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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편: 리훙쯔 사부님께서 공을 전하며 설법하던 시절의 자그마한 이야기를 회상 (전집3)

사부님의 법 강의에 직접 참석하다

글/ 샤오 웨

[명혜망] 1993년 말,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span>전법륜복사본 한 권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 책을 소중하게 다루어라. 책을 읽기 전에 손을 씻어야하고, 읽을 때는 똑바로 앉아야 한다.” 책읽기를 끝냈을 때, 나는 이 책이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책이며 파룬궁을 수련해야한다는 강한 느낌을 가졌다.

1994년 1월, 나의 아버지는 내게 몇 개의 티켓을 주시고 흥분되어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법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곳으로 오신다. 이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행운이다.” 처음으로 사부님을 뵈었을 때, 나의 첫 생각은 내가 따라야 할 분이 그분이다 라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떠돌아다니던 어린아이가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온 것과 같이, 그렇게 행복하고, 따뜻했는데다가 즐거웠으며 안전한 느낌을 느꼈다.

나는 사부님의 강의를 황홀감을 갖고 들었고 사부님께서 더 이야기 해주셨으면 하고 바랬다. 대법은 아주 새로운 세계를 나에게 열어주셨고 이것은 바로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 내가 되돌아볼 때, 그 기간의 시간은 참으로 특별히 귀중했다. 나는 명예와 자기 이익을 찾는 격심하고 무의미한 경쟁에서 물러났다. 나의 상처들이 치유되었고 나의 병들도 사라졌으며, 나는 새로운 여정의 길에 올랐다. 나를 진흙탕에서 잡아 올려주셨고, 나를 깨끗이 씻어주셨으며 깨끗하고 밝은 길로 이끌어 주셨고,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주신 분이 사부님이셨다.

나는 충분한 사부님의 법이 있지 못했다. 나는 사부님 강의 전 세트를 녹음하기를 원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의 《/span>전법륜한 권을 얻었을 때, 사부님을 향해 대단한 감사함을 느꼈다.

나는 사부님의 강의 시리즈를 두 번, 전체 20회 강의에 참석하는 행운을 가졌다. 각 시리즈마다 첫 강의가 시작될 때는, 항상 더 좋은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이 서로 밀어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일단 사부님의 강의를 들었을 때는, 그러한 상황은 빠르게 사라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곳에 있던지 그리고 복도가 얼마나 비좁든지, 수련생들은 항상 질서를 잘 지켰다.

강의가 시작될 때, 사부님은 다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두 앉으세요.” 그러면 수천 명으로 꽉 찬 강당은 당장에 아주 조용해졌다. 그곳에는 단지 크고 맑은 사부님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강의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이야기를 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걸어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아주 어린아이들까지도 매우 조용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수많은 회의와 협회에 참석했었지만, 나는 한 번도 이처럼 절대적으로, 엄숙한 침묵을 가진 회의는 참석해보지 못했었다. 사부님의 강의 동안, 나는 지극히 고요함과 경이로움을 느꼈다.

사부님께서는 항상 미리 오셔서 제시간에 강의를 시작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절대 단 일분이라도 지체하신 적이 없었다.

첫 번째 시리즈에서, 강의를 조직한 사람들이 수련생들로 하여금 사부님과 사진을 찍도록 배치했다. 내 가족도 사부님과 사진을 한 장 찍는 기회를 가졌었다. 그런 다음, 사부님께서는 즉시 당신의 자리로 돌아오셨다. 사부님께서는 절대 어떤 환경 하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점유하지 않으셨고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사부님을 기다리게 하시지 않으셨다. 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내가 그런 종류의 표준에 가 닿기에는 너무도 멀다고 느꼈다.

주최자 측의 지도자들이 한 임원에게 사부님의 신임장을 검사하도록 요청했다. 그래서 이 임원이 사부님께 갔다. 그가 한 마디도 말하기 전에, 사부님은 테이블 위에 인기 기공 마스터, 최첨단 과학 성취 그리고 국가에서 발급한 특별 금상을 포함한 증명서들을 내놓으셨다. 임원은 너무 놀랬다. 그는 사부님이 초상적인 능력을 가지셨다는 것을 믿었다. 그는 집에 가서 그의 아내와 딸에게 이 이야기를 했고, 그의 전 가족이 파룬궁 수련생이 되었다.

회사 차량 과장은 등에 통증이 있었는데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다. 사부님께서는 그냥 그에게 말씀을 계속하셨다. 그는 사부님께서 아주 유머감각이 좋으시다고 느끼면서 그의 등 통증을 잊어버렸다. 다음에 그는 그의 등을 크고 따뜻한 손이 덮는 것을 느꼈는데, 아주 안락하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그런 다음 그의 등 통증이 사라졌다. 나중에, 그는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리훙쯔 사부님은 정말로 비범한 분이시다.”

그곳에는 지방에서 온 두 명의 나이 든 여인들이 있었는데 티켓을 살 돈이 없었다. 그것을 들으시자, 사부님께서는 일하는 간부에게 그들을 들여보내라고 말씀하셨다.

이 같은 아주 많은 일화가 있지만 지금은 여기서 그치겠다.

사부님의 법 강의에 직접 참석하다(속편)

글/ 샤오 웨

[명혜망] 나의 친척 중에 현대적이고 아주 재치 있는 한 젊은 숙녀가 있었다. 사부님의 일련의 강의에 참가하는 첫날, 그녀는 파룬이 그녀의 손바닥에서 돌고 있는 것을 또렷하게 느꼈고 사부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가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녀의 마음으로부터 사부님을 향한 깊은 존경심이 자라났다. 그녀가 사부님께 그녀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요청했을 때, 사부님께서는 ‘진수(眞修)’라고 쓰시고 사부님의 이름을 사인해 주셨다. 주최자 측에서 수련생들이 사부님과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치했다는 것을 알자, 그녀는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사부님의 팔을 잡고 싶다.”라고 말했는데, 후에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내가 사부님께 가까이 걸어갔을 때, 어떻게 됐는지 내가 가졌던 모든 불필요한 생각들이 사라져버렸다.”

1993년에 은퇴한 정부관리가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고질적인 심장병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직접 사부님을 뵐 수 있고 세미나에서 사부님 강의를 듣는다는데 아주 흥분해 있었다. 그는 혼자서 사부님과 사진 찍기를 희망했다. 사부님은 그의 소망을 충족시켜주셨고 그는 사부님 곁에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을 얻었다. 그는 나중에 사부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가 당시 사부님께 존경을 표시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사부님은 지극히 온화하셨고 매 수련생들을 대단히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사부님의 세미나에 참석함으로써, 나는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는가를 배웠다. 그때는 책이라는 것이 없었고, 고난과 마주했을 때 평형을 이룬다는 것이 몹시 어려웠다. 나의 상관은 나와 상호관계에서 모순이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하도록 배정을 했다. 명령에 복종하느냐 아니면 다른 일을 달라고 그에게 요청을 할 것이냐? 나는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그런데 사부님께서 하얼빈으로 법을 전하러 오신다는 것을 들었다. 나는 수련자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방법을 배우려는 희망을 갖고 나의 조부모와 내 아이들을 데리고 급히 그곳으로 갔다. 이는 사부님의 세미나에 두 번째로 참석하는 것이었다.

나의 상처받은 가슴은 사부님의 자비로운 표정을 보고 사부님의 친절하신 음성을 들었을 때 다시금 위안을 받았다. 눈물이 얼굴에서 흘러내렸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나는 나의 상관의 명령을 따랐다. 몇 년의 협조가 있은 후에, 우리의 오해는 더 나빠지지 않았고 간단하게 내가 다른 사람이 성취하려고 하는 것을 갖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해했다. 한바탕 싸움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좀 이상하다고 느꼈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나를 이용하며 내게 더러운 술책을 쓰는 것을 보고 불공평에 대해 분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에 사부님의 말씀을 꽉 잡고 평정한 태도를 유지했다. 내가 이익을 얻으려고 싸우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가져야할 것을 어떤 것도 잃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하얼빈에서 법을 전하실 때,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미나에 참석했지만, 강당 전체는 더 이상 평화스럽고 질서가 잡힐 수 없을 정도였다. 아이스 링크가 아주 컸었기 때문에 멀리 있던 많은 사람은 사부님을 뵐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간부들에게 많은 불평을 보냈다. 이를 들으시고, 사부님께서는 천천히 링크 주위를 도시면서 수련생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셨다. 분위기는 엄숙했고 따뜻했으며, 많은 사람이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세미나에서, 내 옆에 앉았던 사람은 창춘에서 온 수련생이었다. 사부님에 대한 나의 큰 존경심 때문에, 나는 사부님의 고향에서 온 사람들에게도 지극한 매력을 느꼈다. 나는 항상 사부님과 같은 고향에서 온 수련생들을 가깝게 느꼈다. 그래서 나는 단지 그녀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강의장에 일찍 도착하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사실 사부님과 같은 이웃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매우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말했다, “사부님의 가족은 가난하게 살고 있으며, 집에 있는 가장 값진 가구는 12인치 TV입니다. 사부님이 법을 전하기 시작하시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부님께 그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했고, 사부님은 절대로 돈을 받으시지 않으셨으며 때로는 방문한 환자들에게 과일을 대접했습니다. 위암 말기에 있었고 반달 이상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환자가 있었는데, 그는 죽어가고 있었으며 수많은 치료를 거친 후에 그의 가족이 사부님께 그를 데리고 왔습니다. 사부님은 공능으로 그의 병을 치료하셨고 그는 빠르게 회복되었죠. 사부님은 바나나를 하나 까서 그에게 건네 주셨고, 그는 바로 사부님과 같이 이것을 먹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심하게 놀랬고 지극히 감사했지요.”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신 이후로는, 사부님의 부인과 딸만이 집에 있었다. 한번은, 사부님이 사시는 아파트 빌딩에 불이 났다. 사부님의 아파트를 제외한 모든 창문으로부터 불꽃과 연기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소방대원들은 사부님의 창문을 통해 들어가서, 호스를 연결했으며, 결국 불을 진압했다. 단 하나 손상을 입은 것은 창틀이었는데, 몇 군데가 무거운 물 호스로 인해 벗겨졌다. 이 사건은 온 이웃을 통해 퍼졌으며 모든 사람들은 신들이 사부님의 집을 보호했다고 말했다.

다른 수련생 한 명이 그녀의 경험을 말해주었다. “나는 1993년에 유방암으로 진단이 내려졌어요.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사부님께 나의 병을 고쳐 줄 것을 간절하게 청했습니다. 사부님으로부터 내게 세미나에 참석하라는 전갈이 왔지만, 깨달음이 적었기 때문에 나는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과 내 병이 치유되는 것과의 연계를 보지 못했어요. 그때 나의 우선 순위는 치유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대신에 나는 수술과 화학요법을 선택했습니다. 수술 후, 내게는 아직도 통증이 있었으며, 나의 몸은 극도로 약해져 있었고 계속 종양이 다시 자라났어요. 다른 선택이 없게 되자, 나는 세미나에 참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후에 나의 몸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어요. 이번이 세미나에 참석하는 두 번째인데, 당신은 내가 암으로 고통을 받았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녀를 자세히 보았는데 그녀 얼굴은 건강한 홍조를 띠고 있었고, 그녀의 살결은 부드러웠으며, 몸무게는 아주 적당해 보였고, 그녀의 몸은 에너지로 충만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칼은 성글었는데 화학요법이 그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세미나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합니다. 그 이후로 불필요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니까요. 당신은 어떤 환경에서도 항상 사부님을 믿으세요. 당신에게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걸으면 잘못되지 않을 겁니다.”

사부님께서 중국에서 법을 전하실 때에, 나는 사부님과 가까운 많은 수련생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세미나에 제시간에 오십시오, 사부님은 공능을 사용하셔서 교통난을 줄이고 계십니다.” “사부님의 지도 아래, 다리가 마비되어 고통받던 사람들이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제자리에서 뛰기까지 합니다.” “사부님은 아주 소박한 삶을 살고 계시며 아무것도 낭비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등등. 하지만, 나는 내가 자세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쓸 수가 없다. 그런고로, 나는 동수들이 알고 있다면 신, 노수련생들이 우리의 사부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자세한 것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그들에게 사부님의 덕행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사실을 갖고 사악의 거짓을 돌파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 충칭에서 설법하셨던 날들을 기억하다

글/ 충칭 노수련생

[명혜망] 나는 57세이다. 나는 1993년에 파룬따파를 배울 만큼 행운을 가졌고, 충칭에서 사부님의 첫 강의에 참석하는 기회를 가졌었다.

내가 처음으로 사부님을 뵈었을 때 나는 너무 흥분해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진리를 찾고 있었고, 수십 년간 위대한 사부님을 찾고 있었는데 결국 나는 한 분을 찾은 것이다. 어떤 말로도 나의 기쁨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나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아시고, 등록비의 반인, 25위안을 돌려주셨다. 나는 돌려받기를 원치 않았지만 사부님께서는 내가 돈을 받을 것을 주장하셨다. 나는 아주 필사적이 되어 눈물로 말씀을 드렸다, “사부님, 저는 사부님의 강의를 듣고 있기 때문에 돈을 지급해야 합니다. 사부님께서 제 돈을 받지 않으시면, 당신은 나를 당신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으실 겁니다.”

사부님은 자비롭게 그리고 엄숙하게 단상 앞쪽으로 걸어가셔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모두 나의 제자들입니다!” 그때의 내 느낌은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자비로구나’하는 것이었다. 사부님께서 오른손을 흔드실 때, 나는 파룬이 아주 밀도 높게 눈송이처럼 법이 퍼지고 있는 강당 전체에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방 전체에서 즉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렸다.

1993년과 1994년 두 번, 사부님께서 설법하시기 위해 충칭으로 오셨다. 오실 때마다 사부님은 싸구려 호텔에 묵으셨는데, 당황한 호텔 직원이 사부님께 물었다, “사부님, 당신은 이미 아주 유명한 기공 스타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별 다섯 개 호텔에 묵으셔야 하는데, 당신께서는 이런 보통 호텔에 묵고 계십니까?” 사부님은 그냥 웃으시면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다.

사부님의 식사는 아주 간단했고 많이 드시지 않으셨다. 때로는 작은 그릇의 국수를 드셨다. 충칭 사람들은 매운 고추 먹기를 좋아한다. 국수거나 국이거나, 그들은 고춧가루를 넣는다. 한 번은 사부님께서 점심에 국수를 시키셨는데 식당 주인이 사부님이 북쪽에서 오셨고 매운 고추를 잡숫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그는 국수에 많은 고춧가루를 넣었다. 사부님의 얼굴은 매운 음식으로 온통 땀을 흘리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부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조용히 작은 그릇의 국수 잡숫는 것을 끝내셨다.

한 번, 개인이 소유한 작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시고 계신 동안, 사부님은 한 톨의 벼를 까고 쌀알을 꺼내어 드셨다. 사부님이 쌀 한 톨마저도 낭비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모든 수련생들은 더 이상 그들의 음식을 남겨 버리지 않았다.

귀중한 순간, 영원한 추억

글/ 중국대륙 수련생

[명혜망] 1994년 7월에, 나는 광저우에서 사부님의 법 강의에 참석하는 대단한 행운을 가졌다. 그 기간의 시간은 대단히 귀중했으며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법을 전하니 만마가 가로막네…”《span style=”font-size: 12pt; mso-fareast-font-family: 굴림”>홍음, 신생(新生)광저우에서 설법하시는 동안 장소가 끊임없이 바뀌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이미 분명했다. 처음에는 장소가 광저우 일반 노동조합의 강당으로 잡혀있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강의 장소가 다른 곳으로 바뀌었고, 둘째 날에도 강의 장소가 다시 바뀌어서, 링관시(Lingyuanxi)도로에 있는 군대 강당에서 열렸다. 나중에 내가 이를 회고했을 때, 나는 사부님께서 파룬따파를 소개하시는 동안에 만났던 어려움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사부님께서 법 강의를 하실 때, 사부님께서는 항상 일찍 강의장에 도착하셨다. 내가 강의에 참가했을 때 청중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이층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어느 날 내가 미리 강당에 도착하게 되었고 아직 강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밖으로 나가서 현관 위 이층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 순간 나는 내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기쁘고 놀랐다. ‘사부님께서 오셨다!’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서서 망연히 쳐다보면서도, 아래층으로 내려가 사부님을 맞이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혼자서 걸어오시는 장면이 내 가슴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왜? 나의 기공에 대한 흥미는 1984인가 1985년에 시작되었고, 점점 더 흥미를 갖게 되었다. 나는 항상 높은 공력과 높은 도덕성을 가진 사부님을 찾기를 희망했었다. 80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기공은 중국에서 고조되었고, 많은 기공 지도자들과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중국 전역에서 나타났다. 나는 그때 대학에 있었고 그들 몇 명에게 편지를 썼었지만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다. 나는 겨울과 여름 방학 동안 그들을 찾으려고 갔었지만 허사였다. 1988년에, 내가 다니는 대학에 기공협회가 세워졌다. 협회는 몇 명의 지역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기공 공연을 하도록 했다. 그들은 항상 차를 타고 대학으로 오고 갔으며, 일반적인 대학생들은 그들 가까이도 접근하지 못했었다. 내가 사부님을 만났을 때는 그분은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있었다. 하지만, 사부님은 차를 타고 오지도 않았으며 호위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강의를 하시기 위해서 그냥 자연스럽게 그리고 온후하게 강당으로 견정하게 걸어오셨다. 사부님의 특별한 태도는 사부님의 온화함에서 체현되었다.

나는 사부님을 직접 보았던 모든 수련생들이 사부님의 매 한 말씀과 행동에서 감동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문장, 미소, 또는 손을 흔드는 것, 모든 것이 대각자의 광대한 자비와 무아를 체현해낸다. 이 모든 것들은 모든 인간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인상을 남기게 될 것이고 가장 귀중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사부님께서 공을 전하시고 설법하시던 나날을 회억하다

글/ 창춘(長春)대법제자 파라이(法来)

[명혜망 2004년 5월1일] 1992년 5월에 法輪大法(파룬따파)는 창춘(長春)에서 전해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부터 우주의 법리는 인간세상으로 왔다. 그리하여 우리 이 보통 속인들이 대법제자가 될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그 당시 창춘에서 공을 전하시고 설법하시던 나날을 회억하는 것은 나의 이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즐거운 시기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 생각에, 내가 공을 전하고 설법하는 것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장래에 당신은 알게 될 텐데, 당신은 이 시간이 매우 보람찼다고 여길 것이다.”[1] 지금 나는 이런 경력을 써내어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려고 한다.

천리 밖에서 사부님을 찾았으나 사부님께서는 고향에 계시다

92년 황금빛 나는 가을에 나는 사부님을 만나 뵈었고 비로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에 진정으로 올랐다.

인생의 경력은 나로 하여금 감개가 아주 많게 하였다. 나는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 3반과 5반, 공사합영, 대약진, 반우, 4청, 문화대혁명 등을 겪어 심신이 피곤하였으며 사람이 사는 것이 아주 고달픔을 느꼈다. 이 대고해(大苦海)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수련을 선택하였고 늘 절에 가서 불경을 청해 보았다. 질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기 위하여 또한 각종 기공 학습반에 참가하였다. 그 당시 나는 마땅히 유명한 사부님을 모시고 수련해야 비로소 성사된다고 생각하여 사부님을 찾는 길에 나섰다. 몇 년 동안 나는 연달아 보타사, 소림사, 백마사, 영은사, 법문사 등을 갔었고 또 아미산, 낙산, 청성산 등에 갔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사부님을 찾지 못했다.

92년 가을, 이웃 수련생이 나에게 파룬궁(法輪功)을 가르쳐 주었으며, 또한 내가 찾고자 하는 사부님이 가능하게 이(李)선생님일 수 있는데 이선생님께서 창춘으로 돌아오시면 우리 가서 만나보자고 하였다. 어느 날 우리 일행 네 명은 사부님 댁에 갔다. 사부님 댁은 길가에 있는 층집이고 실외는 층계였다. 그 당시 방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두 서 있었고 사부님도 서 계셨다. 그러나 나는 한 눈에 사부님을 알아보고서 두 손을 합장하였다. 공손하게 사부님께 심심한 예의를 올렸다. 입으로는 “이선생님 안녕하세요”라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사부님! 나는 사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였다. 사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나와 악수를 하셨다. 그 당시 나의 격동된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즉, 마치 길을 잃은 아이가 집을 찾은 느낌이었다. 이때 함께 간 사람이 나의 정황을 사부님께 소개하였고 사부님께서는 아주 기뻐하셨다. 나는 사부님과 함께 베이징에 가서 설법반에 참가할 것을 청하였지만 사부님께서는 나더러 창춘의 설법반에 참석하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실 때 나는 비로소 방안의 정황을 볼 수 있었다. 방은 두 칸이었으며, 안 쪽의 침실에는 더블사이즈 침대 하나가 있었고 바깥의 방이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 방이었다. 방은 비교적 컸는데 긴 소파 하나,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있었다. 그 당시 매 번 사부님 댁에 가면 방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벽에는 사부님께서 손수 그리신 몇 폭의 불상이 걸려있었으며 그림 속의 부처님들은 모두 한 층 한 층의 작은 탑처럼 된 연꽃석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 직접 만드신 작은 진흙부처가 있었다. 후에 사부님의 설법비디오의 첫 부분에 멀리에서 가까이로 오는 사부님의 법상이 나오는데 멀리의 것이 바로 사부님 댁의 그 불상이었다.

몇 년 동안 나는 기차 타고, 배 타고, 비행기를 타고 사부님을 찾아 다녔지만 오늘날에야 비로소 사부님을 만나게 될 줄을 생각지도 못했다. 오히려 걸어서 갔으며 나의 집에서 사부님의 집은 단지 버스 한 정거장 거리였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수련계에는 이런 사람이 적지 않은데, 줄곧 고층차로 수련하려고 생각한다. 도처에서 법을 구하려고 돈도 적지 않게 썼으며, 방방곡곡을 한 바퀴 돌아 유명한 사부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유명하다는 명(名)이 진정 명백하다는 명(明)은 아닐 수도 있다. 결국은 헛되이 돌아다니며 돈을 쓰고 고달팠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렇게 좋은 공법을 우리는 오늘날 당신에게 내놓았고, 나는 이미 당신에게 받쳐 주었으며, 당신의 집 문 앞까지 갖다 주었다.”[1] 오늘 나는 마치 꿈을 꾸듯이 정말로 사부님을 만났다. 그 당시 나는 사부님을 따라 끝까지 수련, 원만하여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결심하였다.

사부님의 전공(傳功) 설법하는 반에서

93년 7월 사부님께서는 비로소 창춘으로 돌아오셨고 성위(省委) 대강당에서 제5기 전공설법반을 여셨다. 그 당시 법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관계로 또 연속하여 지린대학(吉林大學)의 대강당에서 제6기 전공설법반을 여셨다. 94년 5월 사부님께서는 지린대학 대강당에서 제7기 전공설법반을 여셨다. 이 4차례 설법반을 나는 모두 참석하였고 후에 또 하얼빈에서 여신 전공설법반에 참가하였다. 수 천 명 되는 설법마당은 모두 조용하였고 잡음 하나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설법하실 때 일꾼들마저 모든 일을 멈추고 조용히 설법을 들을 것을 요구하셨다.

내가 참가한 이 50절(節) 설법에서 사부님께서는 모두 먼저 도착하시고 강연대에 서서 수련생들이 입석하는 것을 보셨다. 이 기회를 빌려 사부님과 함께 우리 온 가족은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에서 사부님께서는 손에 한 장의 작은 쪽지 하나를 쥐고 계시는데 위에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몇 줄의 글자가 쓰여있다. 이것이 바로 사부님께서 설법하실 때 지니신 유일한 물건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설법하실 때 원고도 없고 교안도 없이 파룬따파를 손수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전수하셨다. 매 번마다 나는 불광이 널리 비추고 예의가 원명한 전공 설법마당 속에서 두 다리를 온가부좌하고 손은 결인하고서 눈으로는 사부님의 휘황한 형상을 보며 귀로는 사부님이 우렁찬 목소리로 우주의 법리를 설법하시는 것을 들었다. 우리에게 우주의 특성인 真善忍(쩐싼런)이 바로 불법이라고 알려주셨고, 우리 인생의 참뜻은 바로 반본귀진(返本歸真)이며 우리더러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사람이 되라고 알려주셨다.

제6기 전공설법반에서 사부님께서는 비교적 높게 법을 말씀하셨다. 천목을 말씀하실 때 사부님께서는 다른 공간에 관한 문제와 동시에 같은 곳에 존재하고 있는 다른 공간을 말씀하시며 어떠한 물체든지 다른 공간에서 모두 그의 존재형식이 있다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책상 위의 물컵을 들어 오른쪽 손 위에 올리셨다. 그리고 모두들 주의하여 보라고 하셨다. 천목이 열렸든지 열리지 않았든지를 막론하고 모두 볼 수 있다고 하셨다. 이때 사부님께서 왼쪽 손의 중지와 엄지손가락으로 물컵 속에서 천천히 작은 물컵 하나를 꺼내셨다. 원래의 물컵과 똑같게 생겼지만 원래 물컵의 4분의 1의 크기였다. 사부님께서는 여러분들 잘 보았는가 하고 물으셨고 모두들 격동하여 잘 보았습니다 고 답했다. 그 다음 사부님께서는 또 천천히 작은 물컵을 원래 물컵 속에 넣으셨고 이때 작은 물컵이 차츰차츰 원래 물컵과 함께 합쳐지는 것을 잘 볼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공간의 물건을 확실하게 보게 하셨다. 이는 현대과학으로 돌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사부님께서는 “사람들은 우주가 얼마나 크냐고 묻는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이 우주, 그것은 변두리가 있다. 그러나 여래 이런 층차에서는 그것을 모두 가없이 넓고, 무한히 큰 것으로 본다. 사람의 신체 내부, 분자에서 미시하의 미립자에 이르기까지는 이 우주와 마찬가지로 크다고 하는데, 듣기에는 아주 허황하다. 한 사람, 한 생명을 만드는 데에 극미시하에서 이미 그의 특정한 생명 성분과 그의 본질이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현대과학이 이것을 연구하기에는 아직 차이가 너무나도 크고, 전체 우주 중에 존재하는 고급지혜성구(高級智慧星球)의 그런 생명들과 비교해 보면, 우리 인류의 과학기술 수준은 상당히 낮다. 바로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존재하는 다른 공간도 우리는 돌파하지 못하지만, 다른 별에서 오는 비행접시는 직접 다른 공간 속에서 가는데, 그 시공(時空)의 개념마저 변화가 일어나 그것이 오려면 곧 오고, 가려면 곧 가는데, 빠르기가 사람의 관념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1]

사부님께서 나의 집착을 제거해 주시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또 당신에게 알려주겠다: 나의 이 책의 내용은 몇 개 학습반에서 말한 법을 한데로 합친 것이다. 모두 내가 말한 것으로서 구절마다 모두 내가 말했고, 모두 녹음테이프에서 한 글자 한 글자씩 뽑아냈으며, 한 글자 한 글자씩 옮겨 적은 것인데, 모두 나의 제자, 수련생이 나를 도와 녹음 중에서 받아 쓴 것이고, 그런 다음 내가 다시 한 차례 한 차례씩 수정했다. 모두 나의 법으로서, 내가 말한 것은 바로 이 법이다.”[1]

그 당시 나는 행운스럽게도 그 베끼는 일에 참가하였다. 제7기 전공설법반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아주 높았다. 설법반이 결속된 후 사부님께서는 우리더러 이번 설법녹음테이프를 베끼라고 하셨다. 요구는 특별히 엄격하셨는바, 반드시 한 글자도 빠짐없이 베끼라고 하셨으며 시간 또한 특히 짧았다. 나는 녹음테이프를 받았을 때 심정이 아주 격동되었는데 사부님께서 나를 신임한다고 여겼다. 또한 이번 일이 어렵지 않고 단지 베끼는 일꾼(抄錄員)의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아주 간단하고 쉽다고 여김으로써 환희심이 일어났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의 기타 면과 과정 중에서도 환희심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데, 이런 마음은 마에게 이용당하기가 아주 쉽다.”[1]고 말씀하셨다. 이리하여 나는 베낄 때 생각과 달리 능력이 안 되며,기억력이 차하고 쓰는 속도도 느려 거의 매 한 마디를 모두 카세트를 한 두 번씩 멈춰야만 쓸 수 있었다. 바로 이렇게 멈추고 뒤로 돌리며 하였는데 아주 느리게 여겨졌으며 또한 마음속으로 조급해 졌다. 이때 또 두려운 마음이 생겼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뒤쳐질까봐 두려웠고 제 시간에 완성하지 못하여 체면을 잃을까봐 두려웠다. 후에 카세트가 고장나 시간을 다그치기 위하여 새 카세트로 바꿨지만 나중에 그래도 나는 뒤쳐졌다. 동수의 도움 하에 나중에 제 시간 내에 베끼는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그 당시 우리는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법을 책으로 써내어 우리에게 법공부에 쓰도록 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보귀한 책의 이름이 《/span>전법륜임을 몰랐다.

94년 9월 사부님께서는 작은 법회를 한차례 열어 수련생들에게 수련 중의 일부 문제를 해답해 주셨다. 수련생들이 제기한 문제가 비교적 많았으며 사부님께서는 매 문제마다 모두 상세한 해답을 하셨기 때문에 법회가 결속될 때 이미 점심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사부님과 함께 작은 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때 나의 집착심이 또 일어났다. 다급히 집에 달려가서 카메라를 가져왔고 새 필름을 넣은 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해외로 나가셔서 전공설법하시기에 사부님과 만날 기회가 적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사부님과 함께 있은 사진을 더 많이 남기고 싶었다. 하여 나는 바삐 돌아다니면서 왼쪽에서 한 장, 오른 쪽에서 한 장 찍었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사부님을 한 장 찍었다. 여전히 모자란다고 여기고 계속 찍어댔다. 이때 사부님 곁에 앉은 남편이 나에게 눈치를 주며 그만하라고 하였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계속 나를 보고 웃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남편을 상관하지 않고 찰칵 찰칵 하고 모두 찍어버렸다. 점심을 먹은 후 나는 필름을 현상하였다. 이튿날 가서 필름을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하였다. 필름이 전부 시커멓고 그림이 없었다. 나는 즉시 깨달았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나에게 집착심을 제거해 주신 것이며 직접 나를 점오해 주시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없이 넓은 부처님의 은혜(佛恩浩蕩)로 하여 나는 사부님에 대한 감격과 경앙(敬仰)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까지 매 번마다 자신한테서 집착심을 발견할 때면 그 당시 사부님의 그 미소 짓는 얼굴과 나를 바라보던 정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하여 나로 하여금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며 사부님께 죄송하게 느껴져 노력하여 집착을 제거한다.

사부님의 자비하신 보호하에 나는 오늘날까지 겨우 걸어올 수 있었다. 나는 오로지 사부님을 단호히 믿고 대법을 단호히 믿으며, 에누리 없이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안을 향하여 찾아 집착을 제거하고 동요하지 않으며,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가서 행하면서 극단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최대의 노력으로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나는 이것이 바로 종횡우주(縱橫宇宙)의 대법제자라고 생각한다.

사부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고향의 대법제자들은 반드시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책임을 떠맡아 세 가지 일을 잘하여 사부님의 정법노정을 뒤따를 것입니다. 사부님의 자비하신 고도(苦度)에 떳떳하게 행할 것입니다.

사부님, 고향의 대법제자들은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사부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 《/span>전법륜

사부님께서 스자좡(石家庄)에서 법을 전하실 때의 소중한 기억들

글/ 허베이 대법제자

[명혜망 2004년 5월 2일] 내가 10년 전 법을 얻을 때의 지난날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뜨겁게 용솟음치고 나도 모르게 행복한 눈물이 흘러내린다.

1994년 3월 2일 오전 8시 스자좡 군부대 대강당에서 나는 영광스럽게도 2시간 남짓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다.(그때는 공(功)이 있는 보고회라고 했음) 강의에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디가 불편하거나 혹은 불편한 데가 없으면 마음속으로 가족이나 친척들이 병이 있는 곳을 생각하면 사부님이 청리해 주신다고 하셨다. 한번만 생각해도 없어진다고 하셨다. 그 자리에서 나는 수십년 동안 고질병이던 머리 아픈 증상이 사라졌다.

그날 이루어진 보고회는 전부 무료로 일절의 보수도 받지 않은 평화로운 봉사로 진행되었다.

그 후 8일간의 학습반에서 사부님의 뚜렷한 법리와 열심히 공법을 가르쳐 주시는 모습을 보고, 나는 사부님의 친절하고 온화한 표정이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공법을 가르쳐주실 때도 우리 벽 쪽에 붙어 있는 수련자라 할지라도 사부님은 매일 하나하나 돌아보며 친히 수련자들에게 동작을 교정해 주셨다.

1994년 3월 10일 밤 스자좡 제1기 학습반이 끝났다. 사람들은 모두 사부님과 사진을 찍었으면 했다. 그때 현지의 기공 협회에서는 전문 사진사가 와서 찍어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러나 사부님은 수련자들의 비용을 덜어주려고 수련자들에게 누가 사진을 찍을 줄 아느냐고 물었다.

이일을 보면서 사람들은 느낀 바가 크다.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신다. 원래 10일 강의였는데도 사부님은 많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10일 강의를 8일에 완성해서 수련자들의 시간과 비용을 줄여주셨다. 이 8일간의 학습반에서 수련자들이 기공협회에 내는 돈은 35원이고 기공협회에서 학습반을 개최하는데 든 비용과 수입을 제외하면 사부님과 주위에 따라다니는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돈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 나는 사부님께서 대법을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대법의 아름다움을 세상 모든 선량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시려고 할 뿐, 사부님 당신의 득실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보아냈다.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다.

3월 11일 우리는 오전 8시가 넘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부님과 함께 찍은 사진은 영원하고 소중한 기념으로 남겼다.

이런 것들은 일반적인 작은 일로 보이지만, 모두 사부님의 자비가 배어나오고 사부님의 위대함이 돋보인다. 사부님의 제자라는 것이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정저우(鄭州)에서 사부님의 전수 반에 참가했던 날들

[명혜망 2004년 5월 5일] 내 나이는 올해 86세이다.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으며 병원에 입원했던 기간이 직장에 출근했던 기간보다 길었다. 이것저것 많은 기공들을 접해봤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94년 6월초의 어느 하루 친구의 권유로 사부님의 전수반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병을 제거하기 위해 한번 시험 삼아 해보자는 생각으로 참가하였다.

파룬궁(法輪功)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비용이 아주 적게 든다는 것이었다. 10강의를 듣는데 50원밖에 안되었는데 전에는 40원밖에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기공 협회에서 파룬궁 전수반은 비용을 너무 적게 받는다고 해서 50원으로 올린 것이라고 한다. 이것과 비교할 때 우리 한 이웃 사람은 모 공법을 배우러 1주일을 다녔는데 매일 1강의씩 듣는데 하루에 300원을 지불했다고 한다. 두 번째 받은 인상은 사부님의 기개(氣槪)가 일반인과 다르면서 젊어 보였는데 그저 20여세 밖에 안 되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젊은 기공사가 병을 치료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의 목적은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다. 바로 이런 순수하지 못한 목적이 있었기에 한편으로는 강의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내 병을 생각했다. 그래서 강의만 듣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 강의가 끝나면 좀 기다렸다가 사부님보고 병을 치료해 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의가 끝나자 아니나 다를까 어떤 아줌마가 아이를 안고 강단 앞에 다가가 아이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사부님께서는 “나는 병을 고치지 않아요. 여기서 강의를 들으세요.”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사부님이 병을 치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희망이 절반 식어버렸다. 후에 나는 《/span>전법륜에서 “어떤 사람은 너무나 괴로워 의자에서 엎드린 채 가지 않고, 내가 강단에서 내려와 그를 치료해 주기를 기다린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바로 나 같은 사람한테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몇 강의 듣고 또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나는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를 완전히 개변시키고 열심히 들었다.

나의 마음에 새겨진 몇 가지 일이 있는데 동수들과 같이 나누어 보고자 한다.

한번은 강의를 하시던 중 사부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두 손을 펼쳐 파룬(法輪)을 받으라고 했다. 손을 똑바로 펼치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라고 했다. 나와 친구는 앞뒤로 서서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때 어떤 아가씨가 우리 중간에 끼어들더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에게 파룬이 들어왔어요. 이것 보세요. 빨리 보세요.”하며 나에게 보여줬다. 나는 정말 둥그런 물체가 그의 손에서 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녀를 몹시 부러워했다.

어느 하루 강의가 끝나고 날씨가 갑자기 변하더니, 천둥번개, 소낙비에 광풍과 우박의 소리가 요란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고 번개는 실내까지 내리쳤다. 전기도 끊어져 강단이 캄캄했다. 우뢰와 번개가 들이치는 것을 다 볼 수 있었는데 그때 사부님의 표정은 아주 엄숙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하셨고 사부님은 강단에 앉아 대수인을 하셨다. 점차 천둥번개는 없어졌고 전기도 들어왔다. 그때 우리는 사부님이 왼손 손가락으로 무엇을 비비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여러 번 비비고 나서는 책상 위에 있는 컵 안에 넣었다. 후에 나는 《/span>전법륜을 배우면서 “당신은 그것이 천 년이나 8백 년을 수련했다고만 보지 말라. 아직 새끼손가락 하나로 비빌 나위도 없다.” 이때서야 나는 ‘아! 그때 사부님께서 손으로 비비던 것이 동물이 수련해낸 마(魔)였구나’하고 깨달았다.

그때 우리가 강의를 들을 때는 수강증과 수료증이 있었다. 증에는 사진을 붙여야 했는데 그날 사진을 내러갈 때 보니 사진이 없어졌다. 짜증이 났지만 강의시간에 늦을까 봐 빨리 강당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 강단에서 “누가 사진을 잊어버렸어요?”하고 묻는 것이었다. 누가 내 사진을 주웠나 보다 하고 좋아서 일어나 “저예요.”하자 사부님은 나와 대조해 보더니 “당신 것이 맞네요.”하여, 내가 그쪽으로 가서 받아오려고 하자 사부님은 “여기까지 올 필요 없어요. 다른 사람보고 그쪽으로 가져가라고 할게요.”라고 하셨다. 그때 강당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 거기까지 건너가지도 못했다. 그때 나는 “이 사부님! 정말 좋으시다.”하고 생각했다.

사부님은 절대로 수련자들의 시간을 점하지 않는다. 저녁식사도 드시지 않고 강의를 하실 때가 많다. 강당에는 많은 수련자들을 수용할 수 없어(2천여 명) 체육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의를 들을 때 나는 자꾸 나의 병만 생각하다 보니 강의를 잘 들을 수가 없었다. 후에 나는 사부님께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말씀을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예를 들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좋은 사람보다 더욱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다. 일을 함에 있어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선타후아(先他後我)하고 모순이 생길 때는 자기의 잘못을 찾아야 한다.” 등등의 말씀들이 아주 새로웠고 점점 듣기 좋아졌다. 우리 집은 강의를 듣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다. 그래서 나는 저녁밥을 먹지 않고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 놓았다. 그로부터 언제나 제일 앞줄에 앉게 된 나는 사부님께서 강의를 하실 때 강의 원고도 없이 그냥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종이 한 장을 꺼내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강의를 할 때는 한번 슬쩍 보시고는 “다음에 또 하나 문제를 얘기하겠습니다…”하고는 막힘없이 줄줄 말씀하신다.

그때는 6월 중순의 날씨라 정저우의 기온은 37도에 이르렀고 강단에는 정면으로 붙이는 선풍기 한대밖에 없었다. 사부님은 그 선풍기마저도 책상 옆쪽으로 밀어놓고 사람들에게 가져가라고 하셨다. 객석에는 누구도 부채질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제 시간에 강의를 하시면서 한 번도 강의시간을 지연한 적이 없었다. 한번은 친구의 자리를 잡아놓았는데 시간이 곧 되는데도 그 친구가 들어오지 않아 자리를 찾지 못할까봐 문 밖에 그를 마중하러 갔다. 나는 사부님을 따라다니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사부님은 곧 오시나요?”하자, 청년은 “사부님은 금방 소림사에서 돌아왔어요. 아직 식사도 못하셨어요.”하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아직 시간이 좀 남았을 것 같아 친구를 마중 나가기로 했다. 강당을 나와서 밖에 있는 빈 방을 거쳐 걷고 있는데 마침 사부님께서 걸어오시는 것이었다. 후에 나는 사부님께서 식사도 안 하시고 강의하러 오셨다는 것을 알았다.

10강의를 마치고 사람들은 사부님과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동의하셨다. 우리는 지역별로 사부님과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때 정저우 지역에는 수련자가 100여명 밖에 없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들은 가지 말고 기다려 보세요.”하시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사진을 다 찍고 나신 후 손짓을 하며 우리보고 체육관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사부님은 우리보고 앉으라고 하시면서 사부님은 그냥 땅에 앉으셨다. 다른 사람들도 잇따라 사부님을 둘러싸고 자리를 잡았다. 너도나도 사부님 곁에 앉으려고 했다. 나는 멀리 떨어져 있어 사부님께서 구체적으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냥 모두들 열심히 연공하고, 연공장을 만들고 연락인을 몇 명 구성하고 가깝게 앉아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그쪽, 저쪽, 그리고 여기 있는 분”이라고 지명하셨다. 또 어떤 사람은 “저도 하겠습니다. 나는 원래 공회(公會)에서 일을 했는데 지금은 퇴직하고 집에 있어요.”하고 말했다. 사부님은 “좋아요.”라고 말씀하셨다. 내 친구는 사부님 옆에 서서 “이 선생님, 다음번에는 또 언제 오실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사부님께서는 “다시는 올 수 없을 거예요.”하고 말씀하셨다. 개별적인 동수들이 질문을 하고 사부님께서 답해주시는 것을 나는 잘 듣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후회된다. 이것은 내가 깨달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었다.

정저우 기공 협회에는 스(石) 씨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강의를 듣지 않는 것을 보고 동료가 왜 듣지 않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너무 많이 들어보니 다 거기서 거긴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은 다르니까 한번 들어보라고 동료가 권했다. 그 사람은 끝까지 듣고 나서 연공을 시작했다. 그는 왼쪽 눈 밑에 계란 크기만 한 검은 사마귀가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보니 사마귀가 없어졌다. 그리고 얼굴색도 좋아져 부드러워 보였고 훨씬 젊어진 것 같았다.

인연으로 사부님을 뵙고 법을 얻어 용맹정진

글/ 마샤오(馬曉) 현재 싱가포르 거주

[명혜망 2004년 5월 7일] 최근, 많은 동수들이 사부님과 함께 했던 한 막 한 막의 정경들을 쓰고 있는데, 나는 읽을 때마다 감동해서 눈물을 흘린다. 대법이 널리 보급된 지도 이제 거의 12년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12년 동안 부처님의 호탕하신 은혜는 도처에 남아있다. 나는 사부님의 결백함에 또 하나의 증언을 함과 아울러 동수들과 서로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과거의 내 경험을 여기에서 말하고자 한다.

내가 사부님을 처음 뵈었던 것은 1994년 8월 20일부터 27일까지, 지린성 옌지(延吉) 시에서 열렸던 전수반 때였다. 그 당시, 나는 단지 속인 층차에서 수련을 막 시작했기 때문에, 내 머리에는 현대인들의 복잡한 관념들로 꽉 차 있었다. 나는 친구로부터 파룬궁이 정말로 좋다고 들었기 때문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창춘에서 옌지 시로 가는 기차를 탔다. 나는 옌지 기차역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이 학습반에 참가하기 위해서 아주 많은 사람이 중국 전역에서 온 것에 주목했고, 그리고 학습에 대한 그들의 열정에 놀랐던 것을 기억한다.

사부님의 학습반은 10회 강의로 나뉘어져 있었고 한 강의는 세 시간 가량 걸렸다. 나는 참가비로 50원(元)을 냈고 나중에 7원을 돌려받았다. 결국 10회 강의에 내가 낸 총 비용은 겨우 43원이었다. 매번 강의가 끝나면,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연공을 가르쳐주셨다. 우리가 새로 배운 연공을 연습하고 있으면, 사부님께서는 천천히 전체 체육관을 다니시면서 우리가 하고 있는 동작을 수정해 주셨다. 체육관이 커서 천명 이상이 있었지만 모두들 아주 조용했다. 나는 사부님의 부드러운 눈빛이 우리 모든 사람들의 몸을 주시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 학습이 시작되기 전, 많은 노수련생들은 체육관 밖에 나가 사부님께서 도착하시기를 기다렸다.

그때, 나는 이 시간이 얼마나 보람찬 것인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마지막 강의 중에, 나는 현지 조선족 동수들이 다채로운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모든 질문에 대답하신 후에, 사부님께서는 진지하게 연설을 하셨고, 그 다음 갑자기 일련의 수인을 하셨다. 바로 그 순간, 내 가슴은 마치 무엇인가 찌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눈이 따뜻해지면서 저절로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나는 왜 그렇게 감동을 받았는지 설명 할 수 없다. 내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제부터는 내게도 사부님이 계신다는 것이었다.

창춘으로 돌아와서, 나는 법공부를 했고 그곳에 사는 많은 노수련생들과 함께 법학습과 교류를 했다. 나는 아주 빨리 제고되었고 신체적인 변화 역시 매우 컸다. 1994년 11월, 천 명의 수련생들이 창춘 시에서 가진 교류회에서, 한 수련생은 8월 옌지 시에서 있었던 전수반에서 자신이 천목으로 사부님께서 우리들의 몸을 청리해 주시는 것을 관찰했고 파룬이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눈송이처럼 내려앉았다고 회고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부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혜택을 받았는지 깨닫게 되었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1994년 12월 31일, 다롄(大連)에서, 나는 두 번째로 사부님을 뵈었다. 이때, 나는 자신이 수련인임을 분명하게 알았다. 사부님께서 체육관에 나타나셨을 때, 6천 명이 넘는 군중들은 모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다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내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이 회의에서, 사부님께서는 세 시간이 넘게 강의를 하셨다. 이틀 전인 12월 29일에는 광저우 시에서 또 다른 학습반을 막 끝내시고 쉬지도 못하시고 곧바로 다롄으로 오셨던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1992년 5월 13일부터 1994년 12월 21일까지 각지 기공과학연구회의 초청으로, 전국 각지에서 모두 54회의 학습반을 개최하셨고 매 학습반은 대략 10일이 걸렸다. 연인원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참가했는데, 그 짧은 이 년 동안에, 매달 평균 한개 내지 두개의 학습반을 여신 셈이다. 사부님께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감당하셨는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1995년 이후, 중국에 있는 대다수 동수들의 말에 따르면 더 이상 사부님께서 직접 설법하시는 것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 때, 法輪大法(파룬따파)는 해외에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1998년 7월 26일, 사부님께서는 지린성 각 지역에서 온 책임자들과 창춘 지역 보도원 800여 명에게 설법을 하시고 질문에 해답해주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전에 사부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전에 한 번도 사부님을 뵌 적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도 거의 4년간 사부님을 뵙지 못했다. 당시 사부님께서 회의장에 나타나셨을 때, 밀물과도 같은 박수 소리가 일어났다. 이 박수소리에는 기복이나 변동이 없었고 간격도 없었다. 이것은 수련생들의 눈물, 행복, 놀라움 그리고 무한한 감격이 녹아들어간 것으로 박수는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이런 광경을 평생 본 적이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사업일꾼들에게 의자 위에 다른 하나를 얹어 포개라고 하셨다. 그런 다음 그 위에 앉으셔서 말씀하셨다,

“오늘 나는 주로 여러분들을 보기 위해서 왔다. 많은 사람들도 나를 보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 좀 높이 앉았다.”

이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매 사람의 매 하나의 일념(一念)까지도 알고 계셨다. 사부님께서 설법을 시작하시자 전체 마당이 커다란 자비로 둘러싸였다. 그 느낌은 뭐라 형용할 방법이 없었고 행복감과 평온함으로 충만했으며, 아무런 불순한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앉으신 의자들이 포개어진 모양으로 보아, 사부님께서는 뒤로 등을 기대기도 불가능하셨고, 강의 테이블이 아주 낮았기 때문에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실 수도 없었다. 그래서, 사부님께서는 테이블 위로 양팔을 뻗으셨다. 사부님께서는 분명 편안하지 않은 자세로 앉아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부님께서는 쉬지 않고 네 시간 넘게 강의를 하셨다.

수련생들의 질문 중 어떤 것은 정말로 좋지 않았다. 그것들은 진정한 보도원이 물을만한 질문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이런 질문을 듣고 조급해했지만 사부님께서는 도리어 인내심 있게 모두 다 해답해주셨다. 그 마당에서 모든 동수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보았고 또 모두들 마음속으로 탄복했다. 그 후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10분 휴식을 제안하셨다. 사부님께서 강단에서 내려오시자, 동수들은 사부님을 둘러싸고 질문을 더 했다. 사부님의 큰 키 앞에서, 우리는 모두 작은 아이들처럼 보였다. 둘러싸이신 채, 사부님은 아직도 미소를 지으시며 몇 개의 질문에 대답을 하셨다. 그런 다음 사부님께서는 강단으로 올라가셔서 다시 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질문에 대답하셨다. 전체 5시간 동안, 사부님은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으셨고, 단 일 분도 쉬지 않으셨다.

그 날 마지막에,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희망하건대 여러분들이 더욱 용맹정진(勇猛精進)하고…….“

내가 사부님을 뵈었을 때

[명혜망] 나는 농부다. 나는 이홍지 사부님의 파룬궁 강의에 참석할 만큼 그런 행운을 가지리라고는 꿈도 꾸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집은 후베이성에 있는 작은 외진 마을에 있고, 단 몇 년밖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나중에 나는 선불교를 수련하기 시작했는데, 나를 인도할만한 진정한 법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다만 가부좌를 하고 앉는 것뿐이었다. 18년 동안 수련한 후에, 내게 약간의 진보가 있음은 경험했으나, 여전히 나는 현명한 사부님의 출현을 열망하며 고대했다.

1994년 초반 어느 날, 한 친구가 이홍지 사부님께서 진정한 불법에 대한 강의를 해주시기 위해 광둥성 광저우시로 곧 오실 것이라고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또 이 강의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이것이 내가 기다리고 있던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 학습반 이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기회를 붙잡아야 했다. 주저하지 않고 나는 돈을 조금 갖고 갈아입을 옷 몇 가지를 싼 다음, 광저우시를 향해 떠났다

광저우 강의실에 들어가니, 이것이 마지막 강의여서인지,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안과 밖이 모두 매우 혼잡했고, 많은 사람이 복도에 서 있었다. 총 3000명이 넘는다고 믿어졌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참석했지만, 사부님의 강의 동안에는 전혀 잡음이 없었다. 나는 다만 사부님의 강의만을 들었는데, 사부님께서는 심오한 것을 단순한 용어로 해설하셨다. 사부님은 친절하고 틀이 없는, 마치 가뭄 뒤에 오는 달콤한 비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적셔주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강의 중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만약 그가 공을 쌓으려면 사람은 ‘眞, 善, 忍’의 법리에 따라서 그의 心性(씬씽)을 수련해야하고 그의 德(더)를 쌓아야한다고 분명하게 지적하신 것이었다. 강의를 하시는 동안, 나는 사부님께서 항상 수련생들과 학습반을 조직한 주최자들을 생각하고, 선량한 아버지처럼 모든 학생들과 다른 사람들을 대하시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강의실에 절대로 늦게 오시지 않으셨고, 임의로 강의 시간을 늘리지도 않으셨다. 부득이 강의 시간을 늘려야 할 때는, 주최자들에게 허락을 요청하셨다. 사부님께서는 학생들과 같은 음식을 잡수셨고, 학생들과 같은 종류의 방에 머무셨다. 나는 德(더)를 강조하는 법 강의에 참석했던 것을 아주 행운으로 여겼다. 사부님은 내가 찾던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때, 나는 법륜대법의 수련에로 나의 여정을 시작했다.

내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다른 한 가지 일이 있었다. 학습 마지막 날, 사부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서 포즈를 취하셨다. 나는 내가 도시에서 온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의 농부라는 것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열등감이 일어났고, 사진을 찍을 때 뒤로 물러나면서 맨 뒷줄에 섰다. 사부님께서 멀리서 나의 마음을 보셨던 것 같다. 사진 찍는 것이 끝나자, 사부님께서 내게로 오신 다음 마치 친절한 아버지처럼 나의 손을 굳게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당신이 시골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소. 법을 얻기 위해서, 당신은 먼 거리를 여행해 왔군요…” 나는 너무 기뻤기 때문에 다른 말씀은 모두 잊어버렸다. 사부님의 손은 따뜻했다. 내가 사부님의 손을 잡고 있을 때 나는 따뜻한 시냇물이 내 머리 꼭대기로부터 내 온 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이 세상이 아닌 저 너머로부터 그리고 수련의 매우 높은 층차에서 온 분을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사부님은 아주 경이로우신 분이다! 나는 18년간 선불교를 공부했지만 한 번도 이와 같은 감각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 경험이 있은 후에, 사부님과 대법에 있어서의 나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드디어 사부님을 발견한 것을 아주 행복해 했고 행운스러워 했다. 더욱이, 나는 사부님의 무한한 친절함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는 태도에 놀랐다.

사부님께서 나를 감동시켜주셨던 일들을 회상할 때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찍으셨던 사부님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 볼 때마다, 나는 눈물로 목이 멘다.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나의 견고한 믿음 때문에, 나는 사부님을 따랐고 모든 해 동안 있어왔던 갖은 어려움과 고난을 견디며 수련해 왔다.

사부님께서 톈진에서 법을 전하시던 나날

글/ 뉴질랜드 웰링턴 류이(劉毅)

[밍후이왕] 1994년 1월 17일 사부님께서 톈진 인민 강당에서 제1회 파룬궁(法輪功) 학습반을 개최하셨고, 당초 10회 수업계획을 9일에 마치셨습니다.(사부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용과 시간을 줄이려고 일요일에 2회 강의를 1회로 합치셨음) 9회 강의를 하시면서 설법하시고 공을 가르치셨는데, 마지막 강의는 질문에 해답해주셨습니다. 10회 수강료는 신수련생 50위안(한화 약 8천원) 노수련생 35위안(약 6천원)이었으므로, 신수련생의 1회 수강료는 5위안(약 8백원)에 불과 했습니다. 제가 1개월 전 바로 그 강당에서 상영한 영화 한 편(90분)을 관람했을 때 입장료가 10위안(약 1,60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사부님의 학습반 수강료가 얼마나 저렴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학습반에 참가해 사부님의 강의를 듣는 매일 매일이 감동의 나날이었습니다. 사부님의 설법을 들으면서, 마침내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관, 인생관마저 모두 바뀌게 되어 인생행로에 개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저는 반본귀진의 수련 길로 들어섰는데, 당시 학습반에서 있었던 네 가지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첫 번째, 사부님께서 일요일 정오 수강생들과 기념촬영을 하신 일입니다. 당시 저는 사부님께서 수강생들과 기념촬영을 하신다는 걸 모르고 있었으므로, 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수강생들이 강당 밖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7~8명, 20~30명씩 모여 줄을 서있으면, 사부님께서 오셔서 함께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그렇게 천여 명의 수강생들이 각각 그룹을 이루어 사부님과 기념촬영을 했는데, 사부님께서는 조금도 번거로운 내색 없이 내내 자비롭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촬영에 임해주셨습니다. 그때 늦게 도착한 저도 사부님과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찍지 못했고, 다만 사부님 말씀으로 위안을 했습니다. “나의 법신이 날마다 당신을 따라다닌다.”는 법이 떠올라 기념촬영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사부님과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조금의 아쉬움이 남습니다.

두 번째, 마지막 날 설법을 마치신 사부님께서 대수인을 하셨을 때였는데, 참으로 묘해서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던 일입니다.

세 번째, 마지막 날 사부님께서 설법을 마치셨을 때, 한 수련생이 단상에 올라 사부님께 감사깃발을 증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동북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병원에서 암이라는 사형판결을 내렸으나, 타인의 소개로 파룬궁(法輪功)을 찾아왔다고 했으며, 이번 톈진 학습반 참가는 두 번째라고 하면서 그들 온 가족이 함께 단상에 올라 사부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는 단상에 오르자마자 흥분된 어조로 “다 나았어요, 다 나았어요, 전부 다 나았어요!” 하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단상 위를 뛰면서 한 바퀴 돌았습니다. 모든 수강생들이 뜨겁게 박수를 쳤습니다. 소개를 마친 그가 사부님께 감사깃발을 올린 후 사부님과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단상 아래에 있던 모든 수련생들이 다시 한 번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특히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학습반이 끝나기 전 두 번째 날이었습니다. 신통가지법을 배울 때, 저의 좌석은 2층이었고, 옆이 빈자리라 편하게 가부좌를 할 수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공을 배우다가 눈이 떠졌을 때, 바로 1미터 앞에 미소를 지으신 사부님께서 저를 보고 계셨습니다. 자비롭고 평화로운 사부님의 그 모습은 정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제가 눈을 뜬 것을 보시고, 웃으시며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지금, 웃으시던 그때의 사부님 모습을 떠올리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오랜 기간 수련했어도 자비롭게 구도해주신 사부님의 뜻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단락의 글을 쓰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직 더욱 정진하여 사부님께서 당부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만이 그나마 사부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부님의 톈진 제2회 설법반에 대한 회상

글/ 뉴질랜드 웰링턴 류이(劉毅)

[밍후이왕] 1994년 3월 14일 사부님께서 톈진에서 공을 전수하고 설법하는 제2회 학습반을 개최하셨다. 이번은 천백명이 들어갈 수 있는 톈진 바이극장이었다. 사부님을 따라 온 수련생의 말에 따르면 그해 1년은 이미 배치가 끝났으나 톈진의 거듭되는 요청으로 사부님께서 시간을 짜내 톈진에서 이번 학습반을 개최하게 됐다고 했다.

사부님의 두 번째 공 전수반이어서 사람들은 대법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있어 수강 신청자가 많았다. 게다가 베이징의 수련생 몇 백 명도 참가해 톈진의 많은 사람이 입장권을 구매할 수 없어 입장할 수 없었다. 개강 첫날 수많은 사람이 극장 밖에서 대기하며 떠나지 않았다. 제작진은 이 사실을 사부님께 말씀드렸고 사부님께서는 시간을 내어 오전에 입장권을 구매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단독으로 한 강의를 더 추가하셨다. 설법이 끝나 수강생들이 문을 나서면서 바로 사부님께서 옆문으로 나오시는 것을 보고 단번에 사부님께 몰려가 책에 사인을 받으려 했다. 인원이 많고 질서가 없어서 톈진의 책임자가 “사부님께서 힘드십니다. 저녁에 또 설법하셔야 해서 사부님께 휴식시간을 드립시다.”라고 권고했으나 수강생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사부님께서 사람들에게 줄을 서라고 하셨다. 그리고 수강생들에게 사인을 해주셨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봤던 나는 직접 사부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었다.

이번 톈진 설법기간에 사부님께서는 톈진 인민라디오방송국의 요청으로 아침 시간대의 핫라인전화서비스에서 파룬궁(法輪功)을 소개하고 청중의 질문에 해답해주셨는데 매우 좋은 효과를 거뒀다.

사부님의 설법기간에 소위 한 기공사도 소위 공 전수반을 열었는데 한 강의 당 2시간 수강료가 35위안(한화 약 6천원)이었다. 하지만 사부님의 한 강의 당 수강료는 5위안(약 800원)이었으며 비교했을 때 사부님의 수강료가 매우 저렴했음을 알 수 있다.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10/5/856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