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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율검사위원회 부주임 살해당하고 그의 아내가 장쩌민 고소

[밍후이왕] 올해 73세인 허난성(河南省) 난양시(南陽市) 자오원슈(趙文秀) 여사는 2015년 7월 1일에 최고인민검찰원에 우편으로 고소장을 부쳐 파룬궁을 박해한 원흉 장쩌민을 고소했다.

자오원슈와 남편 장취안더(張全德)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장쩌민 집단에 의해 박해를 당했다. 장취안더는 박해로 사망했고 자오원슈는 여러 차례 불법 감금당했다.

장취안더, 남, 향년 67세, 전 난양시(南陽市) 워룽구(臥龍區)위원회 기관의 당위원회 부서기 겸 기율검사위원회 부주임이다.

다음은 자오원슈가 고소장에 쓴 고소이유이다.

나는 체질이 약하고 잔병이 많았던 까닭에, 1996년 10월경 다른 사람이 파룬궁을 소개해줘 수련하기 시작했는데 연공을 한 뒤 전신의 질병은 전부 사라졌다. 나의 대법학습은 많은 글자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남편 장취안더(張全德)에게 물어야 했다. 묻는 횟수가 많아지자 그도 파룬궁에 대해 초보적인 인식이 있게 되었고 파룬궁이 확실히 좋은 것임을 느꼈다. 그는 매우 나를 지지했다.

1998년, 그는 갑자기 뇌혈전에 걸려 전신을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틀어주었다. 그는 한 번을 들었는데, 일주일 만에 침대에서 일어나 활동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그도 파룬궁을 배우고 연마하기 시작했다. 파룬따파 수련은 그의 건강을 매우 빨리 회복시켰고 심신에 이로움을 얻게 했다. 퇴직한 뒤, 구(區) 위원회기관에서는 늘 전화를 걸어 의약비를 결산하러 가라고 통지했다. 그는 “나는 파룬궁을 연마한 뒤 약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병이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1999년 7월, 장쩌민(江澤民)은 파룬궁에 대해 공개적으로 광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우리 집의 평화롭고 상화하던 생활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장취안더는 수련을 포기하지 않고 확고하게 ‘진ㆍ선ㆍ인(眞ㆍ善ㆍ忍)’을 믿었는데 이를 이유로 경찰로부터 끊임없이 교란과 박해를 당했다. 16기 인민대표대회 기간, 난양(南陽) 워룽(臥龍)공안분국, 처잔로(車站路)파출소의 악독한 경찰은 거의 매일 마다 우리 집으로 와서 교란해 우리 가정은 주야를 불문하고 평안할 수 없었다.

2001년 섣달 15일 저녁, 장취안더는 난양시 정류소 파출소 경찰에게 끌려갔다. 이튿날까지 감금당하고 또 팡청현(方成縣)구치소로 보내져 1개월 동안 불법 감금당했는데, 그 후 또 난양시 제1구치소로 보내졌다. 자녀들은 그의 아버지를 하루 빨리 출소시키기 위해 도처에서 연줄을 찾아 관계를 맺고 활동했는데, 합해서 만 여 위안을 쓰고 64일 동안 감금해서야 풀려났다.

남편 장취안더는 풀려날 때, 온몸에 황선(黃癬) 증상이 생겨나 이미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뒤로는 집에 있었는데, 정류소 파출소의 경찰은 늘 집으로 와서 교란했다. 특히 16기 인민대표대회 후, 경찰은 매일 왔다. 장취안더는 집에서도 신체와 정신적으로 이중의 학대를 감당해야 했는데 몸은 줄곧 회복되지 않았다.

2003년 1월 15일 점심, 장취안더는 또 워룽 분국의 악독한 경찰에게 끌려갔는데, 여전히 그에게 파룬궁수련을 포기하도록 핍박했고 그로 하여금 대법을 욕하고 사부님을 욕하도록 했다. 나의 남편 장취안더는 말했다. “나는 파룬궁을 연마해 좋은 신체를 갖게 됐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해도 대꾸하지 말며 각 방면에서 매사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하도록 가르치시는데 어디에 잘못이 있습니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나 자신은 분명합니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좋습니다!” 그날 저녁 워룽분국에서는 또 가족에게, 구치소로 다시 보내겠다고 위협했다. 자녀가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또 2천 위안을 갈취당해서야 풀려나 돌아왔다.

난양 워룽 공안분국의 여러 차례의 교란과 불법 감금박해로 인해, 장취안더는 2003년 음력 4월 초 갑자기 기절하여 쓰러져 곧 근방에 있는 난양시 위생학교병원에 보내 응급처치를 했다. 보름 동안 매일 3천여 위안이 들어가는 의약비는 입원병원과 직장의 계산이 서로 맞지 않아 의약비를 결산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6만여 위안을 썼다. 집에는 돈이 없었고 결국 16일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향년 67세였다.

장쩌민 집단이 나를 박해한 경과:

1999년에 장쩌민은 잔혹하게 파룬궁에 대해 박해를 진행했는데, 나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나는 연공하는 곳으로 가서 한 바퀴 한 바퀴를 돌면서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2003년 10월, 나는 톈안먼에 가서 붙잡혀 하이뎬구(海澱區)감옥으로 보내졌다가, 또 창핑(昌平)감옥으로 옮겨져 5일 동안 불법 감금당했다. 내가 각혈했던 까닭에, 경찰은 전염병이 있다며 나를 풀어주었다. 나는 또 청원하러 갔는데, 또 나를 감금해 수갑을 채우고는 벽 쪽에 서 있도록 했다. 나는 꼬박 2일 동안 서 있다가 기절했다. 그리고 또 나를 3일 동안 감금해서야 풀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경찰은 늘 찾아와서 교란했다. 어찌할 방도가 없게 되어 나와 남편은 유랑생활을 했다. 2001년 막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남편은 붙잡혔다. 경찰의 여러 차례 납치는 남편의 건강한 몸을 빼앗아갔고 생명을 빼앗아갔다.

2014년, 나는 거리로 가서 대법의 아름다움과 내가 심신에 이로움을 얻은 상황을 알렸다가 경찰에게 납치됐다. 난양시 광우로(光武路)파출소에 의해 하루 동안 불법 감금당했다. 어떤 경찰은 흉악하게 “당신들은 이렇게 연세가 많은데 집에 있지 않고 나와서 뭘 합니까? 공산당은 당신들을 총살해야 마땅합니다.”고 말했다. 아들이 들은 뒤 그들에게 담배를 사주어서야 나를 풀어주었다.

문장발표: 2015년 8월 1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www.minghui.org/mh/articles/2015/8/17/31426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