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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하이성 12명 파룬궁수련생이 중공의 박해로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칭하이 보도) 중공(중국공산당)의 파룬궁 박해는 현재까지 21년 넘게 선량한 파룬궁수련생들에 대해 잔인무도한 박해를 하고 있다. 수많은 가정이 박해로 집과 가족을 잃었고 가족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중국 시베이 변경에 위치한 칭하이성 파룬궁수련생도 재난을 면할 수 없었다.

밍후이왕 통계에 따르면, 칭하이성에서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생은 12명으로, 그들은 허완지(賀萬吉), 판리훙(范麗紅), 탄잉춘(談迎春), 자오샹중(趙香忠), 장유전(張有禎), 핑춘펑(平春峰), 탕파방(唐發幫), 장슈친(張秀琴), 우중민(武忠民), 쉬춘팡(徐春芳), 리위쥔(李玉君), 웨이하이밍(魏海明)이다.

허완지, 칭하이성 텔레비전 스폿 방송으로 중형을 선고받은 후 박해로 사망하다

贺万吉
허완지(賀萬吉)

파룬궁수련생 허완지는 생전에 칭하이성 시닝(西寧)시 철도 분국 공안처 경찰로,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고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사람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린 것 때문에 끊임없이 박해를 당하고 칭하이성 노동교양소에 갇힌 적이 있었다. 그는 2002년 7월, 칭하이성과 간쑤(甘肅)성에서 파룬궁 진상을 텔레비전 스폿 방송 삽입에 참여해 2002년 12월 31일, 17년의 불법 징역형을 선고받고 하이베이(海北)주 하오먼(浩門) 감옥에 감금당했다. 2003년 5월 28일, 하오먼 감옥에서 허완지는 박해로 사망했다. 향년 53세였다.

허완지의 아내 자오샹중, 4차례 노동교양처분 받고 여자노동교양소의 박해로 사망하다

허완지의 아내이자 파룬궁수련생 자오샹중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칭하이 여자노동교양소로 불법 납치를 네 차례 당한 적이 있다. 네 번째는 중공 ‘1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전, 여섯 대의 경찰차로 허완지의 집을 포위하고 허완지 일가를 납치, 불법 감금시켰다. 그중 허완지의 집에 맡겨 둔 두 명의 친척 아이가 있었는데 12살과 두 살짜리 여자아기까지도 10여 시간 동안 불법 감금당해 있었다.

贺万吉和赵香忠夫妇
허완지(賀萬吉)와 자오샹중(趙香忠) 부부

자오샹중은 여자 노동교양소의 영창에 불법 감금돼, 갖은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20여 일 후, 자오샹중이 석방돼 나왔을 때는 이미 하반신 마비로 걸을 수 없었고 가슴 부위 통증으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리고 물과 음식을 먹을 수 없어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고 온몸이 거의 마비돼 자리에 누워 생명이 위험했다. 50세인 자오샹중은 2002년 2월 22일, 창하이 여자노동교양소의 잔혹한 박해로 온몸에 상해를 입어 사망했다.

칭하이성 사범대학 과장 핑춘펑이 독침 주사 박해를 당해 사망하다

파룬궁수련생 핑춘펑(남)은 칭하이 사범대학 교직원(전 칭하이성 사범대학 후방 근무처 처장으로, 첫 번째 노동교양 처분을 받은 후 강직 당했음)이며 사범대학 관사에 거주했다.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됨을 견지한 이유로, 핑춘펑은 두 차례 사범대학의 악인에게 무고를 당해, 칭하이성 노동교양소에 감금돼 박해를 당한 적이 있다. 첫 번째 노동교양 처분을 받고 석방 후, 2002년과 2003년 사이에 핑춘펑은 노동교양소에서 독침 주사를 맞고 독약 투입을 당한 후 그는 정신이 흐리멍덩해 정상이 아니었다. 똑똑하게 기술하지 못하고 명확하지 못해 확실하게 그의 상황을 진술할 수 없었다. 그가 제대로 문장을 쓰지도 못한 채 곧바로 두 번째 불법 납치를 당했다. 출소 후, 곧 악인에게 엄밀한 감시를 받았는데 결국 2005년에 사망했다.

酷刑演示:打毒针
고문 재연: 독침 주사하기

칭하이 탕파방, 먼위안 감옥의 잔혹한 박해로 사망하다

시닝 영어 교사이자 파룬궁수련생 탕파방은 여러 차례 잔인한 박해를 당하고, 핍박에 못 이겨 다년간 유랑생활을 했다. 2009년 9월, 칭하이 먼위안 감옥으로 납치당했는데, 박해로 사망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된다. 그해 겨우 40여 세였다.

2014년 5월, 어떤 파룬궁수련생이 칭하이 민허(民和)구치소로 납치돼 박해를 당할 때, 칭하이성 ‘610’에서 배치한 악독한 경찰 천제(陳潔)는 그를 위협할 때 탕파방에 대해 박해를 진행한 일부 상황을 이야기했다.

2015년 9월, 어떤 파룬궁수련생이 칭하이 둥촨(東川) 감옥 입감대로 납치당했는데, 악인은 위협할 때 “탕파방은 이미 먼위안 감옥에서 죽었다. 당신이 연공을 견지하면 당신도 죽는 길밖에 없다”라고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탕파방은 원래 시닝시 수전부 4국(水電部四局) 러자완(樂家灣) 초등학교 영어 교사로,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파룬궁 진상을 똑똑히 알린 후, 공직에서 해고당했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탕파방은 4년이 넘는 동안 칭하이성 ‘610’[610은 바로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 위에 군림해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 조직임]의 잔혹한 박해를 당했는데, 3차례 75일 동안 구류 처분을 당했고, 3차례 불법 노동교양처분, 총 784일이며, 두 차례 불법적인 가택수색을 당했다.

탕파방은 대법을 위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공정한 말을 한 사실로 1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본래는 2001년 2월, 노동교양을 해제했으나, 믿음을 포기하는 이른바 ‘3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노동교양소에서 불법적으로 기한을 연장했다. 2001년 상반년, 칭하이 시닝시 둬바(多巴)진 노동교양소에서 탕파방과 리성시(李生璽)는 파룬따파 믿음을 견지한 이유로, 시닝 관리과 과장인 루신(魯昕)에게 전 노동교양소의 인원 앞에서 ‘루스리프식 수갑’으로 등 뒤로 채워졌다. 그리고 강제로 탕파방, 리성시(李生璽)에게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에서 ‘몸 단련’—장시간 달리기를 시켰는데, 악독한 경찰은, 그들에게 달리기하면서 큰소리로 ‘하나둘, 하나’를 외치도록 했다. 맨 마지막에 두 사람은 기력이 다 소모되어 따로따로 두 대대의 독방에 갇혔다. 탕파방, 리성시 두 사람은 단식으로 항의했다. 7일 후, 탕파방은 생명이 위급하게 되어 풀려났고, 엄한 관리대의 독방에 갇힌 리성시는, 당시의 대대장 천신샹(陳新祥)이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진행하려 한 상황에 식사를 회복했다.

2001년 12월 16일, 탕파방은 노동교양소에서 석방된 후, 진선인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12월 28일, 불법 체포를 당했다. 정월에 또 둬바(多巴) 노동교양소 5대대로 보내져 엄한 관리를 당했다. 노동교양소에 들어간 후, 악독한 경찰은 그에게 능욕을 가하고 그에게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찼으며, 몇십 볼트짜리 경찰봉을 사용해 윤번으로 구타하고 2시간 동안 전기충격을 가했다. 그런 다음 또 탕 씨의 등 뒤에 수갑을 채워 7일 동안 영창에 구금했다.

이런 고문 학대를 항의하기 위해 2002년 4월 11일부터 탕파방은 단식을 시작했다. 악독한 경찰은 또 그를 1대대에서 3대대로 옮겼다. 2년이 넘는 동안 둬바 노동교양소 안에서 탕파방의 심신은 상상하기 어려운 손상을 입고 박해로 생명이 위험해졌다.

칭하이성 ‘610’의 경찰은 여러 차례 그의 친구의 집과 직장으로 가서 교란했다. 가족은 잔혹한 탄압을 당하고 극심한 정신적인 압력을 감당했는데, 이로 인해 그의 어머니는 병으로 위험했고, 그의 부친의 머리칼은 완전히 하얘졌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정상적으로 출근할 수 없었고, 그의 아내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을 수 없었다.

그 후 탕파방은 줄곧 유랑생활 상태에 처해있었다. 2005년 2월 21일, 탕파방은 집의 아내와 아이를 보러 갔는데, 칭하이성 시닝시 국가보안국, 공안국에서 시닝시 펑자자이(彭家寨) 파출소의 경찰과 결탁해 시닝시 국가보안국으로 납치당했다. 탕파방은 ‘호랑이 의자’ 위에 묶여 사지는 모두 특수 제작한 쇠사슬에 채워졌다. 경찰들은 윤번으로 그를 감시하며 24시간 동안 그에게 잠을 재우지 않았다. 3일 후, 탕파방은 기적적으로 경비가 삼엄한 국가보안 대청에서 벗어났다.

2009년 9월 8일 11시 30분쯤, 탕파방은 시닝시 청둥(城東)구 캉러(康樂) 난환(南環)로 십자길목에서 시닝시 국가보안대대 사복 경찰에게 기습 납치를 당했다. 당시 경찰들은 한 대의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십자 길목 서쪽에서 운전해 왔는데, 몇 명의 경찰이 뛰어내려 탕파방을 납치했다.

탕파방은 시닝시 얼스리푸(二十里鋪)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고, 칭하이성 고등법원에 모함당했다. 2010년, 탕파방은 칭하이 먼위안 감옥 1감구 3분감구로 납치돼 박해를 당했는데, 사악의 세뇌를 저지하고 진선인 믿음을 견지한 이유로 영창에 몇 달 동안 갇혔다. 탕파방은 단식을 통해 박해를 반대했다.

먼위안 감옥에서 탕파방에 대한 박해 방식은 음식물 강제 주입과 높은 데시벨을 사용해 사당을 찬양한 듣기를 원하지 않는 오디오를 틀어 듣게 했다. 결국, 탕파방의 장기가 쇠약해져 칭하이 적십자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이 억울하게 사망했다. 그중 적극적으로 박해에 참여한 사람은 당시의 먼위안 감옥 1감구 3분감구의 개조를 주관한 부지도원 궈(郭) 씨이다. 그 후 1감구 2분감구의 지도원으로 승급했고 이미 악보를 받았다. 병에 걸려 몸조리를 하는 기간에 정직 처분을 당했고, 2018년에 먼위안 감옥에서 전출시켰다.

탕파방이 칭하이 적십자병원에 있는 동안 또 한 사람이 칭하이 ‘610’의 지명을 받고 파견돼 박해에 참여했다. 그는 칭하이 거얼무(格爾木)시 강제 마약중독자 재활원(원래의 거얼무시 노동교양소임) 심리자문센터의 주임 천제(陳潔)인데, 이 사람의 다른 신분은 칭하이성 이른바 ‘파룬궁을 교육하고 전향하는 전문가’라고 했다. 탕파방도 이 사람이 유다와 악독한 경찰을 거느리고 시닝에서 납치를 한 것이다.

두 차례 노동교양박해를 당한 우중민, 억울하게 사망하다

파룬궁수련생 우중민은 원적이 시닝시이며, 허난성 정저우 기계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허난성 싼먼샤(三門峽) 서역 ‘위시(豫西) 선반공장’에 분배돼 근무했다. 그 후 기업이 파산되어 광둥(廣東)으로 일하러 갔다. 1993년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후, 신속하게 심신의 건강을 얻었고, 명리를 좇지 않았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 몇 해 동안, 우중민이 납치돼 불법 감금당한 지역은 네 개의 성, 시(광둥, 허난, 칭하이와 베이징), 네 개의 2급 시[선전(深圳), 싼먼샤시, 쉬창(許昌)시, 시닝시]이다. 그리고 불법 감금당한 장소는 열 곳[선전 훙링(紅嶺) 중학교, 선전 롄탕(蓮塘) 파출소, 베이징 톈안먼 분국, 베이지이 주재 싼먼샤 사무실, 샤(陝)현 구치소, 샤현 유치장, 싼먼샤시 노동교양소, 쉬창(許昌) 허난성 제3노동교양소, 싼먼샤시 제2기 세뇌반(전 싼먼샤시 무장부 정원), 시닝시 제2구치소]이다.

우중민이 첫 번째로 노동교양 박해를 당한 곳은 허난성 제3노동교양소이다. 이 노동교양소에서 4년 넘는 박해 중에서 건강하던 그는 이미 박해로 오른쪽 발이 불구가 되었고, 두 손도 이로 인해 영활하지 못했는데, 의사는 중추신경이 손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예전에 여러 부서(최고인민검찰원, 성 검찰원, 시 검찰원, 공안, 민정 등 부서)에 고소했는데, 모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2005년 6월, 밍후이왕에서 연속 우중민의 문장 ‘5년 동안 진선인 믿음 때문에 잔혹한 박해를 당한 기록’을 게재해 중공 당국의 그에 대한 박해를 폭로했다.

2006년 7월 12일, 샤현 공안국에서는 우중민이 생활을 스스로 처리할 수 없고 걸을 수도 없는 상태였는데 거듭 강제로 쉬창에 위치한 허난성 제3노동교양소로 납치했는데, 이는 두 번째로 노동교양 박해를 당한 것이다. 이번의 박해는 더욱 잔혹했다. 밍후이왕의 ‘노동교양 박해를 당해 사지 불구가 된 우중민, 억울하게 사망’, ‘학대로 불구가 된 우중민, 거듭 노동교양 박해를 당한 경험’ 문장은 고문의 세부적인 더욱더 철저한 폭로였다.

2011년 5월 9일, 이미 두 다리가 박해로 불구가 되어 걸을 수 없는 우중민을 칭하이성 중공 사당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에서 조직한 강제 세뇌반으로 납치했다. 세뇌반은 시닝시 퇀제교(團結橋)의 칭하이성 국세국 양성센터에 설치되었다.

다년간의 잔혹한 박해로 우중민은 사지가 불구가 되어 생활을 스스로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2013년 5월 20일, 억울하게 사망했다.

두 부부가 5년의 불법 징역형 선고받고, 웨이하이밍은 박해로 사망하다

2007년 4월, 세인에게 진상을 똑똑히 알리기 위해 웨이하이밍은 다퉁(大通)현 징양(景陽) 일대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가 중공의 악독한 경찰에게 주시당했다.

2007년 12월 15일, 칭하이성 다퉁현 형사경찰대 대장 장싱눙은 한무리 악독한 경찰을 거느리고 불법적으로 집안에 들이닥쳐 가택수색을 진행해 강탈했다. 웨이하이밍이 22만 위안(약 3천 8백만 원)으로 산 승용차도 불법적으로 몰수당했다. 이 외에 집안의 노트북 컴퓨터, 녹음기, MP3, 파룬궁 서적, 심지어 웨이하이밍의 기사증마저 모두 불법적으로 몰수해 갔다. 이 물건들은 모두 경찰이 수색영장도 없이 집안에서 강탈한 것이다.

다퉁현 경찰은 웨이하이밍, 자오쭝화(趙宗華) 부부를 체포영장도 없이 공안국으로 납치해 불법 감금시켰다. 웨이하이밍은 구치소에서 두 차례 단식으로 항의했는데,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었다.

2008년 4월 16일, 다퉁현 법원에서는 웨이하이밍 두 부부에 대해 불법적인 재판을 진행했으나 결과를 선고하지 않았다. 2008년 7월, 다퉁현 법원에서는 암암리에 거듭 불법 재판을 진행해, 두 사람에 대해 비밀리에 판결을 내려 5년의 불법 징역형을 선고했다.

중공 법원에서 분명히 불법 재판을 진행한 행위가 폭로될까 두려워 판결할 때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들 웨이펑(魏鵬)이 부모님을 위해 선임한 두 명의 변호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사후 변호사는 가족에 대해 “다퉁현 법원에서는 법률의 절차에 따라 처리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웨이하이밍, 자와쭝화의 가족이 무엇 때문에 통지하지 않았는지를 법원 측에 문의했을 때, 법원 인원은 뜻밖에도 강도간은 태도로 “무슨 근거로 당신들에게 통지해야 하죠!”라고 말했다.

웨이하이밍은 칭하이성 먼위안 감옥(원래는 하이베이주 하오먼 감옥으로 불렸음)으로 납치돼 박해를 당했고, 자오쭝화는 칭하이성 여자감옥으로 납치돼 계속 박해를 당했다. 감옥 안에서 웨이하이밍은 죄수복을 거부한 이유로 심각한 박해를 당했다.

웨이하이밍은 감옥에서 박해로 폐병이 도져 2012년 1월, 출소했다. 7월 19일, 웨이펑은 부친을 면회하러 가서 또 얘기했는데, 이상함을 발견하지 못했다. 일주일 후인 7월 27일, 웨이펑은 거듭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는데 이미 침대 위에서 사망했음을 발견했다. 신변에는 한 명의 육친도 없었다(아내 자오쭝화는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그녀는 2012년 말, 출소했음). 사망 원인은 분명하지 않은데, 폐병이 도져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사망은 7월 20일부터 27일 사이며, 사망했을 때 당시 겨우 58세였다. 이때 그가 출소하기까지 단 6개월 정도 남았을 뿐이다.

고등학교 생물 교사 탄잉춘, 노동교양소의 박해로 사망하다

파룬궁수련생 탄잉춘(談迎春)은 시닝시 쿤룬(崑崙)학교 고등학교 생물 교사로, 2002년 12월 29일, 극히 악명 높은 칭하이성 여자노동교양소에서 박해로 46세에 사망했다. 탄잉춘이 사망하기 전, 함께 불법 감금당했던 파룬궁수련생은 탄잉춘의 허벅지 부위에 사람을 놀라게 하는 상처 자국이 있음을 보았다고 했다. 예전에 어느 한 번은 등 뒤에서 끈으로 탄잉춘의 목을 졸라 뒤로 잡아당기는 것을 보았는데, 그녀가 하마터면 질식해 죽을 뻔했다. 증거를 소각해 죄악을 감추기 위해 탄잉춘이 죽은 후 3일째 되는 날 여자노동교양소에서는 그제야 사망 소식을 알렸다.

초등학교 교장 장유전, 박해로 사망하다

칭하이성 후주(互助)현 볜탄(邊灘)향 수이둥(水洞) 초등학교 교장 장유전(張有禎)은 파룬따파 수련을 견지해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며, 자신에게 아주 엄격했는데, ‘문화대혁명’식의 모욕 박해를 당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수갑에 채워지고, 가슴 앞에 팻말을 걸고 비판, 투쟁을 진행하고 조리돌림을 당했다. 뒤이어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고 칭하이성 노동교양소에서 학대를 당해 사경에 이르렀다. 결국 2003년 6월 19일, 억울하게 사망했다. 박해를 당해 사망할 때 47세였다.

파룬궁수련생 장슈친, 구치소의 박해로 사망하다

칭하이성 시닝시 장슈친(張秀琴, 여, 47~48세)은 시닝시 청중(城中)구 법원 관사에서 거주했다. 2008년 11월 13일 저녁, 장슈친은 시닝시 난산(南山)로 인근에서 진상 자료를 다 배포하는 중 악의적인 신고를 당했다. 뒤이어 난탄 파출소의 한 무리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그날 저녁, 시닝시 구치소로 납치돼 불법 감금, 박해를 당했다. 시닝시 구치소에서 박해로 혼미해 의식을 잃은 후, 결국 12월 13일 이른 아침 4시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젊은 소녀 판리훙, 약물 박해로 사망하다

젊고 유망하고 재능이 넘치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칭하이의 젊은 소녀 판리훙(范麗紅)은 믿음을 포기하는 것을 거부하고, 칭하이성 여자 노동교양소에 의해 여러 차례 강제로 정신병원에 보내져 강제로 약을 복용해야 했다. 이로 인해 그의 정신이 흐리멍덩해져 온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는데, 결국 박해로 사망했다. 사망 시 겨우 29세였다.

시닝시 쉬춘팡 노인, 세뇌반 박해를 당하고, 압력, 공갈 협박 중에서 사망하다

2015년 10월, 연세가 70에 가까운 쉬춘팡 노인은 세뇌반으로 납치당했다. 세뇌반에서 공갈 협박, 위협을 당하고 노인에게 수련을 포기하도록 핍박하는 등 학대를 당해 몸에 불편한 증상이 나타났다. 집으로 돌아온 후, 가족은 그를 병원에 보냈다. 6개월 가깝게 고통에 시달리다 쉬춘팡 노인은 2016년 4월 22일, 억울하게 사망했다.

칭하이성 시닝시 85세인 리위쥔, 2개월 동안 박해당한 후 사망하다

칭하이성 시닝시 리위쥔 등 파룬궁수련생은 2018년 6월 21일, 리위쥔(李玉君)의 집에서 법공부를 하다가 시닝시 국가보안, 청베이(城北)분국 국가보안, 생물원구(生物園區) 파출소 경찰에 의해 납치당했다. 대법 서적, 방송기, 연공 MP3 등 전부 강탈당했다. 리위쥔 노인은 풀려나 집으로 돌아와 보고 분개해서 “20년 동안의 나의 물건을 전부 강탈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노인은 병으로 쓰러졌는데, 더군다나 지역사회 인원이 미행, 감시를 진행해 85세인 그녀는 2018년 8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박해 원흉 장쩌민(江澤民)이 발동하고 유지한 이번 군체 절멸적인 박해에서 칭하이성 12명의 파룬궁수련생은 참혹한 박해를 당해 사망했는데, 역시 일억 명이 넘는 파룬궁수련생과 그들의 가족에게 극심한 고난을 가져다주었다. 동시에 무고한 좋은 사람에 대한 이번 박해로 중국의 사법시스템은 점점 칠흑처럼 어두워졌고 중공의 관리들은 점점 탐닉하고 악하게 변하고, 또 중국 사회의 도덕은 점점 조락되게 했다. 모든 중국인은 모두 이번 박해의 피해자이다.

파룬따파는 사람들에게 진선인(真·善·忍)의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쳤고 가정, 사회에 복을 가져다주었으므로 마땅히 표창을 받아야 한다. 파룬궁수련생이 바른 믿음을 견지함은 신앙의 자유이다. 그들이 진상을 똑똑히 알림은 피해자로서 공정함을 요구하는 것이고 사회의 양심을 수호하는 것이므로, 헌법과 법률의 보호를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선량한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박해는 모두 법을 위반한 범죄 행위로, 미래에 진상이 드러날 때 꼭 추소, 징벌을 받고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원문발표: 2021년 1월 2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1/1/25/4190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