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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로 사망한 아내에 이어 남편 완윈룽도 억울하게 세상 떠나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헤이룽장 보도)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 솽청(雙城)구 파룬궁 수련생 완윈룽(萬雲龍, 1957년생)은 세 차례의 불법 노동교양 박해를 당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또 여러 차례 납치 감금을 당했으며, 사악한 중공(중국공산당)의 잔혹한 박해로 오랫동안 단 하루도 편히 보낸 적이 없어 심신에 매우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결국 지난 5월 20일 억울하게 사망했다. 그의 아내 왕리췬(王麗群, 48)도 이미 박해로 세상을 떠났다.

파룬궁 수련으로 새 삶을 얻다

완윈룽은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 각종 질병에 시달렸는데, 심각한 관상동맥성 심질환, 부정맥, 심장 간헐 증상, 간질병, 위궤양 등을 앓아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었다. 입술은 짙은 자색을 띠었고, 늘 구토하며 음식물을 먹을 수 없었고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심할 때는 1개월 동안에 두 차례 혼절하기도 했다. 그 기간에 여러 명의를 방문해 많은 돈을 썼지만 치료할 수 없었다. 하얼빈 의과대학2병원의 교수는 가족에게 “집으로 돌아가 장례를 준비하세요. 방법이 없습니다. 너무 젊어서 안타깝습니다”라고 유감을 전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37세였다.

그 후 먼 친척이 놀러 왔을 때, 파룬궁은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는 신기한 효과가 있으니 시험 삼아 해보라는 말을 들었다. 어떠한 치료 방법도 없고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완윈룽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링거를 때고 비행기를 타 광저우로 가서 중국에서 열린 마지막 파룬궁 학습반에 참가했다.

완윈룽이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설법을 듣고 보름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사람으로 바뀐 듯했다. 안색은 좋게 변했고, 입술도 그렇게 자색을 띠지 않았으며, 또 많은 음식물을 먹을 수 있었고 토하지도 않았다. 천천히 살이 붙고, 심장과 위장에도 다시는 어떤 불편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정상적으로 근무하고 집안을 보살필 수 있었다. 한 가족의 남편이자 아빠 그리고 아들이었던 완윈룽은 기적적으로 좋아져 집안 가장으로 다시 우뚝 일어설 수 있었다.

완윈룽은 파룬궁의 ‘진선인(眞·善·忍)’ 표준에 따라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하며 수련했는데, 친척과 친구들 모두 그가 변한 것을 느꼈다. 이전에는 오랜 병 생활로 성격이 좋지 않아 안절부절못했지만, 수련 후 착하고 겸손하며 온화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완윈룽이 솔직하고 성실하며 다른 사람을 기꺼이 도와주는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첫 번째 불법 노동교양 처분 받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다

하지만 사악한 중공은 1999년 7월 파룬궁에 대한 전례 없는 박해를 발동했다. 1999년 7월 22일, 솽청시의 많은 파룬궁 수련생이 성정부(省政府; 성의 최고 행정 기관)에 평화롭게 청원하러 갔는데, 완윈룽 역시 갔다. 그가 수련을 일찍 시작했고 당시 파룬궁 보도소장이었다는 이유로, 성 정부에서 납치돼 돌아왔는데, 당시 솽청시 위원회 서기 주칭원(朱淸文), 공안국 부국장 610 두목 장궈푸(張國富) 등은 완원룽을 현지 파룬궁 책임자라고 여겨 박해의 중점 대상으로 간주했다. 결국 그는 6개월 동안 구치소에 감금된 후, 2년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고 헤이룽장성 이몐포(一面坡) 노동교양소로 납치됐다.

노동교양소는 이차이 채석공장(一採石廠)이었는데, 죄수와 파룬궁 수련생들은 기차에 돌과 삼절지판(三節撬板)을 실었다. 돌마저 모두 철제 바구니에 담았는데, 바구니마다 50여kg이었다. 그리고 기차 위로 돌을 메서 올렸는데, 초강도의 노동이었다. 어깨의 살갗이 마찰로 상처를 입었고 뼈가 드러나기도 했다. 그 기간 가족은 주변 사람에게 부탁해 완윈룽을 보러 갔다. 노동교양소 직원은 “완윈룽은 너무 고집이 셉니다. 고문 기구를 모두 다 사용했으나 계속 (파룬궁을) 연마한다고 말합니다”라고 설명했다.

2000년 4월 29일 오후에는 흙을 멨는데 돌을 나르는 것보다는 좀 가벼웠다. 그러나 완윈룽은 바구니를 받을 때, 두 명의 하수인이 손으로 그의 얼굴 양측을 가로막고 바구니를 못 보게 하는 동안 3명의 일반 수감자가 큰 돌을 꽉 담은 두 개의 바구니를 한데 쌓아 놓고, 플랫폼 위에서 플랫폼 아래로 전혀 준비가 안 된 완윈룽의 등에 떨어뜨렸다. 완윈룽은 비명을 질렀고, 비명 때문에 또 구타를 당했다.

그렇게 완윈룽이 상처를 입은 후, 노동 현장의 대리 근무 중대장은 장뎬췬(張殿君)을 시켜 대대장 류밍장(劉明江)에게 보고하게 했다. 류 씨는 “그들이 완윈룽을 박게 한 것이 아니라 완윈룽이 바구니를 받을 줄 몰라서 그랬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파룬궁 수련생 완윈룽은 시달림을 당해 죽다가 살아났다. 일을 끝낸 후에는 또 바닥을 닦고 또 세워 두기 고문을 당해야 했는데, 벽을 마주해 바른 자세로 서서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움직이기만 하면 구타했다. 전문적으로 감시하는 일반 수감자가 있었고, 또 일부 일반 수감자를 배치해 혹독한 구타를 하게 했다. 채석공장에서는 무더운 6월에 모두 러닝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완위룽은 배불리 먹지 못해 몸은 여위어 양측 늑골을 볼 수 있었다. 악독한 경찰은 단지 일을 시켰을 뿐 물을 마시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고 그에게 가장 큰 돌 바구니를 메게 했는데, 천천히 걸으면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다.

中共酷刑示意图:殴打
중공 고문 설명도: 구타
2001년 5월, 완윈룽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법 공부를 하고 마음을 닦아 몸은 매우 빨리 건강을 회복했다.

두 번째로 불법 노동교양 처분 받아 사경을 헤매다

2001년 10월, 완윈룽은 기차를 타고 바이청(白城)으로 가다가 신분증이 없어 몸수색을 당했는데, 파룬궁 사부님의 경문이 발견됐다. 그 때문에 창춘 노동교양소에서 6개월 동안 불법 감금을 당했고, 5천 위안의 돈도 빼앗겼다. 담당자는 완윈룽에게 호주머니 속의 돈은 파룬궁 선전에 사용하는 경비라고 강제로 시인하게 했는데, 시인하지 않으면 ‘큰 괘에 올리기’ 고문으로 박해했다. 노동교양소의 박해를 완강히 거부한 그는 강제 단식과 3차례나 호스를 꽂고 농도가 짙은 소금물 주입을 당했다. 완윈룽이 주소, 이름을 얘기하지 않자, ‘큰 괘에 올리기’ 고문, 철창에 가두기, 발로 차기, 주머니로 때리기, 화장실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등으로 고문했다.

中共酷刑示意图:上大挂
중공 고문 설명도: ‘큰 괘에 올리기’ 고문
완윈룽은 파룬궁의 진선인(眞·善·忍)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3년의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았다. 노동교양소 당한 구타로 몸의 뼈와 살마저 떨어졌다가 붙었다. 잔인한 고문 학대를 당한 그는 정신적으로 극한에 다다라 자살하려는 생각도 했다. 2002년 5월, 악독한 경찰은 매우 큰 흙 주머니를 강제로 메게 했는데, 그는 지쳐서 각혈했고, 이후 몸이 차츰 쇠약해졌다. 그 후 또 차오양거우(朝陽溝) 노동교양소로 옮겨 계속 박해를 당했다.

2003년 사스(SARS) 기간 완윈룽은 박해로 인해 숨을 잘 못 쉬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심장은 매분 140번을 뛰었는데, 가슴에 물이 고이는 증상, 심장 쇠약 등 4가지 심각한 질병이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노동교양소 측은 책임질까 두려워 가족에게 전화 걸어 2시간 이내에 반드시 데려가도록 명령하며, 만약 죽으면 책임지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이 노동교양소에 도착했을 때, 노동교양소의 경비원은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응급처치를 하지 마세요. 이전에 나갔던 사람도 2만 위안의 돈을 썼지만, 죽어서 쓸데없는 돈만 썼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족은 사경을 헤매는 완윈룽을 친척 집으로 데려가 몸조리를 시켰다. 완윈룽은 처음에는 단지 누워서 파룬궁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들을 수 있었지만, 며칠 후에는 벽 위에 기대어 몇 분 동안 앉아 작은 숟가락으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그런 뒤에는 혼자 천천히 일어나 연공을 하고 대법 책을 잡고 볼 수 있었으며, 밀가루 음식, 밥 등을 먹을 수 있었다. 대법을 굳게 믿고 몸조리를 한 그는 3개월 후 다시 한번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그 광경을 본 친척과 친구 모두 “기적이다!”라고 말했다.

딸이 공갈 협박받고, 아내는 억울한 옥살이 박해 당하다

2006년, 솽청시 공안국은 새로운 한 차례 박해를 시작했다. 경찰차는 매일 완윈룽의 아파트 아래에 정차해 있었고, 놀란 가족은 그를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완윈룽은 어쩔 수 없이 집을 팔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일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2006년 9월 28일 저녁 5시쯤, 솽청 공안국 국가보안대대의 악인 퉁후이췬(佟會群)은 한 무리 불법 공무원들을 거느리고 하얼빈시 공안과 결탁해, 몇 대의 경찰차를 출동시켜 한 주택을 겹겹이 에워싸고 이곳에 거주하는 솽청 파룬궁 수련생 자쥔제(賈俊傑)를 납치하려고 했다.

9월 29일 오후, 공안국 무리가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는데, 몸을 피하던 자쥔제는 2층에서 넘어져 상처를 입었다. 퉁후이췬은 부하를 지휘해 자쥔제의 어머니 쌍구이전(桑桂珍)을 납치했다. 당시 이곳으로 친척 방문을 온 완윈룽의 아내 왕리췬 및 딸 완메이자(萬美佳) 역시 강제로 솽청 제2구치소로 납치해 박해를 진행했다. 솽청 공안국에서 한 여경은 끊임없이 왕리췬에게 딸의 학업과 일생 모두 이곳에서 완전히 망가질 것이라고 공갈 협박했다.

구치소에 도착한 후, 악독한 경찰은 창문이 없는 폐쇄식 철창 심문실에서 딸을 쇠의자 위에 채운 채 심문했다. 퉁후이췬 등은 전등을 켜지 않고 네 대의 초를 켜서, 음침하고 공포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딸을 공갈 협박해 자신들의 뜻에 따라 서명하게 했는데, 함께 납치될 때 한 수련생이 건물에서 뛰어내린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밀려 떨어진 것이라고 말하게 했다. 완메이자가 만약 그들의 뜻에 따라 하지 않는다면, 컴퓨터로 선전했다는 죄를 씌우겠다고 협박했다.

4시간이 넘는 심문 시간 동안, 왕리췬에게 딸을 매우 걱정해 오후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정신이 극도로 긴장된 상태였다. 딸이 압송돼 돌아오자,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그 뒤 몸에 불편한 증상이 나타나면서 말을 할 수 없었다. 구치소 경찰에게 보고해 구치소 의사를 찾았지만, 의사가 구치소에 없었는데 말로는 의사가 다른 곳에서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가족은 이미 위험한 상태라 빨리 병원에 보내자고 말했지만, 경찰은 동의하지 않고 반드시 구치소 의사가 본 다음에야 병원에 보낼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한 시간이 넘어서야 도착한 의사는 인중을 누르고 또 겨드랑이 아래를 누르다 20분 만에 병원을 이송을 결정했고, 딸이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가려 했는데 여경 진완즈(金皖智)에게 저지당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응급처치 최적 시기를 놓쳐 왕리췬은 그렇게 억울하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튿날 또 왕리췬의 딸을 심문해, 강제로 그들이 써 놓은 기록 위에 지장을 찍게 했는데, 그 내용은 구치소 경찰이 신속히 일을 처리해 의사가 매우 빨리 왔다는 것이었다. 완메이자가 동의하지 않자, 강제로 손을 잡아당겨 지장을 찍게 했다. 국가보안대대에서는 딸을 위협하며 “우리는 당신을 풀어줄 수도 있고, 다시 붙잡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퉁후이취 무리는 적극적으로 사실을 은폐해 진상을 덮어 감추는 한편, 유언비어를 퍼뜨려 파룬궁에 대해 대 수색을 진행한다고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왕리췬의 가족에게 되도록 빨리 시신을 화장하라고 공갈 협박했다.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가족은 왕리췬의 시신을 화장하려 했을 때, 순찰 경찰대대의 한 부대장이 경찰을 가득 실은 네 대의 미니버스를 몰고 와서 직무를 집행했다. 당시 에워싸고 구경하는 군중이 매우 많아서인지 중공의 사악한 무리는 마음이 켕겼다. 사악한 여경 진완즈는 줄곧 시신 주변을 떠나지 않고 시신을 용광로에 넣는 것을 보고서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목격자에 따르면, 사망자의 목 오른쪽에 부상이 있었고 얼굴은 검푸른 색을 띠었다. 이 일에 참여한 한 경찰은 “이번의 일은 망했어요. 만약 건물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없고, 한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1만 위안의 장려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로 불법 노동교양 학대당하다

2011년 11월 13일, 완윈룽은 다른 수련생의 집에서 국내 배상법을 알아본 일 때문에 헤이룽장성 공안청, 하얼빈시 공안국과 솽청시 공안국의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됐다. 그리고 호주머니 속의 2300위안의 난방비를 강탈당했고, 제1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강제로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다른 수련생들의 이름을 말하게 하기 위해, 구치소의 악독한 경찰은 각 감방의 죄수에게 지시를 내려 감방 안의 파룬궁 수련생을 차례로 돌아가며 혹독한 구타를 가하게 했다. 5호 감방의 죄수 차오즈자(曹志家)는 파룬궁 수련생 완윈룽에게 강제로 이름을 말하도록 핍박하면서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신발 양측을 세워 머리를 향해 찍었고 또 온밤을 당직 서도록 하며 잠자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2년의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은 완윈룽은 쑤이화(綏化) 노동교양소로 납치돼 계속 박해를 당했다. 가족 면회 시 완윈룽의 눈가가 시퍼렇게 멍들었고, 정상적으로 걷지 못하며, 말소리에 매우 힘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불법 감금당한 기간에 전향(파룬궁 ‘진선인’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것)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기봉으로 충격 가하기, ‘큰 괘에 올리기’ 고문, 발로 차고 주먹으로 치기 등 각종 박해를 당한 사실을 밝혀졌다.

酷刑演示:电棍电击
고문 재연: 전기봉으로 충격 가하기
감금 기간 완윈룽은 두 차례 호흡곤란으로 병원에 이송돼 검사받았는데, 폐수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가족의 수많은 노력으로 2013년 4월 25일 완윈룽은 집으로 돌아왔다.

핍박에 못 이겨 유랑생활을 하고 억울하게 사망하다

2016년 5월 6일 오후, 십여 명의 경찰은 하얼빈시 후란(呼蘭) 리민(利民) 개발구 위안자 후이첸루(袁家回遷樓)에 사는 완윈룽을 납치했다. 그리고 조각기, 파룬궁 사부님의 법상, 모든 대법 서적, 만 개가 넘는 작은 조롱박 장신구, 컴퓨터 2대, 1만 위안이 넘는 현금, 전기 오토바이 한 대, 접는 자전거 한 대, 완전히 새로운 호텔 용품 몇 박스, 개인 물품 등을 강탈했다.

완윈룽은 경찰에 의해 강제로 검은 머리 씌우개가 씌워진 채 불법 납치됐다. 뒤이어 솽청구 유치장으로 옮겨졌고, 7일 후 솽청구 구치소(이 기간에 줄곧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았음)로 옮겨져 수감됐다. 가족은 완윈룽과 연락이 되지 않아 관할구 파출소로 가서 상황을 문의했는데, 파출소에서는 시 국가보안대대에서 그를 붙잡았다고 말했다. 시 국가보안대대로 가서 문의하자, 유치장[야쯔취안(鴨子圈)]으로 찾아가게 했다. 가족이 또 유치장으로 가서 찾았는데, 유치장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5월 20일쯤, 구치소 내에서 완윈룽은 가슴이 답답해 정상적으로 숨을 쉴 수 없어, 솽청 응급센터와 결핵 병원으로 끌려갔다. 검사 시 심박 수는 140이었으며 심장 쇠약, 관상동맥성심질환, 가슴에 물이 고이는 증상, 폐수증 진단이 나왔고, 또 9일 동안 주사를 맞아 응급처치를 받았다.(이 기간에 여전히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았고 또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음) 그 후 가족이 변호사를 선임해 담당자를 면회하고 또 소장을 찾았을 때, 소장은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라고 말했다.

6월 4일, 완윈룽은 헤이룽장 전염병 병원(후란구)으로 압송됐다. 5월 17일, 가족은 완윈룽이 솽청 구치소에 감금당한 후 ‘업무담당자’(실질적으로 위법 범죄를 저지른 사람임) 솽청 국가보안대대장 샤오지톈(肖繼田), 부대장 왕위뱌오(王玉彪)를 수차례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줄곧 문을 닫고 만나주지 않았으며, 전화도 받지 않았다.

완윈룽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 가족은 즉시 석방해 집에서 보살필 수 있도록 요구했다. 샤오지톈은 석방할지는 자신에게 결정권이 없다고 말하며, 가족에게 성급 반(反)사교협회의 책임자 양보(楊波, 성 공안청 국가보안 부처장)를 찾게 했다. 가족은 이 사람의 직장을 찾아갔는데, 사무실에서 양보에게 전화를 연결해주었지만, 자신은 양보가 아니며 또 이 사건을 책임지지 않는다고 거짓말했다. 게다가 경비원을 시켜 가족이 다시 전화 통화를 못 하게 했다. 완윈룽이 솽청에서 감금당한 기간에 샤오지톈과 양보가 모두 심문한 적이 있는데, 협력하지 않는 완윈룽의 태도에 매우 불만을 품고 자신들을 화나게 하면 가족에게까지 피해를 주겠다고 공갈 협박한 적이 있다.

완윈룽이 가장 위험한 처지에 처한 상황에서, 가족 친지들은 여러 방면의 주선을 거쳐서야 그를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돌아온 후, 완윈룽은 장시간 고문 박해를 통한 정신적 공포 때문에, 현지에 있지 못하고 고향을 멀리 떠나 유랑 생활을 했다.

완윈룽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져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결국 2020년 5월 20일 90세의 부친을 남겨두고 사망했다. 부친은 또 한 명의 자식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매우 비통해했다.

완윈룽의 여동생 완윈펑은 2011년 11월 헤이룽장성 첸진 노동교양소로 납치돼 오랫동안 박해를 당하면서 몸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2016년 그녀는 오빠가 또 한 차례 납치를 당하고, 그녀의 아들 궁쭌(鞏尊)이 파룬궁을 박해한 원흉 장쩌민(江澤民)을 고소한 것 때문에 또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로 인해 그녀의 심신 상황은 극도로 악화돼, 겨우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완윈룽의 어머니 장구이친(張貴琴)은 파룬궁 박해라는 이번 큰 재난 때문에 아들이 박해를 당할까 걱정하다가 정신적으로 감당하지 못하고 역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원문발표: 2020년 6월 1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 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12/40759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