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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선에 오르는 것과 내리는 것에 대해

글/ 리신(李欣)

[밍후이왕] “저는 오늘 갑자기 알게 되었습니다! 공산당은 하나의 정권 조직도 아니고 무슨 독재 당파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살아있는 사령(邪靈)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있고 피와 살이 있으며, 발톱과 이빨이 있는데, 그것의 목적은 인류를 파멸하는 것입니다.” 양더푸(楊德福, 가명)는 에포크타임즈 사이트에서 삼퇴(중국 공산당, 공산주의 청년단, 소년선봉대 탈퇴) 성명을 발표할 때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 선언’ 서두에 공산주의 유령이 유럽 대륙을 배회하고 있다고 설명했으며,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진실한 자술입니다!”

공산주의는 아편처럼 사람을 끌어당겼지만, 소련과 동유럽에선 무너졌다. 사실 그것이 인민들을 기근과 빈곤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증명한다. 중공(중국공산당)은 늘 스스로를 ‘구세주’와 ‘어머니’로 치켜세워 민주와 자유의 ‘신중국’을 만들겠다고 하며, 많은 사람을 끌어당겨 그야말로 ‘해적선에 승선’했다.

해적선에 오르는 것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천쭈페이(陳祖沛)는 광동 기업가로 ‘세계지식(중국 외교부가 주관하는 잡지)’을 즐겨 읽었기 때문에 작가 중 한 명인 류쓰무(劉思慕)와 알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류쓰무는 천쭈페이의 먼 친적이기도 했다. 류쓰무는 젊은 시절에 소련과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했으며, 코민테른(공산주의 국제 연합)의 파견 지시를 받아 국민당 정부의 군사 핵심 부서로 잠입하여 지하공작을 폈다. 천쭈페이는 류쓰무를 통해 장나이치(章乃器), 첸자쥐(千家駒) 등 이른바 민주 인사, 학자, 상공업계 인사를 알게 되어 좋은 벗으로 맺어졌다. 그들의 선도하에 1946년부터 1951까지 천쭈페이는 또 중공에게 10여만(약 1460만여 원) 홍콩 달러를 기부했다.

'陳祖沛'
천쭈페이(陳祖沛)

1948년 10월, 핑진전투(平津戰役) 결전을 앞두고, 천쭈페이는 친동생 천쭈잉(陳祖瀛)을 톈진(天津)으로 파견하여 직원들을 동원하여 중공군이 톈진과 화베이 지역을 접수하는데 준비 작업을 잘하여 영접하도록 했다. 천쭈페이는 톈진과 화베이 지역의 무역을 개척하기 위해 휘발유, 중유, 트럭, 타이어, 고무와 양약 등 대량의 필수 물자를 3000톤 급의 영국 선박을 대절하여 톈진항으로 운송했고, 친히 호송하였다. 중공을 위해 물자가 턱없이 부족하고 지방 특산품이 팔리지 않는 경제적 곤경을 해결해 주었다.

홍콩 화상 일보(華商報) 사장 싸쿵랴오(薩空了), 세계지식 잡지 발기인, 싱타오 데일리(星島日報) 편집장 진중화(金仲華), 음악가 마쓰총(馬思聰), 연극예술가 어우양위첸(歐陽予倩) 등 백여 명 문화인들은 화물들로 가득찬 천쭈페이의 화물선에 섞여 비밀리에 중국으로 돌아가 중공 정치 협상 회의에 참석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그들을 접견하며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 공산당의 해적선에 오른 것입니다.” 첸자쥐는 나중에 자찬연보(自撰年譜)에 실었다. 그는 모택동에게서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보아하니 이건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지하군요.”

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해적선에 태운 천쭈페이도 결국 스스로 그물에 걸렸다. 1950년에 천쭈페이는 “공산당은 상공업계를 진정한 친구로 여깁니다. 우리가 공산당을 잘 따르기만 하면 반드시 밝은 앞날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경솔하게 믿었다. 그는 본토로 돌아가서 중국 최초의 중외합자기업을 세우는 데 참여했다. 1952년에 오반운동(五反運動-자본가 및 사적 기업가에 대한 뇌물, 탈세·누세, 국가재산도용, 원자재 사취, 국가 경제 기밀 절취에 대한 5가지 반대 운동)이 시작되고, 그는 바로 구 인민폐로 세금 200억 위안(약 3조 4천억 원) ‘세금 보충’ 요구를 받았다. 천쭈페이는 광저우시 공안국에 한 달 넘게 감금되어 있었고, 돈을 충분히 모아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잔인한 행위들은 천쭈페이에게 충격을 주었다. 1957년에 그 반대편에서 또 괴롭혀 천쭈페이는 투신을 했고,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한쪽 다리가 절름발이가 되었다.

중공을 잘못 믿어 호랑이 입속으로 들어가다

한 시대의 선박왕 루쭤푸(盧作孚)는 천쭈페이와 같이 중공을 경솔하게 믿었다. 루쭤푸는 애국 기업가였고, 일본군 폭격하에 위험을 무릅쓰고 물자를 긴급 운송한 큰 공헌으로 국민당 정부의 포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중공을 잘못 믿어 1949년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1952년 2월 8일 회사에서 ‘오반’ 궐기 대회를 개최했고, 모임에서 루쭤푸는 중공에서 파견한 정부측 주식 대표에게 중상모략을 당해 당일 밤 자결했고, 회사 또한 중공에게 빼앗겼다.

작년 7월 중공이 기업가들에게 애국하고, 애국 기업가의 모범 루쭤푸, 왕광잉(王光英), 룽이런(榮毅仁)에게 배워야 한다고 호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루쭤푸는 중공이 공사합영 시행 중에 박해를 받아 사망했고, 왕광잉과 룽이런 또한 문화대혁명 기간에 파급되었다. 이 사례들은 바로 중공이 민영 기업가를 약탈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현재 중공은 오직 기업가 장첸(張騫)에게서 배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장첸은 1926년에 사망하여 중공의 폭정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企業家盧作孚'
기업가 루쭤푸(盧作孚)

1949년 장제스(蔣介石)가 중국에서 철수하기 전에 학자 구조 계획을 시행했다. 하지만 후스(胡適), 푸쓰녠(傅斯年), 메이이치(梅貽琦) 등을 제외하고 중앙 연구원 81명 원사(院士) 중 60명은 남아 있었다. 그들은 지식으로 조국을 살리고 정치를 멀리하기만 하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궈모뤄(郭沫若) 등 극소수 사람들이 중공의 노예로 전락한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 중공의 박해를 받았다. 일부는 해외에서 돌아와 ‘신중국’ 건설에 헌신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1951년에 미국에 있는 번역가 우닝쿤(巫寧坤)이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 열정을 품은 채 중국으로 돌아와 교직을 맡았다. 그는 배웅하러 온 리정다오(李政道)에게 왜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자 리정다오가 말했다. “나는 세뇌 당하고 싶지 않아요.” 1957년에 우닝쿤은 우파로 몰려 노동개조 조치가 내려졌고, 20년간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나 그해 리정다오는 오히려 영예롭게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우닝쿤은 자신은 ‘만 리에서 회귀하여 호랑이 입으로 들어갔다’라고 감탄했다.

1993년에 그는 영문으로 작성한 재난 뒤에 살아남은 이야기를 담은 회상록 ‘A Single Tear’는 같은 해 ‘뉴욕 타임스’가 선발한 ‘읽어 볼 만한 책’ 7권에 선정되었다. 이 책은 한 시대의 애국 지식인들이 온갖 세상일을 겪은 파란만장한 삶과 비통함이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한 방울의 눈물이 아니라, 쉬즈모(徐志摩)가 소련 공산주의를 말할 때 묘사했던 것처럼 그것은 온통 ‘불바다’이다.

번역가 우닝쿤(巫寧坤)과 회상록 ‘A Single Tear’

해적선에서 내린 현명한 선택

‘망향가(思鄉曲)’는 중앙음악대학 학장, 중국 바이올린 일인자 마쓰총이 이름을 날리게 된 명곡이다. 하지만 노후에 그는 오히려 귀국하기를 거부했다. 문화대혁명 박해에서 궁지에 몰린 마쓰총은 배수진을 쳐 1967년 1월 15일 밤에 온 가족을 데리고 홍콩으로 밀입국했다. 접안 후에 그는 모택동 뱃지를 떼어 바다에 던졌다.

비행기로 미국에 도착한 후에 마쓰총은 ‘나는 왜 중국을 탈출했는가’라는 연설을 발표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지식인들을 파멸시키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과 가을에 일어난 사건은 저를 완전히 절망에 빠지게 했고, 저와 제 가족은 도망자가 되어 사방을 떠도는 ‘배고픈 유령’이 됐습니다.” 마쓰총이 탈출한 뒤 국내에 있는 여러 친척들이 연루되어 박해를 당했다. 마쓰총은 계속해서 그의 자식들에게 말했다. “나는 조국에 미안한 것이 없다… 악마가 사람을 해쳤다… 언젠가는 진상이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작년 말 영국에 머물던 피아니스트 푸총(傅聰)은 우한 폐렴에 감염돼 세상을 떠났지만, 오히려 일부 사람들에게 검색어 ‘배반하고 도망가다’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1958년 말, 아버지로 알려진 저명한 번역가 푸레이(傅雷)가 ‘우파’로 몰린 것을 안 뒤 바르샤바에서 공부하던 푸총은 런던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중국에 돌아가 ‘아버지가 아들을 적발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적발하는’ 비극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1966년에 푸레이 부부는 문화대혁명의 박해를 견딜 수 없어 자결했다.

푸총과 동시대에 살았던 피아노 천재 구성잉(顧聖嬰)은 상하이 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독주를 맡았다. 문화대혁명에서 아버지가 이미 잡혀가 감옥에 갔고, 이튿날 자신이 비판과 투쟁의 주인공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서른 살의 구성잉은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그날 밤 자결했다. 만약 푸총이 당시 귀국했다면 우리가 아직도 그의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었을까? 중공을 멀리하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선택이다.

삼퇴 용사

중공이 정권을 빼앗은 70여 년 동안, 역대 운동 중에 8천 만 명의 중국인을 비정상적으로 사망하게 했다. 바른 믿음을 박해하고, 하늘을 거슬러 도를 배반하는 것은 중화민족의 진정한 죄인이다. 양심이 있는 중국인은 중공의 본질을 똑똑히 인식하고, 중공이 중국 인민들에게 끼친 고통과 재난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역사의 대반전이 일어나는 관건적인 순간에 역사의 목격자가 되어야 하고, 역사의 추진자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중공을 멀리하여 영혼을 스스로 구해야 한다. 현재 이미 3억 7천 만 명이 당, 단, 대(중국 공산당, 공산주의 청년단, 소년선봉대) 조직을 탈퇴했고,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했다.

2020년 8월, 헤이룽장(黑龍江)성 지시(雞西)시 전 부시장 리촨량(李傳良)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공개적으로 탈당 선언을 했다. 그는 말했다. “중공의 부패로 말미암아 2014년에 스스로 부시장의 직무와 공무에서 자진사퇴를 했고, 현지의 한 지역 서기가 중공이 전염병 발생 상황을 은폐하려는 사실을 논하다 고발되어 체포된 것을 알게 된 후에 저는 말로 빌미를 잡혀 죄를 받을까 우려하여 미국으로 도피한 후 에포크타임스 탈당 사이트에서 실명으로 삼퇴(당, 단, 대 탈퇴)를 했습니다.“ 리촨량은 자신이 중공 체제와 도무지 맞지 않는다며, “공산당이 처음에는 아마 당신에게 말을 듣도록 일부 대우를 해줄 것입니다. 이익을 미끼로 당신을 유혹하고, 더 안 되면 곧 당신을 공격하고 협박합니다”라고 밝혔다.

'李傳良'
리촨량(李傳良)

2019년 중국을 탈출한 베이징의 저명한 중의사 자오중위안(趙中元)이 말했다. “저는 베이징에 중의사이고, 제가 치료하던 일부 변호사들은 모두 파룬궁수련생을 위해 변호하는 변호사(709 변호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파룬궁을 변호했다는 이유만으로 중공의 탄압을 당했고, 저 또한 그들을 위해 치료하다 탄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양심적인 사람들이었고, 강권을 두려워하지 않고, 법에 따라 항쟁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중공의 사악함을 똑똑히 알고, 정의로운 양심이 남아 있다면 모든 사람이 마땅히 중공과 선을 분명하게 그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국내에서는 진상을 볼 수 없어, 해외에 나가서 진상을 알고 몹시 충격을 받는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명소에서 두 중국 여성이 전시판에 적혀있는 “시드니 주재 중국 영사관 전 외교관 천융린(陳用林)은 원래 시드니에서 파룬궁수련생을 감시하는 일을 맡았지만, 파룬궁수련생들의 선량함과 진실함을 눈으로 직접 본 뒤 중공의 사악함을 똑똑히 알게 되면서 중공을 멀리하고 공개적으로 중공의 죄악을 폭로하는 것을 선택했다”라는 내용을 보고는 바로 사진을 찍고 “이것은 정말 충격적입니다!”라고 말했다. 한 명은 즉시 가입했던 공산주의청년단을 탈퇴했고, 한 명은 탈당사이트에 가서 직접 탈퇴하겠다고 말했다.

'陳用林'
천융린(陳用林)

천융린은 중공 관원으로서 중공의 해적선에서 내려 양심과 정의를 선택했다. 더욱더 많은 사람이 중공의 본질을 똑똑히 인식하여, 중공을 포기하고, 사악을 멀리하여 평안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원문발표: 2021년 3월 19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21/3/19/4222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