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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간 둥글게 그리지 못한 ‘집’

파룬궁수련생 위밍후이 일가의 이야기

글/ 룽룽(容容)

[밍후이왕] 여자아이의 이름은 위밍후이(於銘慧)다. 검은 머리카락에 특별한 독특한 표정을 짓고 있다. 눈은 살짝 아래를 응시하며 표정은 부드럽고, 긴 눈까풀은 평온하고 조용하다. 그녀의 배후에는 오히려 아주 평범치 않은 가정사가 있는데 사람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二零一三年六月,于铭慧手里拿着营救父亲的明信片站在“真善忍国际美展”画作“孤儿泪”前。
2013년 6월 위밍후이는 아버지를 구출하는 카드를 손에 들고 ‘진선인 국제미술전’ 작품 ‘고아의 눈물’ 앞에 서 있다.

1. 소년시기의 악몽

22년 전 위밍후이의 집은 바로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단장(牡丹江)시 시하이린(西海林) 철로농장 38동 아파트에 있었다. 1999년 7월 20일 문이 과격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시각부터 위밍후이의 마음속에서 집에 대한 의미는 완전히 변했다.

그 전의 집은 어떠했는가? 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커튼이 쳐진 곳에 책상, 탁자, 작은 의자가 비치되어 있었는데, 그 작은 공간은 위밍후이가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그녀만의 장소였다. 아버지 위중하이(于宗海)는 총명하고 유머가 있는 예술가 기질이 풍부한 화가였고, 딸애를 보기만 해도 흥이 나는 아버지였다. “애야” 아버지는 밍후이를 ‘애’라고 불렀다. 늘 재미있는 것들을 만들어주었고, 잠깐 이야기를 해주다가 또 그림 그리기를 가르쳤다. 식사할 때는 젓가락으로 음악 지휘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위밍후이가 글을 깨친 뒤부터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매주 책을 한 더미씩 안고 왔다. 그럼 밍후이는 앉은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책을 읽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도서관에서 아동도서를 거의 빼놓지 않고 거의 다 읽었다. 어머니 왕메이훙(王楣泓)도 딸애를 무척 사랑했다.

북방의 겨울은 매우 추워서 내의를 세 겹과 겉옷 세 겹씩 껴입어야 한다. 어머니는 밍후이에게 모자와 목도리를 둘러주고 장갑을 끼워주었다. 매일 그렇게 한 가지도 빼지 않고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밍후이가 잠잘 때는 귓가에 모차르트의 소야곡을 틀어주었고, 아침에 일어날 때는 평화로운 파룬따파(法輪大法) 연공음악이 늘 들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직장에서 모범사원이었고, 밍후이도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표현력도 좋았으므로 초등학교 때 반장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도 반장이었는데 거의 모든 학생의 지지를 받았다. 선생님의 권유로 국어, 영어 과목 대표가 되기도 했다. 선생님은 밍후이를 표창했고, 학생들도 모두 밍후이를 좋아했다. 그 시절 밍후이는 건강한 모습으로 아무 걱정 없이 늘 싱글벙글했다.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중공)이 중국에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1천만 가구가 붕괴의 재난을 당하게 되어, 위밍후이의 가정도 그중의 한 집이 되었다. 아버지 위중하이는 각 지역 파룬궁(法輪功) 자원봉사자 보도소 소장 등과 함께 불법적으로 경찰에 납치됐다.

그 후 위중하이는 베이징 톈안먼에 가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말했다는 이유로 현장에서 납치되어 거주지로 압송된 후 노동교양처분(노동수용소) 1년,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란 글자를 분사했다는 이유로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 어머니도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말했다는 이유로 징역 11년 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어린 밍후이도 납치되어 세뇌반에 감금되었는데, 당시 겨우 12세였다.

다른 집 외동 자녀들은 부모의 품에서 재롱을 부릴 때 어린 밍후이는 감옥 두 곳을 오가며 지냈다. 기차와 버스를 이용하고, 또 먼 길을 걸어 도착해서 10~30분간 두꺼운 유리 사이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예전 친숙했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만남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취소되고 말았다. 부모를 만날 수 있다는 부푼 희망을 안고 먼 길을 찾아간 어린 밍후이는 흐느끼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한번은 밍후이가 무단장감옥의 면회실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다렸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청소부들이 바닥을 쓸기 시작하면서 사람을 쫓아내기 시작했으므로 밍후이는 슬픈 마음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곳을 떠났다.

이 가족이 파룬궁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 봄이었다.

2. 불행 중의 행운

아버지 위중하이는 1957년 5월 3일생이다. 무단장시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미술 전시에도 종사했다. 중국 수묵화, 유화, 조각, 서법 등 모든 예술 방면에서 조예가 있었다.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 촬영도 잘했으므로 본사 문화국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모두 그를 찾았다. 근면하고 착실하게 일하기 때문에 여러 번 회사에서 ‘시급(市级) 노동 모범’과 ‘성급(省级) 모범일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위밍후이가 3세 때 30대 아버지는 건강을 잃게 되었다. 류머티즘, 골수염, 말초신경염증, 척추 인대염증, 골다공증 등 난치병인 데다가 허리까지 접질려 상태가 조금만 안 좋아도 움직이지 못했고, 의자에 15분 정도 앉아 있기도 힘들어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집으려면 전신을 쭈그려 앉아야 했다. 작은 대야에 담긴 석탄도 들지 못했으므로 집안일은 모두 어머니가 도맡아 했다.

회사에서 처음에는 보조직원을 붙여주어 돕게 했지만, 후에 관절이 완전히 변형되고 두통, 족통, 요통이 심해져서 새벽 2시가 되어도 잠들 수 없었다. 그는 고통으로 끊임없이 벽에 머리를 박았다. 상사가 아버지를 데리고 톈진의 큰 병원에서 검사받았는데, 골조직이 양봉 구멍처럼 변한 것을 발견했다. 하얼빈 류머티즘 전문의는 신체가 쪼그라들고, 두 팔이 안으로 굽었고, 손가락이 심하게 변형된 한 환자를 가리키며 “당신도 반년 뒤에 저렇게 될 것이다. 이 병은 치료가 어렵다”고 말했다. 병원에 다녀온 아버지를 보고 어린 딸애가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위중하이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기공 연마를 하는 한 친구가 위중하이에게 신비롭게 말했다. 중국에 고인이 나타났는데, 그분은 창춘에 있다. 어릴 때 외할아버지 집에 무림 고수가 있었다고 들었다. 강호를 다니며 무예가 높았는데 가족은 그가 눈밭을 걸어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진정한 고인은 거칠지 않고 손은 모두 솜처럼 부드럽지만, 부드러운 솜 속에 바늘을 숨길 수 있다고 했다.

위중하이도 무술을 배운 적이 있지만 계속 연마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간에는 반드시 고인이 있다는 것은 믿고 있었다.

위중하이와 친구는 함께 파룬궁 ‘창춘 제7기 학습반’에 참가했다. 그의 몸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 연달아 나타났다. 밤새도록 딱딱한 기차에 앉았지만, 몸에 통증이 없었고, 손발 관절도 아프지 않았으며, 허리 통증도 없었다. 지린대학 밍팡궁 예배당 앞에 도착했을 때 한 사람이 크게 외쳤다. “사부님께서 오셨어요!” 위중하이는 전체 하늘이 빙빙 도는 것을 느꼈으며, 동시에 그의 신체도 격렬하게 돌았다. 그는 등 뒤의 난간을 단단히 잡으며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우주에서 큰일이 발생하겠구나.’

사부님께서 도착하셨다. 위중하이는 남들이 사부님과 악수하는 것을 보고 그도 다가가 멀리서 손을 내밀었다. 위중하이의 심신은 전에 있어 본 적 없는 느낌으로 흔들렸다. 위중하이는 사부님의 앞으로 비집고 다가가서 사부님을 바라보았다. 사부님께서는 키가 크시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사부님의 모습은 꼭 고대의 조각한 불상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인정했다. ‘만약 세상에 진짜 부처님이 계신다면 필경 바로 이분의 모습일 것이다.’

위중하이는 4월 마지막 어느 날 꽉 닫혀있는 예배당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온화한 하늘의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대법을 들을 수 있었다. 다음날 사부님께서 천목을 말씀하실 때 그는 다른 공간의 산과 물을 보았는데, 좀처럼 그런 물감을 구매할 수도 없고, 만들어낼 수도 없으며, 본 적이 없는 색이었다. 참으로 촉촉함, 밝음, 투명, 그런 영성,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없었고 형용할 방법도 없었다. 그는 또 함께 수강하는 수련생들의 변화를 보았다. 시작할 때 문을 열면 밀치고, 학습이 끝나면 밀치며 먼저 빨리 움직이려고 했다. 화장실 갈 때도 모두 밀치면서 먼저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자 모두의 모습이 변했다. 예의를 갖추어 상대방을 배려하며 양보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질서가 유지되었다. 좌석 앞쪽에 뚱뚱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축을 받아야 걸을 수 있었으며, 계단에서는 아예 걷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때 사부님께서 다가오셔서 온화하게 “일어나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정말 일어났으며, 사부님께서 “걸으세요.” 하자, 노인은 정말 걸었고 걸을수록 더욱더 빨리 걸을 수 있었다. 며칠 뒤부터 그는 남의 부축을 받지 않았다.

위중하이는 파룬궁 학습반에 참가한 기간에 신기할 정도로 식사량이 많아졌다. 평소 작은 밥공기도 다 먹지 못하던 그가 큰 찐빵 2개, 큰 죽 한 사발, 구운 만두 6개를 다 먹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질병을 잊었고, 증상과 통증도 사라졌다. 참으로 신기했다. 4일째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가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에 진감한 것을 알았다. 그는 왜 그런지, 둑이 무너진 강물처럼 끊임없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위중하이는 사부님의 목소리, 표정, 미소와 일언일행을 관찰하면서 마음속으로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전에 부처님께서 “자비는 위엄과 같이 있다”고 들었을 뿐인데, 오늘 자신이 진정으로 보았고, 느낀 것이다. 일체를 포용하고, 일체를 선하게 대하며, 무사무아(無私無我)하면서 또한 강대하고 끝없는 능력이 소리 없이 일체를 개변하고 일체를 바로잡고 있었다.

학습반이 끝난 후 동료에게 말했다. “나는 아직 모자랍니다.” 후에 그는 또 사부님의 ‘다롄(大連) 제2기 설법반’에 참가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인정했다. ‘이는 내가 찾던 사부님이시다! 대법은 너무나 좋다!’

반년이 지난 후 위중하이는 질병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 완전히 건강해졌다. 1994년 가을 도서관에서 쌀을 분배할 때 120kg 쌀자루를 갓 온 대학생이 어깨에 둘러메다가 힘에 부쳐 바닥에 떨어뜨렸다. 무거운 쌀자루를 멜 수 있는 사람은 전체 도서관 직원 중에서 힘이 좋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자발적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주임에게 “내가 그와 함께 쌀을 옮기겠다.”고 말했다. 주임이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당신이 쌀자루를 멘다고!”라고 했다. 아버지는 단번에 연속 3자루를 옮겼다. 아버지의 체중은 70여kg이었다. 아버지의 힘은 단번에 도서관 전체를 흔들었다. 동료들이 “그러다가 가는 거 아닌가?”라고 말하자, 또한 동료가 유머 있게 화답했다. “가는 게 아니라 뛰어요.” 그로부터 많은 동료 직원이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고, 회사에서 당원 회의를 열 때 보면 인원의 절반이 파룬장(法輪章)을 달고 있었다.

사회에서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고, 아버지 위중하이는 무단장시 아이민(愛民)구의 보도원이 되었다. 또 재밌는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가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10년 전 찍은 사진을 연공장에 가져갔다. 모두 돌려보면서 문제점을 발견했다. “젊은이, 왜 10년 전보다 지금이 더 젊어?” 어머니 왕메이훙은 지식인 가정 출신이다. 무단장시 지질감찰소의 수석 엔지니어이며 회사에서는 업무 핵심 요원이다. 1995년 왕메이훙은 양측 유방에서 종양이 발생했고, 점차 딱딱해지면서 통증이 심해졌다. 유방 안에 종양이 가득 자라서 의사는 유방을 절제해야 한다고 했다. 왕메이훙은 남편 몸에서 일어난 기적을 직접 목격하고 역시 파룬궁 수련에 들어섰다. 아주 빨리 종양이 사라졌으므로 수술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은 모두 출근할 사람은 출근하고, 학교에 갈 사람은 학교에 갔으며, 여가에는 법공부와 연공을 하면서 바쁘고 즐거웠다. 다른 집 부모와 다른 점은 어린 밍후이는 “약삭빨라야 한다. 손해 보지 말라. 어떻게 명리를 취해야 한다”고 교육받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더 많이 남을 배려하고, 명리에 대해서는 자연스러움에 따르라고 가르침을 받았다. 아버지는 늘 밍후이를 웃겼다. “애야, 오늘 진선인을 했니?”

3, 고난 속의 괴로움

매번 부모님을 만나면 모두 밍후이를 보고 웃었고 계속 격려해주었다. 부모는 박해받은 것을 일체 말하지 않았다. 2010년 대학에서 디자인 전공을 한 밍후이는 학교에서 여러 단계의 심사를 거쳐 선발되어 해외 유학을 하게 되었다. 영국 옥스퍼드예술대학에서 패션디자인을 공부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위밍후이는 밍후이왕을 통해 부모님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장쩌민 망나니집단이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적으로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 “때려죽여도 죄를 묻지 않으며, 때려죽였으면 자살로 처리하고, 신원을 조사하지 말고 시신을 직접 화장하라”고 지령을 내려 파룬궁 말살 정책을 실시했다. 공·검·법의 모든 계통은 파룬궁 박해 기구가 되었다. 공안은 사람을 납치하고, 검찰은 기소하며, 법원은 유죄판결하여 불법적으로 감옥에 감금했다.

부모님은 모두 파출소에서 혹독한 고문 박해를 당했다. 아버지 위중하이는 무단장시 시안분국 궁허파출소, 화린파출소, 양밍 형사경찰대 등지에서 모두 고문을 당했다. 고문실에서 입과 코에 병 2개의 겨자유를 부어 넣어 아버지는 호흡곤란의 혹독한 고통을 당했다. 고문당한 뒤 또 전문적인 악인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해 머리와 얼굴이 찢어져 선혈이 낭자했다. 그들은 두 발을 철 기둥에 감아 족쇄를 채우고, 두 손은 등 뒤로 채웠으며, 세 가닥 쇠사슬을 앞가슴에 감아 철제의자에 묶어 8박 9일간 고문했다. 구치소에서는 1리터들이 사이다병에 물을 채워 수건으로 감은 다음 머리통을 구타했다. 그렇게 구타하면 외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구타로 어지러워 목이 가슴으로 꺾기면 다시 목을 잡아 돌렸는데, 그 고문을 일명 “달구지를 부순다(砸大夯)”고 부른다.

2003년 10월 22일 어머니 왕메이훙은 무단장시 신화파출소에 납치되는 과정에서 경찰 쑤레이(蘇雷)가 총으로 위협하며 몸수색을 했다. 기골이 장대한 6, 7명 경찰들이 어머니를 에워싸고 집단구타를 하면서 7층에서 1층으로 끌어내려 강제로 경찰차에 실어 목적지에 도착한 후 다시 어머니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2층으로 끌고 올라가서 두꺼운 책으로 끊임없이 얼굴을 때렸다.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고, 바닥에 끌려 옷도 모두 훼손되었다. 무단장시 둥안구 국보대장 장푸(張富)의 지휘로 20여 명의 악인이 돌아가며 고문 구타를 하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악인들은 잠도 재우지 않고 철제의자에 수갑을 채워놓고 3일 밤낮으로 고문 박해해 전신이 부어올랐다.

아버지는 2002년 무단장감옥에 감금되었고, 어머니는 2004년 헤이룽장성 여자감옥에 감금되었다. 이 두 감옥은 파룬궁수련생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박해하는 감옥으로 악명이 높다. 남성 파룬궁수련생 10여 명과 여성 파룬궁수련생 몇십 명이 이 두 감옥에서 고문 박해로 사망했고, 여러 명이 불구가 되었다.

파룬궁을 전문적으로 박해하는 ‘610기구’의 지시에 따라, 감옥은 파룬궁수련자의 믿음을 포기시키기 위해 소위 결렬서, 회개서, 폭로서, 보증서를 쓰라고 위협하고, 사부님을 모욕하도록 강요했다. 악인들은 파룬궁수련자에게 신성한 믿음을 모욕하면서 중공을 향해 더는 ‘진선인’을 믿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라고 강요했다.

중공은 파룬궁수련생을 ‘전향’시키도록 감옥 측에 요구하면서 전향 성과에 따라 감옥의 교정 성적, 교도관 승진, 재소자의 감형과 연결했다. 이익을 추종하는 사악한 인간성을 부추겨 잔인무도한 박해가 지속해서 이루어지게 했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14년간 여러 차례 소위 ‘1급 엄격 관리대상자’로 분류되어 혹독한 고문 박해를 당했다. 믿음을 포기하지 않아 여러 차례 전기고문과 몽둥이 구타를 당했으며, 딱딱한 플라스틱 호스로 구타당했다.

酷刑演示:野蛮殴打
고문 시연: 야만적인 구타

2009년 리둥성이 ‘610’ 주임을 맡으면서 파룬궁에 대한 박해가 더욱 강화했다. 무단장감옥 부소장으로 새로 부임한 푸룬더(付潤德)는 각 구역에 상급 기관의 통지문을 시달했다. 감옥 내의 모든 파룬궁수련자를 100% 전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감옥의 각 구역책임자는 전부 옷을 벗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6감옥구역 부대장 비하이보(畢海波) 등 교도관들은 1개월간 마산자에서 고문 박해 교육을 받은 후, 11월 아버지를 혹독하게 고문하기 시작했다. 먼저 여러 날 잠 안 재우기 고문을 해 아버지는 두통으로 머리가 깨질 듯 고통스럽고 전신이 피곤할 때, 다른 감옥에서 차출된 장기복역 형사범들에게 아버지를 맡겼다. 그들 형사범은 감형과 출옥을 보상받기 위해 저마다 공로를 세우려고 했다. 그들은 아버지를 대하자마자 물었다 “전향하겠는가, 전향하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단호한 어조로 거부했다. 사람을 구타하면서 피를 보지 않으면 멈출 줄 모른다는 악독한 형사범인 자오젠후이(趙劍輝)가 아버지의 손가락을 사정없이 꺾으면서 완전히 꺾어버리겠다고 소리쳤다. 또 7, 8명이 한꺼번에 집단 구타했다. 금방 얼굴과 전신에 상처가 났고, 부어올랐다.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입을 벌리는 바람에 치아 2개가 부러졌다. 벌어진 입에 양말을 쑤셔 넣은 다음 테이프로 입을 감고, 두 손은 뒤로 감고, 두 다리도 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혹독하게 고문하고 구타했다.

아버지는 늑골이 골절되고 전신이 상처였으며 머리통은 부어올랐고 얼굴은 형태를 잃었지만, 전향에 응하지 않았다. 북방의 날씨는 영하 10여 도의 추운 날씨다. 악인들은 아버지의 옷을 전부 벗긴 뒤 대야로 찬물을 끼얹다가 나중에는 수압이 강한 호수로 배꼽, 귀 등 주요부위를 집중적으로 물을 오후 2시부터 자정까지 계속 분사했다. 10시간이 지나자 별명이 ‘다이허’로 불리는 지체 장애 폭력재소자가 집중적으로 콧구멍을 향해 분사하여 질식시켜 죽이려고 들었다. 질식 상태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전향서에 서명했다. 나중에 다시 서명을 폐지한다는 성명을 하는 바람에 또다시 고문 박해를 당해야 했다. 전기고문과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酷刑演示:电棍电击
고문시연: 전기봉 전기충격

여러 해 동안 수차례 박해로 아버지는 가슴뼈가 튀어나오고, 다리는 절며, 치아는 거의 전부 부러지고 깨져서 성한 치아가 몇 개 없었다. 형벌의 일환으로 먼지가 많은 밀폐공간에서 눈을 감지 못하도록 하여 눈을 다친 뒤, 치료 시기를 놓쳐 눈물샘이 문드러져 영영 막히고 말았다. 먼지가 가득한 차간(車間)작업실에서 누군가를 지켜보라며 눈을 감지 못하게 했다. 눈물이 마른 상태에서 눈에 먼지가 가득 끼어 마치 마른 풀 한 줌을 쑤셔 넣은 듯이 따갑고 아팠다. 아버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온 밤을 쭈그리고 엎드려 있어야 했다.

어머니 왕메이훙 역시 헤이룽장 여자감옥에서 하루도 온전하게 보내지 못했다. 7감옥구역에서 대대장 양화(楊華)의 체벌로 가장 힘든 차간작업실에서 일했다. 바로 몸 옆에서 기계 2대가 동시에 돌아가는 혹독한 환경의 작업실이다. 7, 8월의 기온이 30도에 육박하고 기계에서는 최고 180도의 고열이 났다. 매일 고온의 작업실에서 14시간씩 작업한 어머니는 검었던 머리가 하얗게 희었다.

2006년 어머니가 ‘전향’하지 않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은 쪽걸상에 앉는 고문을 당했다. 화장실을 가든 설거지를 하든, 감시자는 줄곧 따라다녔다. 심지어 밤중에 화장실에 갈 때도 따라붙었다. 파룬궁수련생은 서로 만나도 안 되고, 말을 해도 안 된다. 만약 파룬궁수련생과 말을 하게 되면 욕설과 훈시를 들어야 한다.

酷刑演示:码坐
고문 시연: 작은 쪽걸상 앉기 체벌

2008년 2월 어머니는 침대에서 다리를 가부좌하고 연공하다가 악인들에게 발각되었다. 교도관 장샤오쥐안(張曉娟), 쉬전(徐臻)이 여러 명의 재소자를 데리고 감방으로 뛰어 들어와 어머니를 난폭하게 침대에서 끌어 내리는 바람에 오른쪽 무릎이 땅에 부딪혀 다리를 절게 되었다. 무릎 통증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2011년 11월 감옥은 다시 파룬궁수련생을 혹독하게 고문하며 박해했다. 어머니와 다른 파룬궁수련생은 전부 격리되어 혹독한 차간작업을 하면서 살인범 죄수 2명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밍후이는 부모님 걱정으로 슬프고 괴로워 밤이면 홀로 울면서 하루속히 부모님이 석방되는 날만 기다렸다.

2014년 어머니는 먼저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아버지도 없고, 딸 밍후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밍후이는 절반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2016년 10월 17일 아버지도 형기를 다 마친 후 거의 1개월 정도 더 수감된 끝에 무단장감옥을 살아서 걸어 나왔다. 밍후이는 이 소식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4, 가장 고귀한 재부

일부 부모는 자녀에게 풍부한 재물을 남겨주고,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따뜻한 기억을 남겨주는데, 밍후이의 부모는 밍후이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가?

밍후이의 기억에 아버지는 늘 낙관적이었다. “애야, 손톱은 어떻게 깎나? 손톱깎이가 없네. 그럼 어떻게 깎나? 내가 알려줄게, 이빨로 물어뜯어” “손톱은 딱딱해요” “알려줄게. 입에 물고 물으면 손톱이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물어뜯는 거야. 아! 또 하나 있는데 땅에 있는 시멘트 바닥. 하하…” 아버지는 그렇게 즐겁게 웃었다. 아버지가 웃는 모습은 감옥면회실이 마치 시하이린의 그 옛날 집인 듯했다.

감옥의 특별한 형벌 중에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벌이 있다. 누구도 그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길어지면 언어를 잃어버린다. 아버지 위중하이는 여러 해 동안 수감되어 있으면서 엄격한 관리 대상이어서 언어구성이 조금씩 어려워졌다. 감옥에서 그가 가장 많이 하는 두 마디를 가장 유창하게 했는데 바로 “파룬따파는 좋습니까? 좋습니다.”, “계속 연마하겠습니까? 연마하겠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밤이든 낮이든, 누가 묻든, 대답 후 결말이 무엇이든, 끊임없는 질문에 똑같이 대답했다.

중공의 구치소, 노동교양소, 감옥에서의 생존과 안전은 보장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사악한 인간성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다. 그러므로 착한 인간성은 더욱 진귀한 것이다. 아버지 위중하이와 파룬궁수련생들은 행동으로 진선인을 실증했다. 예를 들어 쉰 냄새가 나는 빵 한 조각을 위해 사람은 바닥에 엎드려 개의 흉내를 내야 하는 배고픔 속에서도 오직 파룬궁수련생만이 조금도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준다. 노동교양소에서는 적게 먹이기 위해 뜨거운 불 위에 죽 그릇을 놓고, 김치 한 그릇을 책상에 던져놓는다. 사람들이 다투어 먼저 빼앗듯이 가져가지 않으면 먹지 못한다. 줄 맨 끝에 서 있는 사람은 항상 아버지였다. 그는 누구의 것도 가로채지 않았다. 늘 죽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고, 반찬도 차례가 오지 않았다. 감옥에 있을 때 아버지에게 차입된 돈이 얼마 없었지만, 가끔 그것조차 압류하고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겨우 남은 아주 적은 돈으로 물품을 사야 했다. 아버지는 돌봐줄 가족이 없는 재소자와 함께 아버지의 1인분을 함께 사용했다. 그곳 사람들이 전한 말에 따르면 백설탕을 한번 핥아보는 것도 일종의 사치라고 했다. 돈이 없는 위암 재소자를 위해 아버지는 반 봉지 정도 남은 백설탕을 그에게 주었다.

또 한 예는 하이린(海林)구치소에서는 일종의 동작이 있는데 ‘전기를 전한다’는 것이다. 모두 줄을 지어서 앉게 한 후, 뒤에 있는 사람이 앞에 앉은 사람의 허리를 주먹으로 때리게 하는 동작이다. 이 구타 동작은 회를 거듭할수록 힘을 주어 때리게 되어 심리적으로 더욱 악하게 변하며 악해질수록 더욱더 세게 때린다. 매번 아버지는 뒷사람으로부터 심한 주먹다짐을 받으면서도 앞 사람을 때리지 않았다. 대법 사부님께서는 수련생에게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럼 “전기가 끊어졌다”면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도 아버지는 역시 아무리 세게 맞아도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나중에 감실(監室)에서 ‘전기를 전한다’는 추악한 짓거리를 중단시켰다.

아직은 양심이 남아있는 재소자나 교도관들이 꽤 있었다. 마음속의 선량함이 일깨워져 암암리에 파룬궁수련생들을 도와주고 보호해주었다. 아버지는 몇 차례 소위 ‘비판투쟁회’에 회부되었지만, 비난 발언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흐지부지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공개장소에서 파룬궁수련생을 칭찬하기도 했다. “파룬,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모모를 파룬과 비교하면 하나는 하늘이고, 하나는 지하다.”(감옥에서 파룬궁수련생을 ‘파룬’으로 칭함)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는 감옥의 ‘난제’가 되었다. 한번은 양칭화(楊慶華)라는 재소자가 아버지 위중하이를 ‘해결하겠다’고 찾아왔다. 양칭화는 누구인가? 전에 자오둥(肇東)시 마피아의 큰형이다. 단체훈련 감옥구역에서 대잡(大雜-재소자 총관)이었을 때 평소에도 죄수복 위에 검은 외투를 걸쳤고,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의 뒤에는 늘 여러 명이 호위병처럼 따라다녔다. 찻주전자를 들고 있는 사람, 고양이를 안고 있는 사람, 옷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뒤따랐으므로 그의 위세에 누구든지 주눅이 들게 했다. 그가 감방에 들어서기만 하면 감방 안 사람들은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이 2년째 유예된 상태에서 무기 징역형으로 감형되었기 때문에 급히 공을 세워야 할 수형자였다.

감옥 측이 이 점을 노려 그를 아버지를 전향시킬 자로 선정한 것이다. 양칭화는 먼저 아버지에게 서신으로 면담 일정을 잡았고, 만나서 ‘도리’라는 말로 한바탕 설파했다. “파룬, 상사가 오늘 나에게 임무를 맡겼다. 나에게 맡겼으니 나는 임무를 완성해야 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무슨 일을 할 때 사람의 여부를 따지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나를 지체하게 하거나 나를 바꿀 수가 없다! 누구든 나의 길을 막으면 안 된다! 오늘 당신이 (4서를) 쓰지 않으면 당신이 걸어서 들어왔지만 누워서 나가야 할 것이다!” 양칭화는 매우 흉악한 표정을 지었고 눈에는 살기를 띄었다. 그러더니 손에 흰 장갑을 꼈다. 곧 손을 쓰겠다는 태세다.

허약한 아버지가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고대에 도적들은 먼저 들어가고 후에 나가서 골고루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말했다. 자고로 도둑질에도 도리가 있다고 했다. 후야오방(胡耀邦)이 회고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을 말했는데, 펑더화이(彭德懷)가 억울한 것을 뻔히 알면서 손을 들었다고 했다(그를 처리하는데 동의). 사람이 양심을 어기는 일을 하면 영원히 비난당할 것이다. 나는 불치병에 걸려서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대법 사부님께서 나에게 돈 한 푼 요구하시지 않고 병이 다 낫게 해주셨다(나의 마음도 치료해주심). 내가 그림을 그리고 개인적인 일을 할 때 모두 회사 물품을 썼다. 파룬궁을 연마한 후 내가 계산해보니 많은 이익을 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액수만큼 물품을 사서 회사에 갖다 놨다.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또 나는 누구에게 그런 일을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에서 물품을 산 사람은 나 혼자였다. 물품을 살 때 얼마짜리 영수증을 끊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기에 사실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부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나의 누나 위전제(於真潔)는 검찰원 회계직에 있다. 전공시험을 볼 때 모두 답안을 베껴 썼지만, 누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정직하게 했다. 우리는 진짜를 수련하는 것이다. 후에 검찰원의 상사가 이 사실을 알고 누나를 불러 ‘오늘날 이 사회에서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니… 검찰원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양칭화에게 되물었다. “만약 당신이 나라면 양심을 버리고 자신의 사부를 욕하겠는가?”, “오늘 당신이 나를 때려죽인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잡혀 들어온 그날부터 나는 살아서 나갈 생각을 안 했다. 4서, 나는 쓰지 않는다. 나는 나에게 뒷길을 남겨놓지 않는다.”

이 마피아 남자는 오만함에서 놀라움으로 변했고, 흉포함에서 감동으로 변했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말했다. “파룬,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

또 구치소에 있을 때 5명을 연속 살해해 사형선고를 받은 ‘살인마왕’으로 불리는 죄수가 있었다. 아버지와 그의 침상이 맞닿아 있었다. 이 사람은 원래 본분을 지키던 농부였다. 심한 경멸을 당하게 되자 순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아버지는 그에게 사람이 되는 도리를 말해주었고 또 그에게 대법 사부님의 시를 가르쳐 외우게 했다. 그는 형 집행을 앞두고 괴로워하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안 것이 너무 늦었다!!”

쑤이펀허(綏芬河)의 마피아 두목이 있었는데 6감구 ‘대잡’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글 쓰는 것을 배워, 좋은 글씨를 연마해냈으며, 온순하고 선량하게 변했다. 그는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매사 공정하게 처신하려고 했다. 300여 명의 감옥구역을 관리하면서 감옥에서 가장 문명적인 감옥구역으로 관리했다. 재소자들은 “인자한 큰형님”으로 불렀다. 그러나 교도관이 관리하는 방법은 재소자에게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게 했으며, 610주임이 이 감옥구역장으로 출범한 후 ‘인자한 큰형님’을 손봐주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출옥한 후 많은 사람이 그를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큰형님은 더는 없다.” 물론 오성이 좋은 재소자들은 대법의 법리에 찬성할 뿐만 아니라 또 대법 수련에 들어섰다. 결국 대법을 선하게 대한 재소자들은 모두 좋은 보답을 받았고, 박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자들은 모두 좋지 않은 결말을 얻었다. 물론 이는 파룬궁수련생이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부패한 자들은 자녀를 교육할 때 양심을 말하지 않는다. 일부 부자들은 자녀를 교육할 때 어떤 사람도 믿지 말라고 교육한다. 그러나 위밍후이의 부모는 진선인을 준수하라고 교육했다. 밍후이는 전에 아버지가 다친 것을 보고 경찰을 원망했다. 아버지가 밍후이에게 “영원히 좋은 일면만 보고 밝은 면만 보라”고 말하면서, “경찰도 어쩔 수 없으니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는 전에 철창을 사이에 두고 대학입시를 앞둔 밍후이에게 미안해하며 “애야, 아빠는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구나”라고 말했다. 밍후이는 눈을 크게 뜨고 손을 저으며 웃으면서 말했다. “아버지, 그게 아니에요. 아버지는 나에게 가장 고귀한 것을 주었어요. 정신적 재부!!” 온갖 마난을 겪은 부모님을 보면서 변하지 않는 진솔함, 선량함은 연꽃처럼 진흙에서 피어났어도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채 세간에 은은한 향을 풍긴다. 금강처럼 순정하고 아름답고 단호해서 무너뜨릴 수 없다.

그녀는 이런 부모를 가졌다는 것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꼈다.

5, 험난한 만남의 길

밍후이는 이미 10년 동안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다. 중국의 감옥면회실에서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근황을 알려주고,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근황을 알려주어야 했다. 아버지는 항상, 너의 엄마에게 나는 잘 있다고 전하라고 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내가 아주 잘 있다고 전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풀려난 후 아버지 면회를 하러 갔지만 가끔은 볼 수 있었고, 가끔은 볼 수 없었다. 비록 만난다고 해도 아버지는 항상 감옥구역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나오는 사람이었다. 11시 반이면 면담이 종료되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침 일찍이 가서 줄을 서야 했다. 아버지는 늘 11시에 겨우 나왔고, 가끔은 몇 마디 말을 하지도 못했고, 가끔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상대방을 한 번 볼 뿐이었다. 몇 마디 말을 할 수 있든지 간에 언제나 밍후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미 위밍후이가 성장했어도 부모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여전히 “애야”라고 불렀다. 가족 세 명은 20년 동안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상태다.

가족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01년이다. 아버지가 불법적으로 수배되어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어느 날 밍후이는 어머니에게 이끌려 강가로 갔다. 무단장 강가에서 밍후이는 익숙한 그림자를 보았다. 밍후이는 기뻐 뛰어가서 아버지의 손을 잡았고, 얼굴을 아버지의 몸에 단단히 댔다. 그것은 한 아주머니의 배려로 이루진 것이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행복한 밍후이의 기억이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무단강도 함께 있었다.

밍후이는 부모와 함께 하루빨리 가족이 모두 모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여권을 발급받으려던 부모가 발급받을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해외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모든 공직에서 면직된 상태고, 60세가 넘어서자 더욱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밍후이는 학업을 유지하면서 계속 여러 개의 알바로 돈을 모아 조금이라도 부모에게 보내야 했다. 어머니는 노인 병간호 일을 찾았고, 아버지는 몇몇 학생에게 그림지도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다가 부모는 결국 매월 1천 위안(약 17만2천 원)의 사회보장금을 받게 되어 겨우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2019년 중공은 또다시 전국 단위의 ‘파룬궁수련생 제로’ 운동을 펼쳤다. 파출소와 지역위원회를 앞세워 파룬궁수련생과 그 가족에게 믿음을 포기하라는 ‘보증서’를 요구하며 압력을 가했다. 심지어 파룬궁수련생을 직접 대면하여 괴롭히는 바람에 위밍후이 부모는 고향 무단장을 떠나 하얼빈으로 이주했다.

2020년 11월 23일 어머니는 하얼빈시 학부서점에서 하시(哈西)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되었는데 네 번째 납치된 것이다. 처음 행정구류처분에서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모함을 조작한 사건 서류와 함께 검찰에 송치되었다. 하얼빈시 난강(南崗)구 국보경찰은 어머니에게 “믿음을 포기하고 보증서에 서명하면 풀어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고 위협했다. 그러면서 “파룬궁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이렇게 한다”고 설명했다.

어머니가 처음 중공에 납치된 것은 2001년 여름이다. 아버지가 납치되어 노동교양소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나 또 청원하고, 방송국에 반영함에 따라 5만 위안(약 860만 원)의 현상금으로 수배되었다. 경찰은 아버지를 체포하지 못하자 어머니와 둘째 고모 위전핑(於真屏) 두 사람을 납치해 구치소에 감금했다. 아버지가 9월에 납치된 후 어머니는 단식으로 항의하여 겨우 두 사람은 풀려났다.

2003년 두 번째로 납치되어 불법적으로 징역 11년 형이 선고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나 돌아온 뒤 수련생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세 번째로 납치되었다. 현재 어머니는 중국 하얼빈시 제2구치소에 감금되어 있는데 이미 3개월이 넘었다.

밍후이의 기억에 어머니는 아주 예쁜 눈은 가진 미인이었으며, 어머니를 바라볼 때 광택이 났다. 위밍후이는 태어나서부터 어머니가 업고 다니며 일을 했다.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아 어머니가 4kg이 넘는 밍후이를 업고 석탄을 나르고 빨래를 하는 등 바쁘게 돌아치며 일을 해야 했다. 유치원에 다닐 때는 어머니 자전거 앞에는 작은 의자를 마련해 늘 밍후이를 태우고 다녔다. 아침에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가 저녁에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에 다닐 때도 어머니가 바래다주고 마중을 나왔으며, 과외수업일 때도 역시 어머니가 챙겨주었다. 그림 그리기, 악기 배우기를 할 때 어린이용 풍금이 무거워서 허약한 어머니가 메고 다녔다. 그렇지만 밍후이는 힘들다는 어머니의 푸념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했다. 밍후이는 상으로 받은 작은 컴퓨터를 동급생의 플라스틱 팔찌와 바꿨을 때 어머니는 한번 웃기만 했다.

밍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한 학생은 부모가 이혼해서 학비를 납부하지 못해 퇴학 위기에 처해 있었다. 위밍후이는 세뱃돈과 용돈을 모아두었던 것을 전부 내놓았을 때 어머니는 기분 좋게 웃었다. 아버지의 말로는 어머니는 무척 소박한 사람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았으므로 화장은 물론 멋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이 무엇을 부탁하면 힘껏 도왔다.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후부터는 마치 단번에 진선인 속에 용해된 것 같았다. 남들은 어떻게 법의 요구에 따라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든지 간에,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무사무아의 선량함으로 일관했다.

예를 들어 1999년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우표수집 스크랩 2권을 주었다. 스크랩에는 진귀한 우표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50만 위안(약 8천6백만 원)을 호가하는 귀한 우표도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한 전문회사에 감정을 의뢰했는데, 고가 우표 몇 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고가의 우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고, 당시 그의 아내는 병을 앓고 있었다. 아버지는 생각다 못해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고 안 하면 안 될까? 신고하게 되면 아마 그 사람은 10년 이상의 형을 살 텐데. 그럼 그 집은 망하는데”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 후 그 일에 대해서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당시 작은 도시에서는 몇만 위안이면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또 한 예다. 한 수련생이 박해당해 신체가 온전치 못했다. 설사를 계속하면서 살이 썩어들어가, 악취가 코를 찔렀다. 어머니는 그 집에 가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을 청소했다. 후에 이 수련생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우리가 데려와서 돌봐주는 것이 어떨까?”라고 물었고 어머니는 역시 담담하게 “그래요.”라고 했다.

어머니는 감옥에서 나온 후 지출을 절약하기 위해 채소시장이 마감되는 시간대에 채소를 샀다. 남들이 고르다 남은 것을 1위안에 한 무더기씩 떨이로 파는 걸 사 왔다. 옷은 늘 수련생들이 버리거나 준 것을 입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더 어려운 수련생을 보게 되면 무슨 물건을 사든지 그 수련생의 것도 함께 사 왔다. 누가 어렵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도와주었고, 누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주머니에 있는 대로 돈을 꺼내주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위밍후이의 어머니다.

아버지는 이 집에 채색을 입혔고, 어머니는 이 집에 따사로움을 비추었으며 밍후이는 이 집에 무한한 즐거움과 동경을 주었다. 어느 날, 이 집에 가족이 모두 모일 수 있을까?

목단이 꽃을 피우게 하라

중국 북방에
한 도시는 크지 않는데
꽃은 물을 위하고 물은 꽃을 위하여
무단장(牡丹江) 무단장
밍후이 일가족 살고 있다.

어머니는 엔지니어
아버지는 화가
일가족은 진선인(眞·善·忍) 믿고
서로 사랑하며 세월 보냈네.

아버지는 수감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어머니는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고
집 무너지고 집이 사라졌네.
12세 여자애야
어떻게 자랄까?

굴하지 않는 아버지는
늑골 끊어지고 구타로 치아 없어진 채
살아 돌아오셨네.
견강한 어머니는
철제 의자에 앉아 고문에 시달려
머리가 백발 되었네.

대단한 어린 밍후이는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부모님 기다리고
붉은 마의 철창이 또 한 번
자유를 가로막았구나.
추운 겨울에 또 한 번
눈꽃 날리네.

선량한 사람들이여
나와 함께 견증(見證)해요
인간성의 고귀함은
매길 수 없는 진리의 가치
선량한 사람들이여
나와 함께 외쳐

목단이 꽃 피게 해요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게 해주세요
목단이 꽃 피게 해주세요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게 해주세요.

 

원문발표: 2021년 2월 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1/2/6/4195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