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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 속 정법의 길 곳곳마다 사부님의 가호

글/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2009년 11월 16일】

존경하시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동수님들 안녕하십니까!

나는 1997년에 법을 얻은 제자로 만12년 동안 수련의 길을 걸으며 사부님의 점화와 가호 아래 대법제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고 대법의 위력을 감수했다. 이 자리를 빌어 최근 몇 년간 수련 사적과 경력을 써내어 동수들과 교류하여 제고하려 한다.

미로에서 몸부림치다 사부님을 만나 제도되는 행운

법을 얻기 전에 나는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을 만큼 몸이 허하고 병이 많아 늘 누워있어야 했다. 남편은 나를 병수발 하느라 일을 할 수 없어서 생활은 늘 빈곤했고, 나는 또 여우, 족제비, 뱀 등의 부체에게 통제당해 자신을 콘트롤 할 수 없었다. 늘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 이웃을 혼란스럽게 했고, 닭과 개도 편안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이웃 사람들은 나를 정신병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을 만났지만 모두 치료하지 못했다.

1997년 다행이 법을 얻어 파룬궁 수련행렬에 들어서면서 사부님께서는 나의 몸을 정화시켜주셨고 모든 병을 제거하고 부체도 청리해 주셨다. 건강을 되찾은 나는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남편도 바깥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서히 생활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사부님께서 구도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을 금할 수 없으며, 사부님의 말씀을 잘 듣는 진수제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생사를 내려놓고 북경에서 호법하니 시시각각 사부님의 가호에 감은

1999년 “7.20” 후 중공이 매체를 조종해 사부님과 대법제자들을 비방하는 방송을 들을 때마다 나는 눈물이 마구 솟구쳤다. 그래서 북경에 다시 들어가 사부님과 대법을 위해 공정한 도리를 찾으려고 생각했다.(1999년 7월 20일 북경에 들어가 호법) 그 당시 어린 딸은 겨우 7살이었고 또 구정도 다가 왔다. 나는 사부님의 법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으니, 깡그리 버리는 것만이 누락이 없는 더욱 높은 법리(法理)이다. “(『정진요지』「원용」)를 생각했다. 그때 진정 세간의 일체 집착을 내려놓았으며 생사를 내려놓고 북경에 들어가 대법을 실증할 생각만 했다.

나는 2000년 12월 28일 모친과 두 번째로 북경에 가서 대법을 실증했다. 비록 가는 길에 검열이 심했지만 사부님의 가호로 우리는 순조롭게 북경에 도착했다.

12월 30일 저녁 우리는 천안문 광장에 가서 연공도 못해 본 채 북경 경찰에 납치되어 우리 지역으로 끌려왔다. 처음 감방에 갇혀 심한 폭행을 당했을 때 내가 울었더니 동수는 왜 울었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심하게 맞았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고 피부색마저 변하지 않았는데, 이는 사부님께서 나를 가호하시어 나를 대신해 감당하시었다. 나는 사부님의 은혜를 생각해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사부님께서 우리 옆에서 시시각각 가호하고 계심을 체험 했다. 그 후 우리 지역의 관리들이 어떻게 때리든 나는 조금도 아픈 감이 없었다.

불법수감을 제지하기 위해 나는 단식을 하면서 무조건 집에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단식한 지 일주일이 되어도 그것들은 여전히 나를 전화시키기 위해 강경하게 쪼그러 앉기를 시켰지만 나는 도리어 앉을수록 편안했다. 그들은 나에게 계속 연공을 하겠는지 묻기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심하게 폭행을 가해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다음 날 관리와 단독면담을 했다. 나는 또 폭행당할 것 같아서 아예 미리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때 법리에 대한 인식이 개인수련에 있었으므로 맞으면 업을 제거한다고 여겼다.) 그랬더니 그는 도리어 “땅에 앉지 말고 의자에 앉으라.”고 하면서 집에 가면 또 연공할 것인지 물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나에게 참말을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거짓말을 하라는 것인가?”고 물었다. 그는 당연히 참말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러면 집에 돌아가서 또 연공하겠다! 고 말하자 그는 나에게 연공하지 않는다고 말해라고 했다. 나는 “그러면 당신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디에 가든 연공을 하겠다.”고 했더니 그는 화가 나서 발로 나를 세 번 차고는 ” 집에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자료를 받아 전달하며 가정환경을 개선

세뇌반에서 집에 돌아 온 후부터 남편은 두려움으로 나를 문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내가 법공부하는 것도 막았으며 우리 집에 놀러오는 사람들에게 진상자료를 주자 매번 그들이 돌아가면 화를 내고 때리지 않으면 욕을 했다. 두 달간 남편은 일하러 가지 않고 집에서 오직 나만 지키며 때리고 욕을 해 거의 매일같이 소란을 피웠다.

남편이 무리하게 폭행하며 욕을 하면 나는 기본상 매우 탄연했으나 억울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사부님의 설법을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개운해 지곤 했다.

2001년 겨울 우리 지역을 비롯해 인근 지역에서도 진상자료, 『명혜주간』, 사부님의 경문을 받지 못했다. 한 동수가 나를 찾아와 자료를 받아 돌리는 걸 책임져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당연히 승낙했다. 당시 환경이 가혹했기 때문에 저녁에 자전거를 타고 자료를 받아서 동수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곤 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부주의하는 틈을 타 자료를 받아 돌리곤 했으나, 후에 남편은 집에 진상자료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어디에서 누가 가져왔는지 물었다. 내가 가져왔다고 하자 남편은 두려움으로 나의 외출을 막았다. 한 번은 남편의 눈을 피해 자료를 받아 들어서자 남편은 “어디에 갔는지?” 묻다가 내 손에 진상자료가 있는 것을 보더니 부들부들 떨면서 나의 목덜미를 잡고 호되게 때렸다. 후에도 내가 자료를 받아 돌리는 것만 발견하면 늘 땅에 엎어놓고 발로 차며 폭행을 가했다. 그렇게 하고도 성에 차지 않아 “이렇게 해서 어찌 살겠나? 살지 말자!”고 했다. 어떤 때에는 나를 문밖에 쫓아 버렸다. 하루 저녁에는 남편이 대문을 잠가버려 나는 담을 뛰어넘어 나가서 자료를 받아왔다. 돌아오자 남편은 이미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들어서자마자 모질게 구타했다.

그때는 정말 칼끝에서 사는 것처럼 힘겨웠으나 얼마나 힘들어도 나는 동요하지 않고 남편에게 타협하지 않았으며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그렇게 때려도 한결같이 그에게 밥을 해주고 살뜰하게 보살폈으며 수련인의 엄격한 표준으로 자비하고 상화하게 그를 대했다.

그렇게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하게 되면서 나는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가 왜 끝없이 나를 때리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갑자기 나는 내가 자료를 받아 돌리는 것은 정정당당한 일이고 위대한 일인데 왜 광명정대하게 하지 않는가? 라는 걸 깨달았다. 그 후 받아온 자료를 정면에 놓고 다시는 감추지 않았다. 남편을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화가 나서 “당신은 그래도 고치지 않는가? 또 가져 왔구나.”고 말했다. 나는 남편을 보고 웃으며 “당신이 어찌 나를 변화시킬 수 있겠어요? 사부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어 비로소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더라면 아팠던 그 세월을 살아 갈 수 있었겠는가? 당신은 그걸 잊었나요?” 라고 말했다. 남편은 나의 말에 “나는 당신을 관할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관할하지 못하겠다는 게 옳은 것이죠. 살림을 사는 것은 당신 말을 듣고, 정법하고 중생을 구하는 일은 내 말을 들으면 되요. 당신은 나를 관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 나를 지지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후에 남편은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 모두 나의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게 나를 도와주었다.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돌리며 정념으로 중생을 구도

2001년 정월, 향 정부에서 20명 남짓의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와서 나를 다시 납치하려 했다. 당시 남편이 집에 있었는데 그들은 남편이 결사적으로 그들을 걸고 넘어질까봐 두려워 감히 담을 뛰어 들어오지 못했다. 당시 나의 정념도 매우 충족하여 속으로 아주 탄연하고 당당하게 도리를 말했다. 나의 남편은 뜰 안에 있고 그들은 뜰 밖에 있었는데, 이 정사 대결은 새벽 6시부터 오전 10시까지 지속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갔다.

박해를 피해 우리 집은 어느 성시에 가서 세를 얻었다. 남편은 낮에 품팔이를 하고 저녁이면 나와 함께 자료를 배포했다. 자료를 돌림에 따라 두려워하는 마음은 갈수록 적어지고 정념은 갈수록 족했다. 어떤 사람은 자료를 받고 “감사해요. 감사해요!”라고 직접 말했다. 당시에 우려하는 마음없이 오직 사람구하는 것만 생각하면서 하루에 이삼백 부씩 진상자료를 돌렸다.

당시 동수들과 연계하지 못해 고향에 가서 한 번에 큰 박스 하나씩 진상자료를 가져왔다. 가져 온 자료는 일반 적으로 며칠이면 다 나가버려 자료가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붉은 페인트로 사처에다 대법진상 표어를 섰다. 후에 아이의 선생님에게 진상을 했더니 자신의 여동생도 파룬궁 수련을 한다고 했다. 나는 진상 CD를 두 장 주면서 하나는 그의 여동생에게 주라고 하면서 “이것은 내가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니 만약 그에게 있으면 다시 나에게 돌려 달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그 동수와 연계하려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동수는 한동안 지나도록 나를 찾아오지 않았는데 하루는 그 동수가 오도록 갑자기 발정념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과 그날 저녁에 그 동수가 나를 찾아왔고 나는 발정념의 위력을 체험했다. 그 후부터 이 동수가 나에게 자료를 대량으로 공급해 주어서 자료를 돌릴 수 있었다.

비록 생소한 지방이라 사람들이 낯설었지만 내가 세인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을 국한하지 못했다. 처음 진상을 알릴 때 나느 선심이 부족해 어떤 때는 세인의 태도에 따라 마음이 움직였다. 한 번은 진상을 알리는데 한 사람이 내가 말한 진상에 반박을 해서 그와 쟁론을 벌였더니 내 목소리가 떨리고 소리가 높아지면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집에 가서 매우 후회되었고 자비심을 수련하지 못해 중생으로 하여금 진상을 알도록 하지 못했다고 나를 원망했다. 그 후 진상을 알릴 때는 늘 나 자신에게 반드시 상화하고 자비해야 한다고 깨우쳤다. 차츰 나의 심태는 갈수록 안정되면서 진상을 알리는 효과도 갈수록 좋았으며, 만난 세인들은 나의 진상이야기를 듣기 원했고 내가 주는 진상자료도 잘 접수했다. 진정 사부님께서 이야기하신 “자비는 안 좋은 일체를 용해시켜 천지에 봄이 오게 하고 정념은 세상 사람을 구할 수 있도다.”는 것을 체험했다.

나는 진상을 알릴 때 분별심 없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알릴 기회만 있으면 알렸다. 한 번은 고모의 사촌동생이 그 지역 성시 모지역의 경찰서 소장이라는 말은 들고는 고향에 돌아가 고모에게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연락해서 만났다. 처음 그에게 진상을 알렸을 때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 상관하지 않고 줄곧 자비로 그를 구도해야 한다는 심태로서 그에게 대법의 진상을 알렸다. 그렇게 그를 구도하기 위해 나는 또 수차례 그를 찾아가 진상을 알리면서 또 대법제자를 박해하지 말라고 권했다.

후에 고향에 갔더니 고모 생일에 그가 올 것 같은 생각에 고모 집에 가서 알아 봤더니, 고모는 그가 이미 돈을 부치면서 집에는 오지 못한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발정념으로 그가 반드시 고향으로 오라고 했다. 고모 생일날 고모 집으로 갔더니 문에 들어서자 고모의 동생이 지금 오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다시 진상을 알리니 그는 상을 치면서 화를 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그를 꼭 구하겠다는 생각에 그의 반응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상화한 심태로 그에게 두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드디어 진상을 이해하게 되어 온 가족에게 삼퇴할 것을 권했다. 나는 그에게 축하해 주면서 삼퇴한 후 상대적으로 복보가 올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는 삼퇴 성명을 다 쓰고 볼펜을 던지면서 “내가 수년간 관직에 있었지만 너에게 설복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너에게 졌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이치를 가지고 있냐? “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나에게 졌다고 말씀하시지 마세요. 대법이 나에게 능력을 부여했고 대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한 마디도 할 줄 모를거예요” 삼퇴 후 그의 아내는 심근염 치료를 하지 않고도 스스로 나았으며 그는 또 경찰국 국장으로 승진해 복보가 이어졌다.

차가운 혹서에도 중생을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노고를 마다하지 않아

남편이 외지에서 날품을 팔았기 때문에 오토바이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료를 주고받기에 편리하기 위해 오토바이 운전을 배우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너무 커서 움직이기 힘든데 어떻게 타는가? 하지만 나는 대법은 하지 못할 게 없으며 나는 대법제자이기에 꼭 배워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딸이 나와 함께 오토바이를 길목에 밀어다 놓으면 나는 오후 내내 오토바이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곧장 배우게 되어 큰 도움이 되었다.

2002년 가을 우리 현성의 큰 자료점이 파괴되어 자료공급처가 끊겼다. 한 동수가 타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서 자료를 들고 와서 건네주었다. 나는 온 몸이 땀투성이인 그의 모습을 보고는 내가 오토바이로 자료를 가져 오겠다고 했더니 동수는 매우 기뻐하면서 나와 함께 이웃 현성에서 자료를 받아 온 뒤 이후에는 내가 담당하기로 했다. 그때 나는 갓 오토바이를 배웠기 때문에 돌아올 때 2개의 큰박스에 담긴 자료를 남동수와 함께 싣고 왔는데, 큰 길에서 비틀거리며 밀고, 타고 하면서 고생스럽게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보니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었다.

한 번은 이웃 현성에서 자료를 가지고 오는데, 백리 넘는 산을 넘고 령을 지나는 길이 험준했으며, 칠흑같은 밤이라 다섯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구빈돌이에 가서 나는 길을 잃어 어떻게 가는가? 사람도 없고 차량도 없었으며 길을 물으려 해도 사람마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오토바이 불빛으로 사처를 비추어 내가 어디에 이르렀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정말 걱정이 되어 어떻게 하지? 갑자기 생각났다. 사부님의 가호아래서 내가 중생을 구도하는 가장 바른 일을 하는데 길을 잘못 갈 수 없다. 하여튼 가보자. 산을 몇 개 넘고 구빈돌이를 몇 개 돌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본 현성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길을 알게 되어 한숨 돌리고는 돌에 앉아 발정념을 하며 휴식을 취했더니 감각이 너무 좋았다. 다리도 없고 팔도 없는 감각에 마치 온 몸은 날아갈듯 가벼운 상태에서 다만 내가 발정념만 하고 있었다.

그때 사악의 요소가 너무 많고 박해가 아직 매우 심했으므로 자료점에 가려면 반드시 밤에 가야 했는데, 자료를 가지고 백 여리 길을 돌아 집에 오면 아주 늦었다. 겨울에 집에 돌아오면 손발이 얼어 잘 쓸 수 없었고 손발을 녹이고 나면 아프고 가려웠지만 종래로 원망한적이 없었다. 길에서 법을 외우거나 혹은 대법제자가 창작한 가요를 부르면 특히 마음이 편안해 졌다.

한번은 『전법륜』을 외우다가 “내 생각에, 내가 공을 전하고 설법하는 것을 직접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장래에 당신은 알게 될 텐데, 당신은 이 시간이 매우 보람찼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연분(緣份)을 중시하는데, 여러분이 여기에 앉아있는 것도 연분이다.”는 단락을 읽을 때 나는 눈물이 났다. 내가 이렇게 큰 연분으로 대법을 얻을 수 있고 중생을 구도할 수 있으며 사부님을 도운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행복했다.

곳곳에 핀 꽃 중의 한 떨기 꽃

2004년 이웃 현성에 가서 자료를 가져오니까 길이 멀고 험해 내 스스로 자료점을 해야겠다는 생각의 싹이 텄다. 2005년 가을 나는 수련하지 않는 남편과 상의했더니 남편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남편을 품팔이 보내고 내가 자료를 하자고 속으로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품팔이하러 떠났다. 나는 급히 동수에게 컴퓨터와 프린터를 가져오라고 했다. 착실하게 수련하는 과정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나의 신변에 계시다는 것을 심심히 체험했으며, 정법 중에서 나는 일하자는 소망만 있으면 사부님께서는 늘 나에게 일체를 잘 안배 해 주셨고 나의 앞길을 다듬어 주셨다.

내가 처음 프린터와 컴퓨터를 보았을 때 나는 격동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뻐서 언어로 표한할 수 없었으며 그것들은 나의 생명의 일부분이고 그것들을 나의 생명처럼 아끼겠다고 생각했다. 아쉽게 내가 있는 곳은 무심한 산골이어서 신호가 없어 밍후이왕에 접속되지 않았다. 나는 부득이 기술을 가르치는 동수와 저녁에 컴퓨터를 메고 나의 친정집에 가서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을 배우고 깊은 밤 12시 발정념을 하고 집에 돌아갔으며 낮에 집에서 프린트 하는 것을 배웠다. 기술을 배울 때 나는 매개 세포마다 행복으로 도취 되었다. 그렇게 한 주일 배우고 나니 나는 기본상 인터넷에 접속하고 프린트하는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비록 시골에 사는 가정주부고 초등2학년 교육 정도밖에 받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지만 나는 무슨 일을 함에 걱정하지 않았고 힘들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전법륜』) 나는 컴퓨터를 하나도 몰랐었지만 동수의 꼼꼼한 가르침으로 차츰 각종 진상자료를 프린트하고, 호신부를 만들고, 스티커, CD를 굽고, 『9평』을 찍고, 『전법륜』을 만들고, 병음을 배우고, 소책자를 만들고, 또 성명을 발표하고 투고하는 것을 배웠다.

자료점의 운행 과정은 문제가 발생하면 사부님께서 가호해 주시어, 나는 기본적으로 자발적으로 자신의 길을 더듬어 걸어 왔다. 기억하건대 처음 프린트를 배울 때 처음 컴퓨터에서 잉크를 바꾸라는 말이 떴다. 나는 늘 동수한테(기수를 배워 주는 동수는 나의 집과 200리 떨어짐) 의지할 수 없었으며 반드시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현성에 가서 잉크를 찾았다. 현성에서 하루를 돌다가 마지막 한 집을 찾아 그들에게 20원의 보증금을 내고 다른 곳에서 잉크를 가져오니 다음날 오라는 것이었다. 후에 기술을 가르치는 동수는 나에게 처리 방법을 알려 주었다.

필요한 용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현성에 가서 샀다. 처음에는 어디에 가서 사는지 몰라 프린트 매장에 가서 물었는데, 여러 집에 가서 물어서야 비로소 한 집을 찾게 되어 가격도 비교적 합당했다.

2005년 남편이 구정을 쉬려고 집으로 왔는데, 기술을 배워주는 동수도 우리 집에 있었다. 남편은 내가 자료점을 건립한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당신은 동수가 왔는데도 가서 반찬을 사지 않는가.”고 원망하면서 스스로 반찬거리를 사다가 부엌에서 반찬을 한상 가득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동수는 그런 남편을 보고는 “수련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대법 일을 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 고 칭찬했다. 후에 남편은 적지 않은 동수들을 접촉하고 “당신들은 정말 좋다. 정말 경계가 있어 나는 탄복한다.”고 말했다.

당시 우리 지역에서 사악을 폭로하는 자료는 동수가 너무 바빠서인지, 우리 향진의 사악을 폭로하는 일부 자료가 밍후이왕에 발표되지 않았다. 나는 조급해져 우리향진의 박해 자료를 정리해 인터넷에 접속해 알렸다. 내가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고 하지 못할하는 것은 중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에게 정리하게 했다.

향진 박해 자료를 알림에 따라 나는 또 이런 자료들을 소책자로 만들어 현지에서 돌리려고 기술을 책임진 동수에게 물었다. 동수는 “내가 하나 조판해 볼 것이니 보라고 했다.”그는 기초적인 것을 조작하며 한번 시범했다. 남편도 따라서 보더니 “너무 시끄러워 이것은 당신이 배워내지 못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대법은 하지 못할 것이 없다. 나는 대법제자이다. 무엇이든 나를 막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후에 나는 『밍후이 주간』에서 동수가 적은, 어떻게 소책자를 조판하는가에 대한 기술교류문장을 보고 주간을 가지고 그곳의 설명대로 조판을 해보느라고, 컴퓨터에 종일 엎드려 있으며 밥 먹는 것조차 잊었다. 주간의 설명에 따라 클릭했는데 어떻게 해도 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었는데 너무 배가 고파 급히 잡채 볶음을 만들려고 고기를 솥에 넣고 끓이며 또 컴퓨터에 엎드려 소책자를 조판했다. 갑자기 타는 냄새가 났다. 나는 어느 집에서 반찬을 볶다가 타는 것으로 여겼다. 냄새는 갈수록 심했다. 나는 방에서 나와 어디에서 오는 냄새인가? 보려고 했는데 문에 나서자 깜짝 놀랐다. 부엌에서 흰 연기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는데 들어가 보니 솥은 달아 빨갛게 되었고 고기는 타 없어졌다. 나는 솥을 버릴 수밖에 없어 다른 솥에다 밀국수를 끓여 먹고 계속 조판하는 것을 탐색했다. 뒷날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익힐 수 있었다.

제1회 조판한 소책자는 책면이 어지럽고 틀린 글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다니는 딸에게 반복 수개하여 우리 본향의 제1회 소책자가 드디어 출판되어 배포했다. 동수들은 우리 본향의 소책자를 보고 모두 매우 놀랐고 기뻐했으며 한 동수는 “이것은 우리 본향의 소책자인데 어디에서 왔는가?” 고 물었다. 다른 한 동수는 “신이 한 일이다.”고 말했다.

현지의 사악을 폭로한 자료는 현지 사악을 노출시키는데 매우 좋은 효과를 보았는데, 우리 지역의 일은 이곳 주민들 모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동수들을 이끌어 현지 사악을 폭로하고 대법을 실증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투입하게 했다. 1년 남짓 되는 기간에 우리 본향의 동수들이 박해받은 사실을 기본적으로 전부 알렸고, 이런 자료들을 소책자로 만들어 현지에다 돌려 현지 중생을 구도하는 데 좋은 효과를 했다.

나는 세 개 향진에서 수요하는 진상자료, 주간, 사부님의 경문, 《9평》과 CD를 굽기에 작업량이 상당히 컸다. 남편은 외지에서 품팔이를 하고 딸은 학교에 다니므로 기본적으로 밭일을 도맡았지만 나는 전부의 정력을 중생을 구도하는데 투입했다. 그때 나는 늘 분망하다 보니 밥 먹는 것마저 잊었으며 특히 구정 때 축년카드, 달력, 호신부, 대량의 진상 자료를 준비해야 하는데 마침 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방학을 해 우리 가족모두 함께 작업을 했는데, 남편도 프린트 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수련을 반대하던 남편이 대법을 지지하게 되면서 성격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나의 남편의 전변은 사부님의 자비한 가호와 떼어 놓을 수 없는바, 지금 남편의 몸은 갈수록 좋아지고 일은 뜻대로 되었다. 금용위기의 충격으로 회사에서 인원을 얼마 남기지 않았지만 남편은 남았고 급여도 매우 높이 받았다. 남편은 대법이 우리 집에 가져다준 행운을 맛보았으므로 내가 중생을 구도하는 일을 더욱 지지했다.

프린트한 자료를 본향의 것은 모친님이 돌리고 기타 향진의 것은 내가 했다. 거리가 먼 향진은 우리 집과 70여리가 되었지만 산을 넘고 령을 넘어 울퉁불퉁 길이 구불구불하여 걷기 힘들어도 비바람 속에서 3년을 견지했다. 2008년 다른 향진에서도 자신들의 자료점이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나에게 너무 많은 부담이 지워져 법공부를 하지 못할 때가 많아 동수들도 자료 점 일을 분담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동수들이 속속 자료 점을 건립할 것을 제출했고 나는 그들에게 기술을 배워 주었다.

사부님의 가호 하에 바바람 속에서도 12년을 걸어 왔다. 나는 다행히 만고의 기연 중 한 대법제자가 되어 반본귀진하는 수련의 길에서, 호탕한 불은에 젖어 오직 정진 또 정진하는 것으로 사부님의 자비한 구도에 보답할 것이다.

(밍후이왕 제6회 중국대륙대법제자 수련심득 교류회)

문장발표: 2009년 11월 16일

문장분류: 정법수련 >대륙인터넷법회글 >6회

문장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9/11/16/2120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