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사존께서 설법하시던 진귀한 시간을 회상

글/치치하얼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0월 3일】

그것은 93년 초의 일이다. 밤에 두 차례 꿈에서 깼는데 검은 장포에 상투를 틀고 허리에 비단 띠를 두르고 몸 뒤에 보검을 찬 매우 키가 큰 도사를 똑똑히 보았다.

치치하얼시 전기문화센터에서 사존의 설법을 경청

93년 7월 16일은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나는 운 좋게 사부님의 치치하얼 학습반에 참가했다. 내가 건장한 체격에 자비롭고 위엄 있는 사부님을 뵈었을 때 마치 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었다. 알고 보니 사부님이 바로 내가 꿈에서 뵈었던 그 도사였으며 내가 이 법을 얻게 하기 위해 미리 나를 찾으셨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매일 저녁 우리에게 설법해주셨다. 사부님께서는 매번 30분 전에 회의장에 도착하셔서 수련생들이 제출한 문제를 해답해주셨으며 정각에 강의를 시작하셨다. 내가 당시 제출했던 쪽지는 “저는 어쩔 수 없는 상태엣 온갖 난잡한 것들을 청해 소위 불당을 세웠습니다. 오늘 파룬궁을 수련하게 되면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이었다. 이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당신이 일념만 움직이면 순간에 청리해준다.”라고 해답해주셨다.

매(梅)씨 성을 가진 언니가 있었는데 사부님 덕분에 신체가 회복되자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어 사부님께 200위안을 부쳐드렸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원래 주소로 돈을 되돌려보내셨다.

수업을 받던 기간에 나는 전기문화센터 홀에서 사부님을 뵈었는데 사부님께서는 깔끔한 차림이셨다. 흰 색 반팔 셔츠에 일반적인 회색 바지를 입으셨다. 나는 속으로 사부님께서는 아주 소박하시구나 하고 느꼈다.

법을 얻기 전 나는 각종 질병을 앓았고 전국 각지의 큰 병원에 모두 가보았으나 호전되지 않았다. 대법을 수련한 후 모든 병이 다 사라졌고 나는 병의 고통과 인생의 미망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존의 장춘 학습반에 참가

94년 4월말 나는 동수와 함께 장춘에 갔다. 장춘 길림대학의 명방궁(鳴放宮)에서 재차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다. 기간은 열흘이었는데 인원이 많은 관계로 아침, 저녁 두 개의 반이 있어 사부님의 노고가 많으셨다. 사부님께서는 매일 자택에서 버스를 타고 길림대학에 오셔서 설법하셨다.

한번은 내가 대학교정 수풀 속 작은 길을 걷고 있었는데 멀리 사부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격동되어 말했다. “아이구, 스승님!” 그러자 사부님께서는 자상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는데 나는 마치 무엇에 억제된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루는 치치하얼 수련생 왕위군(王偉君)이 강단으로 사부님을 찾아가 다년간 병을 앓고 있던 자기 누이의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말했다. “사부님, 제 동생의 병을 좀 봐주십시오.” 사부님께서 사진을 받아 손으로 두어 번 흔드시고는 돌려주셨다. 그는 또 물었다. “여동생이 연공할 수 있습니까?” 사부님께서는 “물론입니다.”라고 대답하셨다. 지금 그의 동생은 매우 건강하다.

학습반이 끝날 때 각지 수련생이 나누어 사부님과 단체사진을 찍었다. 명방궁 계단에 사부님께서 다른 사람들과 다 서 있는데 단지 한 수련생만이 손에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었다. 이때 사부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팡이를 내려놓으세요.” 그 수련생은 오성이 매우 좋아 즉시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앞으로 걸어보세요.” 그는 곧 걸었고 양쪽에 있던 수련생들이 그에게 길을 비켜주며 박수를 쳤다. 그 수련생은 걷다가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많은 수련생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하얼빈 수련생들이 사부님과 사진촬영을 할 때 나는 사부님을 뵙고 싶었고 사부님 옆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사부님께서 가벼운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이곳에 서세요.” 하지만 다른 수련생이, 나중에 사진이 인화되면 어디 가서 찾겠느냐고 하면서 서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주저하다가 진귀한 순간을 놓쳤다.

나중에 오빠가 사부님을 찾아가 말했다. “선생님 모두들 사진을 찍었는데 제가 늦게 왔습니다. 저도 선생님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그럼 혼자 오지 말고 그곳 사람들과 함께 같이 찍읍시다.” 그래서 우리 지역에서 학습반에 참가했던 수련생 전부가 사부님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번에 나는 정말 바라던 바를 이루었고 마침내 사부님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이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매번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굽이치며 사존의 음성과 미소가 눈앞에 떠올라 나를 더욱 정진하도록 격려한다.

대련 학습반에 참가

94년 7월, 나는 한 수련생에게 사부님께서 대련에서 학습반을 여시니 함께 가자고 했다. 하지만 그 수련생이 갈 때에 나더러 몇 시에 갈 것인지 물었는데 나는 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내가 가지 않아도 자신은 가겠다고 했다. 나중에 그녀가 몇 장의 차표를 샀는데 좌석이 하나 남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우연히 나를 만났을 때 자리가 하나 남았으니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가겠다고 했다. 돌아와 남편과 상의한 후 또 법을 들으러 가겠다고 했더니 남편은 가고 싶으면 가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대련에 도착했다. 내가 강의를 듣던 위치는 2층이었는데 마침 굉장히 더운 여름이라 나와 거의 모든 수련생들은 모두 강의를 들으면서 부채를 부쳤다. 때문에 집중해서 법을 들을 수 없었다. 바로 이때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부채를 내려놓아도 됩니다. 부치면 부칠수록 덥습니다.” 나는 오성이 낮아 여전히 몰래 부채질을 했다.

하루는 강의 전 어느 수련생이 방송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프랑스 수련생이 사부님을 청해 아이의 무도병을 고쳐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그 아이의 사진이 있나요?” 하고 물었다. 없다고 하자 사부님께서는 “그럼 당신 집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세요.”라고 하셨다. 다음날 그의 가족이 장거리 전화를 해서 알려주기를 “어제 커다란 붉은 불덩어리가 집에 들어오더니 아이가 나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들 흥분했으며 수련에 대한 신심이 더욱 굳건해졌다.

매번 학습반에는 좋은 사람과 좋은 일이 매우 많았다. 지갑, 목걸이, 손목시계 등 분실물은 모두 주인을 찾아주었다. 사부님께서는 매번 말씀하셨다. “분실한 물건이 있으면 수업이 끝난 후 가져가세요.”

광주 마지막 강습반에 참가

광주에 가기 전에 나는 광주의 물가가 비싸 먹고 자는 비용이 많이 든다고 들었다. 자금이 부족하긴 했지만 또 강의를 듣고 싶은 생각에 나는 한 수련생과 같이 가기로 했다. 우리 둘은 라면과 과자 한 상자를 짊어지고 길을 떠났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우리가 머물 곳을 안배해놓으셨다. 광주 중의학원은 마침 학생들의 방학기간이었는데 세 사람이 두 침대에서 자면 하루에 겨우 20위안이 들었다.

당시 중의학원 기숙사에 투숙한 사람은 거의 다 학습반에 참가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사람들과 교류 중 어떤 수련생이 우리가 라면과 과자만 먹는 일을 알았다. 며칠이 지나 어느 수련생이 내게 “내가 당신들의 상황을 사부님께 말씀드렸더니 사부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나도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밤 사부님께서는 광주 상공에 일련의 파룬을 쳐내셨고 우리 중의학원에 있던 모든 수련생들과 두 명의 속인을 포함해 모두들 이 장관을 보았다. 이 수승한 장면은 두 시간 가량 지속되었다. 사람들은 격동하여 모두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고 환호작약했으며 나중에는 함께 연공했다.

학습반 전 기간에 나는 줄곧 대법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이 나의 왼쪽 위 상공에서 울리는 것을 느꼈다. 학습반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열차에는 전부 학습반에 참가한 수련생들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분위기가 매우 상화롭고 친근했는데 나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문장발표 : 2008년 10월 3일

문장분류 : 중국소식>온고명금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8/10/3/18704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