 장소는 오늘날 ‘돈 찍는 기계’와 중국공산당(중공)의 정치 도구로 변했다. 인터넷과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갈수록 ‘수련’이라는 단어를 비웃거나 멋 부리는 데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상 수련의 신성함을 모독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 승려와 도사, 그리고 그들이 머무는 장소마저도 온갖 거래의 대상과 장소가 됐지만, 1949년 이전만 해도 이 천백 년 된 고대 사찰과 도관은 여전히 불도(佛道)를 닦는 자들이 마음을 닦고 선을 향해 나아가며 마음을 맑게 하고 집착을 버리는 정토였다. 오늘 우리는 수련의 진정한 내포라는 이 거대한 주제를 논하지 않고, 역사와 문화의 관점에서 ‘수련’이라는 두 글자가 담고 있는 무게를 살펴보려 한다.
(전편에 이어)
백일비승
‘신선전(神仙傳)’에는 일부 수련자가 수련성취 후 ‘백일비승(白日飛升)’해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무협소설에서는 사람이 지붕이나 담벼락을 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지만, 일반인은 여전히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하며 백일비승은 더욱 기이하게 여긴다. ‘지구의 인력에서 벗어나고 중력에서 벗어난다? 어떻게 가능할까?’ 현대인은 물리적 관념에 따라 그것을 허구적인 신화라고 여긴다. ‘누가 본 적이 있는가?’
다음 사례는 그중 한 여성 도사이자 역사상 유일하게 관리의 인정과 정사(正史)의 기록을 받은 백일비승자 사자연(謝自然)에 관한 이야기다.
당(唐) 덕종(德宗) 정원(貞元) 9년(서기 794년) 11월 12일, 대당(大唐)에서 신기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여성 도사 사자연(767년생)이 27세의 나이에 민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일비승한 것이다. 당시 수천 명의 사람이 과주(果州, 현 쓰촨 난충)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환송했다.
송대(宋代) ‘태평광기(太平廣記)’의 기록에 따르면, 사자연은 어려서부터 고요함을 좋아하고 성격이 온화하며 예의 바르고 ‘도덕경(道德經)’ 낭송을 즐겼다고 한다. 사자연의 선조는 연주(兗州) 사람이다. 아버지 사환(謝寰)은 과주(果州) 난충(南充)에 살았는데, 효렴(孝廉)으로 추천돼 지방 말단 관리를 지냈고, 어머니 서씨(胥氏) 역시 고을 내 명문가 출신이었다.
사자연은 7세부터 두 비구니를 따라다니며 3년간 수행하며 유람했다. 10세에 집으로 돌아와 대방산(大方山) 정상의 노군묘(老君廟, 현재 시산 풍경구 정상)에 머물렀다. 14세 되던 해 9월, 갑자기 음식이 구더기 같아 먹을 수 없다고 말하며 그 후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정원 6년 4월(서기 790년), 자사(刺史) 한일(韓佾)이 이곳에 부임했는데, 그는 사자연이 곡기를 끊었다는 것이 거짓이라 의심해 그녀를 주(州) 북당 동각으로 불러들여 몇 달간 가두고 정말 음식을 먹지 않는지 시험해 보려 했다.
몇 달 뒤, 방문을 열었을 때 사자연의 피부는 전과 같았고, 목소리는 낭랑하고 기운이 넘쳤다. 이때 한일은 온 가족을 이끌고 사자연을 찾아왔고, 딸 한자명(韓自明)에게 사자연을 스승으로 모시게 했다.
그 이전에 사자연의 아버지 사환은 여러 해 동안 유람하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사자연이 도법(道法)을 수련하며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요사스럽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유학의 풍모를 이어왔으며, 삼강오륜 외에는 모두 선왕(先王)의 법이 아니거늘, 어찌 이런 요사스러운 짓으로 사람을 미혹할 수 있는가?” 그는 사자연을 당(堂)에 40여 일간 가뒀지만 사자연의 외모는 오히려 더 맑고 수려해졌고, 사환은 경악했다.
정원 9년(서기 793년), 이견(李堅)이 과주 자사로 부임했다.
정원 10년 3월 3일(서기 794년), 사자연은 금천도장(金泉道場)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날은 구름이 화창하고 경치가 평소와 달랐다. 사자연은 이날 하늘의 진인(眞人)과 신선들이 모두 모였다고 말했다. 금천(金泉) 숲속에는 사슴이 있었는데, 사람을 피하지 않았고 많은 새끼 사슴이 사람들과 온순하게 어울렸다.
사자연은 성품이 진지해 수도(修道)에 관한 일은 함부로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과주 자사 이견이 지극한 도(道)를 숭상했기에 사자연은 그에게 조금 이야기했다. “경을 외울 때는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를 받드는 사람이 중도에 포기하면 손실이 더 크니, 차라리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부디 신중하십시오!”
사자연은 13년 동안 곡식 한 톨 먹지 않았다. 정원 10년 11월 9일(서기 794년), 사자연은 주(州)로 가서 이견에게 작별을 고하며 말했다. “저는 중순에 틀림없이 떠날 것입니다.” 이후 그녀는 다시는 정실(靜室)에 들어가지 않았다.
11월 20일 진시(辰時), 사자연은 금천도장에서 백일승천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승천 과정을 지켜봤다. 그녀의 조모 주씨(周氏), 어머니 서씨, 여동생 사자유(謝自柔), 제자 이생(李生)은 “부지런히 수련해야 득도(得道)할 수 있습니다”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잠시 후, 오색구름이 산천을 뒤덮었고 하늘의 선악(仙樂)과 기이한 향기가 오랫동안 널리 퍼졌다. 사자연이 평소 입던 의관과 비녀 등 10가지 물건은 작은 노끈 침대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매듭도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또한, 사자연이 비승할 때 당내 동쪽 벽에는 52개의 글자가 쓰여 있었다. “주인과 모든 권속에게 말을 전하니, 몸을 보전하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공덕을 부지런히 닦고 선한 마음으로 복밭을 일구며, 깨끗이 재계(齋戒)하고 도를 생각하면, 백겁(百劫) 뒤 좋은 인연이 있을 것이고, 청원(淸原)의 고향에서 일찍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사 이견과 서천(西川) 절도사 위고(韋皋)는 이 일을 당 덕종 이괄(李适)에게 상주했고, 황제는 조서를 내려 사자연을 포상하고 찬미했다. 이견은 금천도장에 비석을 세우고 사자연이 득도해 승천한 경위를 서술했다.
현재 중국 쓰촨성 지방지 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쓰촨성 정보망에는 당 덕종의 ‘칙과주여도사사자연백일비승서(敕果州女道士謝自然白日飛升書)’가 수록돼 있다. 칙(敕)은 제왕이 반포하는 문서를 가리킨다.
자사 이견이 지은 ‘동극진인전(東極眞人傳)’ 1권에도 사자연의 사적이 기록돼 있다. ‘동극진인전’은 이미 소실됐지만, 24사(史) 중 하나인 ‘신당서(新唐書)’ 권65에는 ‘이견 ‘동극진인전’ 1권 과주 사자연’이라는 목록과 요지가 수록돼 있다.
사자연의 ‘백일비승’은 당시에 천하를 떠들썩하게 했으며, 사실 앞에서도 이 일을 믿지 않거나 이를 빌미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대의 저명한 문학가 한유(韓愈)가 그중 한 사례인데, 그는 사자연이 신선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500자 길이의 오언고시 ‘사자연 시(謝自然詩)’[‘전당시(全唐詩)’ 권336 ‘사자연 시’ 참조]를 지었다. 그 시에는 사자연이 그날 ‘잠시 후 저절로 가벼이 올라, 바람 속 연기처럼 흩날리듯’ 천천히 신선이 돼 떠나 만인의 경탄을 자아냈다고 썼다. 한유는 평생 유학을 수호하고 불교와 노장사상을 배척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렇게 확고한 유물론자조차도 수도(修道)가 이질적인 일이라고 비판했을 뿐, 이 일의 진실성과 신뢰도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역대 수련인들은 각기 다른 수준으로 신통력을 드러내며, 부처를 수련하고 도를 닦는 것이 비범함을 실증했다. 남송(南宋)의 제공(濟公)은 우물을 통해 먼 곳에 떨어진 목재를 운반했고, 원(元)나라 장춘진인(長春眞人) 구처기(丘處機)는 멀리 사막까지 가서 기적을 보이며 칭기즈칸에게 살생을 멈추라고 권했으며, 명(明)나라 장삼풍(張三豊)은 묘수회춘(妙手回春)으로 수많은 불치병을 고쳤다.
서양 역사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서양 작가 빈스 다친스키(Vince Daczynski)는 2004년 저서 ‘놀라운 인간의 능력(Amazing Human Abilities)’에서 가톨릭 문헌을 근거로 200명이 넘는 가톨릭 성인이 공중부양을 했음을 확인했다. 쿠퍼티노의 성 요셉(St. Joseph of Cupertino)은 수백 명의 증인 앞에서 공중부양을 했으며, 100회 이상 공중부양을 해 ‘나는 수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동서양 모두 신기하고도 진실한 수련인의 기적이 있으며, 이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며, 질서 있는 수련과 연마를 통해 초월적이고 비범한 능력을 지닐 수 있음을 증명한다. 수천 년간 사람들은 수련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이해하게 됐으며, 낯설어하다가 갈망하게 됐고, 시종 신(神)이 다시 돌아오시기를 고대해 왔다.
(계속)
원문발표: 2025년 9월 29일
문장분류: 천인(天人)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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