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류이(劉毅)
[명혜망] 침묵은 금일까? 인간관계의 갈등이나 사소한 삶의 마찰 속에서 우리는 침묵하고 태도를 표명하지 않으며 자연스러움에 맡기는 것을 선택하는데, 이는 일종의 너그러움이자 수양이다. 이럴 때 침묵은 확실히 금이다.
하지만 죄악 앞에서 침묵은 결코 금이 아니다. 만행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악행을 무시하고 진상을 말살하는 것이며, 나아가 악을 행하는 자를 방조하는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일찍이 “악이 승리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양심이 집단적 깊은 잠에 빠질 때 침묵은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니라 심연으로 향하는 완만한 비탈길이 된다.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서 독일군 사령관의 아내는 처음에는 인근 강제수용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곳이 생명을 학살하는 악마의 소굴이고 남편의 일이 바로 이 죽음의 기계를 관리하는 것임을 알았을 때, 그녀는 본능적인 혐오와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나 이후의 나날 속에서 그녀는 우울해졌고 침묵했다. 그녀는 원래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려 했으나 운명은 잔인한 장난을 쳤다. 그녀의 아들 브루노가 엇갈림 속에 강제수용소에 들어가 가스실에서 죽고 만 것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속에서 이 어머니의 뼈를 깎는 듯한 통곡은 천지간에 묻혀 그토록 미미하게 보였다. 이 울음소리에 하늘의 질책도 담겨 있었을까? 마치 하늘도 그녀에게 이렇게 질책하는 듯하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고 살해당할 때 제지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구해주었는가? 죄악 속에서 침묵하며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 역시 범죄다! 유대인들이 매일 독살당하고 있는데 당신은 조금의 책임도 없는가? 당신은 그들을 위해 구조를 요청한 적이 있는가? 당신들은 왜 자식을 잃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부모가 지은 죄업이 아이에게 연루돼, 아이가 부모를 위해 속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살인을 냉정하게 방관하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것, 부디 이것이 은막 위의 비극에만 머물기를 바란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종종 영화보다 더 잔혹하다.
2014년 3월, 네이멍구 츠펑시 ‘610사무실’(중공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 주임 양춘웨(楊春悅)는 암세포가 만개의 화살처럼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겪은 후 사망했다. 그런데 일찍이 2005년, 양춘웨의 28세 아들 양지후이(楊志慧·양춘웨가 직권을 이용해 아들을 610사무실 운전기사로 취직시킴)는 차를 몰고 대형 트럭 밑으로 돌진해 두개골이 깨지며 그 자리에서 급사했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사람은 무사했다. 양춘웨의 아내는 이 참혹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 달 넘게 울며 “우리가 무슨 덕이 부족해서 이런 참사가 일어났단 말인가”라고 말했다.[1]
어머니로서 자식을 잃은 고통의 씁쓸함과 절망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만, 인과의 논리는 무쇠처럼 냉혹하다. 하늘은 아마 그녀에게도 질책하고 있을지 모른다. 양춘웨가 파룬궁 박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수십 명의 파룬궁수련자를 박해해 죽게 하고 수백 건의 억울한 사건을 조작해 냈으며, 수백 명을 부당하게 형을 선고받게 하고 천여 명을 부당한 강제노동과 구류에 처하게 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당신은 일깨워준 적이 있는가? 당신은 권고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막아본 적이 있는가? 살인에 대한 묵인과 침묵은 바로 죄악을 조장하고 공동의 업을 짓는 것이다. 예로부터 살인하면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은 천리인데, 당신의 남편은 그 수십 개의 생생한 목숨에 대해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 사람의 죄악이 너무 크면 가족과 후손에게까지 화가 미친다. 아들의 비극은 그의 아버지가 너무 많은 악을 행해 초래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늘 직접 악행에 참여하지 않기만 하면 자신은 결백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늘 거짓말을 자발적으로 퍼뜨리지만 않으면 자신은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늘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충분히 많기만 하면 무리 전체를 벌하지는 못할 것이며, 자신은 악행의 결과를 감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중공 악당의 기고만장함에 무관심한 것은 바로 악행을 위한 온상을 제공하는 것이며, 엄청난 거짓말을 외면하는 것은 독소가 퍼지도록 방임하는 것이다.
수십 년 전, 수백만 유대인의 고난은 전 세계의 침묵으로 인해 12년(1933~1945년) 동안 지속됐다. 그리고 오늘날, 증오를 선동하려는 ‘천안문 분신자살’ 등 거짓말과 생체 장기적출 등 참혹한 만행 앞에서 수많은 중국인의 무시는 이 재앙을 27년(1999~2026년) 동안 지속되게 했다. 저 방관하는 침묵자들은 자신이 기껏해야 방관자일 뿐이며 공로도 없고 허물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대홍수가 거세게 밀려올 때 신이 인정한 선량한 사람 노아만이 다행히 온 가족을 이끌고 대홍수가 지나간 후 안전하게 방주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음을 알지 못한다.
밝고 붉은 해가 비치고 맑고 밝은 세상이다. 정의가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까닭은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도 용감하게 목소리를 내는 소수의 사람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시절 나치 사령관의 아내나 양춘웨의 아내가 여성의 다정함과 정의감으로 남편에게 도살용 칼을 내려놓도록 극력 만류했다면 결말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만약 그들이 침묵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아이들은 어쩌면 지금까지도 부모 무릎 아래서 재롱을 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눈물은 시공을 거스를 수 없고, 통곡도 사라진 생명을 되돌릴 수 없다.
진정한 좋은 사람은 죄악 속에서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 침묵의 대가는 악에 휩쓸려 결국 그것에 삼켜지는 것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당신이 남편을 사랑한다면, 그가 무고한 이를 괴롭힐 때 제발 침묵을 지키지 말고 그에게 도살용 칼을 내려놓도록 만류하라. 그것은 그의 영혼에 대한 구원이다. 당신이 당신의 아이를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가 상처받는 것을 보았을 때 제발 침묵을 지키지 말고 힘닿는 데까지 보호를 베풀어라. 다른 사람의 아이를 보호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당신 자신의 아이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죄악 앞에서의 매번의 침묵은 몰래 미래의 평안을 당겨쓰는 것이다. 당신의 침묵이 재앙의 원인이 되게 하지 말고, 나아가 사랑하는 자식을 잃는 이토록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이 되게 하지 말라.
[1]
출처: ‘명혜주간 제1001기’, 천도는 반드시 응보를 내린다 또 한 명의 중앙 610 부주임 낙마.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4/7/5/294271.html
명혜망 보고서: 610 직원 업보 종합 서술(하) (양춘웨 사례 포함)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6/8/6/332515.html
원문발표: 2026년 4월 8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4/8/50858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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