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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께서는 난(難)이 없지만 우리를 구도하시기 위해 고생하신다

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5월 22일] 사존님께서 국내에서 법을 전하고 계실 때, 나는 아직 수련에 들어서지 않은 상태였다. 그 당시 나는 호기심이 아주 많아 희기한 일을 들추어내는 것을 즐겼고 기공책이나 수련에 관한 일부 책도 좀 읽었다. 그때 기공 과학 연구회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나는 각 문파의 기공에 대한 상황도 적지않게 알게 되었는데, 파룬궁이 좋다는 것은 그때 알게 된 것이었다. 파룬궁은 다른 기공과는 달랐고, 사존님도 다른 기공사들과는 아주 달라서 사람들에게 너무나 상화하고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존님의 강대한 자비가 나를 이끌었는지 비록 그 당시에 수련은 하지 않았지만 사존님의 신변에서 사업하는 사람들과 사존님의 제자들이 몹시 부러웠다. 그래서 그들과 접촉할 수 있기를 바랬고 파룬궁을 요해하길 바랬다.

* 일정한 주소가 없었고, 침대도 없이 다만 기다란 쇼파 밖에 없었다

파룬궁 노수련생들은 사부님께서 베이징에서 법을 전하실 때 일정한 주소가 없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때는 집 사는 게 유행하지 않았고, 직장에서 분배하여 주었기에 집이 아주 부족했다. 사부님 신변에서 일하는 사업 일군들 대부분 부유한 편이 아니었으며 사존님 댁도 베이징에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사부님을 뵈었던 곳은 사존님의 친척집이었다. 아주 평범한 두칸짜리 단층집으로 바깥방은 사부님의 침실겸 객실로 침대도 없이 기다란 쇼파만 하나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때 사부님께서 이런 곳에서 어떻게 주무시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 신변의 사업 일군들은 이 때문에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사부님께 합당한 곳을 찾아 드리려고 애썼으나 오랫동안 찾아내지 못했다.

후에 한 수련생의 집에 거처하시게 되어 사부님의 거주 조건이 약간 개선 되었다. 그 수련생의 어르신들은 자식을 따라 외국으로 떠나 집은 비어 있었다. 그래서 사존님께서 안방을 차지하시고 바깥방은 사업 일군들과 수련생들이 오가는 곳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때 사업 일군이든 수련생이든 또한 기공 애호가이든 막론하고 언제나 사존님을 에워싸고 있어서 사존님은 휴식을 취할 틈이 없으셨다. 하지만 사존님은 끝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자비롭게 웃으셨다.

몇 년전 국내 텔레비전에서는 사존님께 ‘호화로운’ 주택이 있다는 요언을 날조하였다. 그 ‘호화로운’ 주택의 실내장식을 보면 사존님 댁이 아니란 것을 쉽게 보아낼 수 있다. 나는 집안에 놓인 물건들 중에는 불상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불상은 사존님께서 친히 조각하신 것인데 후에 어느 한 제자에게 주었다. 이 일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사존님은 동북에도 그럴듯한 주택을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 사존님 일가는 창춘시 해방대로의 한 낡은 층집에서 사셨다. 한 번은 전기합선으로 불이 났을 때 이웃집들 모두 불에 탔지만 사부님 댁만 불이 붙지않고 그대로 있었다. 이 소문은 그때의 수련생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고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 셔츠는 기워 입으셨고, 공공버스를 탈 차비가 없어서 걸어 다니셨다

사존님이 베이징에서 법을 전하실 때 경제사정이 아주 어려웠다. 한 수련생은 사존님께서 안에 입고 계신 셔츠가 기운 것임을 보았다. 법을 갓 전하기 시작하셨을 때 사부님께서는 자금을 모으기 위해 공공버스조차 탈 돈을 지니지 않으신채 걸어서 다니셨다. 가장 먼저 > 책을 출판했을 때의 일이다. 사부님께서는 책의 출판을 위하여 수련생이 소개한 사람에게서 돈 2만위안을 빌리기로 하셨다. 출판하기 위해서 사부님께서는 많은 것을 바치셨는데 이 일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수련생들이 시름없이 법공부와 연공을 할 수 있도록 사존님께서는 수련생들이 바치는 돈은 일체 받지 않으셨고, 사부님 혼자서 묵묵히 감당하고 계셨다.

그때 파룬궁은 기공 과학 연구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늘 돈을 바쳐야 했다. 학습반을 꾸려서 받은 학비 중 많은 부분은 주최측에 바쳐야 했고, 나머지는 각지에 가서 학습반을 꾸릴 때의 숙박비, 오가는 차비,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사업 일군의 봉급(어떤 사업 일군은 생활 내원이 없었다)으로 지불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광저우로 가서 학습반을 꾸릴 때는 사업 일군들이 라면을 아주 많이 갖고 갔는데 그곳은 물가가 비쌌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에 베이징에 돌아올 때는 학습반을 꾸린 수입이 괜찮아서 다행히 밑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존님께서는 경제를 관리하지 않으셨고 사업 일군이 전문적으로 관리 하였다.

사존님은 수련생들의 부담을 덜어주어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학습반 학비를 아주 싸게 낮추었다. 베이징에서 신수련생은 40원, 노 수련생은 20원으로 이미 그 당시의 각종 기공 학습반 중에서 가장 낮은 표준이었다.

95년 초에 > 을 정식 출판한지 얼마되지 않아 96년도 하반기부터 정부와 관련된 부처에서 출판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후에 수련생들이 구입한 책은 대부분 불법 복사한 책으로 인쇄와 지질이 아주 나빴다. 솔직히 말해서 > 출판으로 파룬궁은 돈을 벌지 못했지만 도리어 적지않은 투기상들이 불법 인쇄하여 횡재를 하였다.

* 마른 구운빵을 지니거나 도시락은 밥과 두부였다.

법을 전하시느라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바쁘셨다. 그러다 보니 식사와 휴식을 제대로 못하셨다. 한 번은 학습반 중간 휴식시간에 노제자가 가방에서 사부님께 드릴 마른 구운빵을 꺼내는 것을 보았는데 빵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사부님은 아침도 드시지않으신채 어떤 때는 오전에 일보러 나가셨다가 좀 늦게 돌아오실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점심 때가 다 되어도 시간이 부족해서 식사도 못하신채 또 총망히 오후 학습반에 수업하러 가시곤 했다.

93년도 베이징의 동방 건강 박람회 때 사존님께서는 수련생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시락을 사서 잡수셨다. 내가 보니 밑은 밥이고 위에는 두부가 놓여 있었다.

사부님께서 국내에서 학습반을 꾸리실 때 너무나도 고생을 하셨다. 항상 학습반 한 기가 저녁에 결속되면 사업 일군이 사다준 차표를 가지고 외지로 다른 학습반을 꾸리러 떠나셨다. 이런 일은 늘 있는 일이라고 사업일군이 말했다.

동북에서 학습반을 꾸릴 때는, 오전에 한 개반, 오후에 또 다른 한 개반을 꾸렸는데 수업 진도 또한 같지 않았다. 열흘동안 계속해서 사부님께서는 날마다 하루종일 수업을 하셨다. 학습반 기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사부님을 찾아서 병을 치료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중간에 쉬는 시간은 모두 여기에 써버렸다. 별별 사람들이 모두 사부님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으나 사부님은 언제나 그렇듯 친절하게 모든 사람들의 요구에 만족시켜 드렸다.

사존님께서는 각지에서 학습반을 꾸리시면서도 생활은 줄곧 매우 간고하였다. 산둥에 가서 학습반을 열었을 때는 같이갔던 제자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여름 날씨가 찌는 듯 무더워서 땀을 엄청 많이 흘렸는데도 목욕할 곳이 없었고 사부님께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 파룬궁 전시대 주위에 감사편지가 빈틈없이 붙다

사존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동방 건강 박람회에 참가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나와 한 동료는 버스를 타고 박람회에 가서 병치료를 받으려고 했다. 차안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우리는 줄곧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다가 내릴 무렵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더니 아 글쎄 사부님께서도 차안에 계셨다. 내가 얼른 인사를 드렸더니 사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였다. “당신들은 아주 신나게 얘기하더군요” 우리는 차에서 내려 아주 기쁘게 사존님과 함께 걸었다. 맞은 편에서 노인내외가 걸어오고 있었는데 손에는 붉은 종이에 쓴 감사편지를 들고 있었다. 노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감격에 가득차 있었다. 사존님은 그들에게 친절하게 말씀하셨다. “보십시오, 지금 다 나았지 않았습니까?” 원래 그 노부인은 무슨 병인지 모른채 배가 아주 커졌는데 아무리 치료해도 낫지않았다. 그런데 어제 사존님의 치료를 받고는 오늘은 완전히 딴사람인 정상이 되었던 것이다.

박람회 기간동안 사존님께서는 당신의 공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셔서 그들의 몸을 막아 주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저마다 신통이 광대해져 병치료 효과가 특별히 뛰어났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파룬궁 전시대 앞은 사람들이 빼곡이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은 어제 병을 본후 집에 돌아가 보니 너무도 효과가 좋아서 오늘 또 여러 사람을 데리고 왔다. 파룬궁을 찾아 병을 치료하려는 사람은 점점 더 많아졌다. 다른 전시대는 잠잠한채 몇 사람되지 않았으며, 어떤 곳은 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파룬궁 전시대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은 다른 전시대까지 차지하게 되어 안내원이 질서를 잡아주어야 했다. 파룬궁 전시대에는 감사편지가 빼곡이 붙었는데 감사편지는 계속해서 전해오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줄을 길게 늘어서서 사부님의 서명을 기다렸고 기공 과학 연구회 지도자는 사부님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사존님께서는 될수록 여러 사람의 요구에 부응해 주시려고 하셨으며, 사람들이 선을 향하려는 마음을 세심하게 보호해 주셨다. 많은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사존님을 뵈러 왔다. 나는 50여세 경의 한 남성이 사부님을 둘러싼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선채 아주 감격하여 두손을 허스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부님께서도 그에게 허스로 답례하자 자리를 뜨는 것을 직접 보았다. 파룬궁 전시대 앞은 에너지가 아주 강하여 어떤 사람은 신체가 본디 아주 괴로웠으나 그곳에 잠간 서 있기만 해도 너무도 편안하여 오래도록 떠나기 아쉬워 했다.

그 기간동안 파룬궁은 베이징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서로 다니며 알려 주었고 심지어 외지에서 파룬궁을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로 인해 사존님께서는 박람회가 끝난 후 탠진에서 임시로 또 한차례 파룬궁 학습반을 열게 되었다.

* 사부님께서는 난이 없지만 우리를 구도하기 위해 고생하신다

지나온 수련 속에서 모두 사존님께서 제자들을 공양하셨다. 제자들은 가장 좋은 물건으로 사부님께 공양하려 했으나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는 종래로 제자들에게 일전 한푼도 받지 않으려 하셨고 오직 선을 향하려는 마음만을 받으셨다.

전설에 석가모니가 각 나라를 다니며 법을 전할 때, 국왕과 대신들은 모두 가장 졿은 집에 석가모니와 제자들이 들게 하였고 제일 좋은 음식을 석가모니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는 국왕은 석가모니가 자기 나라에 와서 법을 전하게 하려고 금으로 집을 짓고 길을 깔았다고 한다.

사존님께서 국내에서 법을 전하실 때 의식주는 그렇게 간고하였지만 우리에게 준 것은 얼마나 거대하였던가. 매 번 이 일을 생각할 때면 나는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사존님께 너무나 많이 죄송하다. 사존님께서 가장 좋은 집에서 사시길 바라며,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식을 드실 수 있으시기 바란다. 그리고 사존님께서 많이 기뻐하시고 근심은 적게 하시길 간곡히 바란다. 사부님께는 난이 없지만 우리의 구도를 위해서 고생하시는 것이다 !

문장발표 : 2006년 5월 22일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6/5/22/128406p.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