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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고 또 고쳐진 중공 역사와 변함없는 사실

글/ 이란(亦然)

[밍후이왕] 역사는 기정사실인데 중공은 주제넘게 역사 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다행히도 이성적인 사람은 중화 문명은 역사가 유구하고, 중국 역사는 적어도 5천 년이지만 중공의 역사는 100년 미만이기에, 중국의 역사는 중공의 역사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않고 있다. 중공은 이 사실을 개변할 수 없다. 중공의 최근 당사(黨史) 개정에 대비해, 새로운 버전 당사와 역사적 사실 차이를 비교해 보자.

우선 2021년 서쪽에서 온 유령인 중공은 이미 수차 수정한 공산당의 역사에 대해 또 한 번 크게 수정했다. 무엇 때문일까? 젊은 세대들이 어렸을 때부터 흑을 백으로, 거짓을 진실로 간주하게 하고, 우마오당(五毛黨)에 완전히 기만당하게 하며, 중국인들이 공포와 거짓말 속에서 지속해 공산당에 독재 당하게 하기 위해서다.

싱다오(星島)일보에 따르면, 올해 2월에 발행된 최신판 ‘당사(黨史)’에서 중공은 기존의 전당정풍(全黨整風), 반우파 투쟁,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화(人民公社化)운동 등을 모두 ‘철거’했다. 가장 두드러지게 미화한 항목은, 최신판 ‘당사’에서 ‘문화대혁명’의 죄악을 약화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을 부패와 특권을 반대하기 위해 진행한 것으로 적었다. 이것은 내막을 아는 사람을 겨냥한 소멸 전술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마귀의 수단이기도 하다! ‘때리고 부수고 빼앗는 것’은 어떤 특권과 부패를 반대하는 것인가?

최신판 ‘당사’는 더는 문화대혁명의 ‘파사구(破四舊, 4가지 오래된 것 타파)’ 죄악을 거론하지 않았다

‘파사구’는 문화대혁명 초기 대학생과 중학생 홍위병을 주축으로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 타파’를 표방하는 사회운동으로, 실제로는 문물을 부수고, 사람을 때리며, 재산을 몰수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파사구’에서 베이징시에서만 11만4천여 가구가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시청(西城)구의 한 푸쑤이징(福綏境) 거리에서만 1061가구가 재산을 몰수당해 서적과 서화(書畵)를 8주야 내내 불태웠다. 베이징시 전체에 235만여 권의 고서를 몰수했고, 도자기, 서화, 고전 가구 등 3종목이 400만 점 가까이 됐다.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말에 따르면 상하이에서 ‘자본가 10만 가구의 재산을 몰수했다.’ 전국적으로 약 천여만 가구가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화원(頤和園)의 300m 장랑(長廊)과 수많은 정자 누각 및 정교한 채색화는 ‘반동 문화재’가 되어 반드시 없애야 했다.

상하이에서 무가지보(無價之寳) ‘용화삼보(龍華三寶)’의 하나인 범금비로불상은 높이가 약 7척에 달하고, 연화좌 아래에 천불(千佛)이 비치돼 있었는데, 홍위병 소장들이 몽둥이로 부숴 곧 조각을 냈다. 미륵전에 모신 미륵부처의 화신 포대화상 좌상은 결국 머리가 잘렸다. 전국 각지의 명인 고묘, 옛 사찰 고적이 훼손된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게다가 당 내외 인물, 문화 명인, 일반인을 막론하고 구타나 억울한 살해를 당한 사람이 천만을 넘는다.

문화대혁명의 본질은 공산당이 전통문화를 파괴하는 폭력 운동이다. 광둥(廣東)의 유명한 작가인 친무(秦牧)는 이렇게 문화대혁명을 평가했다. “이것은 전례 없는 대재난이고, 수백만 명이 끊임없이 곤경에 빠지고 한을 품고 죽었으며, 수많은 가정이 뿔뿔이 흩어지고 소년들은 불량배가 되었으며, 많은 서적이 불타버렸고, 많은 명승고적은 파괴됐으며, 많은 유명인 무덤이 파괴됐고, 많은 죄악의 가짜 혁명이 진행됐다!”

2021년 중공은 살인 방화, 사유재산 강탈, 국보 훼손 등을 ‘반부패 반특권’이라고 말했다. 중공의 이른바 ‘제도적 자신감’은 기만에 의해 이루어졌다.

문화대혁명 발동자는 혁명 특권을 이용해 문물을 착복했다

혁명은 속임수이며, 혁명을 한 사람은 혁명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다. 중국 문화대혁명 원로인 천보다(陳伯達), 장칭(江靑), 캉성(康生) 등은 혁명적 특권을 이용해 사리를 도모하고 부당한 이익을 얻었다. 이것은 기성세대에게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로, 단지 젊은이들이 모를 뿐이다.

1970년 가을, 장칭은 캉성과 함께 베이징 문화재관리처에 진품을 고르러 갔다. 이 여성 혁명 지도자는 거의 100개의 진주와 보석, 4개의 금줄, 18캐럿의 금으로 된 프랑스 회중시계를 골랐지만, 가격은 7위안(약 1190원)이었다.

1990년 캉성이 수탈한 유물이 고궁으로 옮겨져 ‘내부 전시’를 하면서 캉성이 다량의 국보를 개인 소유로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3천 년 전 청동기에서 2천여 년 전 서한 대장군 한신의 도장에 이르기까지, 홍루몽 최초의 각본부터 사람들이 ‘시, 서예, 그림 삼절(三絕)’이라고 불리는 정판교(鄭板橋)의 도장까지 천여 건의 무가지보를 캉성이 개인 소유로 약탈했다. 캉성은 뜻밖에도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 한 권에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문화부는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당초 압수했던 물품들을 화가 예첸위(葉淺予)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희귀 서화, 먹, 벼루, 석장(石章)은 이미 당시 ‘중앙 수장’이 가져가 돌려주지 못했다. 문화재관리회는 천보다(9점), 린뱌오(林彪, 11점), 캉성 부부(8점), 장칭(3점) 등 희귀 역사유물의 거취를 설명하는 리스트만 예첸위에게 주었다.

홍위병 소장들도 혁명을 틈타 사욕을 도모했다. 작가 펑지차이(馮驥才)는 문화대혁명 소장을 취재한 적이 있는데, 그는 1966년 가을, 마오쩌둥이 천안문에서 전국 각지에서 온 홍위병 소장들을 접견했고, 접견이 끝난 후 천안문 광장 바닥 많은 곳에 금괴와 황금이 널려져 있었다고 말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소장이었던 그는 홍위병들이 부잣집 가산을 몰수할 때, 금괴와 황금 등 귀중품을 닥치는 대로 개인 주머니에 넣었는데, 광장에서 마오쩌둥을 보자 모두 미친 듯이 환호를 지르면서 날뛰어, 주머니에 있던 귀중품을 보호하지 못해 결국 ‘혁명의 성과’가 바닥에 널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마오쩌둥은 중국 갑부가 됐다

중국 간행물에 따르면, 문화대혁명 기간에 마오쩌둥의 저작과 어록이 다량으로 발행됐고, 단지 원고료만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며, 1967년 마오쩌둥의 원고료 저금통장엔 570여만 위안(96억9천여만 원)이 들어있어 당시 중국 갑부였다.

2011년 학자 마오위스(茅於軾)가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자, ‘마오쩌둥 시대에는 부패가 거의 없었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옌안(延安) 시기의 왕스웨이(王實味)가 옌안의 부패 현상을 비판해, 정풍운동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왕스웨이는 그의 ‘개나리꽃’ 글에서 공개적으로 부패를 반대하면서 ‘옷은 3색, 음식은 5등급’, ‘노랫소리가 낭랑하고, 춤은 한창이다’라고 옌안을 비판했다. 결국 왕스웨이는 마오쩌둥이 몇 가지 죄명을 씌워 죽임을 당했다.

장룽(張戎)은 저서 ‘잘 알려지지 않은 마오쩌둥’에서 3년 대기근 때, 각지에서 마오쩌둥을 위해 호화로운 행궁을 서로 앞다투어 지었다고 밝혔다. 딩링(丁玲)이 옌안에 있을 때, 마오쩌둥은 그녀에게 옌안의 미녀 이름을 써달라고 해서는 봉인했다. 펑더화이(彭德懷)가 무산 계급도 삼궁육원을 거느리는가 하고 발을 구르면서 마오쩌둥을 욕했다고 했다.

장야오츠(張耀祠)는 마오쩌둥의 중앙경비단 초대 단장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마오쩌둥의 타락한 생활을 기록했다. ‘만약 주석의 지출을 실제로 계산서를 낸다면 천문학적인 숫자이다. 예를 들면, 셔츠 소매와 깃을 수선하는 비용 6자오5펀(약 110원), 모직 상의와 바지 수선비용 1위안5자오(약 255원)는 당시 시중 가격으로 낸 것이다. 하지만 주석은 상하이 진장(錦江)호텔을 지정해 수선했고, 전문 인원이 전용기를 타고 상하이에 보내고, 다시 전용기로 가져와야 했다. 주석은 우창(武昌)·첸탕(錢塘)강·타이후(太湖)의 물고기를 먹겠다고 했고, 겨울에는 전용기로 베이징에 운송했다……’

공산당 내부의 부패는 윗사람이 하는 대로 아랫사람이 따라 했고, 오래전부터 시작돼, 종래로 멈춘 적이 없이 더욱 심해져만 갔다.

홍콩 언론은 캉성과 차오이어우(曹軼歐) 부부가 점유한 저택에 긴 복도와 정원, 단층 빌딩, 독채 등 39칸의 방이 있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중공 각급 간부들은 모두 등급에 따라 특권을 누리고, 특근 인원, 사무실, 설비와 가구, 전화와 자동차, 술과 담배, 생활용품, 자녀 취학 등은 모두 특별대우를 받는다. 그때의 관용차, 여행, 먹고 마시는 것은 등급에 따라 배분돼, 부패는 공산당이 규정한 공개적인 제도였다. 베이다이허(北戴河) 관광지는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중앙 간부와 가족들에게 우선 특별 제공되고 있다. 베이징의 ‘8·1’ 학교, ‘11’ 학교, 징산(景山)학교, 101중학교는 모두 가장 좋은 교사와 최고의 교학 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운영경비가 놀라울 정도로 많아 일반 학교는 비교가 안 됐다. 매주 월요일과 주말이면 등하교 학생들을 태우는 고급 차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 시절의 문화생활에서 백성들은 마르크스·엥겔스·레닌·마오쩌둥의 책만 읽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반당(反黨)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중공 시스템 내부에서는 ‘봉자수독초(封資修毒草, 봉건주의·자본주의·수정주의·마오쩌둥 어록·루쉰의 책을 제외한 서적을 모두 독초로 정의했음)’를 맛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성 부급 이상의 고위 간부들은 모두 내부 서적 구매카드 한 장을 가지고 있으며, 삭제된 내용이 없는 ‘금병매’를 머리맡에 두고 읽을 수 있었다. 전국 각지의 군구(軍區) 강당 및 지방 성시(省市) 공산당위원회의 강당에서 주말마다 ‘군벌(軍閥)’,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일본해 대해전’ 등 외부에 금지된 중공 내부 영화를 상영했다.

‘부패는 바로 문화대혁명 시기부터 시작됐다’

저명한 학자 이중톈(易中天)은 문화대혁명을 평가할 때 ‘부패는 사실 문화대혁명 시기부터 시작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도시 사람들이 갈비 한 개를 사려면 먼저 담배를 건네야 했고, 시골 사람들이 도시에 들어가려면 계란을 선물로 줘야 했다. 지식 청년들은 더욱 비참했는데, 남자는 뇌물을 건네야 했고, 여자는 성 상납을 해야 했다.’

류빈옌(劉賓雁)의 보고문학 ‘인간과 요괴’에서 문화대혁명 기간의 충격적인 부패 현상을 폭로했다. 현(縣)의 연소회사 경리 겸 지부 서기 왕서우신(王守信)은 1971년 11월에서 1978년 6월 사이 50여만 위안(약 8천5백만 원)을 횡령했으며, 50만 위안의 실질적인 구매력은 오늘날의 천만 위안(약 17억 원) 이상에 해당할 것이다.

중공이 90년대 전에 계획경제를 실시해, 자원이 더 집중적으로 통제됐다. 일반 시민들은 실세들에게 깨알 같은 일을 부탁하려 해도 선물을 건네야 했다. 예를 들면 ‘돌팔이 의사’를 찾아 병을 보려면 무료라고 하지만, 정말로 청하려면 사전에 계란을 넣은 따뜻한 면 한 그릇을 준비해야 했다. 계란은 6펀(약 10원)에 하나이고, 담배 한 갑 값이다. 시골에 간 지식 청년이 민영[民辦] 학교의 교사 같은 직위를 도모하려면, 촌 지부서기에게 선물을 건네야 했고, 도시의 지식 청년이 도시에 돌아가려면 뇌물을 줘야 해서 골동품이나 서화를 주는 사람도 있었다.

문화대혁명 때 뒷거래가 성행했으며, 전형적인 권력 임대였다. 입대, 대학 입시, 구인, 질병 퇴직, 도시 귀환 등은 ‘뒷거래’를 해야 했고, 영화 관람, 자전거 구매, 인기상품 배급도 ‘뒷거래’가 이루어져야 했다. 관료집단의 간부 자녀에게는 특권을 주어 지방에 내려가는 것을 피하고자, 직원 모집과 입대, 대학 진학을 많이 했다. 마오쩌둥은 당시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하고 있어 ‘뒷거래’하는 현상을 묵인하면서 “뒷거래로 오는 사람 중에 좋은 사람도 있고, 정상적으로 오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뒷거래’는 중공 때문에 생겨났고, 마찬가지로 중공이 필요하면 곧바로 ‘뒷거래’도 정치 운동이 될 수 있다. 1972년 12월 푸젠(福建) 지식 청년 리칭린(李慶林)이 마오쩌둥에게 글을 올려 간부 자녀 지식 청년들이 뒷거래한 현실을 반영했다. 1973년 4월 25일 마오쩌둥은 왕하이룽(王海容)을 통해 친서로 답했다. “리칭린 동지, 300위안을 보내니 우선 급한 부분을 해결하라, 전국에 이런 일이 많으니 총괄적으로 해결하겠다.”

마오쩌둥은 정말 반부패를 원할까? 아니다. 마오쩌둥과 장칭은 정치투쟁의 필요성 때문에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하는 것’과 ‘뒷거래 반대’를 함께 처리하면서 당내 정치 원로들을 타격했다. 반면 마오쩌둥이 인기 있는 사람으로 추켜올린 지식 청년 리칭린은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마지막 운동인 ‘덩샤오핑 비판과 우경 복권 풍조[右傾翻案風]’에서 덩샤오핑에게 죄를 지어, 1977년 중공에 체포돼 형 17년을 선고받았다.

중공 특권층은 중국을 사랑하지 않고 미국을 사랑한다

자오쯔양(趙紫陽) 전 비서 바오퉁(鮑彤)은, 전에 중공이 완전히 특권층이라고 말했다. 중공 원로 천윈(陳雲)은 당원 가정에서 두 자녀씩 낳아, 한 사람은 장사하고 한 사람은 정치하게 하면 좋으며, 중공 자녀는 믿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부패는 오늘날 중공 관가에서 추악한 일이 아니라 몸값과 자원, 영광이다. 화룽(華融) 라이샤오민(賴小民) 집에서 2억7천만 위안(약 459억 원) 현금을 뒤져냈고, 베이징 촌 관리 런스펑(任石鳳) 집에서 금괴 31㎏을 몰수했으며, 다롄(大連) 쉬창위안(徐長元)은 2714채의 부동산을 보유했고, 이러한 사례는 무수하다.

2021년 4월 6일 ‘포브스’가 발표한 2020년 부자 순위에 따르면, 베이징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억만장자를 보유한 도시로 됐는데, 지난해에 33명이 늘어 억만장자가 총 100명이 됐다. 그러나 더 많은 중공 관리 큰 부자는 종래로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은닉해 중공의 기밀로 남게 됐다.

후룬(胡潤) 리포트에 따르면, 2019년 83명의 가장 부유한 중공 ‘양회 대표’의 평균 몸값은 33억5천만 달러(약 3조7520억 원)에 달했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책임정치센터(Centre for Responsive Politics)에 따르면 미 하원과 상원 최고 부자 의원 83명의 평균 몸값은 5640만 달러(약 631억6800만 원)에 불과하다. 6억 명의 일반 중국인이 버는 월수입은 1000위안(약 17만 원)이나 그 이하인데, 중공 입법자는 미국 입법자보다 60배나 부유하다!

중공 특권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현상은 ‘애국’을 고취하면서 중국을 임시 거주지로 간주했고, ‘제1의 적 미국’을 지구상 제1의 고향으로 삼는 것이다. 지난 40여 년간 중공 관리의 부유한 2~3세대 미국 이민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중국인의 사상에 박힌 나사못

문화대혁명의 본질에 대해 고 유명한 경제학자 양샤오카이(楊小凱)는 ‘중공의 역사로 말하자면, 홍위병의 때리고 부수고 빼앗는 것, 다오(道)현 대학살, 광시(廣西) 대학살은 공산당의 토지개혁 중의 대학살과 일맥상통한다’는 상세한 논술을 폈다.

“중공 당사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고, 가짜가 주를 이룬다. 지금 당사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금서를 찾는 것과 방화벽을 넘어야 한다.”

혁명이라는 명목으로 군중을 동원하여 민가를 습격해 약탈하고, 인명을 초개같이 여기며, 전통을 파괴하는 것은 중공이 중국인의 인성을 완전히 소멸하고, 중국인을 철저하게 훼멸시키려는 기정 책략으로 보인다.

지금 중국 공산당은 각 분야에서 이른바 ‘강대국 포럼’, 신 당사를 배우도록 강요하고 있으며, 공산당 당사를 국사로 혼동하게 하고 있다. 사실 중공이 아무리 많은 운동을 벌이고, 난장판을 만들며, 피투성이로 되게 해도 중국인들은 이 세 마디 말만 기억하면 더는 중공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은 서쪽에서 온 유령이다.
중공은 중국이 아니다.
정말로 나라를 사랑하면 당을 사랑하지 마라.

 

원문발표: 2021년 5월 2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5/2/424037.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21/5/4/19217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