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필농(筆農)
[명혜망] ‘4·25’ 사건(1999년 4월 25일)은 중국 현대사에서 매우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비록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많은 사람이 여전히 호기심을 느낀다.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고 이동통신도 발달하지 않았던 1999년, 그 짧은 시간에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지에서 베이징 중심부로 모여들었는데, 이토록 높은 동원 효율은 어떻게 달성됐는가? 완전히 자발적인 ‘입소문’이었는가, 아니면 치밀한 지하 조직망이 존재했는가?
명혜망 및 관련 참가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1999년에 어떻게 만 명이 모일 수 있었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관련 글에서 서술된 사실과 논리는 다음 몇 가지 측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소식 전달 방식: ‘연공장’을 중심으로 한 입소문
명혜망의 기록에 따르면 정보의 확산은 현대 통신 기기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전국에 퍼져 있던 물리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했다.
첫째, 연공장의 입소문: 당시 전국적으로 거의 10명 중 1명이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하고 있었고 각지마다 아침 연공을 하는 ‘연공장’이 있었다. 톈진(天津) 사건이 발생한 후, 관련 납치 소식과 “톈진에서 사람을 풀어주지 않으니 베이징에 가서 상황을 알리자”라는 소식이 아침 연공 시간에 보도원(자원봉사자)이나 파룬궁수련자 사이에서 서로 전달됐다.
둘째, 물리적 유포: 파룬궁수련자 사이에서 직접 방문하거나 유선 전화로 문의하고, 연공장에서 정보를 교환했다. 이러한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속도가 최소 수천만 명의 수련자를 보유한 집단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셋째, 비교해야 많고 적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만여 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와, 그렇게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숫자상으로 판단한 것이다. 또한, 현실적인 체감상 1만에서 3만 명이 베이징 도심 거리나 특정 구역에 모이면 매우 강한 시각적 충격과 교통 혼잡을 유발하게 된다.
하지만 만 명이 많은 것인가 적은 것인가? 모두가 알다시피 대형 야외 음악회라면 하루 참석 인원이 3만~8만 명이 될 수 있다. 만약 8만 명이 참석했다면 사람들은 전례 없는 성황이라고 할 것이고, 만 명만 참석했다면 사람이 너무 적다고 할 것이다. 만 명이 적어서가 아니라 ‘비교해야만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25를 기준으로 보면 어떠한가? 당시 중국에는 8천만~1억 명이 연공을 하고 있었는데 단지 1만~3만 명만 갔으니, 이 비율은 매우 적거나 많지 않다고 해야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톈진 사건(4월 22일, 23일)부터 4·25(4월 25일)까지 중간에 불과 2~3일밖에 없었지만, 1만 명이라는 전파 속도는 사실 당시 중국의 통신 조건과 파룬궁수련자들이 서로 연락을 유지하던 풀뿌리 방식에 아주 잘 부합한다.
2. ‘자발적인가’ 아니면 ‘동원된 것인가?’
명혜망 기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묘사는 4·25 사건이 어떤 ‘중심’에서 명령을 내려 시작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1) 많은 기사에서 파룬궁수련자들은 톈진에서 사람을 납치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한마디 하겠다’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가기로 결정했다고 언급했다.
2) 기사 기록에는 통일된 지휘부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베이징에 도착하고 신방국(信訪局, 청원국) 근처에 도착해서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3) 시간선의 전개(1999년 4월 22일~4월 25일)
명혜망이 정리한 사실에 따르면, 만 명이 모이기까지 약 3일간의 과정을 거쳤다.
• 4월 22일~23일: 톈진 사건이 발생했고 소식은 톈진 및 주변 허베이, 베이징 지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 4월 24일: 더 많은 외지 파룬궁수련자가 소식을 듣고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베이징은 교통이 편리했기에 주변 성의 수련자들은 기차, 시외버스, 심지어 자전거를 타고 밤을 새워 베이징으로 향했다.
• 4월 25일 새벽: 일찍 도착한 파룬궁수련자들은 대부분 신방국이 있는 푸유가(府右街) 일대에 모였다. 기사 묘사에 따르면, 뒤이어 도착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현장 경찰이 사람들을 안내하기 시작했고 결국 중난하이(中南海)/중앙 신방판공실(信訪辦)을 둘러싸는 형태가 됐다.
4) 현장 질서 유지 사실
‘치밀한 조직’이라는 외부의 의심에 대해, 명혜망 기사는 세부적인 묘사를 통해 이러한 ‘질서’의 근원을 설명했다.
• 행동 준칙: 기사에 따르면 파룬궁수련자들은 자발적으로 진선인(眞·善·忍) 원칙을 준수했고, 현장에서 구호를 외치도록 이끄는 사람 없이 모두 조용히 서 있거나 책을 읽거나 연공을 했다.
• 환경 유지: 널리 알려진 세부 사항으로 수련자들은 떠날 때 땅에 있는 쓰레기를 주웠는데 심지어 경찰이 버린 담배꽁초까지 포함됐다. 명혜망은 이러한 ‘치밀함’이 사실 고도로 자율적인 개인의 표현이지 군사화된 지휘가 아니라고 보았다.
5) ‘안내’ 상황에 대한 기록
명혜망 기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핵심적인 세부 사항이 있다. 바로 경찰이 길을 안내했다는 점이다.
많은 경험자가 기사에서 회고하기를, 25일 아침 도착했을 때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몰랐는데 현장에 있던 경찰이 여러 방향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푸유가로 안내했고, 심지어 “경찰이 우리를 신화문(新華門)의 붉은 벽 밖으로 안내하기도 했다”고 한다.
‘4·25 당시 우리는 창안가에 있었다’라는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는 신화 남문 동쪽으로 약 30~40m 떨어진 곳(4·25 자료 영상에도 이 구역이 나옴)에 서 있었고 맞은편 도로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약 3~5보 간격으로 한 명씩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 앞에서 보초를 서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오갔으며, 어떤 이는 담배를 피우고, 어떤 이는 귓속말을 나누고, 또 어떤 이는 우리 앞으로 걸어와 우리가 손에 든 물건을 쳐다보기도 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짜증이 나 보였습니다. 반면 전국 각지에서 온 남녀노소 서민인 우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신화문은 매우 민감한 장소로 경비가 삼엄해 ‘인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갑자기 수십 명, 심지어 백 명이 넘는 서민들이 그곳에 머무르게 되면 앉아 있든 서 있든 시각적으로 매우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인원수만 조금 강조하면 대부분의 중국인은 이것이 중난하이(중국공산당 집무실 소재지)에 대한 ‘포위’라고 아주 쉽게 믿어버린다. ‘포위 공격’이라는 말이 어떻게 형성됐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떠한 ‘공격’(즉, 언어 및 신체적 충돌)의 증거도 찾지 못했는데, 당 기관지와 CCTV가 ‘포위 공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또 다른 상황은 톈진 사건 현장에서 현지 파룬궁수련자들이 “이 일은 반드시 베이징에 가야만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는 점이다.
맺음말
역사 연구에서 당사자인 파룬궁수련자의 회고는 ‘참여자 서사’로 간주된다. 이는 통신 기술이 낙후됐던 시대에 강력한 공동의 신앙과 하부 소셜 네트워크(연공장)가 어떻게 일정 부분 현대 통신 기기의 역할을 해 만여 명이 넘는 인원 결집을 완성했는지 설명해 준다. 만약 이 일이 스마트폰 시대에 일어났다면 만여 명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도로 자율적인 서민 집단이 지극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고도로 민감한 정치 공간 주변에 섰을 때, 이러한 ‘출현’과 ‘침묵’은 당시 총리였던 주룽지(朱鎔基)의 눈에는 대중과 직접 소통하고 좌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당시 총서기였던 장쩌민(江澤民)의 마음속에는 고함보다 더 위협적인 ‘공격’이 됐던 것이다.
원문발표: 2026년 4월 14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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