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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의 안양행을 회억하다

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9월 7일] (당시 사부님을 직접 만나 뵈었던 동수의 회억에 근거하여 정리)

1997년 9월 11일 위대한 사부님께서는 옛도시인 하남성 안양시에 오셨다. 나는 평생토록 잊지 못할 지난 일들을 글로 적어서 동수들과 함께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를 감수해 보는 동시에 그 한 시기 범상치 않았던 세월을 견증하려 한다.

* 사부님께서 안양에 오시다

1997년 9월 10일 저녁 9시경 사부님께서는 일행 세 사람과 함께 안양에 도착하여 신대지 호텔 2번 건물에 투숙하셨다. 투숙 체크인을 할 때 대리로 당직을 맡았던 여 접대원이 사부님을 알아 보았다. 그녀는 그 당시 수련하지는 않았지만 부모 모두 대법제자였으므로 집에서 사부님의 법상과 사진을 보았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수행한 제자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대략의미) 모두들 보시요, 이 아가씨가 얼마나 기뻐하는가.

여 접대원은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의 부모에게 전화로 알렸더니 그들은 놀랍고도 기뻐하면서 또 반신반의 하였다. 사부님께서 정말로 안양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부부는 두말없이 호텔에 달려가서 사부님을 뵈올려고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딸이 똑똑하게 확인한 것인지, 이렇듯 기쁜 일이 자기네들에게 생겼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듯 믿기 어려운 심정과 격동된 마음으로 사부님 방문을 가볍게 노크한 뒤 문을 열고는 쭈삣거리면서 사부님께 여쭈었다. 당신은 이 선생님이십니까?

동수들은 웃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안양 동수들은 1996년에야 겨우 법을 얻었고, 정주에 살던 수련생이 안양에 와서 홍법하기 전에는 단 한사람만 광주 학습반에 참가했을 뿐이었다. 그 사람마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정주 수련생이 와서 이 상황을 안 후, 매우 큰 우여곡절을 통해서야 학습반에 참석했던 수련생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누구도 사부님을 본 사람이 없었고, 그러다보니 사부님을 뵙고도 알아 보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났던 것이었다.

사부님께선 이튿 날 오전 8시전에 그들을 만나 보시겠다고 대답하셔서 그들은 마음 놓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사부님을 수행해 온 수련생이 아래층까지 따라 내려와서 사부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내지 말라고 재삼 부탁했다. 그들 두 사람은 희열을 참을 수 없었는데, 집으로 돌아 간 후 당시 보도참의 한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부님을 뵈러 함께 가기로 약속 했다.

뒷 날 11일 새벽 5시 넘어 그들은 호텔로 가서 문을 두드리고 싶었지만, 사부님께 페를 끼칠 것 같아 아래층 휴게실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사부님께서 문을 여시자 그들은 얼른 다가가 사부님께 허스하면서 문안을 드렸다. 사부님께서는 당시의사건의 일부 상황을 말씀하시면서 수련생들에게 꼭 법공부를 많이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아침 7시 넘어 사부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당으로 가셔서 식사를 하셨다.

아침 진지를 드신 후 사부님께서는 떠나시려고 하셨다. 그들은 아쉬운 마음으로 사부님을 송별하였다. 사부님께서는 차에서 > 한 권을 꺼내시어 사부님을 가장 먼저 알아본 여 접대원에게 주셨다. 또 아주 정교하게 만든 파룬장도 꺼내어 현장에 있던 수련생들에게 주신 뒤 안양을 떠나셨다. 그 소식을 들은 동수들은 사부님께서 어디에 가셨느냐고 재차 물어보았다. 그들은 그때의 기쁨과 격동에 휩싸이다 보니 묻는 것을 잊었을 뿐더러 또 감히 물어 보지도 못하였다.

악비고향에 시편을 남기다.

그 해 겨울 탕음현 정강촌 악비고향에서 사부님의 시가 새겨진 비석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갑자기 접하게 되어 가 보았더니 과연 정말이었다.

현지 동수와 악사의 관리원을 찾아서 알아본 결과 9월 11일 아침 사부님 일행은 안양시를 떠난 뒤 탕음현으로 가셔서 먼저 현성에 있는 악비묘에 들리신 후 오후에 악비 고향인 청강촌으로 가셨던 것이었다.

사부님을 뵈었던 관리원의 구술에 따르면 사부님은 뜰안에 들어 서시자 앞뜰, 뒤뜰, 집안팎을 샅샅이 훝어 보시면서 아주 세심히 살펴보셨고, 아울러 뜰안에 있는 향로에 향을 피우신 뒤 제를 지내셨다고 한다. 뒤뜰에 수리 확건에 쓸 나무와 돌 등 재료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시더니 사부님께서는 선금을 기부 하셨다.

관리원은 사부님께 성함을 남기시도록 권유드리면서, 규정에 따르면 기부금이 일정한 액수가 되면 비석을 세워 기념으로 남기는데 많이 낸 사람은 단독으로 세워드린다는 설명을 해 드렸다. 하지만 당시 사부님께서는 명함을 남기지 않으셨기에, 사부님께서 차에 오르실 때 관리원은 문바깥까지 배웅하면서 명함을 남겨 줄 것을 다시 제기하였다. 그러자 사부님께서는 잠시 생각을 하시더니 공책에서 종이 한 장을 찢어서 그에게 주었다. 종이에는 시 한 수가 있었는데 바로 사부님께서 후에 발표하신 >이다.

관리원은 사부님께서 떠나신 후 석공을 시켜 그 시를 비석에 새겼다. 자그마한 비석에 글씨도 사부님의 글씨체가 아니었다. 후에 대법제자들은 이 일을 알게 되어 사부님의 글씨체로 커다란 시비를 공경스럽고 단정하게 악사정문 앞의 동쪽에 세워 놓았다.

사부님께서 안양에서 수련생들을 접견 하실 때 (대략) “나는 안양과 인연이 있습니다. 나는 송대에 탕음에 있었습니다.”라고 하시던 사부님의 말씀이 번개처럼 우리의 미혹을 벗겨 주었다 !

안양의 대법제자들은 법공부를 많이 하라는 사부님의 교시에 따라 단체 법공부 열조를 빠르게 일으켜, 대법에 대한 인식이 부단히 제고되었으며, 씬씽도 부단히 승화 되었다. 1999년 4월 25일 이후 안양시 악당 요원들은 상급 사악의 요구에 배합하여 사단을 일으키고 구실을 만들어서 시비석을 넘어뜨렸다. 당시 당지의 많은 대법제자들과 외지의 대법제자들이 가서 비석을 보호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1999년 7월 20일 박해가 시작된 후 사악한 악도들에 의하여 망가지고 말았다.

하지만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으며,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대법제자의 신념은 어떠한 힘도 무너뜨리지 못하리라!

문장발표 : 2006년 9월 7일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6/9/7/137272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