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신념의 간고함, 신념의 힘 (사진)

글 / 핑이

【명혜망 2005년 4월12일】 ”노년에 자식을 잃은” 것 보다 더한 인생의 슬픔은 없다고 한다면 그런 인생의 슬픔은 오히려 64세 되는 왕롄룽 노인이 3년 동안 성년이 된 자녀 셋을 잃은 슬픔과는 비길 수도 없을 것이다.

왕롄룽,올해 64세,거주지는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화이라이현 베이신 보우찬팡잉이며 남편 천윈추안은 올해 66세이다. 두 노인은 원래 아들 2명, 딸 2명을 두었으며 두 아들은 또 쌍둥이였다. 일가족 모두 파룬궁을 수련하였으며 1999년 7.20이후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이번사악한 박해로 자식 4명 중 3명이 잇달아 사망하였다. 큰 아들 천아이충은 2001년 9월20일 박해로 사망하고 사망 당시 33세이었다. 둘째 아들 천아이리의 시신은 2004년 11월5일 저녁 낯선 두 사람에게 들려져 집에 왔으며 사망 당시 겨우 36살이었다. 작은 딸 천훙핑은 2003년 3월5일 박해를 받아 사망하였고 사망 당시 겨우 32살이었다. 큰 딸 천수란은 금년에 39살이고 불법으로 7년 반 판결을 받아 현재 베이징 톈탕허여자감옥에 수감되었다.

금년, 중국 구정 전 우리는 몇 차례 시도 끝에 겨우 왕롄룽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 노인을 보았을 때 그녀의 몸은 아주 허약하여 호흡도 곤란한 것이 생명이 위태로워 보였다. 이는 왕롄룽이 세뇌반에 수감된 2개월 동안 단식 단수하여 박해에 항의함으로써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받아 폐가 엄중하게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말할 때 힘이 없어 겨우 말하는 것이 우리가 인터뷰 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의 그 선량하면서 자주 초점을 잃고 멍해지는 그 눈빛은 사람들에게 한 어머니로서 혈육 세 명을 잃은 그 끝없는 슬픔을 하소연하는 듯 하였다.

구정이 지난 후 우리는 다시 노인을 만났고, 그녀는 이미 건강을 회복하였다. 왕롄룽 노인은 우리에게 그녀 일가족의 조우를 말하였다.

기자: 할머니, 신체 회복이 이렇게 빠른 것이 무슨 영단묘약이라도 썼는지요?

왕롄룽: 어디 무슨 영단묘약이 있습니까. 파룬궁은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함에 있어서 기이한 효과가 있는데 이는 세계상 일억이 넘는 사람들이 실증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법공부하고 연공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있다면 일체는 모두 좋아질 것입니다.

기자: 구정 전에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의 신체와 정신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왕롄룽: 아이구, 그것은 허베이 장자커우 사링즈세뇌반에 있을 때 저는 세뇌와 불법수감을 제지하기 위하여 2개월이 넘도록 단식 단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가 나타났는데 그들은 제가 얼마 살지 못한다고 여기고 책임을 질까 봐 두려워서 석방한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이미 스스로 생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더러 데려가도록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의 남편도 그들에게 박해 당하여 신체가 아주 허약하였습니다.


사진1:장자커우 사링즈세뇌반(사링즈 양타이촌에서 문화대혁명시기 노간부 들을 박해하는 5,7간교를 개조한 것임)

기자:그 당시의 상세한 정황을 당신은 아직도 기억합니까?

왕롄룽: 그 때는 2004년 2월28일이었고 오후 4시가 넘었습니다. 남편이 우리 집 과수원에서 일하면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집에는 저와 작은 아들 천아이리만 있었습니다. 리펑샹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베이신바오향 정부에 매수되었는데 저의 집에서 20미터 밖에 있는 곳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일가족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문 감시하여 그들에게 알리는 자입니다. 그는 우리 집에 와서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하였고 제가 없다고 말하자 그는 가버렸습니다. 그가 간 후 저는 작은 아들에게 “그가 뜨거운 물을 달라는 것은 거짓이다. 나쁜 마음을 품고 우리가 집에 있는가 없는가를 탐문하러 온 것이 진짜이다.”고 말했습니다.

기자: 당신은 리펑샹이 감시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왕롄룽: 그는 여러 차례 그들에게 이용당하여 우리 일가족을 박해하였습니다. 이 일 전에 제가 밖에 나가 물을 버릴 때 그의 구멍가게에 여러 사람이 살금 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우리 마을의 서기 런수쥔인데 이 사람은 30여세이고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기자:그 후에는요?

왕롄룽: 작은 아들이”제가 나가서 볼께요.”라고 말하고 나가더니 더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약 십 여분이 지나 낯선 사람 몇 명이 갑자기 우리 집에 뛰어들어오더니 아무 말없이 저의 두 팔을 잡고 밖에 세운 차로 끌고 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을 저는 알아 보았는데 향파출소의 사람이며 성이 비씨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어디로 데려가는가 하고 물었고 그들은 도착하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베이신바오향정부의 마당에 도착한 후 그들은 저를 한 방안으로 데려갔고 작은 아들이 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갑을 뒤로 채우고 그들에 의해 밧줄로 배에서 작은 다리까지 꽁꽁 감겨 긴 의자에 묶여져 있었습니다. 머리에는 또 노란색 비닐봉투가 씌워져 있었고 밖에는 넓은 테이프를 입에서 목까지 단단히 감아놓았습니다. 저의 남편도 똑같은 자세로 다른 한 긴 의자에 묶여 있었고 입은 수건으로 단단히 동여져 있었고 머리에는 털실로 뜬 모자를 썼는데 복면한 사람 같았습니다. 입 부위도 똑같이 비닐테이프가 단단히 감겨 있었습니다.

멕쑹똑暠튬
사진2:허에비 화이라이현 베이신바오향 정부

멕쑹똑暠튬
사진3:천아이리는 이런 방식으로 4시간이 넘도록 질식하였다(연시)


사진4:천윈천은 이런 방식으로 4시간이 넘도록 질식하였다.(연시)

기자:당신의 남편은 언제 납치되었습니까?

왕롄룽 : 나중에 남편이 말하기를 그날 오후 4시가 넘어서 그가 과수원에서 나뭇가지를 손질할 때 10여명에 의해 향정부로 납치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어떠한 반응도 할 틈이 없이 전반 머리가 또 그들에 의해 털실모자가 씌워졌고 또 밖으로 저의 입과 코를 동시에 단단히 감아 호흡할 수 없었습니다. 숨이 막혀 아주 괴로웠지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두 손은 그들에 의해 수갑이 단단히 채워지고 긴 의자에 묶였습니다. 그 당시 밧줄로 저를 묶을 때 아주 단단히 묶었습니다. 어이쿠, 그때 그 괴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호흡을 할 수 없고 또 말할 수 없는데 그 당시 죽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 모자를 저는 계속 보관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박해한 죄증입니다)

대략 2시간 정도 묶어놓았고 날은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세 사람을 풀어주었지만 입은 여전히 봉해지고 수갑은 채워졌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일어서지 못하고 또 길을 걷지 못하여 경찰 두 명이 나의 팔을 힘껏 위로 들어서는 경찰차에 던져넣었습니다. 그때 너무나 아팠고 며칠 지난 뒤 저의 오른쪽 어깨는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차에 오른 후 그들은 또 우리 세 사람을 차 의자의 다리에 묶어 우리는 앉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였는데 2시간이 넘은 후에 겨우 사링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천아이리가 오랫동안 버티다가 숨 막혀 죽을까 봐 걱정하였습니다. 저를 덮어 씌운 털실모자에 테이프까지 감겨져 저 또한 하마터면 질식하여 죽을 번 하였는데 하물며 그는 비닐봉투까지 씌워지고 입은 테이프로 단단히 묶여 있었으니 정말로 기적이었습니다. 4 시간이 넘도록 질식되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비닐봉투를 풀자 마자 첫 마디를 외치는데 “파룬따파는 좋다” 이었습니다. 또한 목소리가 아주 우렁찼습니다.

멕쑹똑暠튬
사진5:왕롄룽은 이런 방식으로 4시간이 넘도록 질식되었다(연시)

기자: 그들은 왜 당신들을 이렇게 대하였습니까?

왕롄룽:이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모두 해낼 수 있고 마피아보다 더 사악합니다. 우리가 파룬궁을 수련하기 때문에 또 어떠한 서류와 문서도 내보이지 않고 우리 일가족을 세뇌반으로 납치해 갔으며 우리를 오랫동안 수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온 가족이 당한 박해, 그들이 저지른 차마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할 일들을 폭로할까 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기자:세뇌반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곳에는 사람이 얼마나 갇혀 있습니까?

왕롄룽:장자커우 사링즈지역에서 이 세뇌반은 아주 편벽한 곳에 있어 주위에는 마을이 딱 한 곳만 있으며 양타이라고 부릅니다.그 곳은 고립된 주택이고 문화대혁명시기에 노간부를 박해하던 57간교입니다. 마당에는 일층짜리 집 3 줄을 지었고 담벽은 높고 위에는 철사를 감았습니다. 철 대문 두 개가 낮이든 밤이든 모두 굳게 닫혀 있는데 장자커우시 610의 서류가 없다면 누구도 출입 못합니다. 그 곳에는 10여명의 파룬궁 수련생 들이 갇혀있고 “전향”된 후 풀려납니다. 전향하지 않으면 계속 기한 없이 수감됩니다. 저는 그곳에 갇힌 후 더는 작은 아들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기자:당신의 작은 아들은 어느 때 사망하였습니까?

멕쑹똑暠튬
사진6:천아이리 생전 모습

멕쑹똑暠튬
사진6:천아이충 생전 모습

왕롄룽:그 당시 우리 세 사람은 세뇌반에 납치된 후 우리는 이런 폭행에 항의하기 위하여 작년 4월27일까지 단식 단수하였습니다. 아들의 생명이 위태롭자 그들은 풀어주었고 저의 남편더러 가서 그를 돌보게 하였습니다. 후에 남편의 말을 들어보니, 집에 돌아온 후 향 종치판의 왕춘후이가 그들을 집 안에 가두고 문을 잠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 동시에 또 이웃을 매수하여(쩡루시와 리중린) 그 들을 감시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아들은 집에서 신체가 좋아진 후 또 그들에게 납치되기를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에 7월10일 담을 넘어 집을 떠났습니다. 후에 남편은 아들이 집을 나갈 때 신체가 아주 허약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남편은 또 향정부에 납치되어 사링즈 세뇌반에 보내졌습니다.

3개월 후인 11월5일 낮선 사람 2명이 아들의 시신을 차로 실어왔고 그 당시 저는 멍해졌고 이런 잔혹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기자:당신은 어느 때 세뇌반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까?

왕롄룽:제가 세뇌반에 갇힌 후 반년이 지나서 신체는 열이 나고 기침이 나며 머리가 어지러운 등 증세가 나타났습니다.그들은 저를 장자커우시 전염병원에 끌고 갔고 그 곳에서 한 달이 넘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전되기는커녕 더욱 엄중해져 후에 혼수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작년 10월 19일 그들은 제가 거의 죽게 된 것을 보고 풀어주었고 집에 사람이 없으니 남편도 풀어주었습니다. 명의상으로 저를 보살피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 남편도 그들에게 아주 엄중한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기자:천아이리를 보낸 두 사람은 어디 사람이고 그들과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왕롄룽:그 당시 저는 머리가 하나의 공백 상태였고 무슨 말을 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의 말에 의하면 아들이 11월5일 5시가 넘어서 죽었다는 것만 기억 나고, 그 사람들은 돈을 좀 남기고 급급히 가버렸습니다. 저는 지금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는 벌써 저의 세 번째 아이마저 그들에게 박해 받아 죽은 것이었습니다.

기자:당신의 큰 아들(천아이충)은 어느 때 박해로 사망하였습니까?당신께서 큰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게 된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왕롄룽:제가 마지막으로 큰 아들을 본 것은 2001년 1월1일입니다. 우리 온 가족이 톈안먼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였고 톈안먼에서 온 가족이 납치된 후 저는 더 이상 큰 아들을 보지 못하였습니다.저의 큰 아들은 갖은 고생을 다 하였습니다. 그는 전에 베이징, 허베이 등 여러 곳에 수감되었고 박해 받고 고문의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가장 비열하고 가장 망나니의 수단으로 신념을 포기하게 하려고 핍박하였지만 저의 큰 아들은 죽을 때까지 파룬궁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아들을 허베이 탕산 허화컹제1노교소에 가두었고 그 곳에 간지 8일 만에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2001년 9월20일, 저의 큰 아들 천아이충은 영원이 우리를 떠났습니다. 그는 죽을 때 아주 처참하였습니다! 갖은 시달림을 받고 죽을 때 겨우 33세였습니다……

기자: 당신의 집에서 기타 사람들이 그 때 납치된 후의 정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롄룽:저는 여러 차례 납치되어 구체적으로 몇 번인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때 그들은 저를 베이징 화이러우간수소에 납치해갔는데 검사한다는 명의로 옷을 발가벗겼습니다. 제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데 이런 치욕을 당했습니다. 또 이런 치욕은 한번만 당한 것이 아닙니다. 딸 천훙핑은 그 당시 저와 함께 그 곳에 수감되었을 때, 그들이 옷을 벗으라고 하자 작은 딸은 벗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자 범죄자 두 명을 불러 제가 보는 앞에서 딸애의 옷을 강제로 벗겼습니다.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한 여자 경찰이 전기충격기로 작은 딸을 감전시켰습니다. 그 후 그들은 또 옷을 문 밖에 던졌습니다. 밖에는 남자 여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딸애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벗은 몸으로 옷을 입었습니다. 당신이 말해보세요.여자 경찰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들의 이런 짐승만도 못한 행동을 보고 저는 공산당이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우리 일가족은 단지 신념을 위하여, “진,선,인(眞,善,忍)” 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였는데 공산당은 오히려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2002년 9월17일 저와 큰 딸 천수란은 또 다시 납치되어 허베이 화이라이간수수에 갇혔습니다.


사진8:베이징 화이러우간수소

기자: 또 납치되었습니까?! 상세한 정황을 얼마만큼 기억할 수 있습니까?

왕롄룽:그 때 베이징 창핑에 있는 큰 딸 천수란의 집이었습니다. 그 날 2시가 넘어 갑자기 한 무리 사람들이 뛰어들어와 어떠한 문서와 증서도 보이지 않고 토비 처럼 장롱과 서랍을 뒤엎고 뒤졌습니다. 그 후 저와 수란은 각각 수갑을 채워 강제로 보내졌습니다. 그때 그들은 모두 6,7명이고 한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후에 저는 비로소 그들이 모두 베이징 창핑공안국 국보대의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부터 저의 큰 딸은 그들에 의해 불법으로 7년 반 판결을 받았고 베이징 톈탕허여자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멕쑹똑暠튬
사진9:천수란

기자:그럼 당신은요?

왕롄룽: 그들은 저를 허베이 화이라이간수소에 가두었습니다. 10일째 되는 날에 간수소에서 비로소 저를 풀어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저는 정말로 내가 보게 된 일체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집안은 한바탕 난장판이고 지붕이 전부 구멍 났으며 창문의 유리도 없어졌습니다. 전기도 그들이 끊어놓았습니다. 베개 몇 개를 칼로 찢어놓아 속에 있는 메밀껍질이 온 바닥에 널려있는가 하면 양식도 온 바닥에 널려져 있었습니다. 서랍에 넣어둔 아이들의 혼수 준비용 재물도 없어지고 냄비 그릇도 없어졌습니다.그들은 또 야채국, 쌀, 밀가루, 콩, 소금, 샴푸, 세척제, 차 바퀴를 붙일 때 쓰는 본드 등등을 전부 바닥에 쏟아서 한데 섞어놓았고 항아리에 넣어둔 2만 5천 위안이 넘는 금액과 궤짝에 넣은 6천 위안의 현금을 모두 도둑맞았습니다. 그 당시 몸에 돈 한푼도 없었고 양식은 또 온 바닥에 쏟아져 집에 돌아왔어도 10일이 넘도록 음식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간수소에서 이미 10일이 넘도록 마시지도 먹지도 않아 20여일 동안 마시지 않고 먹지 않은 것입니다… …


사진10:허에비 화이라이현 간수소

기자:그 당시 당신의 신체는 어떠하였습니까?

왕롄룽: 아이구, 신체는 그래도 아주 좋았는데 정신적 압력이 너무 커서 일종 하늘 땅이 맞붙는 느낌이었습니다. 후에 저는 바닥에 흘린 쌀을 거두었고 또 이 쌀을 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쌀은 100여근이고 밀가루는 150근이었는데 누가 고의적으로 바닥에 흘려놓고 또 그렇게 물건을 마구 널어놓았으며 또 신발로 밟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속에는 또 그렇게 많은 쥐똥과 메밀껍질이 있어 도저히 먹을 수 없었지만 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간단하게 한번 고르고 다시 물로 씻었는데 그 쌀은 몇 번 씻어도 깨끗하게 씻어지지 않았고 할 수없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돗물은, 집에 오랫동안 사람이 없어 모두 녹이 슬어 그 물은 붉은 색이었습니다.오랫동안 물을 사용하여도 그 붉은 색은 없어지지 않았고 가장 화가 난 것은 그 이불을 사람이 덮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아…

그때는 날씨가 아주 추워 곧 입동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이 찢어진듯한 집을 마주 하고 아주 처량하였습니다! 남편은 그들에 의해 스자좡 제4감옥에 수감되고 아이 4명에서 그때 한 명이 박해로 죽었으며 나머지 3명은 그들에 의해 감옥에 불법으로 수감되었습니다. 나 이 할머니만 혼자서 이 일체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매일 밤 저는 곳곳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시커멓고 차가운 방안에 있었습니다… … 어이쿠! 비록 이런 정황이었지만 향 정부는 여전히 사람을 파견하여(왕춘진, 왕웨이둥 등 6명) 매일 24시간 저를 감시하였습니다. 또 철사로 대문을 밖으로 감아놓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가끔 한 밤중에 문을 열고 들어와 사람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였는데 그 나날은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 때를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습니다… …

기자:당신은 그 때 신고하였습니까?

왕롄룽: 아니요. 우리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들은 근본 인권이 없습니다. 향 간부는 모두 아주 나빴고 저는 그들이 또 납치하고 박해할까 봐 두려워하였습니다. 어느 한번 향 종치판의 왕웨이둥이 향정부 마당에서 저에게 돈을 요구하자 저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리를 건널 돈도 없고 주머니에 돈도 없어.”라고 하더니 얼굴을 두 번 심하게 때렸습니다. 그리고 향 파출소의 소장 류위펑 이 사람은 더욱 악독합니다.

저와 큰 딸이 베이징 초펑옌세뇌반에 납치되었을 때 그 당시 저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한 사람이 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위 아래로 마구 뒤흔들었습니다. 후에 향 파출소에서 사람을 데리러 왔을 때 그 류위펑은 방안에 들어오자 마자 저의 정수리를 향하여 주먹으로 두 번 내리 쳤는데 그 당시 저는 눈 앞이 새카맣습니다. 그 후에 차로 끌고 가더니 그는 또 수갑으로 저를 등 뒤로 채웠고 아주 단단히 채워 무척 아팠습니다. 그리고 또 두 사람을 불러 다리 위에 앉게 하였는데 다리 한 쪽에 한 사람씩 앉아서 또 아주 모욕적인 말을 하였는데 차마 저의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은 나보다 나이가 어린데 어찌 이렇게 욕할 수 있는가 라고 하였고 그는 차문을 열어 너를 길바닥에 던지고 차로 깔아 죽이면 그만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성이 한 점도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 그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당신이 말해보세요, 제가 어디에 가서 신고하겠습니까?

멕쑹똑暠튬
사진11:베이신바오향 파출소

기자:당신께서 작은 딸(천훙핑)을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왕롄룬:아이고, 저는 그 애가 죽어가는 것을 직접 봐 왔는데 아주 처참하게 죽었습니다.2001년 그들에 의해 3년 노동교양을 받았고 허베이 고양여자노교소에 갇혔는데 그들에게 박해 받아 사람모습이 아니었습니다…

2003년 1월31일 오후 6시가 넘어 날은 이미 어두워졌습니다. 베이신바오향 정부의 성이 양씨 인 사람이 저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천훙핑이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저와 남편이 나가 보니 하얀 색 짚차 한대가 보였고 천훙핑이 두 사람의 부축을 받고 길 옆에 서 있었습니다. 딸이 저를 본 후 눈빛이 좀 멍해졌고 얼굴에 표정이 없었는데 이미 저를 알아보지 못했고 신체는 극도로 허약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마음이 아팠지만 감히 딸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못하였습니다. 딸이 보고서 더 슬퍼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저는 딸애가 그들에게 아주 엄중하게 박해 당한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저의 딸을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불법으로 3년 판결을 받고 1년 반 지내고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원래 저의 작은 딸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아주 활발합니다. 매번 집에 돌아오면 집 문을 열면서 엄마 엄마 하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번에 딸애는 저를 보고 한 마디 말도 없었고 이미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

기자:그녀는 후에 당신과 무슨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그녀를 이렇게 박해하였습니까?

왕롄룽:그녀는 돌아온 후 줄곧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남편과 둘째 오빠가 모두 집에 있었고 딸애한테 무엇을 물어 보아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담이 아주 작아 무슨 소리만 나도 아주 두려워하였습니다. 두 눈은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대낮이든 밤이든 혼자서 집에 있지 못하고 늘 옆에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저녁에는 아이처럼 항상 자기를 껴안아야 잠을 잤고 혼자서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 때 둘째 아들은 여동생의 이 모습을 보고 모두 울었습니다… … 그들이 작은 딸에게 무슨 약을 넣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그들이 너에게 무슨 약을 먹였니?”라고 물었더니 딸애는 “먹었어요. 노란 약이고, 커요. 또 주사까지 놓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후에 딸애는 저에게 조금씩 말해주었는데 고양노교소에서 딸애 한 사람만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반드시 사람에게 알릴 수 없는 가장 비열한 수단으로 저의 딸애를 박해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올 때 뼈만 앙상하게 남아 체중은 겨우 20, 25킬로 밖에 안되고 다리와 발은 늘 부어 있었습니다.

어느날 작은 딸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엄마, 그들은 저를 때려서 망쳐놓았어요. 고양노교소에 들어간 후 두 달에 겨우 한번 생리가 왔고 일년이 넘어서는 더는 생리가 오지 않았어요. 저는 지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많은 일들을 모두 기억해내지 못하면서 항상 비어있어요.”


사진12:화이라이현 동화원 파출소

저의 작은 딸이 그들에게 이렇게 시달림을 받고 집에 돌아왔지만 집도 이렇게 처참하고…. …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 12월29일이었고 이틀 뒤에 새해였지만 우리 집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창문의 유리마저 없어 우리는 낡은 나무 판으로 바람을 막았습니다. 방안은 영하 6도이었고 물통의 물은 두텁게 얼음이 얼었고 전기마저 그들이 끊어놓았습니다. 딸아이가 또 어두운 것을 무서워하여 촛불로 조명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계속 고열이 나고 기침이 끊이지 않았고 또 호흡이 급하면서 머리가 어지러워 하였습니다. 엄마로서 딸아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기자:당신은 그 당시 딸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왕롄룽:우리는 돈이 없었습니다.그 당시 작은 딸이 돌아왔을 때 마침 구정이 다가왔고 우리는 딸아이에게 음식을 먹여 몸보신을 시키려고 하였는데 돈이 없었습니다…그녀는 그 곳에서 아주 많은 고생을 하여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주 얇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이에게 옷을 사줄 돈도 없었습니다……

멕쑹똑暠튬
사진13:천훙핑 생전 모습

기자:그녀는 언제 사망하였습니까?

왕롄룽:2003년 3월5일 새벽입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고 또 겨우 32살 밖에 안 된 작은 딸애가 둘째 오빠의 품에 안겨 두 눈을 감았습니다. 어머니로써 자기 자식이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도울 수 없는 그 느낌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

기자:세 자녀를 잃고서 어떻게 지내오셨습니까?

왕롄룽:저는 신념의 힘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진,선,인(眞,善,忍)” 의 힘이었으며 나로 하여금 쓰러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아이 3명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저는 일찌감치 미쳐버렸을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 살아있지 않았습니다.

기자:할머니,저는 전 세계 정의롭고 선량한 사람들을 대표하여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가장 깊은 위문을 드립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왕롄룽: 감사합니다.

멕쑹똑暠튬
사진14:아들 딸 셋을 잃은 왕롄룽

인류가 생존하는 도덕이란 기초석이 전에 없었던 도전을 받고 있다.
중국에서 사람들은 신념”진,선,인(眞,善,忍)”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거대한 고난을 받고 있다.
6년 동안 파룬궁수련자는 이상(異常)적인 간고함과 이상(異常)적인 잔혹한 박해 속에서 걸어온 평화로운 역정은 인류의 역사에 영원한 이정표를 세울 것이다.
우리는 정의를 부르고 양지를 부른다.

문장완성:2005년 04월 11일

문장발표:2005년 04월 12일
문장갱신:2005년 04월 12일 05:22:58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4/12/99453p.html