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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은 오래전부터 중국인 마음속에 증오를 심어놓았다

글/ 명진(明眞), 혜진(慧珍)

[명혜망] 최근 「’사람마다 적으로 대하는’ 사회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라는 명혜망 평론을 읽었는데 아주 잘 쓰여졌다. 나는 두 번 읽었다. 그러나 “도덕과 정신은 결코 문화대혁명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라는 부분에서 나는 “문화대혁명 이전”을 “중공이 정권을 찬탈하기 전”으로 바꾸거나, “민국 시기”로 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중공이 인류의 도덕을 타락시키고 사람들 간의 투쟁을 부추기는 것은 그것이 성립된 이래로 계속 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의 ‘AB단(團) 타도’부터 ‘옌안(延安) 정풍(整風)’에 이르기까지, 중공은 중국의 전통적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화위귀(和爲貴, 조화를 중시함)’를 투쟁과 살육으로 대체해 왔다.

젊은 사람들은 아마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므로, 문화대혁명 이후에야 중국인의 전반적인 도덕이 타락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1949년 11월 중공이 충칭(重慶)을 점령했을 때 나는 열 살이었고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중공은 오자마자 애당 교육을 실시하고 ‘당의 말을 듣자’는 것을 주입했는데 초등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봉사하며, 지주와 자본가는 모두 검은 마음을 가진 착취계급이라고 말씀하셨다. 노동자들은 임금이 낮은 국영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하며 자본가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백모녀(白毛女, 악덕 지주를 피해 산속에 숨은 시골 처녀가 고생을 너무해 흰머리가 되었는데, 나중에 공산군의 도움으로 구출된다는 중공의 프로파간다 연극: 역주)’를 보도록 조직하고, 학교 근처의 고아원에 가서 비판대회를 열었는데 “기독교 수녀는 아이를 먹는다”고 하면서 뒤편 우물에는 많은 아이들의 시신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외국인 수녀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겼다.

1950년과 1951년, 중공은 ‘토지개혁’, ‘진반(반혁명분자 진압)’, ‘숙반(반혁명분자 숙청)’, ‘반동적인 회도문(會道門) 진압'(종교 탄압)을 실시했다. 각종 운동에서 많은 중국인이 죽임을 당했다. 학교에서는 초등학생들을 조직해 비판대회에 참가시켰고, 학생들에게 ‘모래단지 두드리기(敲沙罐)'(총살, 총으로 머리를 쏘면 모래단지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는 데에서 연유된 말: 역주)를 보게 했는데, 순전히 공포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도 지주 비판 활동을 조직했다.

나는 나보다 한 학년 위인 6학년의 쉬(徐)씨 성을 가진 한 학생이, 학교에서 조직한 대회에서 자신의 부모가 지주로서 농민을 착취했다고 비판한 것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어떻게 자신의 부모를 욕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인상이 매우 깊었다.

1953년 ‘3반·5반(三反·五反, 상공업 자산가에 대한 탄압운동)’ 때, 구(區) 공작조는 우리집의 초등학교에 다니는 네 자매를 모두 불러 모아 회의를 열고, 우리에게 자산과와 경계선을 명확히 긋고 집안의 금과 은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나도 집에 가서 금을 찾느라 이것저것 뒤졌고,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야 끝이 났다.

당시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이 연설에서 “나의 학생 여러분”이라는 말을 썼다가 비판을 받았는데, 학생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당의 것이라고 했다. 또한 화학 선생님이 시험관을 훔쳤다고도 했다.

1955년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중공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후펑(胡風, 마오쩌둥의 ‘문예강화사상’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제출해 반동분자로 몰린 문학평론가: 역주) 반혁명집단’을 비판하면서, 학생 간부들을 조직해 당번을 서게 하고, 선생님 창문 밑에서 선생님의 ‘반동적 발언’을 몰래 엿듣게 했다. 당시 나는 반에서 학습위원이었는데 나도 명단에 올라 선생님 창문 밑에서 두 시간 동안 당번을 섰다. 물론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들을 만한 것도 없었다.

1957년 ‘반(反)우파 투쟁’ 이후에는 더욱더 사람들 사이에 진실을 말할 수 없게 됐다.

사실 자녀가 가족을 공격하고, 학생이 선생님과 교장을 공격하는 것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부터가 아니라 일찍이 있었던 일이며, 다만 문화대혁명 중에 더욱 광란적으로 됐을 뿐이다.

나는 중공의 “3년간 새로운 농촌 건설”이라는 구호에 속아 시골로 갔다. 원래 농민은 가장 순박하고 가족애를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당의 ‘교육’ 아래(사실은 강요로) 육친도 모르게 됐다.

농촌의 한 마을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친척 관계였고 서로 간에 모두 매우 사랑이 넘쳤다. 그러나 당의 ‘교육’ 아래 전혀 가족애를 논하지 않게 됐고, 완전히 당에 순종하는 도구로 변해버렸다. 1958년 대약진 시기에는 밤에 초과근무를 하고 심지어 밤새도록 일했으며, 때로는 밤늦게까지 회의하는 바람에 졸음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비판을 받았는데 ‘흰 깃발 뽑기(우파를 백기로 비유)’라고 불렸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애는 논할 수조차 없었다.

1959년 이후 모두가 배고픔에 시달렸다. 당시 쓰촨(四川) 동부 농촌에서는 매일 농민 한 사람당 2냥(兩)의 원곡을 준다고 했지만, 한 달에 겨우 6근씩 공공식당에서 배급을 받았는데 때로는 없기도 했다. 없을 때는 완전히 야채국에 약간의 곡식 가루를 뿌린 걸 주었는데, 곡식은 보이지도 않았으며 정말로 ‘큰솥 맑은 국[大鍋淸水湯]'(큰 솥밥[大鍋飯]이 아님)이었다.

중공은 농민들이 몰래 무언가를 삶아 먹을까 두려워 ‘봉화(封火, 불을 끄고 문을 닫다)’를 실시하여 농촌을 원시사회로 되돌려 놓았다. 불 사용을 금지했고 민병(民兵)이 어느 집에서 불빛이 보이면 끌어내 비판하고 때렸는데, 대부분은 물을 끓여 발을 데우는 것이었다.

그 후 많은 농민이 굶어 죽었다. 농민들이 종자를 훔쳐 먹는 것을 막기 위해 녹두, 완두 등 종자를 먼저 오줌에 담갔다가 초목회(草木灰)와 섞어서 땅에 심었다. 너무 배고파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그것조차 땅에서 파내어 먹었지만, 고발당하거나 민병에게 잡히면 즉시 구타당했고,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철사로 쇄골을 꿰어 거리를 돌며 조리돌림하기도 했는데 ‘생산 파괴’라고 했다. 이러한 잔혹한 행위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굶어 죽어도 서로 사랑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여전히 당의 말을 듣고 서로 싸우며, 사람을 죽게 만드는 정책을 집행했다. 공산주의는 증오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대혁명 이전부터 중공은 일찍이 전 국민의 마음속에 ‘증오’를 심어놓았고, ‘사람마다 적으로 대하는’ 사회는 일찍이 형성됐다.

 

원문발표: 2024년 5월 5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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