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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각성은 물밑 빙산처럼 녹고 있다

글/ 량신(梁欣)

[밍후이왕] 여명 전의 어둠 속에서 창공을 가르는 첫 서광은 아주 미약하여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쉽게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보고 있으면 광명은 느리지만 거스를 수 없이 갑자기 확 다가온다.

역사의 격변 전야에 정의의 한 줄기 촛불과 한 통의 편지, 그리고 한 통의 음성 전화, 한 장의 작은 전단지, 선량한 문안 인사는 모두 어둠을 몰아내고 광명을 부르는 소중한 행동들이다. 정의의 힘이 도미노처럼 전해질 때 사악은 물밑의 빙산처럼 여전히 차갑고 거대하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이미 녹기 시작한다.

빙산 아래는 녹고 있다

6월 4일,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이 가장 삼엄하게 인터넷 봉쇄를 했지만, 위챗의 한 채팅방에서는 여전히 사진, 은어 등 형태로 소식을 전했다. 전 중국 축구스타 출신인 하오하이둥(郝海東)은 이날 중공을 해체하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는 “중공의 소멸은 정의의 필요에 따른 것이며, 중국 인민이 노예의 굴레를 부수고 진정한 세계평화를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라며 강조했다.

또한 중공이 집권 후 반인류적 폭행은 “인권을 무시하고, 인성(人性)을 훼멸하고, 민주를 짓밟고, 법치를 어기고, 계약을 파기하고, 홍콩을 피로 물들이고, 티베트인을 살해하고, 부패를 수출하고, 전 세계를 해친다”라고 일일이 열거했다.

‘하오하이둥’에 관한 위챗 키워드 검색량은 하루에 2295.3% 증가했다. 6월 3일에만 검색량이 43만 회, 6월 4일에는 987만 회에 도달했다!

소리없는 ‘인터넷 시위’는 이렇게 중공의 철의 장막 아래에서 조용히 천만 가구에 전해졌고, 정의의 각성은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최근 중공의 현임 상무위원, 기율위원회 서기 자오러지(趙樂際)는 어느 한 도시에 도착하여 조사할 때 현지의 ‘610’ 업무 보고를 직접 듣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현지 관리들은 경악했다. 610은 철회하고 간판을 내리지 않았는지 묻자 자오러지는 “그것은 서방사회의 반중(反中) 세력에게 발뺌을 위한 것인데 당신들은 어찌 믿는가? 당신들은 봐라. 파룬궁은 아직도 있고 일은 아직도 남아있다”라고 하면서 이 점에 대해서 “누구도 대외에 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식은 바로 해외로 퍼졌고, 밍후이왕은 사실대로 보도했다. 사악은 이미 쇠퇴 몰락의 처지에 놓였다. 사악과 한 패거리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와 양심을 표현하고 있다.

중공은 현재 확산되고 있는 전염병에 대해 죄과를 은폐하고 있다. 대만의 ‘신신원(新新聞)’주간에 한 ‘내부 고발자’는 중공 국가위생건강위원회가 1월 3일에 발표한 메가톤급 문서인 ‘3호 문서’ 원본을 폭로했다. 심하게 구겨져 있었지만, 문서 내용은 뚜렷하게 보였다. 문서 전달자는 중공의 은폐에 대한 확실한 증거 공개를 위해 매우 고심했다.

중공 체제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중공의 구제 불능과 전염병 진상을 은폐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하고 무자비한지를 볼 수 있다, 산둥, 헤이룽장 등 지역에서 위생건강위원회에 보고한 우한 폐렴(중공 바이러스) 감염자의 진실한 도표와 숫자는 하나하나 해외로 유출됐다. 따라서 공개된 숫자와 실제 숫자 사이의 차이가 수십 배가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기 전에 작가와 총지휘관으로부터 온 한 통의 성명서

1989년 9월, 베를린 장벽은 여전히 동독, 서독으로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동독 민중은 동유럽 공산당이 쇠퇴하여 권력이 이미 변질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1989년 9월 25일, 시위에 참여한 인원이 8000명, 10월 2일에는 예상외로 1만5000명이나 되었다. 동독 공산당 독재자 호네커는 당황해서 “동지들,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했다.

7600명의 동독 군경은 한 사람당 18발의 탄환을 장착하고, 진지를 확고히 정비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살기등등한 소련제 탱크는 마치 1956년 헝가리에서 막 돌아온 듯 포구가 아직도 검은 연기를 내뿜는 것 같았다.

동독 공산당 사람들이 얼마나 강대하다고 자처해도 분명 그들은 종말을 앞둔 공포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1989년 10월 8일, 민중의 시위가 계속되자 독재자 호네커는 승부수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라이프치히의 경찰서는 통보를 받고, 시위자들에게 ‘중국 톈안먼 광장’의 시위 결과와 비슷한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했다.

평화로운 시위대는 폭력과 동요가 없었다. 마치 고요한 물이 흐르듯 했지만, 상대편의 군경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음악 지휘자 쿠르트·마주어(Kurt Masur)가 강단에 나타나 군중을 향해 성명을 발표했다. 라이프치히 동포들에게 비폭력 시위를 반드시 지킬 것을 큰 소리로 호소했다. 놀랍게도 이 비폭력 제안서는 의외로 이 도시의 유명한 작가와 지휘자, 문화국장, 교육국장, 공산당 선전부장이 연명하여 작성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무선 라디오를 통해 방송까지 했다.

공산당 체제 내의 유명 인사와 관리들이 모두 자유의 목소리를 낸 상황에서 형세는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총을 쏠까요, 쏘지 말까요?

시위대의 인원수가 갈수록 많아지자 뜻밖에 군경은 무기를 한쪽에 던져버리고, 시위대에 가담했다. 또 5000명의 민중 속에 섞여 들어간 스파이는 자신을 “노동자 계급”이라면서 시위대를 막지 않고 오히려 시위대에 합류했다.

경찰서는 국가안전보위국(비밀경찰기구) 우두머리 크렌츠에게 지시를 청했다. 크렌츠는 전화에서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하다가 마지막에 “논의해 보자“고 말한 뒤 통화를 끊고, 더는 뒷말이 없었다.

군경의 현장 지휘자는 현장에 있던 전체 당위원회 성원들에게 “총을 쏠가요, 말까요?”하고 논의했다.

개혁파 당원들은 다급히 “총을 쏘면 안돼요!”라고 했다. 좌파들은 어찌되었는가? 그 순간 좌파는 없어졌고,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앞에서 좌파는 이미 사라졌다.

그들은 누구도 총 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를 선택했고 역사도 그들을 선택했다. 그때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인생은 늦게 동참하는 자를 벌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한마디 말을 했다. 동독의 격변 속에서 10만 명의 독일 주둔 중병을 손에 쥐고서도 움직이지 않았던 이 공산당 지도자는 정의와 사악의 앞에서 마음속의 양심을 따랐다.

겨우 한 달 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독 공산당이 해체됐다.

1989년, 지금으로부터 벌써 31년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거짓말에 기만당한 중국인은 중공이 거금을 들여 만들어 놓은 인터넷 ‘베를린 장벽’ 아래에서 진상을 알 수 없다.

중국에는 30년이 지나면 또 한 번 변한다는 옛말이 있다. 정의와 선량함이 당신 앞에 올 때 당신은 반드시 소중히 여기고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가장 보기 드문 서광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해외에서 온 전화를 받는다면, 절대 끊지 말고 몇 분이라도 대양을 넘어서 온 마음의 소리를 들어라. 만약 누군가 당신의 집에 지퍼백을 걸어놓으면 절대 광고라고, 가볍게 버리지 말고 열어보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소책자를 한 권 건네준다면, 그것은 전염병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처방이고, 사악에서 벗어나는 가장 참된 복으로 될 것이다!

 

원문발표: 2020년 6월 10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10/4074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