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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뜸 앞에서 자신을 찾자

【명혜망 2007년 5월 11일】 최근 한 단락 시간에 해외 대법제자가 사이트에 한편의 신화(神話)소설을 올렸다. 이 일이 일부 대법제자들 중에서, 특히 적지 않은 대륙대법제자들 중에서 상당한 파동을 일으켰다. 일부 수련생들은 소설을 읽은 후 격동되어 도처에 이 소설을 “소설로 볼 수만은 없다.”고 말하면서 마음과 시간을 불필요한 곳에 쓰고 있다. 일부 자료점에서는 대량으로 이 소설을 인쇄하여 수련생 중에 전했고 이 소설로 정상적인 수련교류를 대체했다. 동시에 또 일부 대법제자들은 이지적이며 냉정하게 문예작품을 대해야 하며 수련을 엄숙하게 대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앞에 언급한 사람들은 흥분 속에서 이런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또 어떤 수련생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사이트에 올라갔음에도 사부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신 것을 보면 틀림없이 사부님께서 올리라고 하신 것이라는 등의 추측을 했다. 소설이 발표된 그 날부터 명혜 편집부에는 매일 이와 관련된 논쟁과 의론을 받아왔고 온 편지 중 어떤 것은 독후감을 발표했고 어떤 것은 엄하게 비평했으며 어떤 것은 열심히 널리 보급했고 어떤 것은 깊은 우려를 표명했기에 편집부에서는 일률적으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모두 마땅히 법을 실증하기 위해 소설 창작 등 문학형식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소설은 곧 소설이며 허구적인 성분이 있기에 역사가 아니며 법은 더욱 아니다. 정법의 과정과 진상은 결코 작디작은 수련 중의 사람이 일부 소설이나 혹은 개인이 천목으로 본 것으로 포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법제자는 단지 대법을 틀어쥐고 수련해야만 비로소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다.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림에 있어, 마음을 써서 세인의 매듭을 겨냥해 알려야 하며 많은 시간을 들여가며 자신의 신기한 느낌과 다른 사람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땅히 시간을 다그쳐 사람을 구도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세인들의 마음속 매듭을 풀어줄 수 있을까에 마음을 많이 써서 교류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대법은 좋다는 것을 알리고, 이번 박해의 사악함을 알리며, 매우 제한된 시간 내에 보다 많은 세인들이 정법 중에서 위치를 바로 잡게 하고 이를 통해 구원 받게 해야 한다.

사실 한 대법제자로서, 자신에게 강렬한 환희심이 나올 때는 환희심 또는 그 어떤 강렬한 정서를 확대할 수 없으며 그것들이 자신의 사상과 언행을 좌우지하게 할 수는 더욱 없다. 자신의 마음이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을 때면 마땅히 즉각 깨어나 곧바로 안을 향해 찾아야 하며, 자신에게 도대체 어떤 집착이 있기에 비로소 이런 마음의 들뜸을 초래했는지 보아야 한다. 아울러 시기(時機)를 틀어쥐고 집착을 제거해야 하다. 이 역시 수련의 기본기가 아닌가.

그 외, 이번에 사람 마음이 들뜬 가운데 일부 수련생들은 이 소설이 자신의 수련에 계발(啓發)이 있다고 여겨 흥분했고, 일부는 줄곧 다른 공간을 볼 수 있는 동수를 숭배했으며, 일부는 다른 사람이 수련과정 중에서 본 다른 공간의 모습을 절대적인 진상과 역사로 간주했고, 일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집착했으며, 일부는 사람을 따르고 감각을 따르는 것이 표현되어 나왔다. 이 때문에 열정과 마음을 이 소설 속에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99년 7.20 이후 대법제자들 중에서 사람 마음이 들떠 조성된 손실이 이미 적지 않다. 어떤 수련생들은 끊임없이 이런 교란, 저런 교란을 받았음에도 도리어 시종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으로 자신의 증상을 찾고 사람 마음을 내려놓을 줄 모른다. 한 대법제자로서 만약 마음이 정말로 수련 속에 있다면 이전의 수련에서 부족한 것을 보는 동시에 마땅히 즉각 자신을 반성해보아야 한다. 왜 자신은 법을 얻은 지 오래되었고 법공부를 다년간 했음에도 법리와 수련에 대한 이해가 도리어 늘 원래의 표면적이며 감성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가? 왜 어떤 행위에서 종종 속인처럼 흐르는가? 왜 장기간 돌파할 수 없는가? 늘 다른 사람이 다시 무슨 소설을 발표하기를 기다릴 순 없지 않는가? 만약 법공부가 자신을 정진할 수 없게 한다면 이는 이성적으로 법에서 법을 인식함을 해내지 못했으며, 더욱이 착실하고 착실하게 법공부를 하고 대법의 요구에 따라 수련해야만 비로소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수련에서 돌파가 있고, 보다 높은 법리를 이해하자면 법 학습이야말로 비로소 근본이다. 이 소설을 본 후 관계를 바로 잡지 못한 모든 대법제자들에게 건의하는바, 모두 안을 향해 자신을 찾아보고 자신이 법을 얻은 지 여러 해가 되었음에도 법공부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지, 정말로 마음을 내려놓고 법공부를 할 수 있는지, 진정으로 수련이 무엇이고 어떻게 수련하는지 알고 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끝으로 여러분들과 사부님의 일깨움을 다시 복습하도록 하자.
“대법제자들은 안정적으로 세 가지 일을 잘 해야 하며, 사람 마음이 들뜨지 말아야 한다. 대법제자들이 신(神)의 정념으로 최후의 길을 잘 걸어가기를 희망한다.”(『삼계 내에서 정법을 교란하는 데 참여한 일체 난잡한 신들을 전면적으로 해체시키자』)

명혜 편집부
2007년 5월 10일

문장발표 : 2007년 5월 11일

문장분류 : 명혜 편집부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7/5/11/154521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