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고금중외 민원을 담론

글/ 루전옌(陸振岩)

[밍후이왕 2010년 4월 17일] 베이징 천안문 앞에는 두 개의 화표(華表, 돌기둥)가 세워져 있다. 화표라는 이름은 고대의 비목(誹木)에서 유래된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일을 논의하는 장소에 나무를 세웠다. 나무 위에는 가로로 나무 판을 놓았는데 그 모양이 정오 오(午)와 비슷하여 오목(午木)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가로로 된 판에 어떤 때에는 도안을 장식했는데 마치 한 떨기 꽃과 같았다. 고대에 꽃 화(花)자와 화려할 화(華)자는 상통(相通)했다. 그렇게 변화되어 화표로 변했다. 화표의 가로로 된 판에는 글을 쓸 수 있다. 누구에게 어떤 의견이 있으며 국가는 마땅히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등을 적을 수 있었다. 사실 그것은 최초로 백성이 민원을 제출하는 방식이었고 감찰 작용이 있었다. 화표에 쓰인 최초의 글자는 아마 현대의 ‘민원신청서’, ‘고발장’, ‘청원서’에 해당될 것이다.

역대로 내려오면서 민원은 민심을 위에 전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많은 중국의 개명 군주의 인정을 받았다. 뿐 아니라 일정 범위 내에서 유리한 사업을 일으키고 폐단을 없애는 작용을 했다. 중국 고대의 민원과 현대의 민원을 서로 비교하려면 고대 역사에도 대량의 ‘단체민원’사건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비교적 유명한 것은 동한의 태학생운동, 남송의 태학생운동, 명대의 동림당인 운동, 근대의 공처(公車, 관청이름)상서 등등이다. 그리고 지방 관리가 민중의 서면 민원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단체로 다리를 가로막고 민원을 제기하는 등 방식의 ‘민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북송 정강(靖康) 원년의 태학생 민원은 고대에 민의를 황제에게 알려 성공시킨 ‘단체민원’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송흠종(宋欽宗) 정강원년에 남쪽으로 내려간 금나라 병사들이 동경[東京-현재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시]에 쳐들어오게 됐다. 송조의 주요 장수들은 군을 거느리고 금나라 병사들을 막을 준비를 했다. 바로 이때 송나라 일부 군은 몰래 금나라 군영에 쳐들어갔다가 오히려 매복을 당해 천여 명의 인마를 잃었다. 송흠종은 투항파의 유언비어를 믿고 주전장을 맡은 병부시랑 이강(李綱)과 대장군 종사도(種師道)를 물러나게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태학생 진동(陳東)은 몇 백 명의 태학생을 이끌고 황궁 선덕문 앞에 몰려들어 ‘민원’을 넣었다. 조정에서 이강과 종사도의 전직을 회복시키고 이방언(李邦彥)과 백시중(白時中) 등 간신들을 징벌할 것을 요구했다. 동경 백성들도 이 소식을 듣고 선덕문에 달려왔는데 몇 만이 됐다. 송흠종은 궁에서 사람을 파견해 성지를 전했다. “이강은 병사를 다스림에 실수가 있어 부득이 하게 물러난 것이다. 하여 금나라 적들이 조금은 물러가게 됐다. 하여 그런 명령을 내리게 됐다.” 학생과 백성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조정에 뛰어들어 ‘등문고(登聞鼓)’(급한 일이 있을 때 두드리는 북)를 울렸다. 북의 가죽이 구멍 날 때까지 두드렸고 항의의 목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이후에 송흠종은 사람을 파견해 이강을 입궁시켰고 이강과 종사도의 직무를 회복시킨다고 선포했다. 몇 만 명의 사람은 그제야 환호성을 지르며 흩어졌다.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국민은 언론자유가 있으며 민원(혹은 중국의 특징적인 ‘상방’)은 합법적으로 민의를 제출할 수 있는 방식중 하나였다. 저명한 인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은 미국 흑인들의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1965년 셀마로부터 몽고메리까지 역사적인 청원 퍼레이드를 이끈적 있다. 앨라배마주 주지사는 이 퍼레이드 대열을 제지시키려고 고속도로를 점유했다. 이유는 앨라배마주 법률을 위반하고 타인의 운전 자유를 침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심리한 존슨 판사는 비록 퍼레이드가 헌법이 허용하는 극한에 이르렀으나 퍼레이드의 가능 여부는 ‘마땅히 악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고려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에서 ‘악(흑인의 인권이 짓밟힌 상황을 가리킴)은 거대한 것이다’ 이에 근거해 존슨 판사는 마틴 루터 킹의 퍼레이드는 합법적이라고 판결했다.

오늘과 같은 자유사회에서 국민은 어떤 요구가 있으면 직접 서신 혹은 자신의 민의를 대표하고 있는 ― 의원과 접견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필자는 전에 중공 영사관으로부터 무리하게 여권 연기를 거절당했다. 나는 현지 의원에게 편지를 쓰고 찾아가 합리한 대우를 받았으며 도움을 얻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자유사회에서 정부에 정상적으로 ‘상방’하여 민원을 제출함은 모두 조용하고 질서 있게 진행되며 민의 대표와 직접 연계되며 사람의 주목을 끌지 않는다.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정부 수뇌자가 있는 관청 앞에 민중들이 모여 민원을 제출하고 격분하며 항의하는 시위대다. 베이징 중남해에 해당하는 미국 백악관, 브뤼셀 유럽연합 본부 앞에는 늘 격동되어 항의하는 시위대를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2009년 10월 5일 수천 명을 헤아리는 낙동업자들이 우유값 폭락으로 유럽연합 본부 밖에서 시위를 벌었다. 2400명 시위자는 현장에 트랙터 740대를 끌고 가서 항의했으며 심지어 경찰에게 병, 건초, 우유 등을 던졌다.

이상의 고금중외 ‘상방’과 시위자 집단은 확실히 중공 당국이 말한 것처럼 ‘국가기관에 집결하고 에워싸서 국가기관 주위 사회 치안질서와 민중의 정상적인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당과 정부에 압력을 가했으며 국제와 국내에서 극히 나쁜 영향을 조성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범죄행위가 없다면 시위자에 대해 ‘훗날에 청산’하거나 대규모적인 탄압을 하는 일은 여전히 자유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황당한 일이다. 중국 고대에 있어서도 역사상에서 아둔한 군주로 유명한 송흠종(‘강정의 치욕’에서의 한 사람)도 ‘상방’한 민중에 어떠한 탄압과 보복을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송흠종이 인성과 기본도덕을 잃지 않았음을 표명한다.

이와 비교해 1999년 4월 25일 1만 명 파룬궁 수련생이 중남해 부근 푸유(府右)가에서 단체 상방했다. 현장의 질서는 정연했고 심지어 근무경찰들도 할 일이 없어 한가히 한쪽에서 대화하고 있었다. 전반 과정은 조용하고 평화로웠으며 교통을 저애하지도 않았고 큰 소리로 떠들지도 않았다. 파룬궁 수련생은 단지 톈진에서 무리하게 붙잡힌 파룬궁 수련생을 석방할 것과 파룬궁 수련자에게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수련환경을 줄 것을 요구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과 아무런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수련자들은 중공 당국의 얼굴을 만나지 못하고 그 뒤로 11년간 역사상 가장 암흑한 박해를 참담하게 당했다. 이러할진대 수련자들은 여전히 십년을 하루와 같이 신념을 견지했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폭력에 마주했고 호기와 강직한 기개는 우주에 넘쳐났다. 다른 한 면으로 이 사실로부터 중공의 사악하고 잔혹한 폭정을 보아 낼 수 있으며 고금에도 이와 비길 것이 없다. 물론 이것 역시 중공이 스스로 정의, 양심과 적으로 지내기로 선택한 것으로 역사적 쓰레기더미에 갈 것을 자원한 것이다.

문장발표: 2010년 4월 17일
문장분류: 평론 > 세상인정문장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10/4/17/2217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