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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4. 25’ 가 백악관에서 발생했더다면

【명혜망 2005년 4월 20일】(명혜 평론원 어우양페이 글)’4. 25′ 사건에 대하여 즉, 1999년 4월 25일 파룬궁 수련생 10,000인이 대청원 한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만약 미국에서 10,000명이 백악관을 에워쌌더라면 당신을 탄압하였겠는가 탄압하지 않았겠는가 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능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렇게 대비하는 것 조차 이미 중국 현실로는 비교할 근거 자체가 부족하다.

첫째, 서방국가 중 특히 미국에서 시위 행진의 권리는 충분히 보장 받고 있으며, 신청시 절대 다수 모두 허가 인준을 받는다. 백악관 부근을 포함하여 심지어 대통령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길에도 사람들이 시위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중국 헌법에서 백성은 언론과 시위행진의 자유가 있다고 규정해 놓고 있지만, 오히려 시위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신청이 진정으로 허락 된 것은 거의 몇 개 없다. 권력 집단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시위행진을 하도록 하는 것은 제외하고, 사실 이런 경우에는 당신이 가서 신청할 필요조차 없다.

둘째,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항의 시위는 늘 발생하는데 시위하는 측이나, 시위 받는 측 모두 자신들이 할 것을 하면서 서로 교란하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은 시위 금지 혹은 시위자에 대한 탄압령을 절대로 내리지 않을 것인 즉, 정말로 내려졌다고 한다면 그 또한 대통령이 될 수 없다. 부시가 2001년 첫 번째 대통령 취임식을 할 때 백악관 부근에는 거의 10개 단체가 조직한 2만여 명이 항의시위를 하였다. 그의 두 번째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길에서 ‘관을 들고’ 시위하였다. 이 시위자들은 미국 정부의 어떠한 탄압도 받지 않았고 대통령 또한 ‘나중에 혼내주는’일을 하지 않았다.

셋째, ‘4. 25’는 실제로 시위 행진을 하러 간 것이 아니다. 만약 법률적으로 진지하게 말하자면 ‘4.25’는 파룬궁수련생들이 자발적으로 중난하이 부근의 국가민원기관에 가서 단체 청원한 것으로써, 이는 시위 신청과 허가가 필요없는 것이었다. 청원 역시 인원 수의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 당시 수련생들은 줄을 지어 섰고 배열 형식 모두 경찰이 현장에서 배치한 것이었다. 파룬궁수련생들이 청원한 것은 완전히 상급 영도에 대한 신임에서 나온 것이었다. 문화혁명 이후, 대량의 억울한 사건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지방까지 ‘민원’부문이 나타났고 국민의 서한과 방문을 맞아들여 처리하는 것을 책임졌다. ‘4.25’ 청원은 사실 파룬궁수련생들이 여러 해 동안 여유있는 수련환경을 쟁취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청원하고 있던 중, 규모가 가장 컸던 한 차례에 불과했다.

넷째, ‘4. 25’가 발생한 배경은 파룬궁 수련생들의 수련 환경이 어느 정무부처로부터 교란을 받았고 대법 서적의 출판이 금지되었으며 매스컴에서는 사실을 왜곡하여 파룬궁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개적으로 사람을 붙잡고 사람을 때리는 악성사건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중국 대륙에서 피해받은 군중들은 자신이 당한 부조리한 대우를 어떻게 대하는가? 중국 백성들의 특유의 방법은 바로 상급부문에 정황을 반영하고 상급 영도가 와서 백성들에게 공정함을 돌려줄 것을 희망하는 것이다.

평소의 마음으로 ‘4,25’를 보면 아주 중국특색이 있는 민중들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을 때 상급 영도를 찾아가 공정한 결정을 내려주기를 청하는 청원 사건에 불과했다. ‘4.25’ 청원은 그날 적절하게 처리되었는 바, 국무원 총리는 민원기관의 책임자가 나와서 그 일을 처리하도록 책임을 지워주었다. 그리하여 무고하게 붙잡힌 파룬궁수련생들이 석방되고 정부는 수련생들의 말을 받아들여 대법서적을 출판할 수 있도록 요청한 것과, 여유있는 수련환경을 달라는 요구를 허락하였다. 그렇듯 일은 원만하게 해결되었고 청원한 수련생들은 아주 빨리 평화롭게 흩어진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백악관에 가서 시위하면 미국 정부는 탄압하지 않는다. 만 명에 달하는 파룬궁수련생들이 국무원 민원기관에 가서 청원하였을 때 그 당시의 총리 역시 탄압을 말하지 않았으며 명지한 태도를 취하여 합리적으로 해결해 주었던 것이었다.

진정으로 탄압을 발동한 자는 바로 권위 세우기에 급급했던, 파룬궁 창시인을 그렇게 많이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질투했던 장쩌민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문장완성:2005년 04월 18일
문장발표:2005년 04월 20일
문장갱신:2005년 04월 20일 05:17:46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4/20/99950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