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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위안 신뎬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로 사망한 리후이원의 더욱 상세한 상황

[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산시성 보도) 리후이원(李慧文, 남)은 당시 32세였고, 길고 네모난 얼굴에 눈썹은 날카롭고 눈은 밝았으며, 온화하고 말수가 적었다. 산시(山西) 중의학원을 졸업해 본과 학력인데, 원래 산시성 양취안(陽泉)시 광무국병원 의사다. 1996년에 타이위안에서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1999년 7월,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리후이원은 파룬궁 수련을 견지한 이유로, 두 차례나 노동교양 박해를 당했다. 두 차례 모두 신뎬(新店) 노동교양소에 감금됐다. 2003년 2월 26일, 리후이원은 신뎬 노동교양소에 의해 박해로 생명이 위독했다. 노동교양소에서는 책임을 미루기 위해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집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리후이원은 첫 번째로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은 기간에 신뎬 노동교양소 1중대에 감금됐다. 그곳에 감금된 대부분은 마약범이었고, ‘전향’을 거부한 일부 대법제자도 있었다.

2001년 7월, 1중대도 노동교양소 남쪽의 큰 비탈을 파서 운동장을 보수하는 일에 참여했다. 무더운 여름날에 당시 대법 수련생은 차를 미는 가장 힘든 일을 했다. 1중대와 서로 이웃한 마약범에 따르면, 그들은 1중대의 한 파룬궁수련생이 차를 밀 때, 늘 ‘얼마후(二馬虎)’라고 부르는 악독한 죄수가 괭이로 쫓아가며 구타하는 것을 보았는데, 구타당한 이 파룬궁수련생은 바로 리후이원이었을 것이다. 그 후 리후이원 자신이 말한 적이 있는데, 1중대에서 늘 악독한 죄수에게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酷刑演示:毒打
고문 재연: 혹독한 구타

매우 어려운 환경 중에서 리후이원은 굴복하지 않고 노동교양소에서 걸어 나왔다. 석방된 날, 1중대의 마(馬) 대장은 내심으로 그의 선량함과 강인함에 감탄해, 그를 위해 짐보따리를 들고 그가 노동교양소에서 나가는 것을 배웅했다.

하지만 현지 610과 노동교양소가 결탁해 리후이원이 집으로 돌아감을 허락하지 않고, 직접 그를 세뇌반으로 보내 또 박해를 진행했다.

세뇌반에서 리후이원은 박해를 저지하고 대법을 모함하는 선전판을 때려 부쉈다가, 또 사당에 의해 노동교양 처분을 받고 또 신뎬 노동교양소에 감금됐다.

어느 날, 신뎬 노동교양소에서는 외국의 모 종교의 이른바 ‘전문가’를 청해 대강당에서 전 노동교양소 인원에게 보고회를 진행해 파룬궁을 모독했다. 당시 일부 대법 수련생이 용감하게 일어나서 그 사람을 제지했는데, 리후이원도 그중에 있었다. 이 때문에 감옥경찰과의 쉬(徐) 과장은 그에게 전기봉으로 충격을 가했다.

酷刑演示:电棍电击
고문 재연: 전기봉으로 충격 가하기

약 2002년 여름, 신뎬 노동교양소에서는 또 한 차례의 이른바 ‘전향 공견(攻堅)’을 진행했다. 리후이원은 집중훈련대로 옮겨져 가중된 박해를 당했다. 리후이원은 박해를 저지하려고 결심하고 단식을 견지했다. 당시 집중훈련대 대장은 우(吳) 씨이고 지도원은 원래의 대장 궁쥔성(宮俊生)이었다. 집중훈련대는 궁쥔성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이 당시 신뎬 노동교양소에서 파룬궁을 박해한 제1선의 가장 사악한 사람은 약 3명인데, 3중대 대장 판리잔(樊立戰), 집중대 대장 궁쥔성, 3중대 지도원 리수궈(李樹國)였다. 노동교양소의 한 감옥경찰과 간부 말에 따르면, 이 세 사람은 장기간 제1선에서 박해를 진행했는데,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손을 댈 수 있다”고 말했다.

판리잔이 관리한 대대는 마약범 바오자(包夾: 수감자로 이뤄진 감시원)를 제외하고 전부 파룬궁수련생이었다. 판리잔은 교활하고 흉악해 ‘전향’한 파룬궁수련생이 가장 많았다. 이 때문에 사당에게 큰 공을 세워줬다. 그의 악행은 전문적인 자료로 쓰여져 산시성 사법국으로 선발돼 보내졌고, 매우 빨리 3대대 대장으로 승진됐다. 3대대에서는 3중대를 관할했다.

그 후 리후이원을 감시한 마약범이 폭로했다. “리후이원은 여러 날 단식을 진행했습니다. 후반기에 인사불성이 되어 구강에서 나온 냄새가 이미 심상치 않았고, 사람은 이미 임종에 가까웠습니다. 이때서야 노동교양소가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후, 그는 다시는 깨어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노동교양소의 통제가 가혹하고, 박해 수단 및 과정이 매우 은폐된 데다, 오랜 시간이 흘렀던 이유로 사정을 아는 사람이 보충하고 수정하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0년 7월 29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 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7/29/4097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